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시32:1-11 |
---|---|
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복 있는 사람
본문 시편32편 1- 11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세상에서 복 있는 자는 물질이 많은 자들입니까? 출세한 자들입니까? 많은 세월 건강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자들입니까? 그리고 가난과 질병과 함께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불행한 자들입니까? 사람들은 세상적인 잣대로 복 있는 자와 복을 받지 못한 자들을 구분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복 있는 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복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 1- 6)
본문 시편 32편 1- 2절을 보면 “복이 있도다”란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복있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겸손히 받고자 합니다.
1. 누가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1) 복 있는 사람은 사죄 받은 자입니다(1-5절).
오늘 본문 시편 32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유명한 부흥사 코리 텐 붐 여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을 숨겨 주었다는 죄목으로 독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노동수용소에 갇혔던 여사는 구사일생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전쟁 후 그녀가 복음을 전하려 다닐 때 성령이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역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독일로 갔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강단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데 그곳에는 바로 그녀가 노동수용소에 있을 때 악명 높던 감독이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그녀의 언니도 목숨을 잃었던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 악수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의 평화와 용서가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고 죄 용서함을 받고 주님 앞에 나왔다는 그 사람의 고백을 들으면서 독일 사람에 대한 원한이 가슴 속에서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오늘은 3월 1일입니다. 삼일절을 지내면서 일본인에 대한 용서를 십자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불쌍한 일본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여기서 “사함을 얻고”란 말씀은 ‘치워버린 바 되다’는 의미고 ‘가리움을 받음’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눈에도 보이지 않도록 되다’는 의미입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다 치워버린바 된 사람이란 말씀입니다. 집에 아이들이 셋이다 보니 지저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장모님과 처제가 와서 집을 깨끗이 치워주셨는데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제가 보고 놀랬습니다. 그런데 하나 치워지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집 바깥에 있는 쓰레기통 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월요일 오전에 쓰레기차가 와서 쓰레기를 가지고 간 후 물로 다 깨끗이 씻고 업어놓고 좀 말렸습니다. 그랬더니 냄새도 안 나는 것 같고 그 정도면 참 깨끗해 졌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쓰레기통 냄새처럼 썩어져 가는 것들, 참으로 냄새나는 죄악들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어내야 하는 것도 알지만 회개치 아니한 죄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어내지 못하므로 고민하는 각자의 죄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도 알면서 회개가 안 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답답해 할 때도 많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회개조차도 하나님 의 은혜가 없이는 안되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죄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죄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인정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렇지 아니할 때 우리는 다윗처럼 종일 신음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3절) 죄를 고백하지 아니했을 때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다윗은 종일 신음하므로 뼈까지 쇠하였겠습니까? 우리는 상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독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속에 가두어 두면, 그것은, 거기서 우리 속에 생명을 소멸시킵니다.
다윗은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허물의 사함을 얻은 자’라고 칭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복 있는 허물 곧 죄성이 없는 사람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이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한 것이라 할 때 다윗은 지금 이 땅에 죄 없는 사람은 없음을 전재한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의 사함이란 허물이란 인간의 타고난 죄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기서 ‘허물의 사함을 얻었다’는 말은 아무런 죄의 대가도 치르지 않고 용서를 받은 것을 말합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법률적 판결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 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 안에는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남으로부터 죄 속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원죄의 굴레를 타고 난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시14:1, 2) 하였으며 다시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시5:9)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 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시36:1)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죄로부터 벗어난 의인의 신분적 변화를 설명하여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 자유케 되었다”(롬7:2,3)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허물의 사함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2) 복 있는 사람은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입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특별한 신학적인 의미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죄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죄가 가리워진 상태를 언급한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라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타고날 때부터 죄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의인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짐승을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죄를 속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스스로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죄를 속한 사람들도 아직 육신 된 죄의 속성을 갖고 있음에도 죄의 가리움을 받아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덮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용서 받은 의인인 것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4)
(3) 복 있는 사람은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입니다.
다윗은 2절에서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의 중심을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솔직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고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가룟 유다를 알고 있습니다. 최근 가룟 유다 복음이라는 고문서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가룟 유다가 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자들이 가룟 유다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쓴 이단 문서입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와 같이 죄 중에서 피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죄 속으로 다시 돌아 간 사람들이 받을 고통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향하여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이라’(유1:13)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잠2:22)
(4) 복 있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는 자입니다.
