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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36: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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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고난의 깊은 바다
본문: 시편 36: 1- 12
1.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2.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4.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8.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10.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11.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12.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세계의 문학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천재적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는 참으로 불행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가난한 군의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자랐습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폐병으로 여의고, 18세 때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은 발작증세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고아처럼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의 청년 시절 역시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는 사회주의적 결사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총살 직전에 극적으로 황제의 특사를 받게 됩니다.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인정받아 사형은 면했지만, 대신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4년 간 징역을 살게 됩니다. 그 후 5년 간 중앙아시아에서 기막힌 고생을 하며 그는 불행한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결혼 생활도 불행하였습니다. 36살에 맞은 아내, 마리아 이사예프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43살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병들어 죽습니다. 3년 후 재혼하여 아들을 얻었지만, 아들을 안아 본 기쁨도 잠깐, 그 어린 아들은 러시아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병들어 죽고 맙니다. 피를 토하는 아픔의 순간을 지냈다. 설상가상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치명적인 병이 있었습니다. 한평생 이 병에 시달렸습니다. 간질병이었습니다. 종종 쓰러지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병을 『거룩한 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오직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는 오히려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는 만큼 신앙은 빛이 났습니다. 고난으로 점철된 자신에게 신앙은 삶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신앙적 안목으로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평생 질병과 싸우고, 평생 고난과 시련 속에서 누에고치가 명주실을 뽑아내듯 글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인 '분신', '백야' 등에 보면, 불행한 사람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요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그 후 1866년에는 '죄와 벌'을 썼고, 1880년에는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많은 명작들을 남기게 됩니다. 이처럼 극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 불후의 명작이 창작된 것입니다. 특히 그의 장편소설 가운데 『죄와 벌』은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다룬 너무나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작품은 그의 나이 44세 때 쓴 것입니다. 그 해는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움에 시달리던 때요, 곧 빚쟁이를 피해 4년간이나 도망 다녔고, 아내 마리아가 죽고, 형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던 해였습니다.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의 한가운데서 그의 간질병도 더 자주 발작하여 가장 참담하던 때에 불후의 명작『죄와 벌』을 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에델바이스는 고산지대의 작은 꽃이지만 이른 봄, 아직 눈이 덮여 있는 추위 속에서도 꽃 봉우리를 맺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난(蘭)도 너무 따뜻한 곳에 놔두면 꽃이 피지 않고, 약간 추워야 아름다운 꽃이 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한 꽃일수록 역경을 온상으로 삼는다는 교훈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의 시로서, 악인들이 난무하는 어두운 현실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밝은 사실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본 시편에 나타난 교훈의 중심은 무엇이 보배로운 삶인가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는 가치론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악인들로 인한 고난과 고난 뒤에 오는 축복을 중점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산비탈 바위 위쪽에 큼직한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쪽의 바위가 조금씩 밀려 내려와 그 소나무는 큼직한 두 바위 사이에 끼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소나무의 그루터기 부분에 큰이형이 생겼습니다. 바위로 눌린 부분은 거의 구멍이 날 정도로 얇아졌고 뿌리들은 바위를 둘러싸서 참으로 기묘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산사태가 나서 그 바위들이 다 무너졌고 소나무도 뽑히게 되었는데, 소나무의 그루터기를 본 일꾼들이 그 부분을 장식가에게 보냈습니다. 그 부분은 결국 고급 장식품이 되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고가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소나무가 바위 사이에서 짓눌릴 때는 아픔이 컸지만 나중에는 희귀한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가에 팔려 귀한 가정의 안방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특수한 형태로 만드시기 위하여 때로는 가난이나 불치의 병이라는 바위로 짓누르시고 때로는 실패와 번민으로 아픔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야 우리는 천국의 진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아픔을 당할 때는 그 아픔만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이후를 생각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게 노래할 사람은 이 땅에서 가장 큰 고난을 겪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두 그들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꽃의 수명을 연장하려면 꽃줄기를 일직선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잘라야 합니다. 그러면 물을 흡수하는 면적이 훨씬 넓어져서 싱싱한 꽃을 오랫동안 볼 수 있습니다. 병에 약한 꽃나무는 줄기를 대각선으로 자르고 그 자리를 불로 태웁니다. 불로 태우면 물을 흡수하는 힘이 강해지고 나무의 부패도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병든 꽃에 가위를 대지 않으면 그 꽃은 곧 시들어 버리고 주변의 꽃들에게도 병을 옮기게 됩니다. 그래서 노련한 정원사는 꽃나무에 가위질을 해야 할 때를 압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훈련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한 인간을 성숙한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 줄기를 자르는 아픔을 주십니다. 그것이 부족할 경우에는 불에 태우는 따끔한 고난도 주십니다.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역경 없는 인생은 건조합니다. 바다에 적당한 파도가 있어야 윈드 서핑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고난은 필요한 아픔일 뿐입니다. 고난이 두려워 피하려는 사람에게 역경은 거대한 파도처럼 두렵게만 느껴지는 법입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9)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번민이나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값진 삶을 살아가려는 신앙인에게는 더 많은 십자가와 시련의 아픔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우리의 고난의 아픔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고, 낫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이 받는 고난의 아픔은 결단코 그의 구원에 해로운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유익한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 71)
본문 1, 2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영국 에딘버러 의과대학에 제임스 심슨 경은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당시까지 마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살을 찢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심슨경이 클로로포름을 발견하므로 수술의 공포감을 덜게 되었고, 오늘날 수술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 공로로 귀족이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의사’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제자들이 찾아 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선 일생을 통해서 지금까지 많은 발명과 발견을 해오셨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마음에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가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내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내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짊어지신 나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있는 우리 또한 가장 위대한 발견을 이룬 것 아닙니까? 하지만 세상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고 범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이사야 1:2-3)
악인에게는 악한 생활 방식과 인생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악은 악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앉아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지우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앉은 죄악이 마치 철학자나 지혜자나 된 것처럼 비밀스러우며 엄숙한 말로 조용히 속삭거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는 죄악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악인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지옥은 없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지옥에 보내겠느냐?”
