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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의 간구

시편 복음............... 조회 수 1433 추천 수 0 2011.02.02 17: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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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0:1-18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가난한 자의 간구

 

본문: 시편 10편 1- 18

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름을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자기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 그가 구프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11.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 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어느 해 홍수가 나서 강물이 몇 배로 불어났습니다. 강기슭 사람들은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야 했는데 때를 만난 듯 뱃사공은 배 삯을 세 배나 올려 서푼씩 받았습니다. 마침 강을 건너려던 가난한 수도사는 가진 것이 달랑 두 푼밖에 없었습니다. 수도사는 뱃사공에게 간절하게 사정을 했습니다.

“사공 양반, 미안하게 됐소. 한 푼이 모자라는데 좀 태워주시오.”

그러나 뱃사공은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수도사는 끝내 배를 타지 못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배가 손님을 가득 싣고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산더미처럼 밀려온 사나운 물결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승객들은 물론 뱃사공까지 물에 빠져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나루터에서 바라보던 수도사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난 돈 한 푼 없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합니다.”

요즘 많은 재물로 오히려 화근을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것이 늘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잠18:23)

 

 오늘은 시편 10편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시편 9편과 함께 하나로 묶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를 따라 9장부터 매절의 첫 음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9편과 10편이 알파벳 순서를 따라 하나의 시로 엮어져 있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릅니다. 9편이 열방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면 시편 10편은 이스라엘 백성내 여러 악한 무리들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 왕과 그 백성이 당하는 고난과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왕과 함께 걷는 일에 있어 왕과 그 백성들이 겪는 희노애락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들은 모두 이 언약백성들의 삶을 노래하고 언약의 주로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에 등장하는 주요 대비는 악인과 의인입니다. 악인은 언약을 배반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대항하는 자로, 의인은 언약을 따라 하나님을 순종하여 그의 의를 이루는 자로 나오고 있습니다. 시편들은 주로 의인이 의의 길을 감에 있어서 당하는 고난과 그로 말미암는 고통 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호소하는 기도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양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의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삶에 있어 당하는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노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절로 11절까지는 악인 얼마나 악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를 고발하면서 의를 따라 사는 자가 당하는 고난을 말하고 있고, 12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이런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악인으로부터 온갖 고통을 당하는 가난하고 압제받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를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하는 것으로 그의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다윗은 형통한 넓은 길, 대로만 그의 앞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원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박해로 인해 고통이 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난 현장에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멀리 서시며” 즉 거리를 두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방관자로 계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환난 때에 숨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자기 백성의 위급한 사정을 돌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렘애 3: 56).

지금 다윗의 상황은 여러 환란에 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환란의 내용은 이후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다윗과 백성들이 오랜 기간의 환란을 겪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은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그 포악함은 더해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은 요원합니다. 그러하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왜 멀리 서 계시기만 하시는지, 왜 우리의 환란을 외면하고 숨어버리시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의미보다도, 도우심에 대한 간절함의 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서 계시고 구경하시는 것처럼, 때론 숨어버리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현상세계는 악인의 창궐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의의 나라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다윗이 당하는 환란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로 인한 고통입니다. 그 악한 자들은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군박한다고 말합니다. 가련한 자라는 말은 가난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군박한다는 것은 멸시하고 핍박한다는 의미입니다. 악인은 교만하여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핍박합니다. 그들은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는 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탐욕으로 가득차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악인들을 탐리하는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여호와를 배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반함은 곧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한 자는 공통된 특성이 있습니다. 악한 자의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치 아니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인정치 아니하기에 가련한 자를 심히 괴롭히는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잠28:3)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시5:10)

 

 본문 3, 4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름을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

50년 전만 해도 교회가 유난히 많아 처치 스트리트(Church Street)라고 불리던 캐나다 토론토의 한 거리가 지금은 전 세계 동성연애자들이 모여드는 ‘호모의 거리’로 변했다고 합니다. 토요일마다 발행하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의 한 면은 아예 동성애자의 구애광고에 할애되어있다고 합니다. 캐나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동성연애자를 목사로 세울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교단 총회의 연구 과제로 상정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몇 년 사이에 동성애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해 논쟁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남녀가 짝을 지어 이룬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누리라고 주신 성(性)이 왜곡되어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타락한 성문화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죄악으로 인해 멸망의 길을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한탄하고 계실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시대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여기에서 배반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언약의 배교자로 섰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하면, 율법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무시했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같으면, 형제의 의무에 있어서 그들은 율법이 규정한 형제사랑의 모든 의무를 저버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불순종하므로 언약의 파기자로 섰고, 언약을 배반하므로 여호와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탐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탐욕 때문에 형제를 살피기는 커녕, 형제의 것을 노략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더욱이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은 없다 합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음에도, 그들은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곧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며 그 교만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에 가난한자를 압제하고 착취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악인이 하는 일들은 언제나 잘됩니다. 악을 범해도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지 않기에 그들은 심판을 말하는 자들은 더욱 멸시합니다. 그들은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망하는가 봐라. 내 사전에 불행이란 없다" 고 말합니다.

