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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부르신 이유"(Why He Called Us)

에스겔 김영봉 목사............... 조회 수 3939 추천 수 0 2011.03.30 17:02:41
.........
성경본문 : 겔4:1-6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6. 1. 29 김영봉 목사

신년특별 5회 연속 설교-
'새해에 받은 말씀'(2) "우리를 부르신 이유"(Why He Called Us)

--에스겔 4:1-6; 갈라디아서 6:1-10

 

에스겔서 4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견디기 어려운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명령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바울은 스스로의 짐을 질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짐까지 지라고 권면합니다.
1.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고통스러운 삶의 방식을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스겔 4장 4절, 5절, 6절)

2.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면 무엇을 완성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2절)

3."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9절)고 권면하면서, 바울은 누구에게 선을 행하라고 요청합니까?(10절)

 

토의할 질문

1.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아픔에 참여하는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쓸 데 없는 동정심입니까? 인정상 해야 하는 일입니까? 그런 행동이 실제로 그 사람에게 치료와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담임목사의 오늘 칼럼을 읽어보고 토론해 보십시오.
2.왜 예수를 믿습니까? 믿음이 성숙해지면 결국 어떤 인간상에 이르게 됩니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3.갈라디아서 6장 10절을 읽어 보십시오. 오늘의 그리스도인 들은 이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어디에서 부족합니까? 어디에서 잘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웃과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중 가요 가수 중 한 분이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 김권사님은 충청도 시골에서 여러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켜 냈는데, 그분에 의하면 그 어머니는 "평생 예수만 찾고 , 예수만 믿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만 생각하고 사셨던 그 독실한 권사님이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택했던 직업이 '가짜 꿀장사'였다고 합니다.

 

진짜 꿀과 설탕물을 혼합하여 가마솥에 넣고 오랫 동안 저으면서 끓어주면, 웬만해서는 구분할 수 없는 가짜 꿀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권사님은 가짜 꿀을 만들기 위해 가마솥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큰 주걱으로 저어야 했습니다. 매일 그 일을 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고된 노동을 이겨내기 위해 그 권사님은 늘 당신의 애창곡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 애창곡은 이겁니다-"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어떻습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생을 견뎌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고생은 '내 주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가짜꿀을 만드느라고 고생하면서 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찬송의 의미를 진실로 아는 사람이라면, 주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힘썼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뜻대로 살기 위해 얼마 있다가 가짜꿀 만드는 일을 중단하고 다른 일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 권사님을 정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이미지를 한 번 마음에 그려 보십시오. 시골의 어두운 부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짜꿀을 만들면서, 도시로 나간 자식들 생각에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찬송을 부르며 일하고 있는 중년 여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innocent한 모습입니까? (영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죄송합니다만, 이 뜻에 해당하는 우리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서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이 모습이innocent해 보이는 것은 그분이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가짜꿀이, 설탕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환자들에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그분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큰 잘못인 줄 몰랐습니다. 그분은 도시로 나간 자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고, 될 수 있는 한 이문(profit)이 많이 남는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2.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린 것은 '믿는다'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견디면서까지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주님을 따르고 믿어서 어찌 되자는 것입니까?

한국 교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을 보면, 김권사님같은 분이 지금도 많이 있겠다 싶습니다. 오직, 이 땅에서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에 신앙 생활의 목표를 두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곧잘 윤리적인 규범(ethical norm)과 법적인 질서(legal provisions)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뿐, 사회법을 지키거나 윤리적인 책임을 감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권사님 당시에는 사회 전체가 워낙 어두웠고, 찌들게 가난했고, 교육의 수준도 낮았고, 밤낮으로 일하여 한 가족이 먹고 살기에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분의 행동이 innocent해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어떤 사람이 그러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innocent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끄럽고 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법도 무시하고, 윤리도 무시하고, 나 하나 혹은 내 가정 하나 잘 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믿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할 때, 일이 잘 풀릴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잘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미혹하는 영'의 속임수로 인해 만사가 잘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냥 조건이 잘 맞아 잘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된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복이라고 성급하게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살 경우,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이웃의 아픔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잘 믿는데,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그래서 사업도 잘 되고 자녀도 잘 되었는데, 그 사람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면, 그게 예수를 바로 믿는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사람을 보았다면, 그분의 신앙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곳에 있는 분 중에 한 분도 예외 없이 '그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 여기서 조심하십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두고는 '그건 아니지!'라고 판단할 줄 알면서, 그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내 삶의 방식이 혹시 이웃에게 아픔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호하게 '이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다. 내 삶의 방식이 내 배우자에게 아픔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자녀에게 혹은 내 부모에게 아픔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직장 동료에게, 내 친구들에게, 내 직장의 손님들에게 혹시 내가 아픔의 원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3.

