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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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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성탄의 기쁨
마태복음2:1-12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어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생각납니까? 저는 학생 때 보내었던 삶을 기름지게 하는 좋은 성탄의 추억들이 있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성탄절이 되면 추리를 준비하여 만들고 성극 연습을 하였습니다. 장작 난로가 있을 때가 있었고, 톱밥 난로, 조개탄 난로가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12월이 되면 유리창에 매주 차례대로 말구유, 말, 요셉, 마리아, 아기예수, 목동, 동방박사 그림들을 붙였습니다. 성탄 전야, 24일 저녁에는 전교인이 모여 선물 교환을 합니다. 가장 신나는 것은 어린이들과 학생들이었습니다. 미리 이름을 뽑아 선물을 준비하고 벌칙도 써 넣었습니다. 선물을 받을 때 선물을 받은 사람은 선물 속에 쓰여 있는 짓궂은 벌칙을 해야만 했습니다. 엉덩이로 이름 쓰기도 써넣고, 누구와 뽀뽀하라고 써넣고 아이들은 매년마다 특이한 벌칙들을 개발하였습니다. 그 벌칙을 하는 동안 자그마한 시골 예배당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밤새 올나이트를 하고 새벽 예배를 드립니다. 새벽 예배가 끝난 후 새벽송을 돌기 위해 조를 편성했습니다. 그러면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같은 조가 되려고 작전들을 폅니다. 그러나 대부분 제비를 뽑아 나누는지라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불을 들고 눈길을 밟으며 산 넘고 들 건너 시골 동네로 갈 때면 서로 눈 속에 밀어 넘어뜨리고 나무를 흔들어 눈을 맞게 하고 장난을 칩니다. 조장 집사님이 천사처럼 조용히 가야하다고 하지만 학생들은 듣지 않습니다. 동네에 들어가면 개들이 가장 먼저 짖어대고, 교인들 집 앞에서 찬양을 부르면 집사님들이 과자를 준비했다가 주면 자루에 담아 왔습니다. 그 때 늘 부르는 찬송가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였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 (115장 1절)” 그 시절 성탄절에 참으로 설렘과 기쁨이 넘친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의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 어린 시절을 새벽송을 할 때를 생각하면서 “115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을 드리겠습니다.
경기가 어렵고 걱정과 근심이 많은 때이지만 우리 성도님 마음속에 성탄의 기쁨이 가득 차시길 바랍니다.
1. 우리가 성탄절에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할 때 동방박사들이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무엇 때문에 기뻐하였습니까? 그들은 별을 보고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10). '가장'은 충만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큰(메가덴)은 ‘크고, 놀랍고, 장엄하다’는 뜻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9절을 보니까 그들이 기뻐한 것은 단순한 별이 아닙니다. 그 별이 자신들을 인도하다가 아기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그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찾던 메시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박사는 "마고이"입니다. 하늘에 있는 별을 연구해서 인간의 운명을 점치고, 꿈을 해석해주는 점성학자로 추정이 됩니다. 동방은 중동의 이란 이라크 지역,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 메시야 오심에 대하여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그 분을 만난 것입니다(민수기 24장 17절) 그들은 머나먼 길, 고난의 길을 낙타를 타고 왔을 것입니다. 많은 세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사막입니다. 살벌한 광야길입니다. 물도 없습니다. 폭양이 내리쬡니다. 괴로워도 힘들어도 가야한다고 결심하고 다짐하고 걸어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생 끝에 그 메시야를 만났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이고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무리 우리가 가야할 길이 사막처럼 어렵고 힘들어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는 한 가지 이유로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신랑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기쁨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전 세계 교회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예수님 만나면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죽음도 빼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위험과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0)"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들은 예수께 경배를 드린 후에 기쁨에 넘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눅 24:5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6)"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 8:8)"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52)" 라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쫓겨 가면서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능욕을 받아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1)"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기뻐합니다. 바울을 죽을 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고후 7 : 4).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되어서도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단테는 { 신곡}에서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넣어 놓았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고 묻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의 말이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말하게 합니다. 신앙인이란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신앙인의 3대 삶의 지침을 말합니다. 그것을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3대 원리입니다. 그 중 무엇이 가장 앞서 있습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기뻐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나의 선택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어린 아기로 오신 주님을 만나 기쁨으로 살 것인가? 예수님을 만나기는 만났지만 계속적으로 소유하지 못했다고 성취하지 못했다고 슬퍼하고 애통해 살 것인가 입니다.
