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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6: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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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존귀한 자의 고백
본문: 시편 16편 1- 11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오늘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황금덩어리 하나씩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요새 금값이 올라서 순금 한 덩어리면 일 년은 충분히 걱정 없이 사실 수 있습니다. 그만한 금덩어리를 제가 하나씩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표제가 ‘믹담’입니다. 믹담이란 황금덩어리를 말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여러 차례 읽어봐도 과연 황금덩어리입니다. 성도여러분들이 믿음의 마음으로 받으시면 지금 제가 전하는 말씀은 그대로 황금덩이리가 됩니다. 이러한 금덩어리는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들, 영화로운 사람들이 가지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생사화복이 결정되는 요인은 사회적인 요인, 유전적인 요인, 경제적인 요인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엔 한 사람이 지니는 자의식이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는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복으로 주신 것이며 한 생명은 창조주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귀하다고 생각하면 귀한 삶이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 천하고 낮다고 생각하면 천하고 낮아지는 삶이 열리게 됩니다.
자신이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존귀한 삶을 꿈꾸며 삶의 문을 두드리면 존귀한 삶이 열립니다. 그러하기에 일차적 육체적 감각에 흔들리지 말 것이며, 주변 환경요인을 나보다 더 크게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높은 자의식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한 잔의 커피를 마셔도 귀족처럼 마시고 차가 없어 걸어가더라도 임금처럼 위용 있게 걸으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라고 저 하늘을 향하여 땅을 향하여 외치십시오. 우주가 그렇다고 메아리로 응답할 것이며 존귀한 삶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항상 우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뜹니다. 그때 내가 반복해서 확인하는 구태의연한 사실은 내가 혼자라는 사실입니다. 아내는 10년 전에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들은 이미 출가했습니다. 나는 아내와 사별한 후 자식들을 출가시키느라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5년 전에 나에게 마지막 연락을 했습니다. 그 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한 녀석은 미국으로 갔다고 들었고, 또 한 녀석은 유럽 어디엔가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내는 한국 어디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자식들 전화번호도, 주소도 알지 못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전화 한 통 해주지 않습니다. 일주일 내내 전화가 1-2통 걸려오기는 합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습니다. 그러면 “여보세요. 거기 똘이 엄마 집이죠?” 잔뜩 기대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립니다. 그 잘못 걸려온 전화 때문에 하루 종일 허탈감에 빠집니다. 아무래도 이 전화를 끊어버려야겠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연락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체로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칭찬하는 말을 해도 농담으로 듣습니다. “너무 멋지십니다. 오늘 당신을 보니 우아함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농담도 잘하시는 군요.” 그러면서 머리를 살며시 숙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자격지심에 눌린 분들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더욱 심한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한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 “당신은 아무 쓸모도 없어요.”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어왔습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못할 때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신을 억압합니다. 이것은 자학으로 연결됩니다. 인생살이가 늘 무기력합니다.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냥 하루하루 살 뿐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무엇이라 알려줍니까?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존귀한 자들입니다.
시편 16편은 너무나 아름다운 고백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특히 3절에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라는 표현은 우리를 황송하게 만듭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를 소망으로 초청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존귀하다고 부르는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존귀하다고 부릅니다. 왜 성경 말씀이 우리를 존귀하다고 부르는가? 우리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생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흡을 받아 생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우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존귀한 자입니다. 또한 범죄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회복되었으니 우리는 존귀한 자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오전에 받은 말씀처럼 주님의 변혁은 우리의 변혁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존귀함은 곧 우리의 존귀함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은혜가 아니며,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존귀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존귀한 자는 여호와께 피하는 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존귀한 자의 고백 첫 번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피할 곳을 찾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완전한 은신처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도피성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권력에 기댑니다. 어떤 이는 물질에 기댑니다. 어떤 이는 철학에 기댑니다. 어떤 이는 자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종교에 기댑니다. 그것이 자기를 평안하게 해주고, 보호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비종교가 기승을 부립니다. 요가가 유행합니다. 예전과는 달리 거리마다 “기”철학원과 요가학원이 흥황을 누리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 다른 것에 기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이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예들은 반복적으로 자기들의 피난처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에 대항하여 하나님께만 진정한 평안이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기억합시다. 존귀한 자의 고백 첫 번째는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우리는 존귀한 자로 오직 하나님께만 보호를 의탁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피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호주 작가 패트릭 화이트는 197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입니다. 그는 작가수업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서 열심히 저술활동을 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그는 호주에 돌아와 나무꾼이 되었습니다. 삼림의 계곡 속에서도 그는 계속 소설을 썼습니다. 그래서 발표한 작품이 『행복한 계곡』과 『인간의 나무』입니다. 마침내 사람들의 찬사가 그에게 쏟아졌습니다. 계곡에서 나무를 자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행복한 계곡’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그 작품에서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나무』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하게 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깨달을 때에, 가장 하나님과 가깝게 된다.’
