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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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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공의에 입각한 구원에 감사
본문: 시편 9: 1- 20
미국 연방 대법원장을 지낸 호레이스 그레이 대법관이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무죄석방을 받아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범법자를 알아본 그레이 판사는 그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유죄인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있소. 당신에게 꼭 일러둘 말이 있소. 후일에 당신은 인간보다 현명하시고 뛰어나신 재판장 앞에 설 것이오. 거기서는 세상의 법률이 아니라 공의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어둠이 판치지만, 빛이 비치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공의가 없어지면 죄인이 판치는 세상이 되지만, 공의가 이루어지면 죄인은 설 곳을 잃습니다. 의인은 공의를 행하기를 즐거워하고, 공의가 이루어지면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공의를 행하기를 싫어하고, 공의가 이루어지면 두려움 가운데 패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에 그리스도인은 항상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의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잠21:15)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공의로운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회고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서도 자신을 구원하고 악인을 심판해 달라고 간구하는 요소를 담고 있는 감사 예배 시입니다. 이 시는 어느 특정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신의 전생애를 회고하며 또 남은 생애를 전망하며 쓴 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은 지난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 역사와 그 분의 의로우심을 회고하며 찬양하며, 7-12절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에 입각하여 영원히 이 세상을 통치하셔서 항상 압제당하는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해 찬양합니다. 13- 20절은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근거하여 이제 고통 중에 처해 있는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의 심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편 9편은 생각보다 의외로 단순해 보입니다. 이유인 즉 전체 내용이 1- 20절로 되어 있지만, 구조상으로는 크게 1- 10, 11- 20절로 나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시편 9편의 서두에 "다윗의 시로서 인도자를 따라 무트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트-랍벤" 이 히브리어의 뜻은 "무트"라는 말은 '죽다'라는 동사이고, "랍벤"은 '라'라는 '전치사-를 위하여'라는 뜻과 "벤"이라는 '아들'의 명사의 합성어 즉 "아들을 위하여"라는 말로 전체의미는 "아들을 위하여 죽다"라는 말에 맞춘 노래라는 뜻입니다. 왜 이 노래가 "아들을 위하여 죽게된 이유"를 적절하게 밝혀 있지는 않지만, 혹자는 이 아들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합니다. 그 외의 것은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본문의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우선 1-10절까지의 내용으로 다윗이 하나님께 찬양의 글을 올리는 장면입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다윗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을 전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했습니다. ‘기사’는 ‘니플라오트’로 ‘경이로운 일’이란 뜻입니다. 인간의 이해와 능력을 초원한 비범하거나 탁월한 일을 뜻합니다. 다윗은 일생동안 체험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 역사를 ‘기사’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하나님의 기사를 ‘전하리이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전하다’는 말은 ‘선포하다(declare)'는 의미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공포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111:1)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반복적인 표현으로 더욱 감사를 넘치게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이신 주’는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분’, ‘전능하신 분’임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바로 ‘엘욘’입니다. 고대에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그 나라의 수호신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으로 하여금 이방 국가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열방의 어느 신들보다 뛰어나시며, 권능이 많으신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70: 4)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자신을 대적하였던 원수들이 도망가거나 물러갈 때에 다윗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원수를 물리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함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잠29:16)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의의 심판을 위하여 보좌에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 이상의 논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해를 입은 사람을 보복해 주고 해친 자를 심판하십니다. 성경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 히10:30)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야 공의롭게 바로 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불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이 있어 보이지마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장차 올 심판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보인 의와 송사를 하나님이 다윗 자신을 대신하여 변호하셨고, 공평하게 정당하게 심판하셨기에 그 하나님을 다윗은 신뢰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행위를 감찰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기 때문에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변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공의로 심판하시는 심판자가 되시고, 시인의 의로움과 대적의 악함에 대하여 공의로 심판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인의 의로움은 인간 세계에서의 의로움이지, 그 행위가 완전한 의로움은 아닙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6:13)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이방 나라(열방)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열방과 악인’은 서로 보충적인 의미로, 이스라엘에 대적하는 민족을 지칭하며, 다윗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였다는 것은 인명부에서 지웠다는 것으로, 이방 민족의 패배가 완전한 멸족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시145: 20)
본문 6절을 읽겠습니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5절과 대조를 이루어, 대적들의 패망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엄정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전쟁 속에서 대부분을 승리로 장식하여, 승리의 횟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92:7)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국에 두 사람의 농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한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한 날은 불신자 친구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고 믿지도 아니한다. 그러나 지난 봄에 파종을 잘하였고 여름엔 순풍으로 물대기와 김매기를 잘하였고 가을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신자 친구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었다."
그때 그리스도인 친구는 이렇게 답신했습니다.
