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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4:1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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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죽음 앞에서 결단
출4:18-26
제가 대학교에서 신앙 양육을 했던 한 여학생이 어제 결혼 한다고 한 주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목회자 사모가 되겠다는 믿음 좋은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될 사람과 함께 오라고 했습니다. 금요일 날 점심시간에 만나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년에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자매의 남편 될 사람에게 목회가 참 힘든데 왜 목회자가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백혈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 놓인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 서면 평소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결단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했답니다. 살려만 주면 평생 주를 위해 목회자로 살겠다고 서원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학의 발달은 단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 줄 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듯이 죽음은 인간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심리학자 헤르만 파이펄은 심상 투사 테스트를 해 본 결과 "쉰을 넘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심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몰두"였다고 합니다. 예측이 가능한 불가항력의 원천적으로 다가오는 자연사든, 예측 불허의 사고사든 인간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폴틸리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죽음과 자기 숙명성 , 허무와 무의미성, 죄책감에 대한 불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수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3대 문제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인생아 너는 어디서 왔느냐?" "인생아 너는 무엇을 하느냐?" "인생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누구나 한 가지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세 번째 질문으로서 "인생아 너는 죽음의 길로 가고 있구나"입니다. 확실히 죽음의 길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죽음 앞에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전도사님은 기적같이 서원기도를 드린 후에 백혈병에서 치유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졸업하고 내년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우리 성도님들이 1개월만 산다면 무슨 결단을 하고 마지막 무엇을 하며 살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죽음 앞에서 결단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모세도 이제 민족을 이끄는 새로운 삶으로 결단해야 하고, 모세의 부인도 이제까지 살았던 고향을 떠나 남편을 따라가야 할 결단을 해야 했고, 바로도 이제까지 노예로 삼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주어야 할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결단의 순간에 자신의 죽음의 위기 앞에 서 있는 모세와 아들의 죽음 앞에 서 있는 바로, 남편 모세의 죽음의 위기 앞에 서 있는 모세의 부인 십보라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은 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결단을 합니다. 우리는 그 시기는 모르지만 언젠가 죽음의 과정을 다 통과해야 하는데 우리가 죽음 앞에서 어떤 결단을 해야 할이지 본문을 말씀을 통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훈 받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죽음 앞에서 사명의 결단/ 죽음 앞에서 결단하는 모세(육신적 죽음)
모세는 지금까지 다섯 차례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앞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당시키라고 사명을 주었습니다. 민족 구원에 대한 소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섯 번이나 거절하였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너를 보낸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겠냐(출3:14)”거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출 4:1)”라고 거절합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 4:10)”라고 거절합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 4:13)”라고 거절합니다. 백성의 신뢰받는 자로서,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민족을 해방시키는 해방자로서 자신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만한 사람이 못되고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며 내가 이룰 터이니 너는 능력의 지팡이를 가지고 순종만 하라고 말씀합니다. 말하는 능력 없는 것 핑계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지팡이를 들고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모세가 끝없이 이유를 대며 소명과 사명을 거절했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두 가지라만 말하라면 능력과 인격입니다. 어떤 분야든 지도자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인격은 되는데 능력이 없으면 무골호인으로 사람은 좋지만 맡겨준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능력은 있지만 인격이 없으면 믿을 수 없고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두 가지가 잘 갖춰진 사람입니다. 사실 모세는 능력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왕실에서 40년을 왕자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 7:22)”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인격도 잘 훈련된 사람입니다.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인격에 대하여 한 마디로 이렇게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 12:3)” 그런데도 하나님이 주신 민족 해방의 사명을 회피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제 장인에게 가서 내 형제가 애굽에 살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가겠다고 말하고 허락받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장인에게 말하는 내용을 보면 모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분명한 사명감이 없습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직도 장인에게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애굽에 보내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모세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그렇게도 끈질기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거절했던 이유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애굽에 가면 살인자로 도피하고 있는 자신이 잡혀 죽이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생명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명의 길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명의 길로 나가는데 발목을 잡습니다. 그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돈일수도, 명예일수도, 권력일수도, 체면일수도,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마음을 모세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을 훤히 보시면서 절대권좌(權座)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모세를 기어이 제거하고자 했던 투트모세 3세와 그 수하의 무리들이(2:11-15) 다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죽었으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말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맡겨준 사명 앞에 망설이며 핑계를 대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불러 사명을 주신 자들에게 늘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아비멜렉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이삭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창 26:24)”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망설이고 있는 야곱에게 말씀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3)”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명 앞에 서 있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동성 위기로 아무리 경기가 힘들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금융환란으로 어려운 경기 속에서 48분마다 한 명씩 자살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살할 힘이 있으면 죽을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죽기로 각오하고 살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어제 신문을 보니까 "목숨 걸면 못할 일 없어… 나는 조선의 옻칠장이" 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있었습니다. 제목이 맘에 들어 읽어 보았습니다. 일본 최고 문화재 복원 칠예가 전용복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3000대 1 경쟁 뚫고 日 문화재 '메구로가조엔' 되살렸다고 합니다. 부모에 버림받아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부산 소년이었지만 “목숨 걸면 못할 일은 없다”는 신념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며 최고의 칠예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내게 맡겨준 일을 내 생명과 바꿀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습니다. 