예수를 믿는 이유는 죽고 나서 천국 가는 티켓(ticket to heaven)을 따자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예수 믿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잘 먹고 잘 살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예수 믿는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층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어서 언제까지고 그 풍요로움을 연장하기를 바라고, 게다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죽은 후에 영원한 생명까지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는 참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새로 지어져,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참된 인생이 되고, 그렇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원의 차원에 잇닿는 참된 삶, 영원한 삶에 이르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두고 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나님을 진실로 만났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의 원인이 되는 삶을 청산하게 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아픔들을 치료해 주십니다. 아니면, 그 아픔을 받으셔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웃의 아픔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그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내 가진 것을 나누는 데까지 가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꿈꾸어야 할 삶의 비전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해에 주신 말씀'이라는 다섯 편의 연속 설교의 두 번째, "시대와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으라"는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상한 행동을 요청하십니다. 430일동안 모로 누워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계속 읽어가보면 알겠지만, 쇠똥으로 구운 곡식을 하루에 작은 참치캔 하나 정도의 분량 만큼씩만 먹고 살라고 요청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런 요청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이 지은 죄값에 참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에스겔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벌을 받지 않아도 되었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죄의 값을 대신 짊어지도록 기대하십니다.

 

오늘 함께 읽은 갈라디아서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두 가지 삶의 지침을 제안합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살피라고 합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다른 사람의 짐이 되지 않도록, 다른 사람의 아픔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헛된 일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사정을 유심히 돌아보아,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는 회복되도록 돕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그 짐을 나누어지고, 할 수 있는대로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라는 요청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언제나 개인적인 차원 (personal dimension)과 관계적인 차원(relational or social dimension)을 함께 가집니다. "나 홀로 깨끗하니 충분하다"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이웃을 찾고, 그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고, 그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내 것을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 "내 코가 석자인데, 내가 누구를 돌아보라는 말인가?"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회를 해 보면 압니다. 정말로 코가 길게 빠져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코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유심히 돌아봅니다. 그러다가 자기처럼 코가 길게 빠진 사람을 만나면 함께 아픔을 나누며 도울 길을 찾습니다. 대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코가 그렇게 길게 빠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상황이 아닙니다. 마음입니다. The heart of the matter is the matter of the heart!

 

4.

이 원리는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이웃에게 아픔과 손해와 불편의 원인이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 한인 이민교회들이 그렇습니다. 다른 인종들이 살고 있는 한 복판에 예배당을 세워놓고, 지속적으로 교통 체증을 유발시키고,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소음을 발생시킵니다. 그러면서도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값, 집값만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 지역 주민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도록 힘쓰십시다. 우선, 여러분 각자가 이 점에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주변 주택가에 주차하시는 분들에게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법적으로 허용되어 있는 street parking을 금지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만, 할 수 있는 한, 추가주차장을 이용해 주시고, 어쩔 수 없이 street parking을 하실 때는, 집주인에게 불편이 없겠는가, 두 번 세 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나다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소로 인사해 주시고, 친절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적으로는 지역 사회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할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교회가 제 스스로의 아픔에 짓눌려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도 분열과 갈등과 투쟁에 휘말려 있는 많은 교회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교회의 분쟁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탄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 때문에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싸움판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만으로는 저렇게 추하고 악하게 될 수가 없으니, 저건 분명 사탄이 하는 일이다"고 결론을 냈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는 관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참된 모습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지만, 교회가 타락하면 사탄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사탄의 존재을 증명하는 표징이 된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 되겠습니까?

 

셋째,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교회는 자신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이웃과 시대의 아픔을 짊어집니다. 세상에, 사람 치고 문제 없는 사람 없고, 가정 치고 문제 없는 가정 없고, 교회 치고 문제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 문제를 딛고 일어나 이웃의 문제에 눈길을 둘 수 있느냐, 이웃의 아픔에 손을 뻗칠 수 있느냐- 바로 여기에서 신앙인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며, 성령에 사로잡힌 교회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5.

2006년, 우리는 '이웃과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으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이 앞으로 우리 교회의 삶의 방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웃과 시대의 아픔을 찾아보고,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내 살을 져며내 줄줄 아는 신자, 그런 교회로 성숙하기를 기원합니다.