어리석은 자들은 이런 내면의 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입니다. 죄악의 세력이 자리 잡고 앉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소리를 막고 악을 행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이 드러나지 않을 줄 압니다. 악한 자의 귀에는 죄의 속삭임뿐 하나님 두려운 생각은 염두에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자기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어 고칠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본문 3, 4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한 농부의 아내가 그 동네 목사님을 헐뜯는 말을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곧 온 마을에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얼마 후 그 여인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늙은 목사님은 "당신이 저의 한 가지 바램을 따라준다면 기꺼이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꺼이 하겠습니다"하고 여인은 대답했습니다. "집에 가서 검은 암탉 한 마리를 잡아 그 깃털을 뽑고 그것을 바구니에 담아 가져오십시오"
30분 후에 그녀가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마을로 가서 각거리 모퉁이마다 이 깃털을 뿌리고 돌아오십시오." 그녀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 마을로 가서 그 깃털을 모아 오십시오. 그리고 한 개도 잃어버린 것이 없나 봅시다." 그 여인은 놀라서 목사님을 쳐다보며 "그것은 불가능해요! 바람이 그것들을 들판 저 너머 사방으로 날려 보냈을테니까요."
"그렇다면"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용서는 하겠지만 당신이 말한 그 거짓된 말들이 일으킨 피해를 취소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십시오." 말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2:1)
악인들의 언어와 행실은 죄악과 궤휼을 말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선행을 하지 않습니다.
3절이 언어의 측면에서 비윤리성을 지적한 것이라면 4절은 행위의 측면에 초점을 모은 것입니다.
나영이 사건은 2008년 12월11일 경기도 안산에서 조모(57)씨가 등교 중이던 여덟 살 나영이를 인근 상가건물 화장실로 끌고가 폭행해 기절시키고 성폭행해 성기와 항문 등의 기능을 영구 상실케 한 참혹한 사건입니다. 수사를 맡은 문 팀장은 국민을 경악시킨 아동 성폭행범 조씨에게 움직일수 없는 증거를 들이댔으나 형사를 비웃듯 조씨는 ’교도소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나올테니까 그때 보자’며 오히려 위협까지 했다고 합니다.(2009.9.30 조선일보)
악인들의 생활방식은 늘 죄악을 꾀하고 악을 좋아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죄악의 속삭임에 속아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행동을 보시며, 그를 심판하실 것을 알고는 죄를 범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유혹을 좆는 사람은 참 지혜를 버리고, 선한 길을 떠나게 됩니다. 뱀은 여인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삭였습니다. 여인이 뱀의 말을 듣고 그 열매를 먹은 결과 그녀는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밖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악인들은 입만 열면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지혜를 깨쳐 잘 살기는 아예 글러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합니다. 즉 잠자리에 들어도 악한 짓만 궁리하고 나쁜 길에 버티고 서서 악을 고집합니다.
본문 5, 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악인들의 죄악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십니다.