평온하고 맑은 날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태양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어떤 환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우리의 전부로 삼을 수 있다면 이미 소망이 있고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들입니다. 왜 존귀하냐 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과 간섭과 돌보심이 부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왕자의 유명한 말 중에 ‘한 송이 장미꽃’이 있습니다. 수십 수백 송이의 다른 장미들보다 나는 나의 한 송이 장미가 더 귀해. 이건 내가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주고 벌레를 잡아준 나의 꽃이니까,,.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존귀한 자들이라고 하십니다(사49:5), 우리도 하나님께 존귀한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 부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존귀한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바라는 것들도 존귀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존귀하게 보셨던 다윗은 믿음도 남다른 데가 있고, 福에 대한 이해도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그가 어떤 복을 누리고 살았는가를 살펴보고 우리도 새해는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 복을 깨닫고 우리의 것으로 누리며 살아야하겠습니다.
존귀한 성도들이 바라는 복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복입니다(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하였나이다. 그냥 듣기만 해도 참 귀한 말씀이지요. 여기서 주님이라는 말은 아도나이라고 하여 주인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다윗은 신앙시인으로서 듣기 좋으라고 이렇게 멋진 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마음의 진정한 고백으로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저는 이보다 하나님께 부담이 되는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특별하게 사랑을 안하실래야 안하실 수 없을 만큼 대단히 강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아도나이)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최고의 복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주인이 되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자원하여 종이 되기를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무적의 왕의 자리에 있는 것보다, 많은 권력이나 재물을 누리는 것보다 그의 본심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그리고서 하는 말이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세상에는 이런 저런 많은 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그 주인이신 하나님 외에는 자신에게는 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답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야 다윗아 내가 세상에 어디를 봐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고 말입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존귀한 자는 혼합주의를 거절하고 오직 주님만 붙드는 자입니다.
존귀한 자의 두 번째 고백은 4절에서 드러납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이 고백은 혼합주의를 철저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순결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나오는 그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 7-8절에서 교훈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세상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면 그것이 어찌 합당한 자세라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종종 혼합주의에 빠지곤 했습니다. 늘 이방과 접하였고, 그들의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겐 변명거리가 있었습니다. 이방의 것들을 거절하면 더 이상 그 이방과 교역할 수 없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따돌림을 받는다. 그래가지고는 이스라엘이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런 사상은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문화 교역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도태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문화를 거절하는 것도 도태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상과 벗하기를 정당화하지는 않을지라도 피치 못할 일로 여기곤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방족속들의 농경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아니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방 농경문화는 우상숭배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방농경 기술을 도입할 때 우상숭배를 그대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세상 지식들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발달한 기술, 편리한 도구는 성경적 가치관을 따라 개발된 것이 아닙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가치관에 따라 개발된 것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 것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로부터 보화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세상의 것들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맘몬 우상에 완전히 넘어가버렸습니다. 물질지상주의 가치관이 지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업이 된다는 것은 단지 머리속에 지식으로만 갇혀버렸습니다. 그 대신 맘몬이란 우상이 어느새 교회의 주요 결정 사안에 핵심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또한 온 성도들의 삶을 물질주의가 지배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이나 일반입니다. 직업을 고를 때엔 먼저 연봉부터 따집니다. 연봉 따지고 나면, 근무 조건을 봅니다. 그리고 그 직장의 전망을 봅니다. 안정직인지 보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준이 아니다. 성경은 직장을 하나님의 소명을 품고 들어가서 헌신하는 장소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장은 생계의 수단이며, 자아실현의 장소이며, 그래서 성공을 위한 터전이라 여깁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 안에도 이런 가치관이 만연해 있지 않습니까? 언제부터 우리의 가치관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4절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 가치관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우상들에게 우리의 예물을 바쳐서는 안 됩니다. 주일날 하나님을 알현하는 우리들이 어찌 평일에는 세상의 물질주의의 노예처럼 살아야합니까? 우리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유자가 될 것이다가 아닙니다.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의 노예로 살지 맙시다. 하나님만 섬깁시다. 한 주인만 섬깁시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주일날도 세상처럼 일하고, 공부하고, 즐겨야 한다. 아니면 따돌림 당하고 도태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시편 16:1의 고백에 불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또한 16:2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까? 우리의 피난처는 오직 여호와 한 분인입니까? 우리에게 복은 오직 주님 한분입니까? 