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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장윤재 교수............... 조회 수 2292 추천 수 0 2011.03.03 19: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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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5:1-6 
설교자 : 장윤재 교수 
참고 : 새길교회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15:1-6)

2011년 2월 20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장윤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조직신학)

 

  부족한 사람을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도 모두 안녕하셨는지요. 새길교회로 향하는 날은 늘 특별합니다. 저 자신도 정말 그동안 새 길을 살았는지, 믿음의 새 길을 걸었는지, 순례자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로마서 15장 1절에서 6절의 본문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라는 제목으로 잠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이거 얼마나 오래 쓸 수 있습니까?” 일본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이렇게 묻습니다. “이거 신제품인가요?”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꼭 이걸 물어본다고 합니다. “이 물건 진짠가요?” 얼마나 ‘가짜’에 속고 살았으면, 이렇게 ‘진짜’인지를 묻는 것이 다 생활화되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참’기름도 진짜, 순, 100%, 원조... 이런 말이 붙어야 조금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만 진짜인지를 묻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 주일날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한 우리들을 향해 이런 질문을 속으로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 진짜요?” “당신 진짜 크리스천이요?”

 

 책 선물 하려고 서점에 나가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서점가에서 인문학 분야 스테디셀러를 달리고 있는 책의 하나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지은『만들어진 신』(영어 원제 The God Delusion)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도킨스는『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과 같은 책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입니다. 그런데 7천권만 팔려도 대박이라는 인문학 출판시장에서, 이 책은 2007년 7월 중순에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4만 이상이 팔려나갔고, 그해 연말 40만권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이후 인문학 도서 최대의 돌풍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의 돈지갑을 흔쾌히 열게 한 이 두꺼운 책의 맨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저자는 가수 존 레넌(John Lennon)의 노랫말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한번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합니다. 그러면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이라크전쟁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도, 그리고 또 보스니아 인종청소도 없었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종교를 버리고 (그대로 인용하면)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무신론자가 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 책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요즘 우리사회에 ‘안티 기독교’라는 문화현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는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인데, 반기독교정서의 조직화 ․ 운동화 수위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마 22세기 한국 역사학자는 21세기 초 한국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 ‘안티 기독교’ 현상을 들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제가 가르치는 이화대학에서는 비기독교인 학생들 사이에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라는 우스개소리가 널리 유포되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하면, 첫째 ‘절대 혼자 식당에서 밥 먹지 않기’ (왜냐하면 약 15분 동안의 평균 식사시간 동안에 최소한 5명 정도의 전도자를 만난다고 합니다), 둘째 누가 다가와 ‘교회 나가시느냐’고 물으면 ‘네~’ 하고 대답하지 말고 ‘넵’하고 단호하게 말하기, 셋째 또 누군가 다가와 ‘같이 성경공부 해보지 않겠냐’고 물으면 ‘아니오’ 하고 대답하지 말고 ‘아니욥’ 하고 확실하게 거절하기 등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의 초대교회 모습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사도 베드로가 한번 입을 열어 설교하면 하루에 삼천 명씩이나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 이유가 44절에서 47절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대로 나누어 가지며,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또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느니라.” 성도들의 본이 되는 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서에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 ‘호감’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주십시오.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종교 호감도 조사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조사에서 종교 이미지 선호도는 개신교가 1위, 불교가 2위, 가톨릭이 3위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도에는 순위가 바뀌어 가톨릭이 1위, 불교는 그대로 2위, 개신교는 3위로 떨어졌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비호감도가 증가한 것입니다. 이러한 호감도의 변화는 실제 신도 수의 변화로도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2005년에 우리나라 정부의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전 10년간 우리나라 3대 종교 중에서 천주교 신자는 74.4%, 불교 신자는 3.9%가 증가한 반면, 개신교 신자만 1.6% 감소했다고 합니다. 이 땅에 전래된 이후 지난 120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성장의 가도만 달려온 한국의 개신교의 신도 수가 처음으로 줄었다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참 신기했던 것은 그 -1.6% 성장률을 실제 사람 수로 환산한 ‘14만 4천’ 명이었습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상징적인 숫자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4만 4천은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나오는 말세 때의 공중 ‘휴거’ 숫자입니다. 이번 한국 개신교인의 감소는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보내신 가히 ‘종말론적’ 메시지라고 보았습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을 설득하는데 논리나 말이 차지하는 부분은 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60% 이상은 첫인상의 호감도가 좌우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을 잘해도 첫인상이 왠지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문 3분의 2는 닫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아침 제 첫 인상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이미지가 갈수록 비호감이 되다보니, 아무리 담대히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외쳐도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 이제 교회에는 새로운 교인이 더 이상 생기지 않고 기존의 교인들이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수평이동합니다. 교회도 큰 교회는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는 부익부 빈인빈 현상에 시달립니다.

