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통곡에서 찬양으로

시편 복음............... 조회 수 2357 추천 수 0 2011.02.04 16:33:46
.........
성경본문 : 시13:1-6 
설교자 : 헌태완 목사 
참고 :  

통곡에서 찬양으로

 

본문: 시편 13편 1- 6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JC 페니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성장하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한 가운데 빚만 짊어지고 허덕이는 생활을 이어 가야 했습니다. 그의 삶은 대단히 불행했고 늘 빚쟁이들에게 시달렸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려 근심과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미시간 주 베틀크릭 병원에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투병 생활에 지친 페니에게 바람 소리를 타고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작은 건물에서 들리는 찬송소리였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뒷자리로 들어가서 가만히 앉았습니다. 늘 듣던 찬송가가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갑자기 페니 마음속에 확신과 믿음이 들어 왔습니다. 페니는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지쳐 버렸습니다. 저를 도와주옵소서!”

이렇게 기도 했을 때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고쳐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확실히 들어 왔다고 간증합니다. 페니는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를 억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나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여 있었습니다.”

그 후 페니는 건강을 회복하였고 용기를 내어 다시 사업을 시작하여 마침내 그는 미국에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은 이렇듯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고 그는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주님의 주시는 은총을 바라며 살아갑시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9)

 

우리나라에서 성자로 알려진 한경직 목사님이 말년에 10년 가까이 치매에 걸려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이중표 목사님도 암 수술을 받았고, 말년에 치매에 걸려 굉장히 고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도 치매로 고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암으로, 폐병으로, 사고로, 심장병으로, 가난으로, 자녀 문제로 고생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가정문제로 이혼을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것보다 더 한 시련을 겪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것도 평생을 성자처럼 살아오신 분에게, 평생을 기도만 하고 한눈 한번 안 팔고 주님만 섬겨 오던 분들에게, 위대한 능력의 사람들에게 이런 시련들이 임합니다.

어떤 분이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시련이 왔다가 살짝 비껴가겠지요? 목사님 가정에는 힘든 고통이 없겠지요?. 혹시라도 예수 믿으면 그런 인생의 문제들을 피해 갈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을 가지셨다면 그건 정말로 큰 착각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한 우리가 고난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인생의 고난 앞에서 신앙인과 비 신앙인의 차이는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고난의 유무가 아니라 고난을 겪어내는 태도가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마5:45). 고난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신자와 신자가 아닌 사람의 차이가 뭐냐면 고난을 겪어 내는 태도입니다.

신앙인이란 어떤 고난이 와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사실 고난 자체가 불행은 아닙니다. 고난을 극복할 의지를 잃은 것이 진짜 불행입니다. 성경은 말했습니다.“의인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비록 일곱 번 넘어질 지라도 여덟번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잠24:26)

