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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출8:2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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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파리 재앙의 교훈
출8:20-32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나비와 벌 그리고 똥파리가 서로 자랑하였답니다. 먼저 나비가 “너희들 나처럼 우아하게 날 수 있어.”라고 자랑하였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벌이 “너희들 나처럼 빠르게 날 수 있어.”라고 자랑하였답니다. 나비와 벌의 말을 듣고 있던 똥파리도 자랑하였답니다. 무엇이라고 자랑했겠습니까? 늘 오물만 찾고 다니는 파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너희들 나처럼 똥 먹을 수 있어?” 파리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불결하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파리가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수호신이라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다신교를 섬겼는데 축복과 기쁨의 상징인 곤충의 신 하트콕(Hatkok)을 섬겼답니다. 네 번째 재앙은 그들이 섬기는 하트콕에 대한 재앙입니다. 파리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파리떼를 애굽 땅에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이 파리는 집파리와 구별되는 '개 파리 떼'(dog-fly,)라고 합니다. 열대 지방에서 홍수 후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활동성이 강한 파리라고 합니다(시 78:45; 사 7:18). 파리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짐승들과 사람에게 달라붙어 무서운 병을 옮기는 지독한 해충이었다고 합니다. 이 파리가 집집마다 가득 찬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겠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파리와는 다릅니다. 파리 떼의 공격으로 성장하는 농작물이 큰 손상을 입어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센 땅에는 파리가 없는 것입니다. 비올 때 보면 어느 때는 분당에 비가 오는데 탄천을 걸어가는데 집에 가는 사이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비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말하면 폭풍이 몰아쳤는데 믿는 사람 집 사과만 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비행기 사고가 나서 추락했는데 믿는 사람만 죽지 않은 것입니다. 경제 위기로 다 망했는데 믿음 좋은 집사님은 승승장구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 백성이 거주하는 땅을 구별하였다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이 아니라 특별은총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정 오늘날도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보여주기 위해 재앙 가운데 보호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임했던 세 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동일하게 겪어야 했던 재앙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파리 재앙은 애굽 사람에게는 내렸지만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인의 구별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재앙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축업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파리가 들끓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파리가 없는 것입니다. 파리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무엇일까요?
1. 파리 재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교훈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계속해서 “너희들이 다른 것이 무엇이냐?”를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내 노예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내 지배를 받아야 하고 나를 존경해야 하고 내 지시를 따라야 하고 나를 신으로 섬겨야 할 신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아니다 이 백성은 나를 섬기고 내 말을 따라야 하고 나의 지시를 따라야 할 구별된 내 백성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늘 말합니다. “네가 다는 것이 무엇이냐? 똑같은 인간이 뭐 잘난 체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것들 똑같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야 하고 세상의 돈을 섬겨야 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몰라서 그렇습니다. 며칠 전 새벽 기도를 마치고 탄천을 걸어 집으로 갔습니다. 가는데 공사관계로 인도가 출입 통제 간판으로 막혔습니다. 그래서 자전거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오시던 노인 분이 손가락질을 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왜 인도를 놓아두고 자전거 길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대단히 의로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상대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의로운데 왜 너는 더럽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 보며 우리를 그렇게 정죄할 수 있습니다. 왜 믿는 사람으로 청빈하게 살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왜 믿는 사람으로 사랑하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새벽이라 자전거도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도 조금만 가면 공사로 자전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알텐데 우선 보이지 않으니까 마구 정죄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가면 자신도 왜 자전거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줄 알 턴데 알지 못하니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왜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가느냐는 것입니다. 왜 주일날 모처럼 쉬는 날 운동을 하고 쉬지 교회에 나가냐는 것입니다. 왜 먹고 살기도 힘든데 헌금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나라도 힘든데 외국의 어린 아이들을 도와주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구별된 백성, 하나님의 백성, 성도라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니까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구별된 백성입니까?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사람입니다(20).
20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소유물, 바로의 노예, 바로가 생사권을 쥐고 있는 백성, 바로가 땅을 주어야 먹고 살 수 있는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소속입니다. 우리는 이 땅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19)”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가 가난하다고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배우지 못하고 명예와 인기가 없다고 무시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권을 우리 하나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이 우리를 구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행한 대로 우리의 상태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별해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둘째, 우리는 예배하는 자로 구별된 사람입니다(20).
