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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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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7·07·14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숨을 부지하기만 해도 다행인 상황이 있는가 하면, 먹을 것만 있어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좀 더 좋은 것,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누리며 사는 것을 추구합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더 좋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일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죽음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완전히 대조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죽는 것이 가치 있고 복된 죽음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죽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오늘의 설교는 지금까지 해왔던 어떤 설교보다 어렵고 강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감동하셔서 이 귀하고 복된 말씀을 잘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 죽음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때’,또는 ‘인자가 영광 받을 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가라사대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마26: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주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영광을 받으실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에서 바로 이 문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17절)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대단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그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왜 목숨을 버리실까요? 아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은 결코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효 중에서도 가장 큰 불효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꼭 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데도 목숨을 버리기로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시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 때문에 아들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기로 하신 일이 좀 더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성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죽어야만 하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스스로 선택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어야만 한다고 요구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기까지의 과정을 암시해주는 단어가 18절에 나오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언약이라는 뜻인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을 가리킵니다. 이 언약은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모든 계획을 아들에게 위탁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기쁘게 복종하여 그 구원계획을 완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서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자발적인 죽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결이라도 하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요즘 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자살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자살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자기 한 몸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죽은 후에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과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과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리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살아가면서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얼마든지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차원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남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전혀 죽으실 이유가 없는데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버리심으로 멸망당할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원해서 목숨을 버리셨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버리사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를 갈망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열렬한 갈망과 확고한 결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수명을 살고 죽는 시한부 생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이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큰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시고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실 때까지 온전한 죽음의 상태에 계셨던 것입니다. 전혀 죽으실 이유가 없으셨고, 또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으실 수도 없으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으며, 멸망당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계명 - 평화의 언약
죽으실 필요가 없었던 그리스도께서 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어가 18절에 나오는 ‘계명’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이 계명은 언약이며 약속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 다시 목숨을 얻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지극히 사랑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요 창조의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갔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류에게는 죽음이 오게 되었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처럼 타락하고 범죄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 사람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한 인간을 그냥 용서해주실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반드시 심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진퇴양난에 빠지시게 되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문제를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의논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해결책을 찾아내셨습니다.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사랑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역시 우리 죄인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불쌍히 여기셨는지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함께 의논하셨습니다. 여기서 ‘평화의 언약’이라고 부르는 언약이 세워졌습니다. 18절에는 나오는 ‘계명’이 바로 이 언약을 가리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범죄하고 영원히 죽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으시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 원하시는 자들은 누구든지 구원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든지 불문하고 그에게 성령을 부으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 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모두 만족될 수 있었고, 죄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본질적으로 아들이신 예수님을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아들이 이처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 아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셔서 아들을 무한히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모습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누구나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성령을 받아 새 사람이 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무한하신 은총을 받은 자들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철저한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철저한 변화인지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완전히 새로운 인종,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그 생각과 인격과 생활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가 개척된 지 8년이 되고 있습니다.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우리 성도들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이 놀랍게 자란 성도도 있습니다. 모난 것과 비뚤어진 성격과 습관 - 그것 때문에 늘 갈등이 많았고 다른 형제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 이 몰라보게 변화된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알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이 8년 동안 별로 달라지지 못한 성도들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셨는데 어떻게 사람이 달라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무시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세상과 정욕을 좇아 내 맘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를 꺾어 성령님께 복종하지 않는 한 우리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은 후에도 전혀 변화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는데 어떻게 여전히 자아와 정욕과 옛 생활만 고집하면서 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런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불사르기 위해서 예비된 것들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세상 것들을 추구하고 의지하며 살던 사람들은 심판날에 그것들이 불탈 때 함께 불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죽음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떠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추호도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자기 맘대로 하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말씀만 전했으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생애와 사역과 죽음을 통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며 얻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과 지위와 명예와 쾌락입니다. 오직 나 자신의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전력투구하며 살아갑니다. 만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돌아갈 이익이 없으면 삶의 의욕도 잃어버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해보십시오.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과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당신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왔습니까? 오늘 당신의 인격과 생활 속에 주님 닮은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것은 추호도 주장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다시 살리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이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주님처럼 살다가 주님처럼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제 더 이상 나의 것을 주장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버리십시오. 이제 자아와 세상 정욕에 대해서 죽으십시오. 이렇게 자아를 죽이며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죽음의 순간에도 전혀 망설임과 두려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복종하는 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에서 영화롭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주님처럼 다시 살기 위해 자아와 세상과 정욕에 대해서 죽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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