네 번째로 다윗은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최종적인 판단을 의미하며 또한 의인의 믿음의 연속성을 뜻한 것입니다. 정죄란 율법적 용어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롬7:7)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 할 때 세상에는 정죄를 판단할 사람도 있을 수 없고 또 정죄의 기준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죄를 정죄하는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다 한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판단되는 판결입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정죄를 받는 일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과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을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방들이 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계11:18)라고 기록하였으며 그 후에 있을 심판에 대하여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는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5)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5) 복 있는 사람은 경건한 자입니다(6-9절).
본문 6절을 읽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북아프리카를 침공했을 때, 영국군은 결정적인 패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물이 없어서 바닷물을 끌어 급수전 시험을 하던 중요한 진지마저 빼앗겼고, 독일군의 신무기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투는 이미 결판이 난 듯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왕을 비롯한 관리들과 국민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은 예기치 못한 데서 역전되었습니다. 사막에서 전투를 하느라고 목이 말랐던 독일군은 영국군의 진지에 있는 급수전을 보자 무턱대고 물을 마셔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바닷물을 잔뜩 마신 독일 병사들의 몸이 성했겠습니까? 결국 막강하다는 독일군은 영국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기에 처한 순간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좋은 기회입니다. 그때 바람직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조치하시는 일의 결말은 기도한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위기의 순간에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합시다.
하나님 보시기에 복 있는 사람은 경건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경건한 자는 누구입니까? 과연 경건한 자는 죄를 한 번도 짖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요? 그것은 아닙니다. 경건한 자란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므로 사죄함을 받는 자인 것입니다. 좀 더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 곧 “의인”을 가리킵니다. 이 경건한 자는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의 기회를 포착하여 주님께 기도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기도의 기회란 다윗에게 있어서는 3-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회개치 아니하고 있을 때를 가리킵니다. 즉, 회개치 아니하고 있는 다윗에게 주님의 손이 그를 누르고 있었을 때가 바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란 말입니다. 이 때에 우리는 다윗처럼 우리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주님을 만날만한 회개의 기도 기회 때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을 때 어떠한 결과가 있었습니까? 다시 말하면, 기도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도 응답은 우리가 이미 묵상했던 것처럼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1-2절). 그 다음에 다윗이 받은 기도 응답은 환난 중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6절).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난 중에도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기도응답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7절)”.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젠 하나님께서 그의 은신처가 되셔서 환난 날에 도움을 받을 것이기에 다윗은 하나님께 찬양할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을 만날 기회를 타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토설치 아니하므로 주님의 손이 나를 누르실 그 때가 바로 주님을 만날 기회인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는 주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기도 응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내가 처한 환난 가운데서도 구원을 받으므로 은신처가 되시는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이것은 경건한 믿음을 지키며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성도들에게 내리시는 주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주에 대한 잘못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판단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의 용서는 단 한번으로 족합니다. 이제 우리는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에 얽히지 않도록 의인의 길을 배워야 하고 주의 훈계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말씀이며 또 보혜사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여기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라는 말씀은 강제로 지배하지 않으면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할 죄가 있을 때에 주님께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강제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며 회개하지 않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너희는 짐승같이 행하지 말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지 말라 한 것입니다.
말은 달려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피를 보면 볼수록 멈추지 않고 달려 나아갑니다. 우리의 육체의 속성은 말과 같이 자기의 필요를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달려 나갑니다. 마치 브레이크 끊어진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입에 자갈을 물려 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 행보를 멈추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육체는 나귀와 같이 나아가지 않으려는 고집을 갖고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알고서도 나아가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완강히 버티려 합니다. 그러므로 나귀의 입에 굴레를 씌워 두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무엇을 하려 애를 쓰면 쓸수록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른 척 하시는 하나님이 야속하여 원망을 하기도 하고 결국은 잘못된 방법까지도 사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합당한 것인지 화가 될 것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한참 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이 잘 되지 않은 것이 복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말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 나갔다면 나는 실패의 늪에서 흐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인에게 슬픔이 많으며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두를 것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그리고 어떤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까? 연약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돕고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구제에 힘쓰는 경건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6)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입니다(10-11절).
본문 10절을 보면 성경은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회개치 아니하는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다윗은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하는 것을 우리는 8절 말씀에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다윗이 무엇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다윗은 친히 자기의 회개를 통하여 사죄의 행복을 체험한 후로 남에게 회개를 권면할 용기를 가진 것입니다(시51:13).