 

 그러면 한국 개신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왜 이렇게 나빠졌습니까? 오늘 아침, 말하기 힘들고 듣기 힘든 고언(苦言)이지만 회개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아픔을 감히 이야기해 봅니다. 우리의 현주소에 대한 뼈아픈 성찰 없이는 새로운 일이 안 열리지 않겠습니까. 그 중 첫 번째의 원인은 교회의 세습 문제라고 합니다. 성공한 제1세대 목사님들 일부가 자기 자식들에게 기업처럼 교회를 물려주었습니다. 사회적 질타를 맞자 맞바꾸기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자기교회는 친구 목사님 아들에게, 친구 목사님 교회는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보지 않고 아무개 목사의 교회로 생각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들의 결혼금지는 11세기까지만 해도 권장사항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속권력을 능가하는 절대적 권력을 가지게 되자, 가톨릭교회는 교권의 세습을 막기 위해 사제들의 독신을 의무화했던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제 한국 개신교회의 세습을 막기 위해서라면 신학생들도 독신을 서원해야 안수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르렀습니다.

 

 둘째, 교회의 물질적 세속화입니다. 교회가 대형화되었고 기업화되었으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속화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면 부자가 된다고 믿고 나가지만, 사람들은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말하는 교회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얻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시류와 정확히 일치하는 교회의 메시지에서 영적 희망과 위안을 얻지 못합니다.

 

 셋째, 도덕성의 위기입니다. 몇 년 전 신정아씨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정아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불려 다니던 서부지방검찰청사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TV 방송차량이 포진한 그 건물 앞을 지나다니며 당시 국민적 관심사와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신정아씨의 예일대 박사학위 위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서부지검 앞을 지나다니면서 개신교 목사로서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고 다녔습니다. 지금 한국에 가짜 미국박사 학위 소지자가 모두 968명이 있는데, 정말 믿기지 않지만 가짜 미국박사의 45%가 신학박사라고 합니다. 저는 가짜 박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개신교 목사로서 너무 부끄러워 서부지검 앞을 얼굴을 못 들고 다녔습니다. 가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님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니, 교인들의 학력이 높아져서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699불을 주고 박사학위증을 사 오신 목사님이 단상 위에서 교인들에게 ‘정직하게 사십시오’라고 설교하시면 과연 어느 교인들이 그 말대로 살겠습니까.

 

 넷째, 일부 교회들의 잘못된 단기 선교입니다. 몇 년 전 여름 서울의 한 유명한 교회는 전 세계 27개국 53개 도시로 무려 103개나 되는 단기 선교팀을 보내 ‘땅 밟기’ 선교를 시행했습니다. 가까운 봉은사에서도 일부 기독교인들의 땅 밟기 선교가 있었습니다. 땅만 밟고 와도 그 땅에 선교가 된다는 말인데, 예수님도 하시지 못한 일을 하겠다는 기이한 발상의 선교에 저는 그만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보낸 미장로교(PC-USA)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 유학중에 미장로교회의 각종 선교대회에 참석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life-long commitment"요 다른 하나는 "equal partnership"입니다. Life-long commitment, 그러니까 선교는 한 나라에 뼈를 묻는 ‘평생 헌신’이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근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가면 언더우드, 스트랜튼 등 우리보다 우리 땅을 더 사랑하고 여기에 뼈를 묻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equal partnership, 그러니까 선교는 문화적, 경제적, 복음적으로 우위인 자가 일방적으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과의 ‘평등한 동반자적 관계’ 속에서 함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사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선교는 입으로 잠시 가서 전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평생을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 아니겠습니다.