하만의 모략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갈 때 자신도 살고 민족도 살렸습니다. 삼촌의 손에서 자란 고아인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당시 최대 강국인 페르시아 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자신은 권력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편안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만이 모략을 세워 이스라엘 사람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민족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에스더는 그 때 자신의 목숨처럼 민족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나아가 민족을 살렸습니다. 왕의 허락 없이 왕에게 나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지만 민족을 살리는 것이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하기 때문에 목숨을 내 놓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죽음 앞에 결단을 하고 신앙을 지켰더니 하나님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죽을 각오로 나가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창업자가 되어 기업을 이루고, 발명가가 되어 인류에게 편안함을 주는 각종 기계들을 발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을 때 명문 가정을 만들고, 이런 직장인이 있을 때 위대한 기업을 만들고, 이런 목회자가 있을 때 주님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전도하고, 죽을 각오로 선교하고, 죽을 각오로 자녀를 양육하고, 죽을 각오로 교회를 섬기고, 죽을 각오로 사업하면 죽는 것이 아니라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죽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해방하게 하고 나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5)”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7)”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29)”
2. 죽음 앞에서 구원에로의 결단/ 죽음 앞에서 결단하는 십보라(영원적 죽음)
모세는 이제 결단을 하고 가족을 데리고 애굽을 향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을 향해 갑니다. 애굽을 향하는 사명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으로 피했다 돌아오는 것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인류 구속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화려한 백마를 타고 가는 행렬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애굽의 왕자 시절 때처럼 호위병을 거느린 장엄한 왕자의 행렬이 아니었습니다. 나귀 타고 가는 행렬입니다. 초라하지만 십보라와 게르솜, 엘리에셀까지 같이 가는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행렬이었습니다. 초라하지마는 그의 손에는 하나님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종하고 가는 그 길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합니다(24). 죽지 않을 것을 보장해 주셨는데, 그렇게 어렵게 설득해 놓고, 그의 앞길을 보장해 놓고 막상 떠나니까 죽이려하는 것입니다. 사업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 건축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선교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맡겨준 일을 시작했는데 위기기 찾아 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지라도 위기가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 여행자들이 임시 머무는 휴식처에서 하룻밤 기거하고 출발하는데 목숨을 보장해 주시겠다는 은혜의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징계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목숨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생후 8일이 훨씬 경과한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준엄하신 명령(창 17:10)을 소홀히 여긴 까닭이었습니다. 지금 사명을 붙들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려고 가는 모세에게 이 할례가 그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할례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믿음의 조상,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께서 할례를 베풀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라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17장 7절에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언약이 무엇입니까? 10절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창 17:14)”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은혜의 백성, 구원의 백성에서 제외됩니다. 그가 어떤 일을 하여도 하나님 나라 확장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하다 죽는 것뿐입니다. 이 할례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신명기 10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 " 신명기 30장 6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짜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4장 4절에는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 마음 가죽을 베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9장 26절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 비밀을 이렇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로마서 2장 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 곧 마음의 할례를 골로새서 2장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5:6)”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30)”
진짜 할례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으로 새사람, 새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여 우리가 성령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부싯돌로 할례를 했습니다. 이것도 모형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5장 2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당시 칼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장군 시대는 칼로 싸우던 시대입니다.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반석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세상을 다 쳐서 멸망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4)"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례란 결국 신약에서는 세례 의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음으로 구원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의식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데 자기 자식도 할례를 시키지 않으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서서 지도자로 살 수 있겠습니까? 야인으로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역사의 중앙 무대에 서는 데는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그릇을 원한 것입니다. 지도자로써 정리해야 할 것 정리하길 원한 것입니다.
남편 모세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십보라가 결단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 모세의 부인 십보라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에 젖은 사람이고 그 당시 모세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돈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문화에 맞지 않은 할례를 반대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의미 없는 의식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 앞에서 할례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하는 사명보다, 이 땅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할례가 삶과 죽음과 관계있다는 것을 깨닫았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결단하고 자식을 부싯돌을 가지고 직접 할례를 행합니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를 피의 남편 피값으로 산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을 살리게 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녀는 잘 몰랐을 것이지만 오늘날 바로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한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이 땅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의 생,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 앞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 땅의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생의 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 후의 삶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죽음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영벌의 심판, 지옥 가는 심판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상급의 심판이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보십시오. 죽음은 그들에게 공평하게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 부자는 불꽃 가운데 고통당하였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의 안식을 누렸습니다. 육신적 죽음 이후의 삶, 즉 영원적 죽음 앞에 우리는 결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적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적 죽음이 또 있습니다.