 

현재 미국 복음주의권의 정신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론 사이더(Ronald Sider)가 다른 저자들과 함께 쓴 Churches That Make a Difference: Reaching Your Community with Good News and Good Works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서적으로 건강하고 바른 사역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론 사이더는 '이웃과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는' 사역의 네 범주(categories)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Relief 즉 '구호'로서의 사역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찾아가 약품을 제공하거나, 치료비를 대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Individual Development 즉 개인을 발전시켜주는 사역입니다. 아픈 사람의 상처를 치료할 뿐 아니라, 재활 치료를 통해 온전히 활동하도록 돕는 사역입니다. 셋째는 Community Development 즉 주변 여건을 개선시키는 사역입니다. 아픈 사람이 다시 병에 들지 않도록 환경을 개선시키는 일입니다. 넷째는 Structural Change, 즉 법과 사회 제도와 구조를 개선시키는 사역입니다(pp. 84-102).

 

론 사이더에 의하면, 건강한 교회는 이 네 가지 범주를 모두 고려하여 선교 활동을 합니다. 그런 사역을 가리켜 holistic ministry 즉 '통전적인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그 동안, 교회는 '인간의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죽고 난 후 천당에 가도록' 인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예수님의 복음을 얼마나 축소시키고 왜곡시킨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얼마나 단순하게 인식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인간을 대하되, 영혼만이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를 보아야 하고, 인간만을 보지 말고 인간 하나 하나가 살고 있는 환경까지 보아야 하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와 제도와 법과 질서까지 보아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럴 때에만 교회는 진정으로 이웃과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준에 의해 우리 교회의 사역을 한 번 비추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relief 즉 구호의 차원에서는 칭찬받을만 합니다. 지난 해, 카트리나 피해가 생겼을 때, 단번에 2만 5천달러를 헌금해 보냈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고 내 주머니를 터는 데는 인색하지 않습니다. 단기 선교 활동도 그렇고, 다른 선교 사역도 그렇습니다. 꽤 잘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구호의 차원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만일 굶고 있는 사람에게 한 끼의 빵을 주는 데서 그치고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근거없는 자의식(self-righteousness)에 빠져 산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 사람이 재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그리하여 결국 영적 차원에까지 눈을 뜨고 믿음에 이르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구호의 차원으로부터 개인을 회복시키는 차원으로 우리의 사역을 끌어 올리기 위해 올해부터 시작한 사역이 '헬프라인'(Help-Line) 사역입니다. 여러분이 드린 '사랑의 헌금'은 relief를 위해 사용되며, '헬프라인'은 지속적인 도움을 통해 개인을 회복시키고 재기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사역에 자원하셨습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중에 갑작스러운 어려움에 빠져 여러 달동안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혹은 그런 분들을 보셨다면, 주저 마시고 목회자들을 찾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손길' 사역팀에서는 대상자를 잘 살펴서, 일정 기간 도움을 줌으로써 곤경을 빠져 나올 수 있을 경우에 한하여 지원할 것입니다.

 

6.

저는 우리 교회에서 하는 사역 모두가 구호의 차원에서 벗어나 좀 더 온전한 사역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 선교부가 단기선교사역을 중장기 프로젝트로 전환시켜 온 이유는 일년에 한 번 찾아가 생선을 먹여주고 오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일년 내내 스스로 생선을 잡아 먹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의도입니다. 어린이 사역과 청소년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서는 비교적 잘 하고 있다 하지만, '구호'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사역을 하시는 황의경 전도사님과 청소년 사역을 하시는 차동빈 목사님이 문제있는 아이들에 대한 '구호 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뒷치닥 거리를 하는, '뒷수습 사역'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개인 개인을 돕고, 그 개인이 그리스도인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법과 제도를 고치도록 의견을 모으는 데까지 이 사역이 성장해 가야 합니다. 문제를 예방할뿐 아니라, 문제를 치료하는 청소년들로 키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4차 장기 계획 안에 '청소년 센터' 계획이 있습니다. 이 계획은 relief의 차원으로부터 도약하자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공해 준 해로운 환경과 전혀 다른, 건강한 성장 환경을 제공해 주자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아픔을 알고 그 아픔을 끌어 안으려 한다면, 이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먼 미래에는 건강한 기독교 대안학교(Christian alternative school)를 열 꿈을 꾸어보기도 합니다. 이 지역에 공부 잘 시키는 학교는 많으니까, 우리까지 그런 경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품성으로 인성을 훈련시키며, 건강한 시민으로 양육시키고, 뚜렷한 가치관으로 이웃의 아픔을 위해 헌신할 사람들을 키워내는 대안 학교는 꼭 필요하다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분에 넘치는 복을 주시어 우리 교회를 오래 섬길 수 있게 된다면, 꼭 실현해 보고 싶은 일 중 하나입니다.

