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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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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491868 |
정용섭 목사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태복음 17:1-9, 산상변모 주일, 2011년 3월6일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 마지막 주일이면서 동시에 예수의 산상변모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현절과 사순절 사이에 산상변모 주일이 들어있는 셈입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현현하셨다는 사실을 기리는 절기이고,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당하신 고난의 40일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 놓여 있습니다. 주현, 수난, 부활이 그것입니다. 그 중간에 변모가 자리합니다. 그 변모 전승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성과 내재적인 인간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는 이유에 대해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아무 말이 없지만 누가복음은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산은 기도하기에 적당한 곳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골방이 기도하기에 더 좋을 수도 있고, 중세기 사막의 교부들이 그랬듯이 사막이나 광야가 기도하기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산이 거론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을 따라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산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었고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났으며, 옷도 빛처럼 희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형체가 전체적으로 빛으로 둘러싸인 것 같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UFO를 발견했다고 떠들썩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킨 인물들로 유명합니다. 모세는 호렙산의 불붙는 가시떨기, 갈라진 홍해, 만나와 메추라기 등, 크고 놀라운 사건들의 장본인입니다. 엘리야도 못지않습니다. 그는 당시 독재 왕조인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 왕비를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특히 갈멜산에서 아합의 어용 제사장들과 싸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에 올려놓은 제물을 모두 태우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이 늘 그를 뒤따랐습니다. 결국 그는 일반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산, 불,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오늘 본문의 변모 전승과 연결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일까요? 이 질문에 반응이 제 각각일 겁니다.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는 분들도 있고,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일단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역사에 등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이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억지를 피우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불합리를 합리로 뒤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신비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합리적인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마태복음을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이 변모 전승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거론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게 합리적인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는 별로 중요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말하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다고 전할 뿐이지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는 이 이야기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연극으로 치면 모세와 엘리야는 소품입니다. 소품은 연극의 중심 서사를 돕는 데만 필요합니다. 연극을 보는 사람도 소품에 한눈을 팔지 말고 본줄기를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본줄기는 바로 예수의 변모 사건입니다. 본문은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마 17:5절에 또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변모한 예수님이 그 자리에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와 말하는 것을 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가 나서서 초막 셋을 짓자고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베드로다운 제안입니다. 황홀한 경험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 순간에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모두 덮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은 그 소리를 듣고 엎드렸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현상이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이 본 것이 무엇일까요? 잠시 환각 상태에 빠졌다가 빠져나온 것일까요?
성경을 꼼꼼히 읽는 분들이라고 하면 이 변모 사건이 예수의 세례 장면과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겁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고 합니다. 하늘과 비둘기를 산상변모 사건에 등장하는 모세, 엘리야와 비교해보십시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절대적인 경험을 이렇게 신화적인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오늘도 예술가들은 이런 경험을 합니다. 이 절대적인 경험이 하늘로부터 울리는 소리로 묘사됩니다. 변모 사건 때 울린 소리와 세례 사건 때 울린 소리가 놀랍게도 똑같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변모 사건 때의 소리에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만 더 붙어 있고, 나머지는 완전히 똑같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절대적인 경험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에 몰입했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전하면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인 빛, 구름,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 하늘, 하늘로부터의 소리를 통해서 전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알아듣는 것보다 훨씬 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9) 왜 침묵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인자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는 이 대목만이 아니라 앞뒤로 몇 번 나왔습니다. 마 16:2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고난, 십자가 죽음, 부활을 거부했을까요? 마 17:22, 23절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해서 전해들은 제자들이 심각하게 근심했다는 겁니다. 마 20:17-19절에는 제자들의 반응은 없이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4번이나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한결같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도 이런 전체적인 구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자들을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머리가 나쁘거나 인격이 비틀어진 탓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탓도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메시아 사건은 근본적으로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변모 사건에 대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떠벌려봐야 사람들은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왜 비밀일까요? 왜 비밀이어야만 할까요? 세상을 구원할 분이라고 한다면 모두 알아보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지금 완벽하게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죄한 자들이 고난 받는 이유를 우리는 지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일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세계는 지금의 잠정적이고 모순적인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아 사건이 왜 비밀이어야만 하는지를 모르지만 그것이 비밀이라는 사실 자체만은 압니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 십자가 죽음, 부활을 예고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가야 할 운명이었고, 메시아의 길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활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바로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완전히 맡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핵심은 억울한 고난과 죽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운명을 그렇게 뜯어말리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메시아의 길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인정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등, 유대교 지도층과 민중들의 생각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의 길을 부정했습니다. 그 길이 불행한 삶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길이 바로 신성을 모독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의 길이라는 예수의 믿음과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던진 예수의 결단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고난은 비밀입니다.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은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비밀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의 비밀이고, 생명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대한 정확한 표현입니다. 전혀 새로운 사건, 또는 새로운 행위라는 뜻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렇게 유별난 게 아니라 성서가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과 홍해, 만나와 메추라기, 바벨론 포로 귀환 등,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예수의 운명에 일어난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하나님의 메시아 사건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역시 비밀입니다. 사람들에게 숨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복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의 메시아 사건을 비밀로 알지 못하고 밖으로 떠벌려야 할 어떤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신자수를 늘리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심지어 각 교단마다 총회장 선거나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에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뿌려댑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메시아 사건은 이미 널리 선전하고 광고해야 할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교회는 몸을 파는 창부처럼 자신의 상품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온갖 치장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목적으로 뭔가를 떠벌린다는 것은 메시아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메시아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밭에 감춰진 보화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간접적으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마 13:44) 메시아 사건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보화가 묻힌 밭을 사듯이 영혼을 다 기울여 예수의 메시아 사건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그 구원과 생명 사건이 완전하게 드러날 그 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에는 희망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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