여러분, 살다보면 이런 저런 가벼운 고난들은 누구에게나 다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존 자체를 위협하는“심각한”고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시편 13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 또한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어떤 배경 가운데서 지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큰 어려운 처지에 있고 그가 참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큰 곤고함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뒤쫓고 다윗은 수척함과 큰 근심 가운데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큰 위기 가운데서도 주의 인자함을 의뢰하고 그의 구원을 소망 중에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그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말미암는 승리를 노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 시편은 여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편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첫 부분의 두 절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픈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절에는 비길 데 없는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쓴 많은 시들을 보면 통곡으로 시작해서 기쁨과 찬양으로 끝맺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깊은 내적인 모습을 봅니다. 한편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한 사람, 그리고 기뻐하며 찬송하는 다른 한 사람이 있는 것을 찾게 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러한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우리 안에는 옛사람과 새사람, 옛 성품과 새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변덕 심한 날씨와 같아서 한쪽에서는 햇빛이 쪼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나기가 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소나기가 많이 와서 햇빛이 가려지지만 그렇다고 햇빛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인간의 참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다윗을 보면 마치 우리가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도 고통 속에서 헤매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몸부림칠 때가 있습니다. 철학자 러셀은 “사람이 외부 공간은 점령하지만 자기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해 고민하는 약한 존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첫 부분에는 인간의 불만, 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부분에는 이 불만이 찬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1절로 2절까지는 하나님 앞에 그의 혹독한 처지를 두고 탄식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고 그리고 3절로 4절은 그가 당하는 어려운 처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절로 6절은 그가 이 큰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 1절,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 우월론’을 주장하면서 죄 없는 유태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갈 때 그들이 눈물을 뿌리며 던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허용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후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탈환한 후 내부를 조사하다가 한쪽 벽에 쓰여 있는 찬송가 가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의 신앙의 고백으로 기록해놓은 구절이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나님의 사랑?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니 웬말입니까? 그러나 또 다른 곳에도 이런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통치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절망적인 영역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실망스럽고 답답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눈을 가지고 현실 속으로 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본문 1절에서 시편 기자가 반복하여 묻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느 때까지입니까?'하는 것입니다. 한글 번역은 이 시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는 것이 매 문장의 서두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번역해 보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저를 영영 잊어버리시겠습니까? 어느 때까지 나로부터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겠습니까? 어느 때까지 내 영혼의 생각들과 내가 싸우고 날마다 내 마음은 슬픔 속에 있어야 합니까? 어느 때까지 나를 대적하는 이가 내 위에서 승리를 맛보아야 하겠습니까?"라고 번역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까지 하는 그 때를 묻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시며 버려두신 것 때문에 마음에 종일토록 근심하며 곤고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 근심과 곤고함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속히 이 곤고함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위협과 그로 인한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하는 일들을 묘사할 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는 것입니까? 언제까지 주의 얼굴을 숨기시겠습니까"하고 묻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자기 삶의 고난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자기 삶을 이해하는 이해의 체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믿음 안에서 그 앞에 당한 모든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간구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대리왕답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고난을 한 개인의 일로만 바라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고난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될 것 같으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어서 그 백성의 영광과 생명이 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다윗은 자신의 당한 일을 믿음의 일로 해석하고 은혜를 부르짖어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얼굴을 드신다, 또는 그 얼굴을 숨기신다' 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를 표현하는 것이 되겠지요? 구약 민수기 6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평강을 베푸신 것, 그것을 그 얼굴을 향하여 드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휘장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자기 백성을 그 얼굴로 대면하시는 언약 관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멀리 떠났고 그의 기업으로부터 발붙일 곳도 얻지를 못하고 있고, 원수들로부터의 모든 고난 중에 있거든요. 자신은 고난 중에 있고 원수들은 도리어 마음을 높여 자긍하고 있거든요.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고 계신 것과 같아서 다윗이 어느 때까지 그 얼굴을 숨기시겠는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질서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친히 기름부은 바 된 왕이요,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왕국이 자기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여전히 고난