성탄절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괴로웠던 것, 슬프고 고달팠던 것 다 십자가에 묻어 버리고 희망의 메시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쁨을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부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모두 다 나를 떠난다 하여도 우리 주님만은 나를 지켜 주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진정 주님 한 분으로 기뻐하며 살 수 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으로 행복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복음 찬송: 주님 한 분 밖에는 아는 사람 없어요. 가슴 깊이 숨어 있는 주를 사랑하는 맘 주님 한 분밖에는 기억하지 못해요 처음 주를 만나 그 날 울며 고백하던 말 나는 행복해요 죄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2. 왜 사람들은 기뻐하지 못하며 성탄절을 보낼까요?
동방박사들은 그렇게 기뻐하는데 오늘 성경을 보면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롯대왕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4). 똑같이 예수님 오실 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기뻐하지 못할까요?
1)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해서도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헤롯 대왕은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손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입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당대 유대 땅에서 최고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참 많은 혜택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 사람입니다. 에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유대인을 다스릴 만한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유대의 왕이 되었고 유대의 왕으로 있는 동안 로마의 황제, 유대 총독이 몇 번씩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25세 젊은 나이로 주전 37년에 취임해 예수님 오시기까지 유대를 통치하는 왕으로 재임하였습니다. 그는 권력욕이 대단했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10명의 아내를 거느리며 아내와 아들들을 죽였습니다. 첫째 부인 첫 아들, 두 번째 부인 두 아들 죽였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뿐입니까? 예수님이 태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두 살 이하 유아들을 비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오죽하면 "헤롯의 왕자보다는 헤롯의 돼지가 더 행복하다"하는 당시 속담까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 아리스도 불로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 오순절 행사 때 백성들이 그를 환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를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는데 그 날 무더워서 목욕파티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장난처럼 대제사장을 머리를 물속으로 처박고는 그가 익사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헤롯에게 있어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결코 기쁨이 아니었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크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소동할 뿐입니다(3). 거짓을 말합니다(8). 죽이려 합니다(16). 작전을 세워 제거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위치, 자기의 세력, 자기의 영향력에 어떤 침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 평화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헤롯은 다윗도 짖지 못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초점이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모든 초점이 자신의 이익에 맞추어 산 사람입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력 잃지 않을까 평생을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행복과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마음의 기쁨이 없습니다.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자식들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갔고 자신은 악질이 악화되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하므로 돈을 벌고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광남 박사가 쓴 [예수는 없다]를 썼습니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불가지론자 또는 무신론자들을 대변하는 책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 책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많은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은 실존인물일 가능성도 희박하고 단지 그 당시 존재하던 구약성경의 예언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일 수 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진화론에 근거한 사고를 통하여 예수님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은 전혀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토킨스는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를 인용합니다. 러셀은 자신이 죽어서 신 앞에 섰을 때 신이 왜 자신을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신이여, 증거가 불충분했습니다. 증거가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욱 악하게 종교를 비난합니다. 종교는 인류에게 해를 끼치는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을 절대시해야 하고 ‘신에 의존하기보다는 인본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앞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나아가야 할 바이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이 없다고 논증하고 있습니까? 단지 그들의 이익을 위한 주장일 뿐입니다. 그가 무신론자인 까닭은 과학적인 사실들에 연유한 것이 아니라 무신론이 그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에 바탕을 둔 판단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믿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아무라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믿게 해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에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8)”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10:3) 증거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으려고 하니까 증거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눈만 들어 보아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얼마나 많이 널려 있습니까?
