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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사4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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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경숙 교수 |
| 참고 : | 새길교회 2010년 12월 5일 주일예배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가족 사랑과 하나님 사랑
이사야 40:9-11, 마가복음 3:31-35
2010년 12월 5일 주일예배
이경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학사부총장)
오랜만에 여러분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학교 행정에 정신을 쏟고 지내다가 이렇게 신학자의 역할로 돌아오니 머리가 잘 전환 되지 않아 오늘 여러분들에게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교회 절기로는 오늘이 두 번째 대림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매우 소중하고 기쁜 절기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부터 차단하게 된 우리의 욕심과 오만 그리고 독선을 모두 내려놓고 우리를 비움으로써 예수님과 소통하고 화해하여 우리 속에 예수의 빛을 받아드리고 시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연평도 사건도 있고 해서 이 절기를 그대로 기쁨으로 지내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무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지난 일년동안 제 머리 속을 가장 어지럽힌 한 주제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혈연관계, 혹은 가족이라고 하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2010년에 가족과 관련해서 있었던 민망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한에서 정권이 김정일 다음에 권력 승계를 20대의 아들 김정은에게 승계하려 한다든지, 고위직에 있는 분들의 아들이나 딸을 특채로 임용해서 시작 된 문제 등등. 가족과 관련된 이런 사건들은 요즘 몇몇 교회에서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넘겨주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가도 다시 내쫒고 자신의 친인척에게 세습한다는 소식과 맞물려 가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우리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하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탱시켜 주는 힘은 모두 가족에게서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행복해 보이는 아니 행복하려면 가족이 있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로서 가족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가족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해서 가족 사랑이 큰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저렇게 행복한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너무 지나친 것도 같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이 저렇게 자신들의 행복에 도취해도 되나 하는 기우가 생기기도 하고 하였습니다. 또 최근에 자주 거론되고 있는 가정의 변화 즉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 가고 있고, 자녀 없는 가정이 늘어 나는 것도 사회적으로는 큰 문제인데, 그 사람들은 전혀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저렇게 우리 집안만은 평안하고 잘 돌아가면 된다고 말하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아 제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TV 에서는 다른 한편에서 가족이 족쇄가 되어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어머니 때문에 고통 받는 딸의 모습에서, 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자식 때문에 고통 받는 어머니, 장애자를 돌보는 가족 등등 이들에게 가족은 엄청난 스트레스의 근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굴레 때문에 너무나 큰 업보를 지고가면서 자신도 서서히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결손 가정의 자녀들이 다시 좀 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가정을 피괴시키는 것 같은 현상도 목격했습니다. 종합해서 말씀드리자면 사회나 정부가 방치해온 결손 가정의 문제가 이제는 더 이상 가족이나 식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의 뇌관이 되고 있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을 가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우리의 가족 문제는 5월 가정의 달에 일시적으로 생각할 문제가 더 이상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즐거운 가정을 소개하고 꿈꿀수록 다른 한편에서 그런 가정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적개심을 가지게 되고 박탈감을 가지게 되면서 망가져 가는 청소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정 안에서의 폭력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고, 가족에게 당하는 성폭력의 희생자들도 늘어가고, 존속 살인이 늘어가고 아들이 부모를 죽이고 어머니 아버지를 고소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족을 원수로 보는 상황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이들이 또 다른 결손 가정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여권이 신장되면서 여성들만이 짊어지던 가정의 문제가 이제는 가족 전체가 짊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중학생 아들이 집에 불을 질러서 대학 진학 문제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을 모두 사망하게 하였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우리들이 모두 가족에 대해 심각히 검토해 보아야 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가족에 대해 막연한 신화를 가지고 있어서 사회문제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편에서는 우리가 너무 가족을 강조하고 가족만이 자기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자기 가족만 잘 살면 될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도 겉보기와는 달리 더 이상 정을 나누고 서로 믿고 신뢰하던 가정의 숫자 보다 건강하지 못한 가적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외국인들에 비해 대가족제도를 비교적 오래 간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아직 농경지 생활 태도를 버리지 못해서라고 비하하기도 합니다. 