20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를 말씀입니다.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내 백성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무엇하기 위해 보내라는 것입니까? 나를 섬길 수 있도록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의 정치적 지배권에 있다고 해서 바로를 섬길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자, 하나님께 제사드릴 자,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로 거룩하게 구별한 자라는 말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훈받고, 용서받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말씀듣고 위로받으며 소망 가운데 일어날 자라는 말입니다. 아무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백성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전(2009.05.16) 신문을 보니까 남자 한센씨 환자가 일반인보다 최대 7년 가까이 장수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 의대 박상철 교수, 보건대학원 조영태 교수팀은 국내 한센병 환자 1만 5000여명의 기대 수명을 전수 조사한 결과 남성 한센병 환자들은 일반인 남자보다 최대 7년 가까이 장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를 박상철 교수는 "가난 속에 차별받는 삶을 산 한센병 남자 환우들이 일반 남성보다 확연히 더 오래 사는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힘을 바탕으로 절제된 생활을 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고 말했습니다. 예배함으로 건강의 축복을 받을 자로 구별된 자들입니다.
미국 뉴욕 예시바대학 연구팀은 9만 2,395명의 50∼79세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등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사망위험이 약 20%가량 낮다고 합니다. 영국 'The Times'의 보도에 의하면 최소 한 매주 한 차례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이나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참된 안식을 누릴 자로 구별되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새 힘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존귀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잠 8:17) 우리는 예배를 통해 진정한 용서를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사 55:7) 우리는 예배를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고 영혼이 소생함을 누립니다(사 55:2-3). 예배시간에 나와 삶에 지친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면 우리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새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자유는 예배를 위해 주신 것이며 우리에게 주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예배를 위해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예배로 구별된 자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사람으로 구별된 사람입니다(22).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파리 재앙을 내릴 때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하여 파리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신 32: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축의 악질 재앙 때에도(출9:14)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우박재앙 때에도(출9:26), 흑암 재앙 때에도(출10:23), 장자를 멸하는 마지막 재앙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해 주었습니다(출11:7). 홍해를 건널 때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해 주었습니다(출14:19,20), 우리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8)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하나님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백성된 신분의 특권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예배의 특권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보호의 특권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특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를 합니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가 이러한 특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2. 오늘 파리 재앙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우리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릴 수 있는 복을 방해하는 것을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데 넘어가야 할 장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4개의 장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가 혼합주의 장벽(25)입니다. 둘째는 적당주의 장벽(28)입니다. 셋째는 개인주의 장벽입니다(10:11). 넷째는 물질 지상주의 장벽입니다(10:24). 이 장벽을 뚫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됨의 축복, 예배의 축복, 보호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들어가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무엇인지를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혼합주의 장벽과 적당주의 장벽을 넘어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자녀됨과 예배, 보호의 축복을 누리려면 먼저 혼합주의 장벽(25)을 넘어가야 합니다.
애굽 온 땅에 파리 재앙이 내리니까 바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라고 말합니다. 구태여 광야로 나가 제사드릴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별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면서 예배만 드리라는 것입니다. 다신교를 섬기는 그들이 하나님 섬기는 것도 하나의 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것을 종교 다원주의라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고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는 '너도 옳고 나도 옳으니 모두 다 옳다'는 상대주의입니다. 구별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를 거부합니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과 경험적이라는 것입니다. 비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지성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양성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적당히 섞여서 애굽 사람과 함께 어울려 그들과 조화하며 예배드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파리 떼”라는 말은 '혼합하다' 또는 '섞여 있다'라는 뜻을 지닌 '아라브'란 말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떼' 혹은 '혼합물'을 뜻합니다. 사탄이 늘 우리를 거룩한 삶, 구별된 삶, 성도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첫 번째 방법은 혼합주의 유혹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자기 땅에서 자기 밑에서 종노릇하고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믿고 실제는 사탄의 권세 속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말뚝은 세상에 박아놓고 교회만 나가라는 것입니다. 닻을 올리지 않으면 아무리 노를 저어도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항해할 수 없습니다. 빙글빙글 돌 뿐입니다. 노를 더 세게 저으면 저을수록 어지럽기기만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주제권을 바로에게서 하나님께 과감하게 옮겨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생사화복권이 바로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로는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너희 신분의 본질은 여전히 노예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가지만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믿어라. 그러나 네 가치관, 네 인생관, 네 세계관, 네 재물관은 여전히 세상에 말뚝을 박아놓고 살아라."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신앙인의 목에 개목거리를 매어 놓고 여전히 원격 조정하고 싶어합니다. 이 장벽을 벗어나지 못하면 교회는 나오지만 언제나 세상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참 평안이 없습니다.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시험들고 회의와 좌절이 다가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늘 비난거리만 보입니다. 세상과 비교합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판단합니다.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끊임없이 비판적이고 부정적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세상적인 눈으로 비판하고 시비만 일삼습니다. 이런 사람 예배의 복을 못 누립니다. 보호의 복을 못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학교 다닐 때 아주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학교를 비판하고 교단을 비판하고 기성 목회자를 비판하다가 결국 자신의 신앙도 잃어 버립니다. 잘 된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형제는 졸업한지 10여년 넘은 후 결혼식에 갔는데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노상에서 객사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담그고 머뭇머뭇하니까 차지도 덥지도 않으니까 쉬어 버립니다. 신앙의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참 자유가 없습니다. 예배의 기쁨이 없습니다. 보호의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심과 자랑이 없습니다.