 

 ‘밥 퍼주는 시인’으로 알려진 최일도 목사님의 일화가 기억납니다. 잘 아시다시피, 속칭 청량이 588 굴다리 밑에서 노숙자와 행려자들에게 밥 먹이기 운동을 시작한 그는, 세간에 수행 잘 하고 계시는 가톨릭 수녀님을 ‘꼬득여’ 결혼한 개신교 목사님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이 분이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신학대학교에 강연을 하러 1호선 전철을 타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서서 가게 되었음에도 부구하고 하염없이 졸음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철이 흔들리는 대로 마구 흔들리며 한참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옆구리를 콱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깨보니 이마가 약간 벗겨지고 아주 깐깐하게 생긴 초로의 아저씨 한 분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무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더니 느닷없이 ‘예수 믿어!’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엉겁결에 최목사는 ‘나 목산데요’ 라고 말도 못하고 ‘네, 저 믿고 있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또 한 번 이렇게 한마디를 콱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졸지 말고 바로 믿어!’ 그 때 최일도 목사님은 자신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목사라는 것이 너무 창피해서 달리는 전철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는 거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습니다. ‘나 다시는 저렇게 입으로 예수를 증거 하지 않으리라! 나 다시는 저렇게 자신의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리라!’

 

 마지막 다섯째로, 한국 개신교가 비호감이 된 가장 큰 원인은 ‘종교가 생활화되지 못하고 실생활이 종교화되지 못한 것’입니다. 한 교계신문이 ‘기독교의 이미지에 대한 일반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일반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는 느낌을 가지는 이유 중 1위는 “교인들이 진실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34%)입니다. 그 다음 이유는 “교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11.8%)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큰 이유는 “타종교에 배타적이기 때문”[10.7%)입니다.) 1920년대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김활란 박사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혹자는 종교란 모든 실생활과의 관계를 떠나 자기 혼자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고 일요일에 예배당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이나 다른 방식으로 착취를 하다가도 주일에 양심에 아무 저촉도 없이 예배를 드린다. 그 원인은 종교생활이 실제화되지 못하고 실생활이 종교화되지 못한 까닭이다.”

 

 이처럼 종교가 생활이 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가 되지 못하니까, 즉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처럼 사는 것이 하나가 안 되니까,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인이란 토요일에 한 일을 일요일에 회개하고 월요일에 또 하려는 사람이다.” 저는 일요일에라도 한번 회개하는 것이 일주일에 한 번도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면 우리는 회개한 일을 월요일 또다시 반복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진정성(authenticity)’이 의심을 받기에, 세상이 교회에 등을 돌립니다.

 