다윗이 회개를 권면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 다윗은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여기서 “의인들”과 “정직한 너희”는 회개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회개자 들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개를 하였다면 죄 사함을 받은 자로써 또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로써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여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의인은 허물의 사함과 죄에서 가리움을 받고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한 마음입니다. 또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뻐하며 즐거움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12:2)
죄 사함을 받은 의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11: 28)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은혜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죄를 고백케 하십니다.
3절에서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음같이 되었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죄를 품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한 사람들 곧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에서 가리움을 받은 복 받은 사람들에게 엎드려서 절을 받으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모가 금한 일을 하게 되면 죄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입을 다물고 어떻게 해서라도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감추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식의 죄를 보고 덮어 줄 부모는 없습니다.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일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부하의 아내를 범하여 임신케 하고도 부족하여 그녀의 임신을 남편에게 돌리려 하였으며 끝내는 그 남편을 죽음으로 내어 몰았습니다. 이처럼 죄는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악한 것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이처럼 중한 죄를 짓고서도 묵묵히 모른척하고 지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는 사람의 양심을 마비시켜 하나님으로부터 격리 시킵니다. 결국 주께서 죄의 고통을 더하기 전까지는 잘못을 회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된 자녀로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다시 죄인 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다윗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스스로 자복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주 앞에 죄를 고백함에 있어서도 강한 의지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죄를 고백할 때 조금도 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의 죄를 모르고 계심이 아니라 우리의 선한 양심이 주를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토하도록 역사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돕기 위해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선물입니까?
바울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8:20) 하였으며 다시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증거하였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나를 누르시는 주님의 손’을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여기서 ‘누른다’는 말의 히브리어 직역은 ‘무겁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있지 아니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한 후 마음이 무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을 볼 때에 너무나 죄를 가볍게 여기다 보니 마음에 무거움도 별로 없고 심리적 고통도 들한 제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 다윗처럼 죄를 고백하지 아니할 때 주님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는 은혜를 사모할 필요가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있다가 주님의 손이 그를 눌렀을 때 본문 5절을 보면 자기의 죄를 더 이상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결국은 들춰내셔서 자복하며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그러면 죄를 자복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비행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 앞에 체면이나 세우려고 사람의 눈가림이니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그만큼 자기 죄를 진실히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그 태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복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실패케 하지 않으시며 헛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복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절에 근거해서 다시 말한다면, 우리는 마음에 간사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는 죄를 가리우지 않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인 것입니다. 즉, 죄를 죄로 간주되지 않음을 받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죄로 간주되지 않는 사죄함을 받은 자는 복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로마서 4장6절을 보면 행복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이를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시간을 잃지 말라고 경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는 아무 값없이 은혜를 따라 죄사함을 받아 의인이 되었지만 다시는 죄에 얽히지 않기 위해 온전한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복음서에는 성전에 기도하는 두 사람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으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였고 세리는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은 죄인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돌아갔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성도의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행위의 의로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든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할 때마다 우리의 죄는 가리움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하여 우리는 영원히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시골의 어느 작은 교회에 70세가 넘은 한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열심인지 10Km나 떨어진 교회를 새벽 예배조차 빠짐없이 매 시간마다 참석했습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성경책은 강대상용의 큰 성경책으로 이것을 매일 등에 지고 다니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이 할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딱해 보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 그리 무거운 성경을 들고 다니십니까? 좀 작은 성경으로 바꾸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죄를 지고 다니는 것 보다는 훨씬 가볍지요. 젊었을 땐 죄의 짐을 지고 다녔으나 이젠 하나님의 말씀을 지고 다니니 제겐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 28)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전에 말씀을 들음으로써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자라게 되고(롬 10:17) 말씀을 들음으로써 깨달음이 옵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범사의 형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우리 신앙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신28:1-5)
성도여러분! 힘써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눈과 귀에서 마음으로 가는 통로에서 막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에서 입술과 손끝과 발끝으로 가는 통로에서 막히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 보십시오. 이런 태도와 삶처럼 우리들에게 은총이 넘치는 태도와 삶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더욱 말씀 중심적으로 사는 축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성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셔서, 큰일을 행하시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하며, 자손의 복과 천국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복의 근원이 되신 주님,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형통하여 창대함으로써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입술을 열어 주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며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시고 정직하고 근면하게 살도록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을 누리며 살게 해주소서. 불신자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이 전파되어 잘못을 뉘우칠 수 있게 하소서. 위기의 순간에 주님만을 신뢰하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