이 제안에 대하여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첫째가 그리함은 부당합니다.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우리가 이런 당당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비난하는 자 앞에 당당하게 그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말하는 자들앞에 그것을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합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자 앞에 그것은 아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합니다.
둘째가 결국 예배를 통해 생명에 손상이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혼합주의에 사로잡히면 결국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애굽 사람은 짐승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짐승을 잡으면 그들은 미워할 것이고 심지어는 생명을 위협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2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어떤 타협안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말씀이 가라는대로 가고 멈추라는 대로 멈추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흘 길쯤 광야로 가 희생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출 3:18) 바로 사흘길 쯤 가는 곳은 시내산입니다. 그곳에 가서 예배드릴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모세는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C. S. 루이스는 말합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둘 다를 얻으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오직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복받는 길입니다. 혼합주의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는 적당주의 장벽(28)을 넘어 서야 합니다.
모세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바로는 또다시 무슨 타협안을 제시합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보낼 것이니 너희 하나님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서가 붙습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넘어야 할 두 번째 장애물입니다. 저는 적당주의 장벽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교회에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열심을 다해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야단스럽게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신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가까이 하고 장로님 가까이 하고 성도님 가까이 하면 시험 드니까 적당한 선을 유지하고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유별나게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술 끊고, 담배 끊고, 주일 가게 문 닫고 수요예배, 새벽 예배 뭘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며 교회를 다니냐?는 것입니다. 불리한 상황이 오면 빨리 도망갈 수 있도록 발만 담그라는 것입니다. 상황 봐서 적당히 무릎까지만 담그라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는 가슴까지만 담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22)”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의 강물에 온전히 담그길 원하십니다. 적당히 끓는 물은 결코 증기 기관차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적당주의 함정에 빠지면 기회주의가 됩니다. 빛도 집중해야 때울 수 있습니다. 열정을 다해야 교회도 부흥하고 사업도 성공하는 것입니다. 무엇엔가 미친 사람들이 사람에게 유익한 혁신적인 것을 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적당히 섬기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신 10:12)”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에 예배드릴 때 보십시오. 일천 번제를 드리며 예배들 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적당히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는 것 적당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신 4:29)”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보십시오. 술취한 여인처럼 전력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보십시오. 왕이지만 전심전력을 다해 기도합니다. 다윗이 기도할 때 보십시오. 왕입니다. 체면 불구하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바로를 보십시오. 방해하는 사람도 기도의 능력을 압니다. 사단도 기도의 능력을 압니다. 예수를 압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의 능력을 압니다.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부탁이 어떤 기도부탁이겠습니까? 그는 이미 기도의 능력에 대하여 체험받은 사람입니다. 개구리 재앙 때 모세가 기도하자 개구리가 다 죽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기도의 맛을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진정 바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기도부탁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기도를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를 이용할 뿐입니다. 바로는 기도를 부탁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희생 제사를 통해 자신의 안위 도모하려고 할 뿐입니다.
적당주의로 모세를 유혹하는 바로의 속셈을 알고 있는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첫째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할 터인데 내일이면 파리가 떠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일 분명히 떠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에 대한 확신이 분명합니까? 기도에 적당주의가 아닙니다. 31절 보십시오. 모세의 기도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파리가 떠났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 인도에 대한 확신, 보호에 대한 확신,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둘째 권력자 앞에서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합니다.
모세의 태도를 보십시오. 29절을 보십시오. 바로에게 다시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러 차례 보내 준다고 해 놓고 약속을 번복하는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어떻게 합니까? 32절을 보십시오.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거짓을 밥먹듯이 합니다. 우리는 비록 권력이 없는 자 같고 연약한 자 같지만 어떤 힘 앞에서도 나약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집트 땅의 풍요가 있고 편안함이 있는 것같지만 노예의 땅입니다. 죄악의 땅입니다. 떠나야 할 땅입니다. 과감하게 떠나야 합니다. 과감하게 끊어야 할 것 끊어 버려야 합니다. 과감하게 놓아 버려야 할 것 미련없이 놓아 버려야 합니다.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합니다. 광야는 척박하고 고난이 있는 것같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있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땅입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백성들을 모아 놓고 오직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 섬기라라 결단하였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850:1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타협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을 향해 외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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