"하나님은 10월의 결과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의 정하신 날에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 언젠가 갑자기 밤의 도둑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지명 수배가 되었어도 수십 억의 채무가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신앙과 행위를 따라 추호의 가감도 없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며, 대적에게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보좌가 예비된 것은 영원토록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통치가 계속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겔33:20)
본문 8절을 읽겠습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가끔씩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합니다. 이 신정론(神正論)의 문제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욥의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욥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 때문에 그토록 심한 벌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 그런 심한 벌을 받을 리가 없으므로 분명히 욥이 죄인이라며 회개하라고 강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판결해 주신 내용을 보면 욥은 다른 세 친구들보다 의로웠습니다.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뜻을 전부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길고 지루한 환난과 친구들과의 논쟁이 있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이 당한 환난만을 보고 그때에 판단했더라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없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으나, 논쟁이 끝나고 하나님이 욥에게 복 주신 상태를 기준으로 한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공의롭게 판결하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실행되었음을 알게 될 날은 세상 끝 날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같지 않으시기에 공의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세계 모든 민족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힘이 되시며 보호가 되십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1)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리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압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산성은 외적의 침범을 막기 위해 산 위에 쌓은 성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압제당하는 자의 산성과 환난 날의 산성으로 비유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위험에 처해 있는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 보호해 주시는 분이심을 말합니다.
5-9절까지 연이어 이방나라를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고 악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시는 하나님, 원수의 대가 끊어지고, 원수들의 성읍들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 이러한 그릇되고 원수의 행악을 보고만 있지 아니하시고 확실하게 응징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여 당신의 보좌를 준비하시는 철저하심. 무엇보다 혼돈되지 않고 강력한 올곧은 공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정직으로 모든 백성들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그렇기에 당신은 이 세상에서 고통과 억울함에 괴로워하는 자들의 방패이자 요새가 되시는 분, 무엇보다 힘없고 약한 자들이 당하는 환난의 때에 보다 강력한 보호자가 되시는 요새와 같으신 분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다윗은 자신의 권력보다 자신의 힘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다.”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 선교를 감당하면서 일이 너무 많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형편에 처했습니다.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부담이 커서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테일러 선교사가 말씀을 보다가 요한복음 15장에 이르렀을 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라는 구절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믿음 없었던 나약함을 시인했습니다. 가지는 나무가 공급해 주는 수분과 양분을 받으면 되는데 지금껏 가지인 자기가 염려와 근심을 하고 있었던 것을 회개했던 것입니다.
인생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선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녀들의 문제를 결코 외면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신 하나님이 어떤 것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롬 8:32)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요트웨 슈메트"라는 말인데, 알다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속속히 들여다보고 알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아는 자, 찾는 자, 믿는 자는 모두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인자하심과 공의로우심 등 성품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주를 찾는 자들은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는 말입니다. 죄인이라도 주님을 찾을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의인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음도 알 수 있습니다.
'주를 의지한다'라는 말에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뢰는 하루 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는 자신의 입장이 완고하거나 튼튼할 때 신뢰가 드러나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위기나 어려움 고통이 따르고 위기가 닥쳤을 때 그 때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가에 그 신뢰의 진위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의 삶의 여정을 돌아볼 때 우리는 다윗이야 말로 자신의 삶에 있어서 흠과 죄와 허물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장애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처한 위기나 어려움이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더욱 더 곤고한 산성이 되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의 이러한 당당한 고백이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진지하게 한 목소리로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본문 11-20절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함과 동시에 자신을 대적하던 악인의 어리석은 말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중에 선포할지어다”
다윗은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을 아는 자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행해야 할 것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분의 행하심을 온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잘못되어가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여지고 험악해져 가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늘 계시며, 그분만이 오직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만백성들에게 선포하여 살아계심을 말하고 인정하라는 의미입니다. 고통당하고 피흘린 자들을 대신하여 그 분은 대신 고통을 주고 피를 흘리게 만든 자들을 향하여 심문하셔서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그 답변을 들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기억하셔서 그들의 겸비함을 그들이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시온’은 높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헐몬산을 시온산으로 불렀고, 시온성은 높은 성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이라는 영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시온에 계신 여호와’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옮겨진 후부터 불려진 이름입니다(삼하 6:12-19). 이것은 다윗과 언약을 체결하시고(삼하 7:8-16)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항상 함께 하시며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일컫는 성호(聖號)입니다.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 피 흘림은 자연적인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아닌, 폭력에 의한 무고한 피 흘림을 뜻합니다. 무고한 피흘림, 곧 죄에 대해서 묵과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보응하시는 철저한 공의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자는 경제적 궁핍에 처한 자는 물론 악인의 강포로 인해 고난 받는 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공의를 경제적인 부분만 아니라 인생사 전반에서 실행하시는 분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시72:12)
본문 13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7-12절에서 찬양했던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에 근거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곤고를 ‘사망의 문’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문은 시온의 문(14절)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경외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죽음의 문턱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요청합니다. 은혜의 갈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절실함을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장면입니다. 악인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다윗 자신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주셨기 때문이고, 그로부터 자신을 일으켜 죽음에 빠지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다윗의 부르짖음은 너무나 간절합니다. 자신이 지금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지금 바로 현재 봐달라는 간절함입니다. 다윗이 지금 당하고 있는 억울함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나아가 가만히 보고만 있거나 외면치 마시고 어떠한 행동을 취해 달라는 내면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을 만나면서 어찌보면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이런 억울함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윗의 간구를 따라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보고 계시며 그것을 받아주실 때, 주님의 영광의 찬송을 모두 전할 것이며, 주의 구원하시는 행동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방나라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는 결국 자기가 판 우물에 빠질 것이라는 것이며,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말로는 결국 스올, 즉 무덤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궁핍한 자는 결단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소외받는 자들은 결코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게 하여 그들의 말로를 보여지게 될 때, 결국 무엇보다 우리들의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다시 한 번 가르쳐 주고 있으며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믿어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딸 같은 시온’은 시온의 딸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루살렘 또는 그 거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 구해주시며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인 예루살렘 성문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쁘게 증거하겠다는 일종의 서원입니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25:9)
본문 15절을 보겠습니다.
