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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33: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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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여호와를 즐겁게 찬양하라
본문: 시편 33: 1- 22
파릿츠 크라이슬러는 세계적인 바이올린의 대가입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뛰어나서 알파벳을 알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악보부터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에 대해 교만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됨은 결코 나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는 새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는 걸 보셨나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재능을 내 명예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나는 항상 새로운 소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이 크리이슬러가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역시 가진 바 재주를 다하여 하나님을 즐겁게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시편 111:10)
본 시편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과,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 나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자연과 관련해서 창조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계와 그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7, 8절) 또한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9- 12절) 하나님의 사랑과 권위가 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땅히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1절) 찬양하되 즐거움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보다는 못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지만 즐거워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발적이기에 힘들지 않으며 아무리 헌신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속에서는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다른 복은 필요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것만이 유일한 복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모든 수단과 기구를 이용하여 찬양하여야 합니다.
본문 2-3절에서는 수금(하아프)과 비파와 인간의 목소리를 언급합니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2절)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요즘은 경배와 찬양이 보편화됐지만 70, 80년대만 해도 예배당 안에서 피아노 외에 다른 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을 경망스럽게 여겼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 의하면 그것이 기타이든, 드럼이든, 전자올갠이든 그 어떤 악기든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라면 마땅히 빠짐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이런 악기들이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거나 하나님께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많은 악기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최고의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입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3절)
인간의 목소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가장 완벽한 악기입니다. 또한 목소리는 어느 곳이든 들고 갈 수 있는 악기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걸어가고 머무는 모든 곳에서 찬양이 넘치게 하십시오. 찬양하되 새 노래로 찬양하십시오. 새 노래는 신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늘 불러도 즐겁고 주의 은혜가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새 노래입니다. 아무리 새로 만든 곡일지라도 그 안에 은혜가 없으면 전혀 새 노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6- 9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6절) 세상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조의 6일 동안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10 번이나(창세기 1:3, 6, 9, 11, 14, 20, 22, 24, 26, 29) 울려 퍼졌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듯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을 그 입 기운으로 만드셨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흩어져 돌아다니던 바닷물을 모아 경계를 정하셨으며, 깊은 물은 하늘 곳간에 두시고 때를 따라 비와 이슬로 사용하십니다(7절). 천지가 충돌 없이 흩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9절) 태양이 동쪽에 떠오르는 것이나, 물질이 서로 잡아당기는 만유인력의 법칙 등 모든 자연법칙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신 바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4절)고 노래합니다. 자연법칙을 법칙이라 부르는 이유는 규칙적이고 어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자연법칙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또한 모든 정의의 원천입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5절)
민족과 국가의 헌법을 우선하는 것은 도덕법이나 자연법이고 이들 법보다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기에 세상의 법 중 정의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말씀은 차가운 진리가 아닙니다. 인자가 담긴 따뜻한 진리입니다. 그 사랑은 온 세상에 충만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이 마치 죄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부정적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세상에 충만한 것은 주의 진리요,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침투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이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를 두려워 마십시오. 세상과 연대하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은 우주 구석구석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고3 아들에게 대학에 합격만 하면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 아들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보따리를 쌓아 학교 기숙사로 떠나는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경을 한 권 주면서 "매일 쉬지 말고 읽어라.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빌립보서 4장을 꼭 읽도록 해라" 라고 말했더니 아들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4년 동안 읽지도 않은 채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장을 들고 나오는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아버지는 "너 내가 읽으라고 준 성경 어떻게 했니?"