그렇다면 세상을 따르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도태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도태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태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도태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데 누가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 35- 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실히 따르다가 곤란을 당한다면 그것은 명예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따르다가 곤란을 당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의 인정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삽시다. 혼합주의를 우리 안에서 물리칩시다.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만을 우리의 복으로 삼읍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존귀한 자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자들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본문 5, 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십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에서 하와이로 간 성도들이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일이 돌아오자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화가 난 농장 주인이 이제부터 주일에 교회 나가는 자들은 매질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민들은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왔는데 주일을 못 지킨다면 이민 온 이유가 없어지니 매를 맞더라도 주일을 지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농장 주인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많은 일꾼들이 ‘오늘은 주일이니 교회에 가기 전에 매를 맞고 가겠습니다’라고 농장 주인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뜨거운 믿음에 감동을 받아 매주일 농장 일을 쉬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그 주인도 일꾼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으며, 나중에는 일꾼들을 위해 예배당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을 향해서는 열과 성을 다해서 투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산업과 우리 잔의 소득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학생들이 수련회를 가면 곧잘 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예수 나의 기쁨 아멘.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기 차례가 오면 “예수 나의 기쁨”이란 곳에 독창적으로 두 글자를 집어넣어 부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이라 화답합니다. 그리고 다음 사람 순서로 넘어갑니다. 여러 가지 고백들이 순식간에 쏟아집니다. 예수 나의 안경, 예수 나의 사랑, 예수 나의 신랑과 같은 일반적인 고백도 있습니다. 예수 나의 지갑과 같은 돌발적인 고백도 나옵니다. 모인 학생이 50명이면 각기 다른 50가지 고백이 쏟아집니다. 그러면 한글 두 글자로 된 단어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인가?” 이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누구이셨는가? 매일 똑같이 기도하는 것, 괜찮다. 중요하다. 그런데 특별히 오늘 이 순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누구이셨는지 예수님께 고백해 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이것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생동감 있게 해줍니다. 오늘 시편 16:5절이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인이 이런 고백을 여호와께 올려드렸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진솔한 고백을 날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개인적으로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멋들어진 말, 미사여구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정말로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그 고백을 하십시오. 제발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건만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밀어내지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시인에게 하나님은 실재입니다. 산업 자체입니다. 시인의 분깃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내가 실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재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실재를 반영하는 자입니다. 나는 주체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체이십니다. 나는 주체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청지기입니다. 그 분은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십니다. 그는 나의 분깃을 지키십니다.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 기준선을 마땅히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기복주의,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신앙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제 6절 말씀을 고백합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런 고백은 현대인들에게 어색합니다. 왜냐 하면 자기 처지를 만족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자기 처지를 만족하는 이들이 있긴 합니다. 그들은 아주 높은 권력을 쟁취한 자들이거나 매우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입니다. 그들은 분에 넘치는 보수를 받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나오미 켐벨 스토리를 방영했습니다. 나오미 켐벨은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보그, 영국 보그와 타임지의 표지모델로 선정된 현시대 최고의 모델 중 하나입니다. 그 방송에는 켐벨과 함께 두 명의 톱 모델이 출연하였습니다. 이들은 천문학적 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수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우리가 너무 많은 돈을 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받는 돈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정도 돈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됩니다.” 아마도 거액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청지기답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권력과 부는 마땅한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누리는 유명세와 막대한 부는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벌어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 때마다 도와주기는 했을지라도 결국 자신이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처지에 만족하면서 막대한 부를 향유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극소수의 사람으로 한정됩니다. 또한 이들의 만족은 참 만족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언젠가 세상에서 낙마하여 모든 부를 상실할 때, 여전히 만족하겠습니까? 세상이 그들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래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유명세와 막대한 부를 향유하기에 마땅한 그들에게 잊혀짐과 소외는 결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만족은 상황적이며, 임시적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과 소외층들은 연약한 자들로 자기 처지를 한탄하기 때문에 만족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6절 고백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옆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습니다. “자, 다음번에 볼 때도 지금처럼 이 모습 이대로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아니, 다음에도 이 모양 이 꼴로 있기를 원한단 말인가? 자넨 나에게 무슨 감정이 있나보군. 악담을 해라 악담을 해.”