하바드대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라는 사람은 죽음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는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했습니다.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던 사람들, 죽었던 사람들 그런 가운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의식세계 만을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세계는 터널을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아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하였고 한 종류의 사람들은 터널을 잠시 통과한 후에 환한 빛의 세계에 들어가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이야 말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싸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 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참 안식의 시작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사람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으며 유명한 19세기의 미국 부흥사 D.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새겼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이 있다는 사실 앞에 결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만약 오늘 밤 죽는다면 천국에 가 있겠습니까? 지옥에 가 있겠습니까?
3. 죽음 앞에서 포기의 결단/ 죽음 앞에서 결단하는 바로(영적 죽음)
오늘 본문에서는 미래에 죽음 앞에 서있게 될 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말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신만이 왕이라고 살아가는 바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바로 앞에서 행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21절 “네가 애굽에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라고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표적, 이적을 행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사건을 목격해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완고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했다는 말씀은 아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아 구원의 백성이 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유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거룩한 마음이 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 마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새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돌과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 이름도 들어갈 수 없는 닫힌 마음입니다. 자신이 최고인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면 불편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적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안은 발달되어 보이는 것은 잘 보지만 영안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일으킵니다(출7:9) 그 때 바로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출 7:13)” 하수가 피로 변하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래도 어떻습니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7:22)” 개구리 재앙이 내렸습니다. 궁에까지 개구리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출8:15)라고 말씀합니다. 온 나라에 이가 들끓는 재앙이 내립니다.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출 8:19)“ 파리 떼 재앙이 내립니다. 그래도 바로의 마음은 강퍅(출 9:12)합니다. 가축이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사람과 짐승이 독종으로 죽어가고 곡식이 우박으로 초토화되어도 여전히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합니다.(출 9:35; 출 10:20; 출 10:27; 출 11:10)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끝없이 다가오는 고난 앞에서도 요지부동입니다. 손들고 주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왕권이 있다고 사무엘이 오지 않자 제사까지 집례합니다. 사무엘이 와서 잘못을 지적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삼상 13:13)”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삼상 13:14)” 그러면 깨달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아말렉과 전쟁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 15:9)” 끝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깨닫지를 못합니다. 자신도 죽고 아들들도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음으로 끝이 나버립니다. 아간을 보십시오. 욕심이 나 옷과 보화를 도둑질 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전쟁에서 패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비를 뽑습니다. 점점 자기 가정을 향해 다가옵니다. 이 때 회개하고 돌이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결국 온 가족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삽비라를 보십시오. 남편의 죽음 앞에 결단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결단하지 못하고 자신도 죽습니다. 다윗은 보십시오. 간음하고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비유로 말씀할 때 금방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는 성군이 되었습니다.
결국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을 언제 내어 주게 됩니까? 결국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이 다 죽으니까, 자신이 아들이 죽으니까 손을 들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악합니다. 이익 앞에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 앞에 가야 어쩔 수 없이 놓고 갑니다. 그 때는 가지고 갈래야 갈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다 놓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포기할 것 빨리 포기하면 손해가 없습니다. 더러운 습관, 나를 병들게 만드는 생각,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생활 청산할 것 빨리 청산해 벌여야 내가 행복해지고 가정이 행복해 집니다. 쓴 맛 보고 하려고 하지 말고 싸인 주어질 때, 징조 주어질 때, 청산해 버려야 합니다. 그것 붙들고 있다고 결코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들 내 손에서 자유를 주어 버려야 합니다. 좋은 나라, 좋은 세상, 좋은 가정, 좋은 직장, 좋은 교회 예수님이 원하시는 의와 사랑이 통치되는 세상이 됩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어느 젊은 대학교수가 탄 '지옥행 불륜 열차' ]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목이 호감이 들어 읽어 보았습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된 분입니다. 서구형 미남이고 대인관계도 좋았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용된 후에는 2년 만에 연구실에 대학원생이 6~7명이나 될 정도로 인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섯 살 연하의 같이 연구하는 제자와 눈이 맞은 것입니다. 외도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내에게 발각되었다고 합니다. 가정은 불행해졌습니다. 지옥 가는 불륜 열차에서 그 정도에서 내렸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결국 아내를 죽이고 6살짜리 자식을 비닐 질식사 시키고 내연녀와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잡혀왔다는 기사입니다. 극한 상황이 도래하기 전에 포기해야 할 것 포기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행복하길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11)”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3)”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버릴 것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버리지 않아도 죽으면 모든 것 다 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 이 땅에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들 과감하게 버려버리고 이 땅 사는 동안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진지해 지고 정직해 집니다. 죽음 앞에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행복해 질 수도 있고 불행해 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임박함 앞에서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하길 원합니다. 인간과 삶, 오늘의 소중함,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임재에 대한 깊을 통찰을 갖기를 원합니다. 죽음 앞에서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다 육신이 죽습니다. 죽으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어차피 죽을 몸입니다. 육신의 죽음 앞에 죽을 각오로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진정 가치 있는 사명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육신이 죽는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과 천국이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축복이 있습니다. 영원적 죽음 앞에 진정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천국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눈물 다 씻어 주실 날이 올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육신의 생명은 있지만 영적 생명이 없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신 것가지고 내가 왕노릇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이 왕노릇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참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3)●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11.2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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