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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35: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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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나는 네 구원이라
본문: 시편 35편 1- 28
어떤 집사가 세상을 떠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선했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보니 그렇지 않은 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항상 의로왔는가?” 역시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대는 항상 깨끗했는가?” 역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닙니다” 간신히 대답을 하고 어떤 벌이 내려질 것인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전신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눈을 드니 예수 그리스도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사를 껴안고 보좌를 올려다보면서 “아버지, 이 사람은 항상 선하지도 못했고 의롭지도 못했고 깨끗하지도 못했으나 세상에서 이 사람은 항상 저의 편에 있었으니, 지금 이 곳에서는 제가 이 사람 편에 서겠습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골 1:15). 예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 창조주되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9:4)
본 시편은 다윗이 환난 중에 지은 시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다윗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 시입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공격에 대해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실 것과 그들 위에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주실 것을 호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기도를 항상 들어주셨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여 싸우소서 (35:1~6)
하나님의 사람은 혈과 육에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엡 6:12). 다윗처럼 지혜로운 싸움을 벌입니다. 다윗은 기도로 대적과 싸웠습니다. 그는 직접 나서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대적과 싸워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또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주셔서 대적을 몰아내 주시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만군의 하나님이 그의 대적과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멋진 장면을 보았습니다. 모든 싸움이 ‘영적 전쟁’인 것과 하나님이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 24:8)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윗처럼 대신 싸워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네 구원이라”(3절)는 말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이 말은 승리를 향한 돌격 깃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받는 것은 승리의 보장입니다.
본문 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해 자주 언급했듯이 현대인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경향은 틀림없이 타락한 인간의 실존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에 아예 하나님 만나기를 두려워하며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3:10).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겪는 두려움이 바로 현대인들의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입니다.
근본적인 인간 실존을 해결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돈과 권력, 명예를 추구하거나 술과 음행, 마약에 빠져 두려움을 잊으려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전에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엡 3:12 말씀에서 ‘우리가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감을 얻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35:7~10)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자들은 대체로 ‘은밀한’ 일을 꾸며 하나님의 사람을 궁지로 몹니다. 없는 일을 만들고, 거짓을 지어내고,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마음이 약한 자를 협박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동조 세력을 불러 모아 자기들의 강한 위세를 드러내려 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늘 행하는 일입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노략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영혼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모든 뼈까지도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와 같은 자”(10절)가 없으며, 구원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신자가 여호와를 즐거워하려면 무엇보다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즐거움이란 어떤 일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이는 여호와를 즐거워 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런데 대개 무엇으로 여호와를 즐거워하려고 하는가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은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은 것에 대한 즐거움일 뿐입니다. 즉 9절에서 말하는 즐거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즐거움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원하는 것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여호와를 즐거워 할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께 있습니다. 여호와가 행하신 일이 신자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은 바로 구원입니다. 여호와의 일은 신자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모든 일이 신자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편 32:1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정직한 자인 의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인들은 시편 32:1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입니다. 이 의인들이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우신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곧 구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에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일하시는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여호와를 즐거워하려면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신자는 설사 자신이 실패의 자리에 놓인다고 해도 변함없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여호와로 인해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편으로 구원을 말하면서 구원을 쉽게 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이 되는 모든 일들이 간단하게, 쉽게 되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 왜 하나님의 능력이 동원되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할하자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구속의 뜻과 계획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악한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심으로써 택한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힘으로도 악한 세력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대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자신의 대적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싸우는 대적을 하나님이 싸워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적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인용해서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관계에 있거나 자신을 해롭게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싸워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해 너무 무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는 것이 됩니다. 다윗이 죽는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과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을 개인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자리에서 여호와의 대적으로 바라보고 여호와께 대적과의 싸움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이 대적과 더불어 싸우시고 승리하심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성취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승리로 인해 주어진 은총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구원이야 말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증거물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한 몸에 입은 자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란 이처럼 하나님의 승리와 전지전능하심과 능력과 인자와 자비하심의 증거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뛰어난 존귀한 자가 됨으로써 신자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신자는 신자 됨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와의 싸움은 이미 창세기에 예고되어 있습니다. 