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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마2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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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백소영 교수 |
| 참고 : | 새길교회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하나님 나라의 1데나리온
(마태 20:1-16)
2011년 1월 23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백소영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 HK연구교수)
예수는 소문난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고 감칠맛을 지닌 예수의 이야기는 언제나 수많은 군중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이야기, 즉 내러티브(narrative)가 가진 힘을 십분 사용한 듯합니다. 특히 비유를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비유적 교수법’은 사실 예수가 창안한 방법은 아니었죠. 유대 랍비들은 전통적으로 “A는 마치 B와 같다.” 라는 비유법을 교수법으로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A는 B다”라고 가르치는 것과 “A는 마치 B와 같다고 할까?”라고 설명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학습태도와 이후 두뇌활동에 분명히 다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전자가 상당히 수동적인 자세로 정보를 주입하고 들은 것 이상의 생각을 하려하지 않는다면, 후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즉 A와 B의 연관성, 유사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 스스로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유도하는 것, 열린 질문으로 초청하는 것이 바로 비유적 교수법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담 예수의 비유법은 오늘의 대학 강단에서도 통할까?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저는 그런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아마도 강의초반, 어쩌면 강의 내내 상당한 불만에 접해야 할 거라 예상됩니다. 마태복음에서만 보더라도,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마태 13: 24)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13: 31)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마태 13: 44)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마태 13: 45)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으니”(마태 13: 47)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태 18: 23) 이렇게만 말하고 사라지는 교수가 있다면 분명 좋은 강의평가를 받지 못 할 겁니다. 확실한 답, 그것도 오직 하나의 정답만을 골라야 점수를 주는 교육제도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는 동안 학생들은 “해석의 끝이 열려있는 비유”를 불편해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아, 그래서 천국이 정확히 어떤 거라는 걸까?” “저 교수, 자기도 모르나봐” 아마 학생들은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학기말 강의평가 란에 부정적 언어로 분풀이를 할지도 모르죠.
예수 시대의 군중들도 비유로 말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예수가 의도한 깊이와 폭까지 이해했을 지 의문이긴 합니다. 그의 제자들도 헛다리를 짚는 일이 종종 있어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열려있음’이 가져오는 상상력의 힘(!)은 분명히 큽니다.
“천국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는 아주 다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데... 하나님의 뜻은 다름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공평하게, 평화롭게, 서로 섬기고 나누며 서로를 살리고 건설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구약의 희년법에 나타난 기본 정신이 그것이었다.”
이렇게 명료하게 풀어서 설명한다면 명료성을 덕목으로 여기는 현대의 학습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죠. 시험을 볼 요량이라면 “희년법에 밑줄 쫙~ 그으세요!” 하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고 나면 그 뿐입니다. 듣는 청중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입니다. 아니면 의미도 모른 채 달달 외우거나요. 늘 들려지는 “아주 훌륭하고 좋은 말씀”일 뿐 자신의 일상, 자신의 삶의 자세와는 거리가 먼 언어, 고상하고 도덕적인 표현, 그래서 생명력은 없는 “죽은 메시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끝을 열어놓은, 생각의 포문을 열어놓은 비유”는 듣는 이들에게 숙제를 안겨줍니다. “마치 ~와 같다.”라는 말을 들은 청중은 그 연관성과 유사성을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 질문이란 것을 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천국이 왜 ‘좋은 씨 뿌리는 농부’나 ‘진주를 찾는 장사’ ‘종과 회계하려는 임금’과 같다는 것인지, 천국은 왜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겨자씨 한 알’과 같고 ‘바다에 친 그물’과 같다는 것인지, 예수의 비유는 이렇게 듣는 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많이 묻고 많이 기도하고 많이 생각한 사람에게 더 깊이 더 심오하게 주어지겠지요. 답의 깊이뿐만이 아니라, 답의 내용도 각기 다르게 해석되거나 적용될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위험성이 있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다양성이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창조적 다양성이라 그리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답이 하나인 곳에 발전이나 성장은 없으니까요.
또 하나 예수의 ‘이야기’가 가진 특징은, 그 소재가 언제나 군중들의 일상, 아주 가깝고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소재를 찾았기 때문에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 한 알의 비유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도시생활에 익숙한 우리에게나 낯선 비유이지, 예수 당시의 군중들에게는 늘 접하는 일상이었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를 비유의 소재로 가져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예수의 설교는 때문에 언제나 흡입력이 있었고 매혹적이었습니다. 서둘러 씨를 뿌리고 오느라 마음과 몸이 바빴던 농부들이 허겁지겁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둘러앉자마자 예수가 “천국은 마치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리는 사람과 같다”고 했을 때,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방금 자신들이 하고 온 행위, 그것이 천국과 같다니요.