중에 있고 지금 생명을 위협받고 있거든요. 그러니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자신을 잊으시겠느냐고 어느 때까지 그 얼굴을 숨기고 계시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근심은 그가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하는 그런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실은 그의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멀어져 있고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가리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근심은 '장차 내 목숨이 어떻게 될꼬'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죽음으로 그 나라가 조롱되고 원수들의 자긍이 더 높아지고 의인들의 터가 무너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곧 하나님 나라의 무너짐을 의미하거든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 죽으면 그 나라는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모욕과 굴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신약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바울에게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바울의 죽음으로 그 나라는 흔들리고 무너지는 나라입니까? 도리어 그는 죽기를 원하고 있고 죽어 주와 함께 있기를 더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나라는 죽는 것 때문에 무너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는 죽지 않는 영원한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구약의 왕은 죽으면 그 나라가 위태하고 그 터가 무너지고 의인들이 소망을 잃는 나라였지만 그러나 교회의 머리시요, 우리의 왕께서는 다시는 죽음의 권세가 조롱할 수 없는 생명의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하늘 보좌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들은 죽음 앞에서도 평안하고 베드로는 다음날 죽는데도 그 전날 밤에 평안히 잠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목숨이 어찌될까' 하는 그런 두려움보다도 그는 하나님 나라의 기름부은 바 된 왕입니다. 그는 한 개인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의인들의 소망이요 터입니다. 그런데 그 터가 무너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나라는 조롱되고 원수는 기뻐할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어느 때까지”란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다윗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기한이 있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도와 주시기는 도와주시는데, 오시기는 오시는데 언제입니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잠깐이라도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잊으셨습니까?”라는 부르짖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사랑이 불변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 지극히 진실하신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습니까?”라는 울부짖음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다윗은 하나님이 꼭 자기를 잊으신 것처럼만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비단 다윗 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잊으면 참을 수 있으나 하나님이 나를 잊으면 나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자부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즐거워했지만 지금은 불행한 사람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하나로 처해 있는 자신을 볼 수도 있습니다. 태양이 가리워지면 대지가 어두운 것같이,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 심령에서 숨어버리면 문자 그대로 우리 심령은 암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닥친 번민으로 인해서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잊어버리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뿐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여인이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절대로 잊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이 자신의 고통을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숨기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나 뜻을 숨기신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을 숨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는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웃으시는 그 얼굴을 숨기는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오늘 우리도 이런 절규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보십시오.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로부터 숨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나 그 은총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루만 보지 못해도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싫은 사람은 보게 될까 겁이 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대하시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 숨겨졌던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뵐 때 우리는 수심 대신에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화창한 날씨만 있었다면 가을에 추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계속적으로 성공하고 그로 인해 기뻐하면 우리의 뇌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랍 속담에 “햇빛만 빛나면 사막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비가 없으면 어떻게 초목이 자라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얼굴을 숨기실 때 우리는 절망을 느끼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의 슬픔을 말해 줍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독백입니다. 자기 스스로 얻은 결론입니다. 사람은 이런 독백에서 위로를 얻지 못하고 절망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사역에 전보다 더 큰 축복을 예비하실 때 나에게 먼저 우울이 온다”고 했습니다. 어떤 성공이 있기 전에 먼저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소망의 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고 말했습니다.

시편 42:4절에서도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절규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샘물과도 같습니다. 그곳에 가서 물을 길으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길으실 수가 있습니다. 영혼의 샘이신 하나님에게서 샘물을 마실 때 참 위로가 되실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것은 외적인 인간의 슬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2- 4절)

외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죽는 것과 의가 불의에게 패했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외부에서 당하는 고난이란 사탄과 사탄의 협력자들이 우리를 치켜올리고 그 다음에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 내린 때에 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4절)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의 신앙입니다.

사무엘하 1:20절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믿음 떠나면 마귀들이 기뻐합니다.