의인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과 정반대로 악인은 그 자신의 욕심을 자랑합니다. 탐리하는 자는 '부당 이득을 취한 자'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적인 이익만을 얻으려는 자입니다.

권력 등의 수단으로 불의하게 재물을 착취하는 자입니다.

악인의 계획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하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전혀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존재뿐 아니라 그분의 간섭과 심판까지도 부인합니다. 악인들이 인간 중심적 사고로 꽉 차 있습니다.

 

 본문 5- 6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들은 자기 힘을 의뢰하고 자신의 가진 부와 건강을 의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를 멸시하고 '나는 요동치 않을 것이다 나는 대대로 환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들은 거의 신적인 권세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들의 부와 권세는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이 모든 말들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정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고함과 교만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이 어디있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자기 힘을 자랑하고 자신의 부를 자랑합니다. 가난한 자를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멸시합니다. 권세 있고 부자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가지지 못한 자도 그들이 탐욕을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스스로 자기 삶을 보장받고자 합니다. 보장된 삶의 구축을 위해 혈안에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보장된 삶을 위해서는 온갖 부정을 해가며 다른 사람의 생명을 노략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의 정신은 이미 가진 자들이나 그렇지 못한 자들이나 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서고자함에 있습니다. 스스로 자존자로 서고자 하는 것, 이것이 아담이후로 타락한 세상의 정신입니다. 빈부를 떠나서 모두가 맘몬신의 정신을 따라 물질세계를 최상의 가치로 추구합니다. 이 거대한 물질의 풍요를 좇는 탐욕의 세계는 만족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이후로 그 생산성이 혁명적으로 배가되었음에도 세계는 더 많은 소유를 향해 탐욕스럽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제한과 결핍은 보지 못하고, 가진 힘과 부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악인들이 악을 행함에 있어서 전혀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인간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또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대담하게 악을 행합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8:11)

7절 이후로 이러한 악인들에 대해 그들의 악을 행하는 방식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7- 11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자기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그가 구프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악인이 그 입술로 의인을 시험에 들게 합니다. 산적이 산기슭 으슥한 곳에 숨어 기다리다가 무죄한 자를 죽이고 강탈하듯이, 악인은 의인을 해치기 위해서 은밀하게 엎드려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다고 말합니다. 새 번역의 표현으로 보자면 '그 입에는 저주와 기만과 폭언들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혀 밑에는 욕설과 악담이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3:14)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시59:12)

그들은 돈을 위해서는 으슥한 길목에 숨어 있다가 사람을 쳐 죽이기도 합니다. 마치 사자가 가련한 동물을 잡아먹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가난한 자를 잡아 넘기기 위해, 순진한 사람을 등쳐먹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짓밟고, 때론 강압적 폭력으로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얼굴을 돌렸으니 영원히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잊으셨다는 말은 가련한 백성, 외로운 자들을 돌보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과의 언약을 저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버리셨다고 조롱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언약의 배반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가난한 자 곤고한 형제를 돌보아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형제의 재산을 은밀히 탈취하고, 때론 큰 권세와 폭력으로 노략하고, 자기의 가진 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며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차라리 이방인들이 그리하였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같은 언약의 백성된 다들이 그 형제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한 언약의 공동체로, 한 언약 안에서 큰 사랑의 공동체로 부르시기 위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모든 가나안의 복으로 복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스런 통치를 나타내는 나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은혜를 입은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공급하신 것으로 형제를 공급하고 가난한 자들을 보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를 보호하고 부양하기는커녕, 도리어 형제의 것을 빼앗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합니다. 돈 때문에 형제의 생명까지 해하려듭니다. 그들은 도무지 언약백성이라 불리울 수 없습니다. 이름만 유대인이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나라는 하나님나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언약의 파기자들이 그 나라를 짓밟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높아진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님을 대하여 마음을 높이고 대항합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악행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신론에 근거하여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자는 철저히 이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기적인 탐욕과 자기 추구로 심지어 다른 이의 생명까지도 노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모습들이 오늘 새 언약의 백성들 가운데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극단적인 죄의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가난한 자들이 소외되고 때로 조롱되고 있습니다. 형제를 보호하고 부양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해서 저렇게 가난하게 살지. 무언가를 잘못했으니까 저런 일을 당하지' 이런 식으로 형제를 판단합니다. 어디 개척교회 목사가 감히 발언을 하려들어! 이런 식으로 형제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악을 보며 다윗은 부르짖습니다. 여호와께서 일어나시도록 촉구합니다. 그들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도록 간구합니다.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8절)’ 산적이 산기슭 으슥한 곳에 숨어 기다리다가 무죄한 자를 죽이고 강탈하듯이 악인은 의인을 해(害)하기 위해 은밀한 음모를 꾸밉니다. 은밀하게 엎드려 먹이를 노리는 사자와 같이 악인은 은밀한 곳에서 숨어 기다리며 의인을 해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사자가 자기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9절) 사자는 난폭한 성질 때문에 종종 행악을 행합니다. 악인은 이같이 압제당하는 자를 또다시 압제하고자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잡아당기는 어부처럼 악인은 가난한 자들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잡아들입니다. 악인은 사냥꾼처럼 자기 그물 안으로 유인합니다.