“이방 나라들(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후 흉년 때문에 찾아온 형들을 만납니다. 동생을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면서 구덩이에서 애걸하는 동생을 외면하고 옆에서 식사를 한 파렴치한 형들입니다. 그리고 단 은 20에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 자신을 노예되게 한 원수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수석 대신이었던 하만은 유다 사람을 멸하고자 하다가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자기가 매달려 죽임을 당합니다(에7: 9- 10)
죽음의 위협을 무릎 쓰고 신앙의 원칙을 지켰던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사자 굴에서 살려주셨습니다.(단6: 19- 24)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다니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호와께서 의인을 보호하시기 때문에 악인은 잠시 흥하는 것 같으나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의인은 잠시 어려움을 당하나 반드시 승리하며 하나님께서 높이실 줄로 믿습니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시7:15)
우리는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원수가 회개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원수가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십시오. 원수가 나를 위해 파놓은 함정은 스스로를 위한 함정이었음이 곧 드러날 것입니다. 그분의 의로우신 심판을 신뢰하며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하십시오. 억울함이 곧 물러갈 것입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2)
본문 1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악인들이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움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의의 보응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악인의 멸망은 자연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임을 알고, 하나님의 공의와 오묘하신 섭리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힉가욘’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용어가 ‘묵상하다’는 뜻의 ‘하가’에서 파생된 것으로 ‘엄숙하게’ 노래하라는 뜻의 음악 기호일 것이라고 칼빈은 주석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잠28:10)
본문 17절을 읽겠습니다.
“악인들은 스올(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열방)이 그리하리로다”
악인은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입니다. ‘음부’ 곧 죽음을 뜻합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본래의 상태 즉 흙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죽음을 뜻합니다. 음부는 모든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처소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악인과 관련 되어 생각하면 그곳은 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궁핍한 자는 ‘무엇을 얻고자 열망하는 자’를 뜻합니다. ‘가난한 자’ 역시 풍족하기를 기대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물질의 궁핍을 말하는 것이라, 악인의 핍박으로 인해 곤핍한 처지에 빠진 자,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애타게 갈망하고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140:12)
본문 1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열방)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호언장담하며 세계 정복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던 나폴레옹! 그러나 그는 러시아 침공에 실패하고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후에는 한 작은 섬에 유배되어서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일생을 끝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패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승리하여 그의 왕국이 날로 날로 왕성하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듯 했던 내가 도리어 패배자임을 알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잠시 승리하는 듯 보여도 그것은 참 승리가 아니며 참 승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있고 주님을 의지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기자 또한 악한 자들의 심판을 통해 인생으로 하나님만이 참 승리자 되심을 알게 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생’은 ‘에노쉬’로 전능자 하나님과 비교하여 볼 때 무능하기 그지없는 존재,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인 인간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열방이 하나님 앞에 반드시 심판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무능함을 깨닫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본문 20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나라들(열방)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19절과 20절에서의 ‘인생’은 단지 연약한 인간이 아닌, 대적, 열방을 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인생’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멸망과 관련하여 볼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제외됨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에 의한 압제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오늘 우리 성도들이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압제하는 자를 담담히 바라보며 하나님께 확신가운데 구원을 간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본서는 이에 대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압제당하는 자와 가난한 자의 보호자와 변호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8, 12절) 실로 고난 받는 자의 소망을 꺾지 않으시며 그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않는 하나님이 곁에 계시기에 악인들이 눈앞에서 광포를 행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은 승리를 확신하며(19절)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어두움을 헤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미움을, 진리가 거짓을, 광명이 암흑을, 의가 죄를, 선이 악을, 생명이 사망을 이긴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공의에 입각한 구원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죄악된 세상에서 힘들고 억울할 때가 많사오나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하게 하소서.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사람의 심장과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믿고 죄악을 멀리하며 용기있게 사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주님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마음 상하지 않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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