 어느 도시에 목회를 잘 하시는 목사님이 있었답니다. 열심히 목회를 하니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그만 과로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콩팥 두개를 다 떼어내고 다른 사람의 것을 이식받아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기독교인의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으니 수많은 교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콩팥을 떼어주지 않겠나 싶어, 주일날 설교시간에 상황을 설명하고 콩팥을 한 떼어줄 사람 손을 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맨 앞에 앉으신 장로님들로부터 쭈뼛쭈뼛 손을 들더니 급기야 전 교인 1천 명이 다 손을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내가 목회를 잘못하진 않았어! 목사님은 너무나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1천 개의 콩팥은 다 필요가 없어서 목사님이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가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서 날릴테니 전 교인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중에 그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사람이 콩팥을 기증하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모두 눈을 감고 통성으로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루 종일 지나도 그 머리카락이 계속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만 하고 아무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글쎄 교인들 모두가 이렇게 통성으로 (바람을 불며) 기도하더랍니다. “주여 ~” “아멘 ~” “믿~습니다.” ... 요한계시록 3장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2백 년이 넘었습니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어 살아가던 이들에게 - 특히 여성들에게 -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았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가히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소개함으로써 급속히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요즘 극장가에서 관객수 1위를 달리고 있는 <조선명탐정>을 한번 보십시오. 기독교 전래 초기 왜 힘없고, 가난하고, 천대받던 노비들이 그 심한 박해 속에서도 이 종교에 빠져들었는지 잘 나옵니다. 철저한 계급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이라는 그 메시지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릎 쓰고 그 종교에 귀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의 이와 같은 변혁적이고 인습타파적인 특성들을 점차 상실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종교가 소종파적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는 평등적이고 변혁적이며 예언자적 특성을 지니다가도, 그 소종파가 점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한 사회에 무리 없는 안착을 시도할 때가 되면 초기의 특성들을 포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강한 현상유지적 성향을 가지게 되며, 변화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도전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는 성차별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한 교회여성단체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설문자 1천 명 중 51%가 청소 및 음식 만들기, 7.3%가 행사준비라고 응답했습니.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여성의 약 60%가 집안일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교회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항목에서 청소 및 음식 만들기를 택한 사람은 겨우 0.3%였다고 합니다. 또 언제부턴가 한국 개신교회는 지극히 배타적 신앙 행태를 강화해 왔고, 대형교회 목사들은 도덕적 타락과 권력 사유화의 길을 걸었으며, 개 교회들은 수평 이동을 통한 교회성장을 추구하면서, 교인들을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인 경쟁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점점 자신의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갔고, 교회 성장이 곧 복음 선포라는 환상 속에 살다가 최근에는 성장 자체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종교가 아니라 다수종교입니다. 주류종교입니다. 이제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risky)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인들과 달리,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변의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고 서슴없이 예수를 나의 ‘주’(Lord)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에 나가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회생활에 큰 보탬과 이득이 됩니다. 기독교는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좁은 문’이 아니라 가장 넓고 안전한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은 서서히 ‘일상적인’(routine) 일이 되어 갔습니다. 즉 매일 하는 판에 박힌 일과가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중년의 부부들에게 권태기라는 것이 찾아오듯이, 신앙의 감동도 사라져갔습니다. 이제 모두 제도교회의 안락함과 기득권 속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이란 토요일에 한 일을 일요일에 회개하고 월요일에 또 하려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 ‘메신저’(messenger) 때문에 ‘메시지’(message)가 거부당하는 것입니다.

 

실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종종 ‘예수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신학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당한 슬픈 예수를 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자리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이 메워왔습니다.

 

경애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로마서 15:5-6)고 권면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한 우리를 향해 오늘 아침 길거리의 사람들이 속으로 우리에게 물었던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가 던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진짜’인가? 우리의 믿음은 ‘진정성’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를 본받아 사는 참된 크리스천인가?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제 아이를 찾으러 갔다가 너무 좋아서 초등학교 벽에 붙어 있던 것을 메모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I hear and I forget (나는 듣고 잊어버립니다); I see and I remember (눈으로 보면 기억할 것입니다); I do and I understand (몸으로 살아보니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저는 믿습니다. 이 땅에 빛과 생명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 정말 알고 싶다면, 그의 구원의 복음이 무엇인지 정말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의 말씀대로 먼저 살아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늘 품고 사는 예화를 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고 싶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을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습니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What is your name?"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My name is Christian." 그 때 그는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준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는 총탄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사지 한복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나가게 만든 그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목숨을 건 이름이었습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진짜’ 크리스천이 적어서는 아니겠습니까.