그러자, 그 사람이 인사말을 수정했습니다.
“다음엔 돈도 더 많이 버시고, 더 좋은 모습으로 봅시다.”
자기 처지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모습은 현대인들에겐 머나먼 이상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족하는 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 6- 8)
지족하라는 가르침을 우리가 기꺼이 수용한다면 오늘 시편 16장 5-6절은 참으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우리가 5-6절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시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특별히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받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줄로 재어준다는 것은 땅을 분배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줄은 땅을 측량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줄로 재어준 구역”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나에게 떼어주신 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만족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제 이 6절 말씀과 지족하라는 가르침을 연결해 봅시다. 우리가 지족할 수 있는 근거는 주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구약의 출애굽 성도들은 땅을 주셨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6편의 시인은 땅을 포함한 모든 것이라 말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산업, 기업이란 말은 단지 땅만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으니 시인은 기쁘고 만족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기업을 아름답다고 말하며 만족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기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를 기업으로 묘사하는데, 신약 역시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첫 열매이시다(고전 15:20).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기업을 얻는다(엡 1:11).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기업이시라면, 신약에서 예수님은 성도의 기업이시다. 이 점에서 신약과 구약은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업이시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그가 우리의 기업이 되시므로, 우리의 기업은 쇠할 수가 없습니다. 번영이요 풍성함이 우리에게 약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합니다(요 10:10). 주님은 우리의 기업이 되어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업이시므로 우리는 당연히 우리 모든 형편에 대해 만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고백합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우리는 시편 16편을 읽을 때 어떤 긴장감을 그다지 느낄 수 없습니다. 도리어 편안하고, 아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가 편안한 가운데 기록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1절부터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그의 급박한 상황이 시편 16편을 노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순탄함 중에 아름다움이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무사안일하게 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내일도 무사안일 만사태평을 바라옵나이다.”라고 기도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가 됩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은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급박합니다. 난파선에 타서 곧 함몰될 듯한 위경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바로 그때 빛을 발합니다. 왜냐 하면 신앙이란 우리 안에 우리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힘입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위기를 만날 때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같은 연유로 순교자들의 삶은 너무나 아름다우며, 순교적 삶을 날마다 사는 헌신자들의 삶은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저는 30대에 산상수련회에 갔을 때 이 시편16편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는 8절 말씀에서 특별히 은혜를 받고 나는 항상 하나님을 제일 앞에 모시고 살자고 좌우명을 삼았습니다. 오랫동안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교회를 개척할 즈음에는 5절 말씀이 참 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줄로 제어준 구역이 실로 아름답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말씀을 강해 준비하다가 저는 2절 말씀에 그만 꼿혀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고 그 주인이신 하나님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야 정말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 안 하실래야 안 하실 수 없을 만큼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이 있을까,,,.정말 다윗은 나 같은 사람하고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차원이 다르구나 하고 통감을 했습니다. 그리고서 저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 삶의 주인되시는 주님밖에는 저의 복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사니까 얼마나 평안하고 든든한지요.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고 무슨 복이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오직 내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만을 나의 복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귀한 믿음이고 진정한 복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는 믿음으로 사시면 하나님은 정말로 그 사람의 복이 되어주십니다. 다윗의 고백이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존귀한 성도들이 바라는 복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복이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복입니다(4-6절).