다윗은 오늘 말씀에서“여호와여 언제까지 숨어 계십니까?. 언제까지 이 고난을 견뎌야 합니까?”라고 절규합니다. 이 기도는 한 인간이 절망의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토해내는 한숨 그 자체라고 성경 번역가들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아픔을 견뎌야 합니까?, 악한 자들이 잘되는 꼴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합니까?” 다윗은 이 탄식을 1,2절에서(4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절박한 기도를 했겠습니까?.“하나님, 왜 나를 모른 척 하십니까?, 나는 언제까지 근심하며 고민하고 살아야 합니까?. 나는 지금 지치고 절망에 빠져서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도 내용을 잘 보시면 이렇게 엄청난 탄식과 절통한 기도를 하면서도 한 번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신자와 비신자와의 차이는 고난의 유무가 아니라 고난을 겪어내는 태도가 다를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인이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려는 사람입니다. 스펼전은 “고난 자체가 불행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할 의지를 잃은 것이 진짜 불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의인은 비록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이 믿음과 의지로 새힘 얻고 일어 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여러분, 우리는 고난이 왔을 때 결코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고난을 향하여 투쟁하고 항의하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켜 나갈 때 길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고후1:8-9에 보면 바울의 인생 고백이 나옵니다. 너무나 힘에 겹게 짓눌려서 마침내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정말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내 자신을 믿지 말고,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 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학문과 지식과 돈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권력도 있었습니다. 젊음도 있었습니다. 은사도 굉장히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것들 때문에 굉장히 교만했습니다. 자기보다 배움이 모자랐던 사도들을 멸시하고 핍박했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만들을 깨뜨리기 위해서 고난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이와 같이 문제를 만나고 시련을 만났을 때 깨닫고 신앙이 더욱 강해집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 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항상 두려워하며 지나친 걱정을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보며 그분의 무한하신 섭리를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현실적인 축복을 간과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두려워하는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안 될 가능성만 지레 염려합니다. 그런 생각이 비록 작을지라도 그것은 감사를 드려야 할 많은 일들을 못 보고 지나쳐버리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나친 근심과 걱정은 성령님을 슬프게 합니다. 우리를 초조하고 피곤하게 하며 시련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커다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낙망하지 말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지금 대적들은 다윗을 쫓아내 죽이고 그리하므로 그 나라를 찬탈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역사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식의 위협을 받아 왔습니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요동하면 원수들이 조롱할 것이고,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자면 원수들이 기뻐 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저를 이기었다. 내가 저가 믿는 여호와를 이기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그것을 두려워하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혀주십시오"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눈을 밝혀 달라는 말은 아마도 그의 지치고 쇠약함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력을 회복시켜 달라는 말이겠지요.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기름 부어 세우셨고 그 나라는 그 대리왕을 통하여 통치하실 것이기에 그 왕이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무너져 버리면 그 왕국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있어 다윗은 깊이 탄식하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여라도 자신이 요동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요동하면 그에게 속한 모든 의인들이 요동될 것이고, 그러면 그 나라의 터는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들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무너져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과 그 나라는 조롱되고 마귀는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아니 하나님을 향해 조롱의 손가락을 쳐들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왕상18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가 갈멜산에서 850대 1의 승리를 했는데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계속 더 많은 핍박이 몰려오자 19장14절에서 절망적인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선지자들은 다 죽고 나만 남았으니 차라리 나를 죽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왜 너만 남았다고 하느냐, 칠천 명을 남겨 놓았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감당 못할 시험은 주시지도 않지만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다 열어 놓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눈앞의 고난만 보지 말고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축복의 길을 내 다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도“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넘지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여러분, 믿음의 용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낙심과의 싸움입니다.

 

 본문 5- 6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윗의 모습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의 찬양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전에는 슬픈 탄식을 하였지만 여기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뭐랬어요?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 기쁨은 외부적인 기쁨이 아니라 본질상의 기쁨입니다. 그 마음의 기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입술로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우리의 감정을 자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때 우리는 감정을 자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실 때에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참된 평강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의 믿음을 버티어 나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맛볼 때 이것이 참 평강이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아니하는 참 평안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고 그래서 찬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통하여 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 사람의 판단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을 비교해 보세요. 다윗은 “왜, 무엇 때문에, 어느 때까지 이렇게 하시겠습니까?”하면서 불만과 의심을 토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하였습니다. 지나 놓고 보니 하나님이 나에게 은덕을 베푸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같아서는 하나님이 왜 나를 잊으셨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알고서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여호와가 나를 푸대접하셨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그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셨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나의 오해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셉이 한 말은 너무 유명합니다. 그는 소년 때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고 거기서 충성스럽게 종의 일을 보았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누명을 쓰게 되었고 감옥에 갇혀 얼마나 억울하게 고생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세워 애굽의 바로 왕의 버금가는 총리 대신이 되어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팔아 버린 형들이 굶주린 가운데 찾아왔을 때 원수를 갚으려면 갚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오히려 온 가족을 다 모셔다가 잘 대접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형들은 동생 요셉을 두려워하여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마는 세상 떠나기 전에 요셉에게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였다고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가슴이 아파서 울면서 형들을 불러,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각으로는 억울할 수도 괘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천대하고 박대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후대하였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자신이 망각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이 가련한 사람이 자기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이와 같이 대하시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크게 변했습니다. “전에는 슬픔과 불만투성이었지만 지금은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이런 결심은 현재 뿐만 아니라 일생 전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입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교우 모두가 이렇게 “일어날 때, 일할 때, 잠잘 때 이 입술을 그대로 간수치 말고 찬송을 부르리라”하는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외로움이 사라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두려움이 가십니다. 찬송을 부르면 힘이 생깁니다. 감사가 솟아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인처럼 “내가 사는 동안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는 결심을 가지기 바랍니다.