 

경애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춥고 길었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옵니다. 2011년 새 봄, 우리 모두가 말과 입으로가 아니라 몸과 실천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참된 신앙인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 ‘예수 없는 예수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크고 화려한 예배당은 없어도, 높으신 목사님과 근엄한 장로님들은 없어도, 이렇게 ‘예수 있는 예수 교회’로 신앙을 살고 있는 새길교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이 민족에 산 소망이 비추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살려는 참된 크리스천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이 땅에 놀라운 사랑과 구원의 드라마를 펼쳐 가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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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0 룻기 은혜를 주소서! ..... 룻2:1-7  이정원 목사  2011-03-07 2087
4819 룻기 징계와 회복 ..... 룻1:15-22  이정원 목사  2011-03-07 2100
4818 룻기 올바른 결정 ..... 룻1:6-14  이정원 목사  2011-03-07 2074
4817 룻기 잘못된 선택 ..... 룻1:1-5  이정원 목사  2011-03-07 2355
4816 요한복음 나를 따르라 ..... 요21:18-25  이정원 목사  2011-03-07 2222
4815 요한복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요21:15-19  이정원 목사  2011-03-07 2367
4814 요한복음 어떻게 살 것인가? ..... 요21:1-14  이정원 목사  2011-03-07 2120
4813 요한복음 의심 많은 도마 ..... 요20:24-31  이정원 목사  2011-03-07 2909
4812 요한복음 너희를 보내노라 ..... 요20:19-23  이정원 목사  2011-03-07 1988
4811 요한복음 부활하신 예수님 ..... 요20:11-18  이정원 목사  2011-03-07 2437
4810 요한복음 빈 무덤 ..... 요20:1-10  이정원 목사  2011-03-07 2526
4809 요한복음 장사되신 예수님 ..... 요19:38-42  이정원 목사  2011-03-07 2276
4808 하박국 진정한 감사 ..... 합3:16-19  이정원 목사  2011-03-07 2223
4807 고린도전 성찬에 대한 합당한 자세 ..... 고전11:20-34  이정원 목사  2011-03-07 2101
4806 요한복음 다 이루었다! ..... 요19:28-37  이정원 목사  2011-03-07 2551
4805 요한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 요19:17-27  이정원 목사  2011-03-07 3517
4804 요한복음 빌라도의 선택 ..... 요19:7-16  이정원 목사  2011-03-07 2594
4803 요한복음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 요19:1-6  이정원 목사  2011-03-07 2109
4802 마태복음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17:1-9  정용섭 목사  2011-03-07 2547
4801 고린도전 영적 자유의 토대 고전4:1-5  정용섭 목사  2011-03-07 2387
4800 마태복음 원수사랑, 가능한가? 마5:38-48  정용섭 목사  2011-03-07 2727
4799 신명기 하나님이 생명이다 신30:15-20  정용섭 목사  2011-03-07 2551
4798 마태복음 가난한 사람들 마5:1-12  정용섭 목사  2011-03-07 2347
4797 시편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시34:1-22  한태완 목사  2011-03-07 2660
4796 고린도전 복음의 능력을 가지자 고전2:4-5  강종수 목사  2011-03-06 2116
4795 창세기 사닥다리를 타는 곡예사 인생 창28:10-22  하원양 목사  2011-03-06 2175
4794 마태복음 가치 있는 일에 힘쓰라 [1] 마13:44  한태완 목사  2011-03-05 2796
4793 시편 여호와를 즐겁게 찬양하라 시33:1-22  한태완 목사  2011-03-05 2567
4792 시편 세상학교 시119:148  추응식 형제  2011-03-03 1901
» 로마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롬15:1-6  장윤재 교수  2011-03-03 2292
4790 창세기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 창1:26-27  이선근 형제  2011-03-03 2111
4789 민수기 인생은 미완성, 역사도 미완성, 그래도 희망을 가지며 민27:1-4  최만자 자매  2011-03-03 2186
4788 마태복음 하나님 나라의 1데나리온 마20:1-16  백소영 교수  2011-03-03 3176
4787 디모데후 십자가 그늘에서 -고난도 유익 딤후2:3-13  윤여성 형제  2011-03-03 2627
4786 마태복음 아빠(Abba)가 우리의 하나님 이라니 마6:5-13  한완상 형제  2011-03-03 2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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