‘그가 구프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10절)

이 구절의 주어를 악인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악인이 의인을 잡기 위해 바싹 엎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뱀이 가인 문 앞에 엎드렸다가 그를 살인하게 만드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나운 맹수가 연약한 짐승을 잡아 그 뼈를 부스러뜨리듯이 악인은 가난한 자들을 잡아 깨뜨리고 있습니다. 폭력배나 깡패와 같이 악인은 공갈이나 폭력을 휘둘러 의로운 자들을 넘어뜨리고 있습니다. 악인은 이러한 악행을 하고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도 자기 행위를 심판 할 자가 없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담대했고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시59:2)

 

본문 12-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 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어느 부요한 한 믿는 이가 예배당에 갈 때마다 평소에 그가 잘 아는 이웃을 만났는데 그녀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늙고 병들며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그를 보고는 처량한 목소리를 내며 몇 푼을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부요한 믿는 이는 마음속으로 ‘내 수중에는 적지 않은 돈이 있지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의 돈을 그녀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귀찮게 하는 것이 싫어서 그녀에게 동전 두 개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 그는 그녀를 떠나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당신이 나의 쓸 것을 충족시키셨고 또한 나로 평강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오늘 더 많은 은혜를 내게 주사 나의 심신이 넘치는 축복을 받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모든 은혜를 내게 주십시오.”라고 간구했습니다. 그 사람은 남을 위해서는 털 한 가닥도 뽑으려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얻기를 좋아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열납될 수 없습니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여기에서 일어나옵소서 하는 것과 손을 드옵소서 하는 것은 등치 개념입니다. 일어나소서. 손을 드옵소서하는 것은 가난한 자를 잊지 말고 보살펴 달라는 말과 같습니다. 곧 언약의 주로서 역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찌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모욕하는데도 그냥 두고만 계시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속히 그들의 팔을 꺾어 주시고 그 악함을 낱낱이 심판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이런 식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의 당하는 환경은 비슷합니다. 지금도 악인의 자기의 부를 자랑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여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을 경멸하고 모욕합니다. 이에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가만 두고 계시는가? 왜 자기백성의 고난을 외면하시는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기백성을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금 원수를 저주하는 것처럼 기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팔을 꺾어달라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옛 시대는 하나님의 원수는 자기 원수여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수를 저주하고 대항하여 세우므로 세워지는 시대였습니다. 원수를 향해 저주하며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육체를 따라 세워지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육체의 방식으로 증거되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가난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모욕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수치를 당하시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모욕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 나라는 가나안에 세워진 나라였고 육체의 방식으로 경륜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하늘에 속한 나라여서 욱체의 방식으로 그 영광이 증거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때로 극심한 핍박과 함께 모욕을 당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나라가 모욕되는 것

이거나 하나님이 모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욕될 수 없는, 조롱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서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아니어서 그 영광이 빼앗길 수 있는 나라였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 영광이 빼앗길 수 없는 원수 마귀가 조롱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의 권세는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그가 생명의 권세를 가진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활하시므로 모든 사망의 권세를 파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성도는 원수에 의해 생명이 탈취되어도 기쁨으로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는 것이고, 멸시를 받아도 기쁨으로 감내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의 왕국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기에 원수를 저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원수를 긍휼히 보고 그들이 많은 힘과 부를 가지고 권세를 부려도 불쌍히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부활에서 그들의 종말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련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조롱애도 담대히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을 앗아가는 자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영광은 나타났고, 그 안에서 하늘이 열려 우리가 그 영광을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을 빼앗겨도 하늘의 부요함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17:5)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체험담이 있습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그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한 백 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기자가 과일 하나 갖고 있어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거나 멸시하고 조롱하지 맙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자니라”(잠14: 2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19:1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잠28:2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29:7)