어떻게 통곡에서 찬양으로 바뀌어졌습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보장을 받아 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3절) 하였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기 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많은 번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게 부딪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집니다. 마침내 저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놓고 기도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용기와 신념, 그리고 감사와 찬송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짐을 주께 맡기고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다시 생각해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또 생각이 날 때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여러분의 고민과 문제를 모두 이야기하세요. 여러분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신 다음에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당에 나와서는 맡기지만, 예배가 끝나면 다시 찾아 가지고 갑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 5절 다윗의 간증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고통을 여호와 앞에 맡겼을 때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만한 감동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주님을 의뢰하세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에 대한 의뢰뿐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의뢰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사하여 주십니다. 능력이 필요하십니까? 그리스도를 의지하세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거짓말했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마세요. 그러나 그리스도가 진실하다면 그를 의뢰하세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를 의뢰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가 전능하신 구세주라면 그를 의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할 때 다윗과 같은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라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의뢰케 하십니다. 나는 대접받을 사람이 못되는데 후대해 주시니 감격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 날의 생활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들로 쌓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평스러운 일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시고 도와 주셔서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덕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하나 하나가 이 하나님의 은덕 베푸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무겁게 왔으나 돌아갈 때는 가볍게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낙심 가운데 왔으나 돌아갈 때는 소망 중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맥없이 왔으나 돌아갈 때는 용감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올 때는 울면서 왔으나 돌아갈 때는 찬양하며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15:2)

 

본문 5, 6절은 다윗이 신앙고백적으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여기 보면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뢰하였사오니'해서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은 현재형으로 '나는 오직 당신의 인자하심만을 의뢰하겠습니다.' 또는 '나는 오직 당신의 끝없는 사랑만을 의지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겠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6절을 번역해 보면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늘 선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는 사망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시고, 외면하시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소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수의 조롱과 앞길의 캄캄함 중에도 감사와 찬송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나 온 생애 동안 늘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선히 자신의 삶을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그 얼굴을 들어 비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구원하셔서 그 나라에 평강을 주셨고 특별히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는 그 왕국에 있는 모든 대적들을 다 정복하여 참으로 그 나라가 평화의 왕국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믿고 신뢰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를 향해 영영히 얼굴을 돌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잠시 그를 잊은 것 같으셨으나 결코 그를 잊지 아니하셨습니다. 혹 젖먹이는 어미는 그 젖먹이를 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깊이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한 신뢰로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진노의 잔을 받으셨을 때, 철저히 그 얼굴로부터 외면 받으셨을 때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가 가장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얼굴로부터 외면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진노 중에도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부르셨고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했던 것처럼 마지막에 세우신 아들께서도 죽음의 저주에 이르도록 까지 아버지를 시인하고 의뢰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신뢰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너는 구원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니 너를 건지실 것이라' 이런 식으로 조롱할 때에도 그는 흔들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끝까지 견고히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의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아버지께서는 모든 권세의 주가 되게 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이제 다윗왕국의 평강 정도가 아니라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는 평강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들의 부활에서 이 모든 결과를 본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인의 결국을 본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다윗은 선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중에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높이셨고 아들을 하늘 위에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주님의 부활의 시대를 사는 자들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인들의 결국을 본 자들이요,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참으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의 신뢰에 응답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도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놓을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선히 인도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교회에 주시기로 예비하신 모든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얼굴을 들어 비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부활의 영광의 빛 가운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겠습니다. 한 시도 주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함께 하심을 물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가 주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 가운데 능히 승리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 바랍니다.

