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시31:1-24 |
---|---|
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하나님의 크신 은총
본문: 시편 31편 1- 24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4.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6.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8.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17.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18.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
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22.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4.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한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100달러씩 갖다놓은 후 그 결과를 관찰하기로 한 것입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갔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100달러씩 집앞에 놓고 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둘째 주쯤 되자 현관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셋째 주쯤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이상해 하지 않았고 넷째주가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갔습니다. 실험기간인 한 달이 지나자 학자는 돈을 집 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며 “왜 오늘은 안 주고 가느냐?”고 따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베풀었던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고 불쾌해 했던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그가 당한 고통과 괴로움을 주께 호소하는 탄식시의 형태를 취합니다. 그의 탄식은 내부적인 죄악과 외부적인 비방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철저히 맡깁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원수의 추격과 압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간구하며 이 시의 중간에 이르러(7, 8절), 그의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고 또한 미래에도 응답될 것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의 끝부분에서는 괴로움으로부터의 구원이 오직 여호와로부터 왔음을 말하면서 동료 성도들에게 여호와를 사랑하고 진실할 것과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찬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1,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한자로 人(사람 인) 자를 보면 두 획이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아야만 바로 설 수 있는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아무의 도움도 없이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릴 때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좀더 자라면 선생님의 도움, 다음엔 친구의 도움, 친지의 도움, 선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플 땐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의식주와 문화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온갖 생산업체, 제조업체, 판매업체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무엇을 의지하여 이겨낼 수 있습니까? 그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그것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유한한 세상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33:15, 16)
본문 3절을 읽겠습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지난 86년 2월 미국 항공우주국에서는 5명의 우수한 우주비행사들을 태운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를 발사했습니다. 그런데 챌린저 호는 발사 1분 만에 공중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챌린저 호의 공중폭발 원인은 본체와 고체 연료 로켓을 잇는 이음쇠 1개가 부식되어 파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토록 사전에 철저한 점검을 했던 최고도의 과학기술의 집합체인 우주선이건만 작은 이음쇠 하나가 부식되어 공중폭발하고 말았고, 거대한 미국의 우주계획에 일대 차질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일, 기술의 발달, 과학과 군사의 힘이란 것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야지, 그것 자체만으로 인간에게 진정한 성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현대 과학 문명을 절대 신뢰하는 현대인들은 그 이면에 있는 여러 가지 한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대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질병을 만난다거나 지진이나 홍수,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을 당하게 되면 인간의 능력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근거이며 유일한 능력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립니다. 그때도 포장마차에서 참새구이를 팔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의 가격을 알고 계십니다.(눅12: 6) 그 참새는 누가 지키는 것일까요? 그 참새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는 공중에 나는 새가 나옵니다.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새를 기르십니다. 공중에서 나는 새들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하늘 아버지께서 주인이시기에 기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행27:34)
다윗은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하고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하실 마지막 말씀을 여기에 담아 놓으셨습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 말씀 가운데 마지막 유언입니다. 예수께서 큰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3:46)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기도드립니다.
야고보는 시편 31편 5절의 말씀을 몰랐을까요? 예수님의 임종기도를 몰랐을까요? 베드로, 안드레, 요한, 빌립 ... 사도바울의 임종기도는 무엇일까요? 누가, 실라, 디모데, 가이오의 임종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독교 역사상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하직할 때 이 구절을 사용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icarp)도 주님의 임종기도를 드렸습니다. 화형(火刑)에 처해져서 활! 활!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애원합니다. 초대교회 믿음의 거장들의 가슴에는 - 마음에는 이 말씀이 새겨져있습니다. 영국의 토마스 목사는 단두대에서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하고 목이 잘리는 순간 기도했습니다. 헝가리의 종교개혁자 요한 후스는 종교재판에서 화형이 확정되고 즉시 집행되었습니다. 화염 속에서 목이 메인 소리로 시편 31편 5절 말씀으로 기도했습니다. 루터와 멜랑히톤도 시편 31편 5절의 말씀을 임종기도로 삼았습니다. 주기철목사의 감방에서 마지막 기도 소리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주시옵소서" 그도 역시 시편 31편 5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31편 5절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소풍 마치는 날' 이렇게 기도합시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열일곱 살 때 수영을 하다가 목이 부러진 조니라는 소녀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소녀 조니는 하루아침에 전신마비 장애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불타오르는 재활의지와 주위의 도움을 통해 입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글을 쓰고 또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곤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쓴 『조니의 신앙』이란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은 나를 완전히 절망에서 끌어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휠체어의 인생으로부터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마비로 인한 내 모든 시련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제게 임한 것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고통 뒤에 이유를 두셨고, 그것을 알고 나니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기도하면서 기쁨을 찾아내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