다윗이 가난한 자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은 사회복음주의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이들은 분명 마음만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실재로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사모해서 가난해진 자들이지, 다른 이유로 가난해진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므로 가난해진 자들입니다 의롭게 바르게 살고자해서 가난해진 자들입니다. 마치 나봇과 같은 자들입니다. 나봇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 가난해진 자입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아합왕에게는 이세벨이라는 왕비가 있었는데 이 이세벨은 매우 탐욕스런 여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바알신을 끌어들여 온 이스라엘로 배교케한 악의화신이었습니다. 그 왕궁 앞에 포도원이 있었는데, 바로 나봇의 포도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포도원이 매우 탐이 났습니다. 그래 사람을 시켜 그 포도원을 팔도록 종용하게 됩니다. 몇 배가 되는 높은 값을 쳐줄테니 그 포도원을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봇은 이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보면 기업은 팔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신 기업을 사고 팔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기 위해 이세벨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에 이세벨은 격분하게 되었고, 결국 남편 아합의 힘을 빌려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탈취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 때문에 가난해진 자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위해 스스로 가난해진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핍박과 강포로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을 말합니다. 그 나라와 의 때문에 탄식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거의 필연적으로 가난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극한 가난에야 처하지는 않겠지만, 정직하게 세금내 가지고는 운영하기조차 힘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 촌지나 뇌물을 받지 않으므로 가난할 수 있습니다. 때로 그것 때문에 비난받고 조롱될 수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가난해진 자들을 위해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들을 구원해 달라고, 가난한 자를 잊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요한 자들은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잊으셨고 돌아보지 않는다'고 조소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로 불의가 판치고 악인이 득세하는 모순된 상황 속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12절),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15절)라고 부르짖어야 될 것입니다. 악이 제하여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은 모든 세대의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이러한 소망에 대해 하나님이 반드시 들이심을 확신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16- 18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줍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다윗은 지금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은 겸손자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의인의 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영원무궁토록 의의 왕이십니다. 반드시 자기 백성의 옳음을 변호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과연 그리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자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는 가난한자를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왕이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의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들, 그 나라와 의를 사모하므로 다윗처럼 애통해하는 자들을 자기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그 나라의 임함을 기다리고 고대했던 자들을 새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다시 본문 1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영원토록 주관하시는 최고 통치자이시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어질 것을 노래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시인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할 영원한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띤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7:18)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개입해 주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초조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때에 숨어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리욘')'입니다. 가장 높으신 주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시고(시97:9), 천지의 창조주이시며(창 14:19), 만물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십니다(시47:2; 신 32:8).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십니다. 악한 자의 번영은 허무합니다. 악한 자의 권세가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그것은 얼마가지 못하여 파멸합니다.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기서 열방은 하나님을 대적한 이방 나라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일시적으로 행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영원히 섭리 가운데 반드시 적기(適期)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기도는 듣지 아니하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소원을 아뢰는 것은 들어주십니다. 시편 145편 19절에도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하였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높으신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십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고아'를 돌보아 주셨으며, 앞으로도 고와와 가난한 자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68:5)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146: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아직 새로워진 세상을 살고 있지 않기에, 때로 우리도 고난을 당할 수 있고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악인들의 모든 궤휼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유한 자들의 교만하고 높아진 말을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잔잔한 미소를 그 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잔인한 악한 자의 폭력까지라도 기쁨으로 당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쁨으로 환란에 참여했던 것처럼, 스데반이 원수를 도리어 축복하는 중에 미소를 머금고 죽였던 것처럼, 우리는 하늘 영광을 보고 사는 자요,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그리스도를 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이 높아진 자들의 교만한 말을 들을 때, 악한 자들의 궤휼과 포악함을 볼 때까지라도 그리스도의 승리하신 영의 역사를 따라 이 모든 어려움을 기쁨으로 극복해 가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에 어리석은 방식으로 대응하려 하지 말고 하늘 영광을 보고 사는 자답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그러한 악한 자들을 이겨갈 수 있도록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가난해져도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이고, 때로 죽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이 땅을 사실 수 있기 바랍니다.

본문 18절에 ‘세상에 속한 자’란 말은 ‘땅에서 온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 본래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뜻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비할 때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교만을 버리고 그분께 절대 순종하여야 할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욥4:19)

인생은 아담의 후예입니다. 흙입니다. 훅 불어버리면 날아갈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므로 "티끌과 같은 나"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이런 인생이 승리를 얻지 못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열방은 심판 아래 있음을 알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먼지와 같은 존재임을 알고 겸손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사40:15)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악한 자의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같고(약4:14), 악인의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고(시103:15) 한 편의 영화 스토리와 같습니다. 우리 또한 흙이요 먼지같이 연약하고 가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한 자의 간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드립시다.

 

 * 기도: 곧 넘어질 듯 약한 나를 붙드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부족함이 없게 날마다 채워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으며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요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이 그러셨듯이 세상의 헛된 욕망을 포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현실이 어렵고 곤란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을 주소서. 비천과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족함을 배우게 하시고, 범사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에 힘쓰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선지자의 용기'를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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