 

 * 기도: 영원히 찬양받으실 주님!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의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을 확신하게 하소서. 헛된 두려움을 버리게 하소서.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능히 역사하시는 주님을 찬송하게 하소서. 가련하고 고통 받는 자의 삶이 통곡에서 찬양으로 바뀌게 하옵소서. 저희가 찬양하는 삶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믿는 사람들에게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 시편 통곡에서 찬양으로 시13:1-6  헌태완 목사  2011-02-04 2357
4705 시편 거짓과 아첨하는 입술 시12:1-8  한태완 목사  2011-02-04 2819
4704 시편 여호와께 피하는 자의 평안 시11:1-7  한태완 목사  2011-02-03 2398
4703 역대하 진실만을 말한 참 선지자 미가야 대하18:12-34  한태완 목사  2011-02-03 2944
4702 시편 가난한 자의 간구 시10:1-18  한태완 목사  2011-02-02 1433
4701 시편 공의에 입각한 구원에 감사 시9:1-20  한태완 목사  2011-02-01 2280
4700 시편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 시8:1-9  한태완 목사  2011-02-01 3384
4699 시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시7:1-17  한태완 목사  2011-01-31 2133
4698 시편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150:1-6  한태완 목사  2011-01-31 3543
4697 시편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는 사람 시145:1-21  한태완 목사  2011-01-31 3321
4696 고린도전 덕을 세우는 사람 고전10:23-24  강영구 목사  2011-01-31 2378
4695 시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하라 시146:1-10  한태완 목사  2011-01-30 2685
4694 야고보서 회개로 복음의 혜택을 누리자 약4:9-10  강종수 목사  2011-01-30 2096
4693 시편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 시147:1-20  한태완 목사  2011-01-29 2924
4692 시편 성도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149:1-9  한태완 목사  2011-01-29 2503
4691 시편 온 우주만물들아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시148:1-14  한태완 목사  2011-01-29 2407
4690 아모스 정의를 외친 선지자 아모스 암5:1-15  한태완 목사  2011-01-28 3936
4689 사사기 300명 삿7:1-8  하원양 목사  2011-01-28 2361
4688 시편 복 있는 사람 시1:1-6  조용기 목사  2011-01-27 2354
4687 누가복음 예수님의 오심과 사명 눅4:16-21  조용기 목사  2011-01-27 2264
4686 창세기 바라봄의 법칙 창12:1-5  조용기 목사  2011-01-27 3247
4685 누가복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눅8:5-11  조용기 목사  2011-01-27 2586
4684 고린도전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 고전4:10-11  조용기 목사  2011-01-27 2377
4683 시편 참으로 복 있는 사람들 시144:1-15  한태완 목사  2011-01-24 2679
4682 시편 나를 고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시6:1-10  한태완 목사  2011-01-23 2665
4681 에배소서 계시의 영안을 밝히라 엡1:17-19  강종수 목사  2011-01-23 2235
4680 시편 악인의 응징과 의인의 보호 시5:1-12  한태완 목사  2011-01-23 2414
4679 시편 상한 심령의 구원 호소 시143:1-12  한태완 목사  2011-01-22 2976
4678 창세기 헌신의 3단계 창12:1-9,13:8-9  하원양 목사  2011-01-22 3156
4677 시편 외로운 영혼의 구원 호소 시142:1-7  한태완 목사  2011-01-21 2256
4676 시편 의로운 자를 도우소서 시140:1-13  한태완 목사  2011-01-20 2431
4675 시편 악에서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 시141:1-10  한태완 목사  2011-01-20 2305
4674 하박국 기쁨의 선지자 하박국 합3:16-19  한태완 목사  2011-01-20 4987
4673 시편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는 주님 시139:1-24  한태완 목사  2011-01-19 4287
4672 시편 고난을 이기는 믿음의 용기와 기쁨 시4:1-8  한태완 목사  2011-01-18 2975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