얼마 전 30-40대 기혼여신도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예수께 배운 일상에서 끌어온 이야기의 힘을 실험해 보았습니다. “<시크릿 가든>에서 오스카가 그랬잖아요? 오빠, 알고 보면 쉬운 남자야! 하나님 나라의 질서도 마치 그와 같습니다. 한류스타처럼 멀고 어려운 존재 같지만, 알고 보면 아주 쉽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강사와 청중은 2011년 1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의 시공간을 가진 덕분에, 단 1분 만에 서로 공감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종영 후에도 그 열기가 식지 않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린 드라마이거든요. 특히 30-40대 전업주부들, 즉 낭만적 사랑의 환상 덕분에 일도 직업도 자기성취도 다 포기하고 오로지 사랑을 택한 지 어언 십 수 년... 이제 남은 것이라곤 일상이 되어버린 가사와 육아, 가족이 되어버려 무덤덤한 남편! 그녀들에게 ‘길라임’과 ‘김주원’은 ‘되찾고 싶은 청춘’이요 ‘실재이길 바라는 꿈’이거든요. 그 어떤 다른 이야기보다 <시크릿 가든>의 인물이나 이야기에서 접점을 찾아 시작한 그 강의는 이후 집중력이 아주 좋아 특강을 진행하기 휠씬 수월했습니다.
바로 이 두 특징 즉, 상상력을 여는 ‘비유’와 일상으로부터 끌어온 ‘이야기’로 공감을 얻는 힘에 초점을 맞추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를 읽어보려 합니다.
2
오늘 본문(마태복음 20: 1-16)에서 예수는 천국을 마치, 포도원 일을 위해 품꾼을 고용한 주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전 본문을 낭독해 주셨으므로 다시 반복하여 읽지는 않겠습니다만 주요한 줄거리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넓은 포도 농장을 가진 주인이 일용직 노동자를 구하러 노동시장에 나간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아마도 새벽 5시 전후로) 한 데나리온에 합의를 보고 품꾼들을 고용해 포도원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약 4그램 정도의 로마시대 은화였습니다. 직업군인이나 일용직 품꾼들의 하루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로 환산하면, 7만 원 혹은 8만 원 정도가 아니겠나, 그리 생각됩니다. 건축 현장이나 힘을 많이 써야하는 노동현장에서 건장한 남자 노동자의 일당이 요즘 그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아침 아홉 시 즈음 또 다시 노동시장에 나갔습니다. 성서본문은 일을 시켜보니 먼저 온 일꾼들이 일을 잘 못했다거나, 아니면 일꾼이 더 필요하여 시장에 나갔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주인은 그저 나갔고 해가 높도록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 품꾼으로 고용했습니다. 이번엔 한 데나리온이라는 구체적인 임금을 이야기하지 않고 ‘상당하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적당한 품삯” 영어로는 “whatever is right”(KJV)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하루 일당을 쳐주기엔 늦은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주인은 정오, 오후 세 시쯤 같은 말을 하고 품꾼을 샀습니다. 심지어 오후 다섯 시, 즉 이제는 파장 무렵의 노동시장에 나가 그 때까지 서 있던 사람들까지 포도원의 품꾼으로 고용했습니다.
그러고 저녁이 되어 하루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가장 늦게 온 사람들, 그러니까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일을 하기 시작했던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맨 처음 새벽부터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슬그머니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이라면, 하루 종일 일한 자신들은 분명 더 받을 거라는 예상이었습니다. 상당히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그들의 기대는 정당해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주인은 이후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새벽부터 일한 그들에게조차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지불했습니다. 드디어 불만은 터졌고 이들은 주인에게 투덜거렸습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부당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이 분명 한 데나리온에 합의를 하고 일하기로 결정했음을, 그리고 주인은 그 돈을 지불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들과 계약위반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고 그 주인은 덧붙입니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의 눈에 거슬리오?”
거기까지도 충분이 청중의 의아함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기이건만, 예수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해 버립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다른 고대 사본에는 다음의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 우리나라 개역성서와 표준 새번역은 이 뒷부분을 생략했습니다만, 킹 제임스 버전에는 “For many are called, but few chosen."을 덧붙였습니다.