한 사회학자는 우리의 가족이념은 한국인들이 식민통치, 전쟁, 절대빈곤, 산업화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오로지 가족을 중심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부와 권력을 쌓아나가려는 가운데 생겨난 생존철학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거시적 정치, 경제, 사회질서가 극도의 가족중심성을 띄는 것은 재벌과 정치엘리트에서부터 기층서민에 이르기까지 가족관계의 전략적 활용을 통해 생존과 성공을 추구하는 형태가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족제도와 사회제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면을 많이 가지고 있고 외국인들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현대의 개인주의가 인간을 외로움으로 몰아 놓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공동체를 선호하는 우리 문화는 잘 발전시켜가야 할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가족문화 이외에도 집단 문화는 농경지 문화권에서 자연스럽게 발달해 왔다고 합니다. 신라에서는 국선, 선랑, 화랑, 풍류도 등이 있었고 백제에도 비슷한 공동체가 있었으며 고려나 조선 왕조 시대에는 선비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물론 성리학을 존중하는 사림정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공동체 놀이 문화는 탄압을 받고 신분질서를 문란시키고 음사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만, 우리는 전통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어울려서 춤과 가무를 즐기면서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래서 “나”가 아니고 언제나 “우리”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남끼리의 결속, 그리고 호남끼리의 결속도 기본적으로는 나쁠 것이 없습니다. 최근에 제가 박완서 씨 글에서 읽은 가장 흐뭇한 동우회는 같은 산모조리방 출신 엄마들이 같은 포대기에 아기를 업고 한 달에 한번 만나는 모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동아리나 공동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동아리들의 공익을 추구하는 공동체 정신의 빈곤입니다. 공동체가 정치적으로 악용이 되고 다른 편을 죽이는 목표로 사용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작은 공동체, 작은 동아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모두들 사익을 추구하는 공동체들입니다. 너무 집단 이기주의가 심한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원인은 한국 부모들이 너무 혈연관계를 강조하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의 자식에게는 무관심하고, 자기 자식들에게 가족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르치지 않는데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자신을 희생하며 자기 식구만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이러니 자녀들이 창조적이 되거나 성년의식을 지니거나 하지 못합니다. 사회도 그냥 작은 패거리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정치 갈등, 노사갈등, 사회갈등을 필요 이상으로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만 아는 사고와 작은 공동체의 난립이 아니라 만민을 포용하는 큰 공동체의 출현입니다. 그런데 북한 정권이나 대형교회나 대 기업이나 모두 큰 공동체를 만드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또 가족을 사랑하는 사적인 감정과 사회나 나라의 공적인 일을 이렇게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기업의 승계나 세습 또 김정일의 권력승계나 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 큰 약점이 있습니다. 도구로서의 가족 문화의 가장 큰 병폐를 안고 있는 셈입니다. “나”와 “우리”만 있고 다른 사람은 모두 나의 행복을 위한 도구가 되니까 저절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지도부가 북한이라는 공동체에 어떤 이익이 될지는 참으로 우려되는 바입니다.
저는 오늘 진정한 가족, 동아리, 즉 공동체가 어때야 하는지를 기러기 떼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 풀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새 박사이시고 경희대학교에서 생물학 교수를 하시던 환경전문가이신 윤무부 교수가 쓰신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나는 새들처럼” 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기러기는 예부터 공동체를 상징하여 가정과 집단의 끈끈한 결속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라는 용어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기러기는 평생 반려자의 상징이고 또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먼 거리를 동아 다니며 목이를 잡아 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마을 입구에 솟대를 세워 기러기의 질서와 같은 가정의 질서, 마을의 질서를 배우려고 했습니다. 아빠 기러기가 어른으로서 새끼와 부인을 이끌고 보호하고, 엄마 기러기는 남편과 아이들을 보살핀다고 생각하여, 오륜에서 말하는 장유유서나 부부유별, 부자유친 같은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기러기에서 배우고자 한 것입니다.