깊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암초에 부딪힐 염려가 없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배는 육지 근방 얕은 물로 항해해야 안전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노련한 항해사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바다는 깊을수록 그 항해가 안전하다고 합니다. 깊은 바다에는 암초가 없고 장애물도 없습니다. 앝은 물에는 모래 바닥도 만나고 암초도 있고, 그밖에 장애물도 있어서 위험한 경우도 있지만 깊은 바다를 항해할 때에는 그런 위험성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실 때에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항해하는 중에 가장 안전한 항해가 될 수 있는 때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서 낮아지면 교만해질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장중에서 겸손하게 될 때 유혹의 물결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번성하고 복잡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들을 수 있는 여유조차 없지만 실패의 잔을 마시거나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세미한 말씀과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실 사람들이 성공하고, 모든 일이 번영할 때가 위험할 때입니다. 재산이 영적생활을 방해하고 자만심을 가져오며 세속적인 경향을 가져올 때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재물의 여유가 생길 때 자제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방종에 빠집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은 영원한 사랑에 관한 것이고, 믿음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나라와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살 때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하게 보이고 조촐하게 보일지라도 그는 고상한 생을 앙모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깊은 바다를 항해하면 안전한 항해가 될 뿐 아니라 발전을 가져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 67)
큰 바다에는 많은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진주도 있을 것이고 오래 전에 잃어버린 많은 보화들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겪는 환난 속에 지혜가 있고 사랑과 믿음의 보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보화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얻게 하기 위해 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 12)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불병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파도를 스치면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입니다. 폭풍우가 바닷가의 더러운 곳을 씻어 항구를 깨끗이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폭풍을 통해서 더러워진 우리 심령을 말끔히 씻어 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 10)
본문 7- 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보배로 알고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인생이 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풍성함으로 채우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은 그 인자와 성실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 절에서 시편기자는 주의 집에 거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살진 것을 먹고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는 인생이라 하였습니다. 복락이란 본래 에덴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우리를 두시고자 하셨던 바로 그 동산에서 누릴 기쁨을 말한 것입니다. 기쁨의 강물로 해갈하는 인생-얼마나 부요하고 넉넉한 삶의 그림인지요!
복락의 강수로 해갈하는 인생은 무엇보다 삶의 초점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두고 살아갑니다.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볼 때 그 누구도 그 어느 곳에서도 참된 만족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주소를 주의 집에 두고 늘 주를 묵상하는 자는 그의 환경과 상관없이 만족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인자와 성실, 그리고 그의 의로우신 판단을 믿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삶의 불만족은 악인의 존재와 악인의 득세에서 비롯됩니다. 악인의 죄악이 은폐되는 세상 그리고 악인이 오히려 환영받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삶의 용기를 상실합니다. 때로 인생의 길에서 만나는 악인은 오히려 우리의 선과 호의, 친절까지 왜곡하여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런 악인들은 죽지도 않고 오래 오래 이 땅에서 활개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하나님은 당장에 악인을 심판하시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달려 오셔서 그를 품어주시고 주의 날개아래 쉬게 하십니다. 충분히 먹게 하시고 마시우게 하십니다. 약인에게서 보호하십니다. 변함없는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계속적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악인은 악인의 때에 반드시 엎드러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복락의 강수로 해갈하게 됩니다.
9절의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여름 날 오후에 쉽게 볼 수 있는 하루살이가 만 하루도 못 되는 시간을 살다 죽지만 그들 나름대로 빠른 번식 과정을 통해 생명의 끈을 이어나가는 것을 과학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자주 먹는 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보존을 위해 베푸신 깊은 섭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배는 모양이 둥글어서 나무에서 떨어지면 조금 먼 곳으로 굴러가 싹이 틀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껍질은 물은 드나들지 못해도 공기는 통하는 특수한 구조로 되어 있고, 배의 살 부분은 충격을 흡수해 주는 역할을 해서 씨방에 있는 씨앗을 보존해 줍니다. 씨방 주변은 신맛이 나서 사람들이 배를 먹을 때도 씨 부분만은 먹지 않도록 보호 조치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의미 있는 사랑의 계획을 마련해 놓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믿음이 적은 현대인들을 이렇게 꾸짖고 계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본문 10- 1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합니다. 주의 인자와 의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악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를 기도드립니다. 또한 시인은 주님께 계속해서 자신에게 신실한 사랑과 의를 부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나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잠11:3)
정직한 자는 바르고 곧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성실입니다. 그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치관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는 일관성 있게 자기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측 가능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누구나 그를 믿을 수 있고 쉽게 따라 갈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악한 자는 비뚤어지고 굽은 사람입니다.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패역입니다. 그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치관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그는 술수와 모략에 인생의 성공을 의지합니다. 이런 사람의 인생은 예측 불가능합니다. 누구도 그를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주변은 불안해 지고 그 공동체는 늘 혼란스럽습니다. 정직한 자가 누리는 최대의 축복은 자기가 가야 할 길로 인도함을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정도를 걷는 사람의 결국에는 정직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의 마지막에는 멸망이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선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곧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야 합니다. 무엇이 한 사람을 정직한 사람으로 만들고 무엇이 또 한 사람을 사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첫째는 믿음의 차이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정직한 결말을 믿었고, 사악한 사람은 악한 의도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습관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정직을 습관으로 만들었고, 사악한 사람은 술수를 습관삼아 살아온 것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7:10)
성도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고난당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고통스러운 그 소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하신 방법으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깊은 바다 속에서 보화를 찾아내야 합니다. 가장 큰 고난이 가장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부디 여러분의 고난과 슬픔이 하나님의 은혜로 찬송과 기쁨으로 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고난을 통하여 정금같은 믿음으로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어 복된 기회를 삼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곤란 중에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시련을 통해 더욱 큰 발전과 지혜를 얻게 하소서. 시련과 고난이 다가올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어 복된 기회를 삼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하소서. 이 세상은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주께 달려가 주의 품에 안기는 것을 배우게 하소서.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만 있사오니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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