복음주의적 목회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의 경우 이러한 주인의 행동과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상당히 영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새벽부터 일을 한 일꾼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일찌감치 받아 그의 뜻대로 성실히 살아간 유대인들을 뜻한다. 이후 오전 아홉시, 정오, 세 시, 다섯 시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모태신앙 기독교인을 선두로 각각 복음을 접한 시기에 따라 상대적으로 뒤늦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된 시기는 각기 달라도 그러나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영적 메시지로 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즉 율법주의적 태도로 자신들의 먼저됨을 자랑하는 사람들보다 은혜에 자복하고 낮은 자세로 임하는 회심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높임을 받는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하지만 저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일단 예수가 복음서에서 구원을 사후적 의미의 영적 문제로 사용했는지, 그리고 그 맥락이 과연 자신을 구주로 영접하는 문제와 결부시켰는지 물어보면 답은 회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천국 비유는 대부분 삶의 질서, 그것도 현재적 삶의 질서에 관계된 것이었기에 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의 청중 한 사람이 되어 상상력을 발휘하여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 주인은 기왕 다 한 데나리온씩 줄 거, 일찌감치 아예 다 불러다 일을 시킬 일이지, 왜 찔끔찔끔... 그리 일꾼들을 불러 들였을까? 심보가 특이한 주인이라면 굳이 예수가 그런 주인을 천국 비유에 끌어들였을까?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질문은, 해가 높도록 혹은 인력시장이 거의 문을 닫을 시간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찬찬히 곱씹으며 읽지 않으면 이 노동자들은 자칫 게으른 사람들, 삶의 목적이 없이 빈둥거리는 한량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후 다섯 시에 나가 그들에게 던진 주인의 질문, 그리고 그들의 대답에 집중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저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되는바 인력시장이 열리자마자 새벽 일찌감치 품꾼으로 뽑혀 가는 사람들은 젊고 건장하고 튼튼한 사람들일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팔고 있는 것은 노동력이었으니까요. 일꾼을 구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날 하루 가장 많은 량의 노동, 혹은 가장 효율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고르겠죠. 만약 그 일이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일용직이라면 품꾼들의 이력을 본 뒤 결정할 것입니다. 결국 시장 문을 닫기 한 시간 전까지 그 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늙고 병들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사람들일 확률이 큽니다. 다 뽑혀 가고 마지막에 남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들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던 까닭은 그들 자신 혹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할 벌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겠지요.
예수 당시에도 이런 일은 아주 구체적인 민중들의 일상이었을 겁니다. 로마의 식민지배, 유대제사장과 지주들의 이중적 침탈을 매일 겪고 있던 그들 중에 변변한 땅을 가지고 있거나 장사 밑천을 두둑하게 가진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겠습니까? 분명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씩,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한 데나리온’은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최소한의 생계,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만큼 먹고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을 만큼의 거주가 유지되도록 하는 최소비용이었을 겁니다. 그 최소비용은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벌기위한 일자리는 유한하고 때문에 줄 지워지고 평가받는 사람들. 가장 빨리, 가장 많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뽑혀 간 뒤에, 남아있던 사람들. 오전 아홉시의 ‘2등급 인간’, 정오의 ‘3등급 인간’, 오후 세 시의 ‘4등급 인간.’ 그리고 오후 다섯 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도 최소한의 생계비용은 필요했을 ‘최하위 등급의 인간’들을,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 일꾼으로 초청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인간에게 등급을 매기는가?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 시대나 우리 시대나 현실이 그러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우만 1등급, 2등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그리 등급을 매겨 필요가치를 따지는 세상입니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단어 중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말인 즉 “남아도는 인간” “아무도 필요하다 불러주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2008년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던 『잉여인간 안나』라는 디스토피아적 책을 보면, 사람을 두 부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합법적 인간과 잉여인간! 잉여인간은 조용히, 보이지 않게, 그러나 부지런하게 합법적 인간의 편리한 삶을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며 그렇게 배경으로 살아가도록 요청됩니다. 