C. S. 루이스 교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창조물은 욕망에 대한 만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망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베고픔을 느낀다. 그래서 음식 같은 게 있다. 새끼 오리를 헤엄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물이 있다. 사람은 성적 욕구가 있다. 그래서 성행위 같은 것이 있다. 만일 내 안에 이 세상의 경험으로 만족할 수 없는 욕구가 있다면 이에 대한 가장 있을 법한 설명은 내가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지어졌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안에 절대자와 창조자를 찾고 있는 욕구가 있음은 절대자가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주후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중요한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가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타키투스는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때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실제 인물이며 빌라도에게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그 때에 예수가 등장하였는데 그는 만일 우리가 그를 적어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현명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한 사람이었으며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다.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거들은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정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모시고 사는 것이 손해가 아닙니다. 믿는다고 야만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예수님을 우리 가정의 왕으로, 예수님을 우리 회사 왕으로, 예수님을 우리 민족의 왕으로, 예수님을 인류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미신이 아니고 손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순간, 내 인생이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을 우리 가정의 왕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 가정이 행복해지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진정 예수님을 우리 회사, 우리 민족으로 왕으로 모시면 회사가 사회가 기쁨으로 충만해 집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1)”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2) 성탄절을 맞이해서도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신론적 신앙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들입니다. 어디에서 탄생할지 알고 있습니다(6). 그러나 그들에게 기쁨이 없었습니다. 냉철한 머리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좋은 기회를 가졌으나 그것을 놓치고 결국 그들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잡이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지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행동없는 머리만 발달된 사람들입니다. 마27:1-2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결국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들은 이신론자들입니다. 신앙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구분할 때 신자, 무신론자, 이신론자로 구분을 합니다. 이신론자 중에서 다시 비판적 이신론자와 실천적 이신론자로 구분을 합니다. 이신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 지식으로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비판은 하지 않더라도 행동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이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학교도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 생활 모태로부터 했다고 합니다. 자기 친구가 어느 목사 어느 장로하고 합니다.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행위는 없습니다. 왕년에 자신도 이런 저런 성경공부를 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활은 엉망입니다. 실천력이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가라지 신자일 경우도 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 믿은 기쁨이 없습니다. 성탄의 감격과 기쁨이 없습니다. 차지도 않고 덮지도 안는 미지근한 상태는 썩게 되어 있습니다.
니체도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칼막스도 사르트르도 볼테르도 성경을 잘 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사르트르는 ‘신은 없다’ 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정말로 하나님이 돌아가시고 안계십니까? 니체는 말년에 미쳤다고 합니다. 그가 광기 어린, 그 미침 속에서 낙서장에 남긴 메모는 "신이여, 당신은 살아있다. 나는 죽었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싸르트르는 그렇게 자유를 부르짖었지만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을 죽을 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 못하고 죽어갔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글을 집필해 자신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100년 후에는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미신가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욕을 퍼붓는 나를 가만 두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몸을 떨며 의사에게 6개월만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오, 이제 나는 지옥불에 들어가는구나” 절규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신앙인은 날로 늘어나고 있고 볼테르가 운영하던 인쇄소에서는 지금 성경을 찍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 예수님은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막3:20-30). 형제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요7:5). 친족들도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1장에 보십시오. 형제들이 기도합니다. 동생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사도들이 주를 위해 순교를 하며 진리를 전합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벧후 1:16-17)"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믿음을 확실히 가지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이 고백해 봅시다. “우리 주님은 나의 구세주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실히 믿습니다.” 어려울 때 이런 고백을 하면 인생이 새롭게 보입니다.
3.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은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11)
오늘 성경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기쁨을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진정 메시아로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이 찾아 온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메시야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크리스마스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성탄절을 산타크로스의 날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추리에서 추방시키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언론에서 추방시키고 있습니다. 성탄 축하를 종교 차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주님을 경배하는 날입니다. 중심이 분명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들의 지위에 비하면 마구간 초라한 곳에 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겸손하게 경배한 것입니다. 발달된 문명으로 예수님을 초라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초라한 마구간을 유치하게 생각하고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주님을 보는 눈이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지위 때문에 주님께 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나의 가진 지위로, 나의 가진 건강으로, 나의 가진 학식, 나의 가진 재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 찾으시고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의 인생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를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이 주어지면 그 건강으로 물질이 주어지면 그 물질로 지식이 주어지면 그 지식으로, 권력이 주어지면 그 권력으로, 명예가 주어지면 그 명예로, 인기가 주어지면 그 인기로 예수님을 더욱 경배해야 합니다. 주어진 것 때문에 예수님을 멀리하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헤롯이나 제사장 서기관은 주신 것으로 경배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기뻐하는 기쁨은 필수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드림으로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 기쁨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11).
이 보물은 당시에는 제일 귀한 것이요 가장 값진 것입니다. 이 예물은 의미가 있습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로써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므로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레2:1,2)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약품으로써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 한 것입니다.(요19:39,40) 그것을 팔아 경비로 쓰고 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예물은 마구간 아이에게는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통하여 예수님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건강이 주어지면 건강으로 지식이 주어지면 지식으로 명예가 주어지면 명예로 권력이 주어지면 권력으로 재물이 주어지면 재물로 그리스도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드리는 기쁨이야 말로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일시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생이 다할 때까지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만난 기쁨을 계속적으로 간직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헌신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진정한 기쁨 영적 기쁨이 회복되고 예수님을 통하여 큰 기쁨을 나누는 삶으로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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