가을날, 추운 겨울을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보내려고 길 떠나는 기러기 떼는 “기럭 기럭” 울음소리와 함께 그들은 하늘 위로 승리의 V를 그리며 날아갑니다. 한 마리도 낙오되는 법 없이 이들은 3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날아갑니다. 또 다른 내일을 위해, 또 다른 삶을 향해 그들은 본성이 가르치는 대로 그렇게 먼 여행을 떠납니다. V자 대열로 날 때, 혼자 날 때보다 기러기의 심장박동과 날개 짓 수는 훨씬 줄어듭니다. 그만큼 에너지를 덜 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앞의 새가 바람의 저항을 막아 주어 뒤따라오는 새들의 수고로움을 덜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의 새가 일으키는 날갯짓으로 뒤에 상승기류가 생기기 때문에 뒤에 있는 새는 날갯짓을 덜해도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떠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상승기류는 새의 날개 끝에서 만들어지므로, 이를 이용하려면 뒤의 새가 앞의 새의 날개 끝에 자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새의 날개 끝에 다음 새가, 그리고 그 날개의 끝에 그 다음 새가 따라가다 보면 기러기는 어느새 V자 혹은 사람 인(人)자를 그리며 날아가게 됩니다. 나 혼자만의 여행이 아닌 함께하는 여행인 만큼 기러기들은 서로가 서로를 등대삼아, 발판삼아 그렇게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친구가 힘들어 하면 기러기들은 어느새 자신이 앞에서 이끌고 그 친구를 뒤로 보내 쉬게 한답니다. 함께 목적지에 가려고, 그들의 짐을 나누어 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기러기들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서로를 위해 주며 함께 날아갈 수 있는 것은 그들만의 대화 즉 소통의 통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러기의 울음소리에는 “영차! 영차! 조그만 더”라는 격려의 메시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서로를 묶어 주는 환호성으로 그들의 집단력을 강화시켜 주며 서로를 단단한 끈으로 묶어 주고 이어 줍니다.
또한 기러기들은 어떤 기러기가 병을 얻거나 상처를 입어 추락하면, 자신들의 친구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일부가 무리를 이탈해 상처 입은 기러기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아픈 기러기가 완쾌되어 다시 비행할 수 있게 되거나, 혹은 죽거나 할 때까지 그와 함께 머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자신의 무리를 따라 가거나 다른 무리에 합류합니다. 기러기들의 끈끈한 우정, 아마도 지금 내 곁에 있는 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마음이야말로 “나”가 아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고, 함께 꿈을 꿀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기러기 떼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족 이기주의나 집단 이기주의가 아니라 영차 영차 하면서 모두가 함께 격려하고 큰 집단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을 너무 배타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 안에는 한 집단 안에 있을 수 있는 약자, 즉 쉽게 소외당할 수 있는 집단 즉 약자 중에 약자인 과부나 고아, 이방인에 대한 배려가 늘 강조되고 있습니다. 율법서이나 예언서나 지혜서나 모두 사회정의나 약자보호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집단은 파괴되고 말것이니까요.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이런 공동체 정신을 외면하고 공의나 정의를 왜곡하고, 자기 교단, 자기 교회, 자기 가족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참으로 자가당착적입니다.
신약성서 막 3:31-35에 보면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고 동생들이냐?” 물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어머니이고 동생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혈연적 가족 관계를 강조할 것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예수가 모성으로서의 마리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마리아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동정녀수태 설화도 바로 이러한 마리아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구현하는 인간 마리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혈연적 가족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즉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곧 올바른 기독교 공동체 일 것입니다. 즉 누구와도 평등한 관계 속에서 살며,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 뜻을 행하고 실천하는 공동체, 약자를 생각하고 따른 사람의 아픔을 생각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추운 연말연시에 우리 교회들이 얼마나 이런 정신을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 속에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믿고 바라며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혈통 혈통하거나 피를 나눈 가족만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각가지 동아리를 이루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개념이 나왔으면 합니다. 이로써 우리 사회 전체가 따뜻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우리의 욕심과 편견과 독선을 버리고 예수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오시는 대림절 절기를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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