2140년 영국을 상상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대한민국의 삶에서 우리는 이와 같이 ‘필요하다 인정해주지 않는 인간’, ‘인간의 대접을 해주지 않는 인간’을 수없이 만나고 삽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최근 한 데나리온이 자꾸 머릿속에, 가슴속에서 떠나질 않았던 한 사건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한 대학에서 집단해고를 당하게 된 미화원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직종이든 이제는 평생고용이 보장되는 그런 안정된 직장은 없는 세상이긴 합니다. 고용유용성이라는 것이 말이 좋아 유용성이지 실은 언제든지 해고하고 대체할 수 있는 유용성을 의미하는 것인 줄 우리는 다 압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닌데, 마치 기계부품이 대체되듯 더 젊고, 더 기능 좋은, 더 빨리 일하는, 더 많이 일하는, 그리고 더 싸게 일하는 인력으로 대체되는 경험을 직접 겪기도, 혹은 가까이서 보기도 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 청소부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한 달에 67만원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어느 미디어에서는 75만원이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최소한의 생계비용 ‘한 데나리온’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입니다. ‘아, 노동 강도가 높은 직종의 경우 하루 7, 8만원이라는 거지’ 하고 따지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턱도 없이 부족한 임금에 점심 값을 해결할 길 막막한 이분들이 학교의 폐휴지를 모아 그걸 팔아 점심값을 충당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폐휴지도 학교 것이라며 이를 못 팔게 하였답니다. 그리고 대신 식대로 월 9천원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쌀을 사서 직접 지어먹으라면서요. 그걸 삼십 일로 나누어 보면 하루에 삼백 원. 하루 세 끼 꼬박 먹으면서 초등학교 제 아이가 매일 챙겨가는 하루 용돈만도 못한 돈입니다. 이에 항의를 했다고, 학교는 이들을 고용했던 용역회사와 계약을 해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빚어진 갈등으로 한동안 사회가 술렁였습니다. 자본주의적 세상을 닮은 학교에 대한 비난은 물론이고 교직원이나 학생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글과 행동이 생겨났습니다.
어느 기사의 배경으로 올라온 사진을 보니, 한 학생이 학교 본관 로비에 붙였다는 작은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미화 노동자분들의 생활임금을 보장해 주세요.” 생활임금! 저는 그 단어가 ‘한 데나리온’으로 읽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월 67만원에 하루 식대 300원으로도 일하겠다고, 그리 합의하고 미화원의 직업을 선택할 잠재적 고용인들이 많은데, 왜 굳이 이 조건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고용하겠습니까? 자본주의 논리에 기반한 노동시장은 분명 더 싼 임금으로 일할 사람들을 선택할 것이고, 이는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으며 불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하겠지요.
하지만 요즘 나날이 뛰는 생필품 물가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식대 300원은 그분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혹 학교 식당 밥을 미화원들에게는 그 가격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한다면 모를까. 아니 그럴 거면 아예 식대 9천원 주지 말고 미화원들께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자유롭게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식권을 지급하는 것이 차라리 더 인간적인 대우였을 겁니다. 미화원 아주머니께 막말로 대한 여대생의 동영상이 올라와 한참 떠들썩했지만,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학교가 미화원에게 최소한의 인간 예우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뭘 보고 배웠을까요?
우리 사회가 한 데나리온,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을 일하는 모두에게 보장할 수 있는 그런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 비유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되는 나라겠지요?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겠지요? 그렇다면 선한 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 생계비용을 보장하는 그런 질서를 원하시겠지요? 정치적인 이야기는 관심도 적고 잘 모르는 부분입니다만, 얼마 전 뉴스를 보니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자는 의견이 민주당 내에서도 소수 의견이라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선거 시 지지표를 염두에 두어야하는 정당들이야 쉽게 말하기 힘든 부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한 데나리온 운동’ 같은 것을 전개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믿는 기업인들끼리 돈 불리는 ‘크리스천 은행’ 같은 것 만드는 일이 무에 그리 중요합니까? 기독교인이 은행을 만들고, 기업을 만든다면 포도원 주인 같은 그런 은행이고 기업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어떠하든 신앙의 이름으로 최소한 ‘한 데나리온’은 보장하는 고용주들, 성실히 선하게 일하는 그 모든 노동자들이 적어도 하루 ‘한 데나리온’은 보장받을 수 있도록 돕는 ‘재정지원단체’ 같은 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왔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하루 7만원 잡고 삼십 일을 곱해보니 2백 10만원입니다. 사실 요즘 물가에 최소한의 가족 수를 세 명 잡아 볼 때 그 돈이면, 새 옷 사 입고 문화생활 즐길 만큼은 안 되어도 (아, 대학등록금 내야하는 자녀가 있으면 이도 못할 일입니다만), 빠듯하게 한 달 춥지 않고 배곯지 않고 약간씩은 절약해서 저축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에 비할 때 한 달에 67만 원이라니요. 식대가 300원 이라니요.