하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책장 어딘가에 있겠지요"하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성경을 찾아 빌립보서 4장19절을 읽어 보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그 날 밤, 편치 않은 마음으로 먼지 묻은 성경을 찾아 빌립보서 4장19절을 찾아 읽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는 말씀과 함께 봉투하나가 끼워 있었는데 그 봉투를 뜯어보니 "대학 합격을 축하한다"는 아버지의 글과 함께 자동차 교환권이 한 장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라면 4년 전에 자동차를 가질 수 있었는데 4년 간 그것을 모르고 지낸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증수표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성경은 읽고 듣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과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보증수표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읽고 듣고 믿고 행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시편 33편 6-9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는 이유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 하셨기 때문이고, 그의 계획은 영원히 변함없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셨고, 앞으로 행하실 일을 위해 찬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희랍사상의 형식을 빌려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말씀을 "로고스"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논리, 이성, 계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계시된 말씀이십니다. 이 계시된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장 2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복음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로마서 10장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이니라"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23절에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길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 하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스텐퍼드 호텔에서 방마다 성경을 놓아두었는데, 15년 간 단 한 권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어사전을 놓아두었더니 한 달 사이에 14권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호텔사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말에는 훔쳐 갈 정도로 관심이 많다"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먼지 속에 파묻혀 가는 성경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으나 죄로 어두어진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에서는 복음이 세상에 선포되지만 세상이 복음으로 받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지적한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빛은 복음으로 어두움은 죄로 비유되어 왔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의해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고 교회가 성장해 가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은 넓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세상적인 지식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얼마나 읽으셨습니까? 지금까지 완독을 못하신 분은 오늘부터 시작하여 완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열방과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10-17). 열방들은 자기가 최고인 냥 무력을 자랑하고 어리석은 계획들을 도모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시며 그들의 생각을 무효로 돌리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만이 성취되고 영원합니다(11절). 이사야 선지자의 놀라운 비전을 보라.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40:15) 거대한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제국도 하나님의 손에 비하면 물 한 방울과 먼지처럼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한다(16).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통의 물을 젓듯이 한 번 휘휘 저으면 세상이 요동을 친다. 결국 영영히 설 것은 하나님의 나라뿐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으로 자기 하나님을 삼으신 나라는 복이 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 시편 33편을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우리 시야가 열린다. 국제정세를 보면 강자가 위력으로 약한 나라를 누르며 정의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편 시인의 위대한 찬양이 그 모든 역사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큰 손을 보게 만든다.
본문 1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미국의 한 상원의원이 주미 벨기에 대사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의원은 자기의 아버지에게 그 대사를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던 의원의 아버지는 인사를 하면서 대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사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신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을 손님에게 던지자 의원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상원의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많은 화환이 들어왔는데 그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화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나의 영혼에 대해 말해 준 단 한 분이었던 존경하는 00 씨께. 벨기에 대사 드림.’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진 나그네와 같은 초라한 존재이지만(벧전 1:1), 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벧전 2: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약속하신 복을 요약하면 ‘자손’과 ‘땅’과 ‘복의 근원’입니다(창 12:1-3). 이스라엘이 복된 백성이라 함은 배타적인 특권을 누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13 ~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고층빌딩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볼 때면 장난감 같은 차들과 개미 같은 사람들이 꼬물거리며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보통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한 꼬마가 개미 굴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작은 돌 하나가 굴 입구에 떨어지자 개미들은 안간힘을 쓰면서 그 돌을 밀어냅니다. 개미굴 옆에 떨어진 과자 하나에 몇 마리의 개미들이 붙어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꼬마가 개미들이 물고 있는 과자를 살짝 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놓자 혼비백산한 개미들이 이번에는 굴을 찾아 우왕좌왕합니다. 개미들은 세상에 자기들만이 존재하는 줄 알고 열심히 자기 일들을 하지만 꼬마에게는 한눈에 다 보이는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세상을 감찰하십니다.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묘사하듯이,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도 동일한 돌보심을 베풀고 계십니다. 감찰자 되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그분께 인생을 맡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하는 이유는 여호와는 우리 인생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18-21절).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인생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지으신 분이기에 우리 속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15절). 이 말씀은 두려운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실수투성이고 돌아보면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육신의 기근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19절)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는 우리의 환난 날에 의지할 큰 도움이시요, 우리를 시련의 불화살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우리의 방패이십니다(20절). 그래서 우리는 다만 그의 성호, 곧 그의 거룩한 이름만을 의지하며 찬양합니다.
