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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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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9·01·10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당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 때문에 더 이상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에게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깊은 침체에 빠져 방황하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자 베드로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치유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아무리 실패하고 침체된 사람도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뜨겁게 느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셔서 종으로 삼아주시고 사명 주신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사명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며, 우리의 인생을 복되고 영광스럽게 만듭니다. 당신은 삶의 목적과 사명이 분명하게 세워져 있습니까? 실패하고 침체된 베드로를 찾아와 회복시켜주신 주님께서는 다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베드로는 오직 주님만 따라갔으며, 순교하기까지 주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삶과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린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더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18-19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다가 순교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유하시면서 이것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부르며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양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원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소리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다스려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곧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평탄하고 화려한 것인 줄만 알고 따른 사람은 고난과 욕을 당하게 될 때 더 이상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의 기대나 생각과 다르면 더 이상 주님을 따라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참좋은교회 로고가 완성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로고에도 주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기 원하며, 편하고 영예를 얻으며 맘껏 즐기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려 하겠습니까?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 두 길 중에서 어떤 길을 가기 원하십니까?
사람들은 대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인 줄 압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기 원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스럽고 가치 있고 영광스런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최고의 인생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타락하고 파괴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패한 본성이 원하는 대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충성하며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최고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최후의 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알든지 알지 못하든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에게 이제 그날은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육신과 정욕을 따라 자신의 만족과 쾌락만을 위해 산다면 주님 앞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자기만족과 쾌락만 추구하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그날에 돌이킬 수 없는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충성했던 성도들, 어려운 형제를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었던 성도들은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날에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세상 따라가지 말고, 자기주장과 만족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남을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는 깊은 침체에 빠져 방황하는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회복시켜주시고 다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더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18-19절)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다가 순교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요한을 걸고 넘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20-21절)
왜 베드로는 선뜻 주님을 따르겠다고 대답하지 않고 느닷없이 요한을 끌어들였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미래와 최후에 대한 주님의 말씀(18절)을 듣고 두려움과 큰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요한이 뒤따라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러면 과연 이 요한은 어떻게 될까, 왜 하필이면 나만 그런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이 요한도 나와 함께 이 길을 가게 될 것인가, 요한도 나처럼 주님을 따르다가 순교하게 될 것인가?’하는 궁금증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에게 요한은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절) 요한은 요한이고 베드로는 자신의 사명과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말고 자신의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요한을 모른척해야 한다든지, 서로 협력하거나 도와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주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오직 철저하게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든지, 무슨 이유로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없었다는 핑계는 전혀 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지 오직 내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했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교훈해줍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남을 끌어들여 핑계 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성도는 목사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서 힘이 빠져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 믿는 누군가에게 실망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핑계들이 하나님 앞에서 통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남은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믿어주거나 책임을 져줄 수 없습니다. 그날에 주님께서는 그 어떤 핑계도 인정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책임지는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남을 상관하거나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없이, 남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무궁한 주님의 은혜와 사랑
이제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마무리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이렇게 끝마쳤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5절) 요한이 여기서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요한의 마지막 말이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셨을 때뿐만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그분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의 간증을 다 기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모든 것은 다 예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들입니다. 요한의 이 말이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나십니까?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도 요한은 붓을 놓으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마지막으로 생각해보려고 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단지 그분에 대한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경이로운 일들이 아무리 놀라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앞으로 체험하게 될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카테고리들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다. 인간의 책들은 그리스도를 담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요한은 헤아릴 수 없는 승리, 다함이 없는 능력, 그리고 제한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지고 자기의 복음서를 끝맺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304장 3절)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처럼 무궁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 사명 감당하며 살아갈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순교하기까지 주님을 따르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교회 역사상 이들처럼 순교한 성도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성도들이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그들은 우리와 다른 초인들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답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우리 주님 안에 마르지 않는 생수의 샘이 있습니다. 주님께는 결코 다함이 없는 은혜와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며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에게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을 위해 살기 원하여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무한한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극심한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다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서 기록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11:32)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요즘 우리가 새벽마다 부르는 찬송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의 인생길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날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 뵙게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 형제를 섬기며 돕고 있습니까? 그 어떤 핑계도 대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탓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무한하신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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