창 3:1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의 구도로 흘러온 것입니다. 이 싸움이 세상에 최초로 드러난 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벨이 가인에게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이미 셋을 예비하시고 아벨의 자리에 셋을 세우셔서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유다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언약이 중단될 위기에서는 다말을 등장시켜서 다말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이어가십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세상의 힘을 무서워해서 사라를 누이로 속이는 사건 역시 하나님의 언약이 무너질 위기였으나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써 다시 언약을 이어가십니다. 이 모든 것이 악한 세력의 훼방이었습니다. 이러한 악한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현실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비록 평온할지 몰라도 사실 세상은 하나님과 악한 세력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고백을 가진 자로 나와 있는 것도 하나님의 전쟁에서의 승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원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대적이 다윗을 해하려고 그물을 숨기고 함정을 판 것처럼,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는 신자 역시 대적으로부터 이러한 훼방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개인을 넘어뜨려서 지옥 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은혜를 훼방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죄를 경험합니다. 이 모두가 악한 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이고 악한 세력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넘어뜨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기 위해 힘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 가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를 옹호하고 죄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알수록 애통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대적과 더불어 싸우시고 승리하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키심이고 보호하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세력을 여러분의 힘으로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싸우시고 승리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을 소망하면서 하늘의 의의 나라에 거하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악한 세력에 붙들린 자의 악한 심령이 아니라 의의 힘에 붙들린 거룩한 심령입니다. 이러한 심령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로 인한 전리품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승리가 우리를 의의 나라에 붙들어 놓기 때문에 여호와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적은 결국 멸망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고 신자는 여호와의 승리로 인해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일로 인해 신자는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보이지 않는 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승리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근거는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여호와를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터의 위급함을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그 몸이 칼에 베이거나 창에 찔릴지 모릅니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상대가 더욱 강할 때에는 그 위험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거나 경험을 기억하면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와 싸우는 자와 하나님께서 싸워주세요. 그렇다면 내가 이기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일어 나를 도와주세요. 방패와 손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와주세요.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사 나를 보호해주세요 라는 간구입니다.그러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여 주세요. "나는 네 구원이라"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네 구원이니 너는 안심하라. 놀라지 말라. 용기를 내어라! 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곧 내 생명이 보호받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얻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또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그 손길로 친히 물리쳐주시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다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9절) 그리고 10절에는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다른 것을 궁극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다윗은 소망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이 되어 주십시오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위협이든, 아니면 인간관계에서 악하게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주변사람들이든, 혹은 죄악의 유혹 앞에서든 오직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 되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구원의 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요? 다윗에게 함께 하시고 다윗의 순전한 마음을 귀하게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순간 순간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다윗은 믿음으로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 구원이라!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이 말은 ‘여호수아’란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자란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구세주 곧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네 구원이라> 하나님의 이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고백하고 누릴 차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은 나의 구원입니다!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는 우리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이십니다! 이 고백이 바로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라는 고백과 연결이 됩니다.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몇 해 전 영국 런던에서 구제 사역을 하는 선교회 회장이 유명한 무신론자의 논쟁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은 각자 자기 입장을 지지하는 후원자를 100명씩 데리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 회장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삶이 확실하게 변한 100명의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회장은 상대방에게도 불신앙이 주는 유익을 발표할 수 있는 100명의 증인을 데려와서 반격하라고 도전했습니다. 약속한 날짜에 선교회 회장은 100명의 증인과 함께 토론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유익에 대해 말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만 무신론의 유익에 대해 자신 있게 증언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무신론이 오히려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법정에서 증인의 증언은 가장 유력한 증거로 인정됩니다. 그래서 증인의 증언은 나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증'을 하는 증인은 오히려 없는 것이 낫겠지요? 나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증언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나는 내가 가장 잘 압니다. 나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다 속을지라도 나는 나를 속일 수 없습니다. 나는 나의 양심에 비추어 정직합니까?
둘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만하십니다. 내가 숨을 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곳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 눈앞에서 나는 정직합니까?
셋째는 나의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명해 줍니다. 저울추를 속이거나 사람들에게 이롭지 못한 일을 하면 그 순간에는 돈을 벌지 모르나 반드시 나중에 그 댓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일을 합니까? 이 세 가지의 증언자와 친해지십시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나에 대해서 정직하게 증언을 해 줄 증언자들입니다.