우리나라는 해마다 태풍이 발생합니다. 태풍은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여 아시아 동부로 불어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대성 폭풍 이상을 태풍이라고 합니다. 태풍은 발생 후 북진하여 우리나라 쪽으로 다가오다 동해 쪽으로 빠져나가 태풍의 일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태풍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큰 비구름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추수기에 닥치는 늦은 태풍은 농부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마음을 졸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풍이 오지 않는 해는 바다농사를 망치게 마련입니다. 태풍은 큰 놀을 일으켜 바다 속까지 산소를 공급해 풍어를 가져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고 바람의 길을 정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큰바람 뒤에는 하나님의 잔잔한 은총이 숨어 있습니다. 태풍도 유익한 은혜입니다. 성도의 고난 뒤에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시86:3)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119:132)
본문 14,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전쟁터를 묘사한 인상적인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지금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그림은 포탄이 떨어지고 많은 병사들이 쓰러져가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표정 하나하나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한편에는 전쟁의 참상 속에 나타난 하나의 거대한 손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쟁 가운데,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신앙의 사람을 크신 손으로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들에만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수치나 자료, 관계자의 말에 우왕좌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차원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손입니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운명과 미래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정죄자입니다. 사람의 과거를 파헤쳐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런 정죄에 싸이게 되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새롭게 살아 보려 해도 누구도 전처럼 대해 주지 않습니다. 이웃과 친구마저 피합니다. 죽은 사람, 깨진 그릇 같은 취급을 당합니다. 하나님이 끝내지 않은 인생을 그들이 끝내 버립니다. 두렵고 성급한 마음에 다윗은 ‘그래, 나는 하나님에게서 끊어졌어!’(22절)라고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주님을 찾았습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14절). 아무리 정죄하는 혀들이 그렇게 말해도 그는 주님을 의지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14절). 다윗은 자기 시대가 주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함으로, 하나님이 그의 인생 시간표를 주관하고 계심을 선포했습니다(15절).
본문 18절을 읽겠습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
악인들이 현재는 의인들을 비방하며 중상모략하는 거짓 입술을 떠벌리나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한 마디 변명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는 17절의 ‘잠잠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2004년 5월 29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비 개막식이 있었습니다. 개막식에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참전 용사들이 초대되었습니다. 많은 이가 인터뷰에 응했으며, 훈장을 받은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명예로운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들은 한결같이 겸손했습니다. 교만한 태도나 자랑하는 마음, 특별 대우를 원하는 눈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전몰장병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 눈물을 터뜨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원망하는 마음을 내비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개막식 축하 행사가 진행되는 4일 내내, 그들은 감사와 겸손만을 드러냈습니다. 감사와 겸손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에게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1945년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 “동료들의 피와 친구들의 희생 덕분에 찬사를 받는 사람은 항상 겸손한 미덕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전 용사들은 자신들의 곁에서 죽어간 전우들을 회상하며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겸손이란 감사가 충만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 돌려 봅시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 고난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잠시도 교만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가 감당하신 십자가 고통의 공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에 삶을 낭비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는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할 때에만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삼상2:3)
본문 19절을 읽겠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오랫동안 투병을 하는 성도가 계십니다. 이 분은 수 년 동안 교회출입을 하지 못하고 병상에 계십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이 방문을 했습니다. 그날 따라 성도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목사님, 제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수 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데 정말 힘듭니다. 제가 제 발로 걸어서 주일예배를 한 번만 드리고 하늘나라로 갔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여러분, 병을 앓고 투병을 해 보면 내가 건강을 회복하는 이 은혜만 입으면 만사가 아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건강을 막상 얻고 보면 은혜 되지 못한 일들이 또 일어납니다. 이 성도의 소원을 가만히 새겨보면 오늘 우리가 몸소 걸어서 예배당에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은혜 되지 못한 것들을 붙잡고 불평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보면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고시를 준비하는 한 젊은이를 압니다. 수만 명의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합격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 싶어도 합격 이 후에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개업을 하시는 분들,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하시는 여러분들, 내가 돈만 벌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막상 돈을 벌고 보면 거기서 또 다른 인생의 장애물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 되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다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은혜로운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나면 갈등이 오고 장애물이 오고 시험이 옵니다. 은혜를 받았는데도 은혜를 역행하는 온갖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도저히 은혜가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 발생이 됩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은혜 되게 하는 은혜'가 바로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마을을 떠돌며 떡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떡이 먹음직스럽고 값이 싸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한번 떡을 사먹은 사람은 반드시 처음보다 더 많이 사가려 했기 때문에 자리를 펴자마자 떡은 다 팔렸습니다. 하지만 떡이 잘 팔릴수록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그 마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날도 할머니는 낯선 동네에서 떡을 팔았습니다. 여느 동네에서와 마찬가지로 떡을 한번 산 사람들은 다시 와서 더 많은 떡을 사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린 소년이 할머니의 손에 금화를 내밀었습니다.