 

이런 사역은 엄청난 헌신을 요청합니다. 팔을 걷어부치고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드려 봉사할 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 사역에서의 자원봉사를 위해 은퇴를 고대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많이 생겨야 하고, 자신의 능력을 돈벌이에만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헌신할 젊은이들도 많아야 합니다. 교우들 대다수가 각자 할 일을 찾아 묵묵히 일하는 성숙함에 이르지 못하고는, 이런 사역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이권 타툼에 교회가 풍비박산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런 사역을 위해서는 재정적인 헌신도 더 강해져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우리 교회 올드 타이머(old timer) 중 한 분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오래 동안 우리 교회에서 머물러 줄 것을 권면하시면서, 목회자들이 이웃을 아픔을 돌아보는 일을 위해 당신의 유산의 1/3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병에 걸려 nursing home에 들어가 재산을 다 소비하고 가지 않기를 기도하고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와싱톤한인교회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미 유서에 그렇게 쓰셨답니다. 저는, 제게 대한 이 엄청난 믿음과 신뢰 앞에서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분은,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리며 주머니를 틀켜쥐고 있는 분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정도로 넉넉히 헌신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헌신하는 분들이 많아진다면, 우리 교회는 청소년 센터를 마련하는 일뿐 아니라, 이 지역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필요한 일들을 넉넉히 해 내고도 남을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교회도 부자가 되면 틀림없이 타락합니다. '부자 '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자신만을 위해, 자체 확장을 위해, 자체 소비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 혹은 단체를 말합니다. 이런 교회는 '부하지만 가난한 교회' 입니다. 보십시오. 자기 확장에만 분투하는 교회에 가시면 끊임없이 헌금하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가난하면 그렇게 끊임없이 달라고 하겠습니까? 3천명, 5천명이 모인다 해도, 자기 확장을 위해 계속 '달라, 달라'고만 하는 교회는 실제로는 핍절한 교회 (destitute church)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끊임없이 모으기만 하려는 사람이나, 그 재산으로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궁핍한 사람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반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웃의 아픔을 위해 섬기는 사람 혹은 그런 교회는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요 부유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지 않아도, 성도들이 교회의 사역에 감동하여 기꺼이 헌신합니다. 그러므로 '달라, 달라'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돈이 부족한 법이 없습니다. 교회는 부지런히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는 사역을 위해 노력하고,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음을 아는 성도들은 힘껏 봉헌합니다. 그런 교회의 목회자들은 검소하고 소박한 살림살이에 만족하고, 교회의 내적 필요를 위해서는 절약하고 긴축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이미 이러한 교회였음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더욱 그런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또한 기원합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의 아픔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힘쓰십시다. 이 시대와 사회의 아픔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진정한 교회가 되도록 힘쓰십시다. 쉘던 바너큰(Sheldon Vanauken)은 그의 책 Severe Mercy('잔혹한 은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기독교가 참된 종교임을 증명해 주는 최고의 증거는 바로 그리스도인들 자신이며, 그들의 기쁨과 확신과 완전함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종교라고 생각하게 해 주는 최고의 증거도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이 기쁨을 잃고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기 만족적인 거룩함에 빠져 있을 때, 편협하고 억압적인 삶을 살 때, 그 때마다 기독교는 수천 번씩 죽는다.(p. 82)

 

정말 옳은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의 원인이 되는 그리스도인 혹은 그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짜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 자신의 아픔에 짓눌려 사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 내적인 문제에 짓눌려 살아가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별 것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 몸 하나 혹은 자기 가정 하나 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 혹은 자기 교회 하나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고 활동하는 교회도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찮아 보이게 만듭니다. 오직, 눈을 밖으로 돌리고 손을 뻗쳐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힘쓰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런 교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짜 '복된 구원의 소식'임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그리싀도인,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오, 주님, 주님은
저희의 아픔을 끌어 안으시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당신의 전부를 드리셨습니다.
그 은총으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저희를 능하게 하시어
이웃의 아픔을 돌보도록 부르십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귀한 사역에 참여하고
주님의 귀한 고난에 참여할 영예를 주셨습니다.
저희를 능하게 하옵소서.
이웃의 아픔의 원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저희 자신의 아픔을 딛고
이웃의 아픔에 응답하게 하소서.
이 와싱톤한인교회가
통전적인 사역으로써
주님의 복음이 진정한 복음임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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