중세시대 때 수도원에서 일하던 어릿광대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바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궁리 끝에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밤이 되면 수도원 뜰에서 자기의 특기인 재주넘기를 했습니다. 지식도, 재물도, 명예도 없는 광대였기에 하나님께 드릴 것은 자신의 덤블링하는 몸짓뿐이었습니다. 남들이 보면 우스운 몸짓이었겠지만 그 광대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기에 그것은 그 어떤 찬양보다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호와를 즐거이 찬양하십니까?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라 할 때, 우리는 진정 무엇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일까요?
1. 온몸으로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얼마 전 특별한 음악회에 참석하여 커다란 감동과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 음악회는 장애자들이 마련한 천국 잔치였습니다. 농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비음을 섞어 수화로 드리는 찬양, 앞을 못 보는 이들의 짧은 연극과 찬양,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연주하는 정박아들의 합주....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조금도 무질서한 모습의 음악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찬양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들은 정말 온몸으로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찬양하였습니다(시 86:12; 시 146:2).
이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온몸을 다 드리고 온 힘을 다해 즐거움으로 드리는 찬양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렇듯 온몸으로 드리는 찬양은 음악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관 돌리기 위해 손으로 발로 하는 모든 봉사까지도 포함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특별하게 받은 나름대로의 달란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음악적 재능, 미술적 재능, 운동을 잘하는 신체, 지식적으로 탁월한 머리, 그리고 여러 가지 기능적인 재주들…. 우리 각자에게는 이렇듯 서로 다른 다양한 달란트가 부여 되는 것입니다. 롬 12:6절에도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떤 재능이든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유명한 축구 선수가 멋진 골을 넣고는 그라운드에 엎드려 기도하던 모습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국악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향피리라는 악기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편)라는 곡을 편곡하여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눈에 눈물을 머금으며 감격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그 재능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특별한 재능으로 드린 찬양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케 하고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3. 자신의 소유물로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맨몸으로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소유물들을 얻게 되고 그것들을 향유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근원적으로 볼 때 내 자신의 것이 아니며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신의 지식과 재물 등 모든 소유물들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유물들을 가지고 자신의 안일함과 즐거움, 그리고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여호와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도리어 그분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됨을 명심하십시오.
4. 자신의 삶 전체로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어두움의 자녀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무조건적인 은혜로 우리 성도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해방되어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엡 5:8엡 5:8).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던 절망의 삶이 영생을 바라보는 소망의 삶으로 변화되었으며, 사단의 지배를 받던 고통의 삶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기쁨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그렇듯 변화된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오직 여호와만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 돌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이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셔서 영원한 생명과 하늘 영광에 참여케 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우리의 삶 전체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데 모아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함으로써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존재입니다. 특히 모든 피조물 중 가장 뛰어난 우리 인간들은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앞장서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찬양하면 입으로 하는 찬양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들이라고 할 때, 그것들을 가지고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함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온 몸과 모든 재능으로 , 그리고 우리가 가잔 모든 소유물과 우리의 삶 전체를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입이 닫쳐 있으면 손으로, 손이 없다면 발그름을 통해서라도, 그리고 몸의 지체 중 아무 것도 쓸 수 없다면 빛나는 눈동자와 뛰는 심장만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찬양은 영원히 그치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계속될 것이 확실합니다.
* 기도: 영원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므로 목소리 높여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음을 기쁨으로 여기며 복된 소식을 세상에 널리 전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늘 지켜보심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즐겁게 찬양하는 날이 하루속히 오게 하소서. 온 땅이 주님을 두려워하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게 하소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쓰임 받는 도구 되게 하소서. 내가 매일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소서. 그리고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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