“이 금화만큼 떡을 달라는 거냐?” “아닙니다. 할머니께 산 떡에서 이 금화가 나왔어요. 제 것이 아니라서 가져왔습니다.” 떡장수 할머니는 많은 유산과 사업장을 물려줄 후계자를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동안 정직한 사람을 찾기 위해 금화가 든 떡을 팔며 전국을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욕심 때문에 큰 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고 진실한 자를 기뻐하시고 그를 보호하십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15: 2)
잠언서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을 떠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만이 마귀를 만들었고 마귀가 들어가면 영락없이 교만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만드는 원인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가를 주님께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이 드러난 이후에도 고난을 깨뜨리는 망치로써 고난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집과 자기중심과 자기 의지를 무엇으로 깨뜨립니까? 교육을 해서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좋은 환경을 통해서 인간의 고집과 자기중심과 자기 의지가 깨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깨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망치로써 때리고 몽둥이로 때리면 교만이 깨어지고 자기 중심이 깨어지고 자기를 의지하던 것이 깨어지고 두 손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고 주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만큼 우리를 깨뜨리는 힘을 가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욥기 33장 16절로 17절에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고 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도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바로 고난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는 방망이가 되고 우리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라고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C. S. 루이스에게 왜 인간에게 고난이 주어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잖아도 타락한 인간이 고난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교만하겠는가?" 그러면서 "인간은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이 있다. 고통은 귀머거리와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확성기와 같다." 고 말했습니다.
본문 2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신앙적으로 매우 담대했던 오스틴 딥 목사에게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그의 임종의 병상에 마귀가 찾아와서 "오스틴 목사, 그대는 평생 동안 나의 원수였소. 이제 그대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소. 나는 이제 그대를 꼼짝 못하게 하고 그대에게 복수를 퍼부을 작정이요."라고 잔인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틴 목사는 여전히 담대하게 "사탄아, 네가 나에게 복수를 퍼붓기 전에 우리 주님께서 나의 주위에 성령의 울타리를 두르고 계시는 것이 보이질 않느냐?" 이 담대한 말에 사탄은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고 한탄하면서 물러가고 오스틴 목사는 평안히 임종을 맞아 하늘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딥 목사와 같이 오직 담대히 주님의 이름만 의지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31:6)
인생의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삶은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합니다.
찰스 스펄전이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차를 타고 템즈 강다리 위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템즈 강의 작은 물고기가 아닐까? 내가 이 물을 다 마셔버려서 템즈 강이 다 말라 버리면 어떡하지?' 그때 하나님이 그 작은 물고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마음껏 들여 마셔라, 작은 물고기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애굽이 통치하던 시대의 작은 새앙쥐가 아닐까? 내가 풍년이 들었을 때, 그 곡식을 이 새앙쥐가 조금씩 먹는데 이거 내가 다 먹어서 이 곡간이 텅텅 비면 어떡하지?' 그때 요셉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껏 먹어라. 이 작은 새앙쥐야. " 문득 '내가 등산하는 한 사람의 등산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의 공기가 너무 좋은데, 내가 호흡하다가 다 마셔 버려서 공기가 고갈되면 어떡하지?' 그때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껏 다 들여 마셔라, 작은 인간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우리 인생이 피곤하지만 하나님이 그때마다 우리의 하늘을 열어 주신다면 일평생 능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자발적으로 말입니다. 이 얼마나 크신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한다 해도 찬송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쌓아 놓으시고 잔치를 배설하시고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주님께 예비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 1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입만 넓게 열면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있어서 약속을 의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온전히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안에는 의로움만 있고 신실함만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 저희 가족을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영원히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 크신 은총을 잊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져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게 하옵소서. 하루 일과 중 하나님을 향하여 솟아나는 새 노래가 끊이지 않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환난 중에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시고 하나님께로 피하게 하소서. 세상의 허탄한 것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주의 손을 의지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고, 복된 하루되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