본문 12 - 15절을 읽겠습니다.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하나님의 지하 운동』이라는 간증집을 통해 잘 알려진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가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감옥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던져졌는데 그는 다름 아니라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비밀경찰의 대위였습니다. 그 대위는 자기가 감옥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얼마 전 열두 살된 소년이 자기를 찾아와서 꽃다발 한 단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소년은 대위가 자기의 엄마를 체포해가서 엄마의 생일 때 늘 드리던 꽃다발을 더 이상 드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원수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꽃다발을 대위의 아이들의 어머니, 즉 그의 부인에게 갖다 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대위는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고 소년을 부둥켜안은 채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남은 일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해서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구원을 얻어 사랑을 알게 된 성도들은 이제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요일 3:16). 그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행함으로 보여야 하는 실천적 사랑입니다(요일 3:18).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13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는 우리 품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한 것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나 다 내게로 돌아옵니다.(마10: 12, 13) 그러므로 축복하는 기도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는 하지 마십시다.“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25:21)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 17- 21)
3. 복수의 집행, 은혜의 십자가
복수를 바라는 기도는 심판 때 하나님의 정의가 집행되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신다면 이러한 심판은 행해져야 하며, 이에 해당하는 자는 심판받아야 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놀라운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죄인을 대신해서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그분의 아들에게 행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편에서 간구하는 하나님의 복수를 친히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해서 짊어질 수 없고,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잘못된 생각, 곧 하나님은 죄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시지 않는다는 생각에 끝을 고합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미워하시기에 그분의 원수를 위해 죄 용서를 간구하는 유일한 의인에게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며, 진노의 심판을 십자가에서 공의롭게 행하셨고, 이제 이러한 진노가 우리에게는 기쁨과 은혜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에 하나님의 복수를 행해 달라고 직접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원수를 날마다 십자가의 진지함과 은혜 가운데로 이끄십니다.
본문 18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어느 숲속에 있는 넓은 호수가에 많은 개루리들과 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개구리들은 쉴새없이 재갈거리고 있는데, 새들은 너도 나도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나무에 앉아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목동이 이 이상스러운 관경을 보고 새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개구리들은 쉴새없이 노래를 하는데, 저들보다 휠씬 더 예쁜 소리를 가진 너희들은 왜 가만히 있니?”
“저것 좀 들어보세요. 개구리들의 소리가 저렇게 시끄러운데, 우리들이 아무리 예쁜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해도 그 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기나 하겠어요?”
“이 바보 같은 새들아, 그러니까 너희들이 더 크게 노래를 불러야지, 너희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저 개구리들의 소리가 더 시끄럽게 들리는 거 아니니.”
그런데 오늘 우리 또한 여러 가지 이유의 불평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만 들려지는 것은 아닌가?
진정 다윗과 같이 세상 만민이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찬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44:23)
‘대회’ 와 ‘많은 백성’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해 모인 회중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본 절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체험했을 때 느꼈던 감격에 모든 백성들이 동참하여 함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에 어떤 노래가 있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러면서 그 노래가 무엇을 말하는지 유심히 들으십니다. 만일 우리가 입으로 '음란함'을 노래하거나 '돈타령'을 노래하거나 '미움을 노래한다면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귀 기울이실 때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역사와 은혜를 찬송한다면 그분은 얼마나 감격하실까?
나는 오랫동안 찬양을 부르면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영적상태를 진단하는 '자가진단법'입니다. 만일 지금 자신의 영적 상태을 알고 싶다면 요즘 자신의 입에 자주 맴도는 노래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됩니다. 외롭다면 외로움에 관한 내용이 흐를 것이고 절망하고 있다면 비관적이고 슬픈 노래가 입에서 흐를 것입니다.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찬양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곧바로 지금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 와 같은 찬양을 하고 있다면 위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우리의 입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 입의 노래를 바꾸면 자신의 상태도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바꾸길 원한다면 입술의 찬양을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은 노래를 좋아하시기에 우리 입술의 찬양을 들으시고 그대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본문 26-28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함께 부끄러워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스스로 뽐내는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탄원한 저자는 이에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심으로 정의와 공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공의와 정의가 땅에 가득하게 되면 당연히 그의 원수둘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의 결론부분에 제시된 이미지는 시를 시작했을 때 형성된 이미지와 큰 대조를 이룹니다. 저자가 처해있던 문제를 즐겼던 자는 수치를 당하고 창피를 당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를 같이 슬퍼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정에 노래하면서 기뻐합니다. 특히 그들의 찬양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섬기는 자들에게 기꺼이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27절). 이 시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으로 시작했으며 이제 그는 찬양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변호하시고 그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도록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은 자신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다루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전쟁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원수 갚는 일을 주께 맡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이 시간 우리의 심령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죄에서 떠나라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라 그리햐면 구원을 얻으리라”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시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고 담대하게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와 섬김을 본받아 살게 하시고 악을 선으로 이기게 하소서. 때로는 세상의 것들이 더 크고 힘 있어 보여 두렵습니다. 저의 이런 약한 모습을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대신해서 싸워 주시고 제 삶에 승리를 주시는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게 하시고 믿음을 통해 참 평안을 주옵소서. 어떠한 환난과 핍박 중에라도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를 해치려는 자들을 위해서도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가 베푸신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널리 전파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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