세상 사람들은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립니다. 내 마음을 드리게 되면 그게 다른 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고 구하는 다른 복을 말합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돈을 복으로 알고 사는 자들은 그것을 신처럼 사랑합니다. 거기에 마음을 드리니까 당장이라도 돈이 없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매이게 됩니다. 알고 보면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추구하는 것들은 한 꺼풀 두 꺼풀 벗겨보면 다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좋은 신랑감을 얻으려하고, 돈 때문에 명문대 보내려고 하고, 돈 때문에 돈쓰고,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기를 씁니다. 신앙생활을 좀 허술하게 해도 세상에서 악착같이 쟁취하면 그것을 복(福)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빠져도 성적을 위하여 학원에 보내고, 교회도 중요결정사항의 핵심부에 물질이라는 것이 떡하니 자리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봤자 허전함과 괴로움만 더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것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돈버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해도 하나님은 돈 잘버는 방법 안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오히려 돈 없어도 부자로 행복하게 잘 사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40일 금식기도 아무리 해도 하나님은 명문대에 안보내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목을 메는 명문대 못가도 믿음의 자녀들에게는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오히려 지금 내게 주신 것이 많든지 적든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것으로 알고 감사하면 기뻐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5절)
‘내게 줄로 제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구역이 실로 아름답도다.’(6절)
하나님이 나의 복이 되시니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로 제어서 맞게 주셨으니 세상 어느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oo이라는 말을 한번 만들어보십시오. 70여명이면 70여개의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선장, 나의 신랑, 나의 메니져, 나의 사랑, 나의 반석 등)
모든 것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말고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시편23편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이고 ‘내 잔이 넘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의 눈높이를 하늘로, 바울이 경험했던 삼층천으로 맞추어 보십시다. 이전에 뭘 몰라서 괜히 부러웠던 세상일들이 이제는 아주 아주 작게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만큼 주셨든지, 또는 어떤 신랑신부 아들딸을 주셨든지 복이 되시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실로 아름답게 보여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버니언 목사는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어느 날 옥사장이 몰래 버니언 목사를 찾아와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만나고 오라고 했습니다.하지만 버니언 목사는 얼마쯤 가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옥사장이 그에게 이유를 묻자 버니언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결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닌 것 같아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1시간 후에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버니언 목사를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이때 옥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동하셨기 때문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이제 제가 목사님께 가라 오라 하지 않을테니 목사님의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그때마다 나의 생각과 감정대로 살지 않고 양심에 비쳐오는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인다면 진정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거듭나면 성령이 그 안에 내주 하심과 동시에 죽었던 양심이 살아납니다. 이 양심의 자유를 얻는 것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죄가 내안에 있을 때 내 안의 양심은 율법이 됩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 양심은 거짓된 나를 고발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양심은 예민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양심은 민감합니다. 양심의 자유를 잃으면 지옥이 임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의 피를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 성령은 죽은 양심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선한 양심으로 주님을 찾아가게 하십니다. 성령은 깨끗하고 순결한 양심으로 살 것을 끝없이 요구 하십니다
그러나 화인 맞은 양심도 있습니다. 마비된 양심도 있습니다. 더러운 양심도 있습니다. 거듭난 사실이 아무리 분명하다 할지라도 성령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면 타락한 양심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게 충만했던 사람이 남의 유부녀와 놀아나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한 그의 양심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남기고간 하나님의 발자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발 자욱이 흐릿해 지는 이유는.....성령의 지배와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고후3:17)
내가 죄에 빠져 악한 길을 걸으며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할 때 거룩한 내 안의 성령은 양심의 문을 두드립니다. ‘거짓에서 벗어나라, 나를 의지 하라, 지금 그 죄의 자리에서 떠나라’
선지자 나단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다윗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이 죽은 양심을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 없는 사람들도 본성으로 행할 때 그 양심이 율법이 되어 그 생각들이 자신을 고발하기도 하고 혹은 변명하기도 하며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롬2:15) 이방인의 양심도 이러한데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양심은 얼마나 민감하겠습니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딤전1:19)