공산주의식으로 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든 임금을 다 평준화하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임금 차이를 너무나 벌려 놓았습니다. 이 문명이 정해놓은 가치의 척도는 ‘그의 노동이 얼마만큼의 이윤을 창출하는가’입니다. 때문에 CF하나 찍는 ‘노동’으로 5억, 10억 챙기는 일이 가능하겠지요. 이것 다 뜯어고치자면 섣불리 엄두가 나지 않을 대공사입니다. 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만, 오늘 이를 제안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다만 최소한 ‘한 데나리온’을 보장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아, 그런 단순노동에 무슨 돈을 그만큼 지불하나?” “내 일이 훨씬 더 어렵고 숙련된 일인데 임금차이는 당연한 일 아닌가?” “아쉬우면 전문능력을 키웠으면 될 일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이 없었으면 하는 소망이었습니다. 두려운 것은 이 임금을 행여 ‘공정하다’ 평가하는 신앙인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겁니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노동에 더 많은 임금을 주는 것이 정당하지!” 이렇게 세상의 논리를 따르면서요.
3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 수수께끼 같은, 읽는 이에 따라서는 확 기분도 상할만한 이 마지막 구절을 저는 이 맥락에서 풀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다니... 그럼 아침부터 뼈 빠지게 일한 사람들의 운명이 ‘나중됨’이란 말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의 ‘가난한 자 지향성’을 이해한다 해도 그런 뜻이라면 의롭지 못합니다. 정당하지 않습니다. 요즘 유행어로 ‘공정사회’ 아닙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 어느 사본에는 있고 어디는 없다는 이 뒷부분에서 저는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부름은 모두가 받았습니다. 새벽 다섯 시 팀부터 오후 다섯 시 팀까지, 그 노동시장에 있던 사람들이 다 포도원 주인의 부름을 받았지요. 하지만 ‘하루 한 데나리온’의 선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는 것을 듣게 되었을 때, 이를 ‘기쁜 소식’(희년의 소식, 복음)으로 알고 기뻐하고 감사했을 사람들, 그 행복함이 가장 컸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한 시간 일한, 가장 나중에 온 자들일 겁니다. 이들이 기뻐한 까닭은 겨우 한 시간 일하고 그 돈 다 받아서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하하, 저 사람들은 쌤통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나랑 똑같이 받다니.” 그런 심보에서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를 ‘필요하다고’ 불러 일을 시켜준 고마움도 큰데, 한 데나리온이면, 이 돈이면 집에 갈 때 한 손 가득 먹을거리를 사갈 수 있겠구나! 내일 아이의 학교 준비물도 사줄 수 있겠구나!” 하나님 나라는 이러하다는 것! 한 데나리온이 보장된 질서가 실현되는 순간 뛸 듯이 기뻐하는 순서는 분명 가장 나중된 자가 가장 먼저, 가장 으뜸으로, 가장 절절히 기뻐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 많이 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더 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록 이 질서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기뻐하기는 더 더욱 힘들 일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이 질서를 받아들이는 가장 나중된 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영영 받아들일 수 없어서 택함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일입니다. 그 경우 첫째였던 사람들, 그들은 꼴찌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어서도 아니요, 그들의 능력이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약하고 병들고 경쟁력 없고 가난하고 뒤처진 사람들. 마지막 남은 그 사람들에게도 ‘꼭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음으로 인해, 그 질서를 기뻐할 수 없음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새벽부터 일한 일꾼으로 비교되는 이 시대의 ‘엄친아’ ‘엄친딸’들도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길은 있습니다. 오후 다섯 시 팀만큼이나 ‘한 데나리온’의 선포를 기뻐하면 됩니다. 그 질서의 실현을 복음이라 여기면 됩니다. 그 질서에 기꺼이 참여하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 예수의 삶과 메시지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최소한 ‘한 데나리온’이 보장되는 삶을 기뻐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행하는 한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첫째’일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모두가 ‘첫째’일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종으로 줄 지워져 평가되고 정리(해고)되지 않고, 횡으로 손잡고 나란히 함께 걸을 수 있는 나라, 그래서 모두가 ‘첫째’일 수 있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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