양심이 더러워 질 때 믿음은 산산이 깨어진 파선한 배가 되고 맙니다. 거친 바다를 항해 할 수 없는 부서진 배는 바다에서 무용지물입니다. 한 조각 깨어진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사탄은 자주 나의 양심을 더럽히려 술수를 놓고 유혹을 합니다. 사탄의 그 술수에 속아 양심을 속이고 양심을 더럽히는 날 나의 영혼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평강은 깨어지고 기쁨은 사라집니다. 성령은 탄식 하시며 양심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십니다. 그 소리가 괴롭지만 이미 미혹된 양심은 손과 발 온몸을 죄악으로 물들입니다. 성경에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삶의 뒤 안길을 살펴봅니다. 부끄러운 일은 셀 수도 없이 많고 어둠속을 헤매던 지우고 싶은 발자욱들이 너무도 선명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갈망했던 시인의 갈망이 절규가 되어 이 아침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양심을 간구하며 내 영혼이 부르르 떨림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오직 성령의 지배 아래서만 내 양심은 정결하고 거룩하며 담대히 주님을 찾아 갈 수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오른편에서 나를 지켜주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게 해주시는 복입니다. 너무 과분한 말씀이지요.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면 족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무섭고 두려운 주인이 아닌 신랑처럼 우리를 보좌라도 하시듯이 우측에서 있어 주마고 하십니다. 세상은 자꾸 우리를 흔들어댑니다. 경제도, 환경도, 급변하는 풍조도 요동칩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성도여러분 때로 사방 모든 것이 요동하는데 우리들 자신은 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복 그자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른편에 계십니다. 그러니 다윗이 여호와여 인자가 무엇이관대 이렇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셨나이까하고 고백할만도 하지요. 그런데 이 16편은 가만히 읽어가다 보면 결코 편할 때가 아닌 아주 힘든 시기의 고백입니다.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사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아마도 자신을 죽이려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끈질기게 추적해오던 사울왕으로 인한 위험에 처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도 하나님께 피하였다고 합니다. 참 재미있는 말씀이지요. 다윗에게는 피난처도 하나님, 복도 하나님, 나의 산업도 나의 잔의 소득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빼 놓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하고,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실제가 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복이 다 누구 때문입니까?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위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종이 되시고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를 믿음으로 우리는 다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자세는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종의 겸손으로 살아야지요. 보십시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제일가는 안전보장이 되어주십니다(9-11절).
본문 9- 11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세계의 부호들이 온갖 돈자랑을 하며 부요하게 사는 곳이 미국의 비버리 힐즈라는 곳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그곳에 사는 정도이면 모든 생활이 기쁘고 행복의 정점에 다다랐을 것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그러한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조건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환경과 조건을 가졌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히려 환경과 조건은 열악하다 할지라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사람은 첫째, 여호와를 품은 사람입니다. 둘째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존귀한 자이며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장 크고 위대하며 영원한 산업과 소득이 되시는 하나님을 품었고,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임을 알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며, 영원하고 복된 소망을 가지고 그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일은 존귀한 자로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땅에서 그런 참된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기쁨과 행복을 전하고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진정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로서 주님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마음도 기쁘고, 영도 즐겁고, 육체도 안전케 하시고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 진정한 낙을 누리게 하십니다. 영원한 보장입니다. 이보다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잔이 막 넘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주인삼은 자는 분명히 땅에서 벌써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흔들어 이것을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빼앗아 갈려하면 주께로 피하면 되니까요.
달콤한 세상의 유혹이 올 때도 주께 피하고, 위기가 올 때도 주께 피하고, 돈이나 자녀가 너무 좋을 때도 먼저 주께 피하고, 하나님밖에는 복이 없는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도가 존귀한 자임을 보았습니다. 존귀한 성도는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며, 하나님께만 피하며, 그 하나님만을 복으로 삼는 자입니다. 성도는 날마다의 삶 속에서 다가오는 물질지상주의를 척결합니다. 맘몬의 우상을 거절합니다. 세상의 온갖 회유와 위협을 만날지라도 당당히 그것들을 거부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존귀한 자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업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바랄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되심을 마음 깊이 새깁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업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존귀한 자답게 이렇게 고백합시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 참다운 고백이 우리 모두의 마음과 입술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주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로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으로 나의 복을 삼게 하소서. 하나님을 가장 으뜸으로 모시게 하소서. 정결한 양심 정결한 영혼으로 살도록 제 영혼을 다스려 주옵소서. 주님이 항상 내 곁에 계셔서 나의 믿음과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언제나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소서. 나의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고, 주의 십자가와 섬김의 흔적이 남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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