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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붙들며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출애굽기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401 추천 수 0 2011.04.13 16: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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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11:1-10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약속 붙들며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출11:1-10

대부분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공연을 감상하는 자세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바울을 일찍이 말씀을 통해 설교듣는 자의 자세에 대하여 경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기 욕심을 따를 것이며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교사들의 말을 들으려고 그들에게 모여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외면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3-4, 현대인의 성경) 예레미야 시대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평강하다 평강하다'만을 외치며 백성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었을 뿐이지 결국은 멸망이었습니다. 우리는 설교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설교 방송, 설교 테이프, 설교집, 인터넷 설교 수많은 설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루한 것같고, 어나운서 같은 듣기 좋은 음색이 아니고, 개콘처럼 즐겁지 않으며, 대형 뮤지컬처럼 감동적이지 않지만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 문을 열고 아멘으로 화답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10번째 재앙에 대한 예고입니다. 하나님께서 길고 자세하게 예고합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아홉 번이나 기대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홉 번이나 기대한 것을 이루지 못하면 대부분 사람은 낙심이 됩니다. 특히 아홉 번째는 바로가 모세에게 떠나라고 했습니다.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다시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40세 때처럼 자신의 혈기로 나아간 길도 아니고 80이 되어 하나님께서 불러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나아간 길입니다. 그러나 아홉 번씩이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되면 낙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분문에는 낙심이라는 말도 냄새도 나지 않지만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약속 붙들며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잡았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약속붙들고 사명을 감당하지만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여,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신앙인들은 이 땅에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때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 하나님의 약속은 반듯이 이루어질 때가 있으니 약속 붙들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1-3). /하나님의 때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낙심합니다. 특히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모세였다면 낙심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홉 번 시도했는데 아홉 번 실패했습니다. 약속 믿고 교회 건축을 시작했는데 아홉 번 실패했습니다. 저는 심하게 낙심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홉 번이 아니라 두세 번만 연속 실패해도 쉽게 낙심합니다. 교회 건축을 한다고 하니까 10여년 동안 새벽기도회를 모시고 다니며 기도했던 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저는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더 열심히 기도해 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낙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했습니다. 무슨 약속을 했는지 출애굽기 3장 20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출 3:20-22)”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 보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이나 쳤는데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에게 은혜를 입어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 믿고 위험을 무릅쓰고 바로에게 나아가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아홉 번이나 재앙이 내렸는데도 애굽 사람들이 재물을 주며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바로 앞에 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기 전에 모세에게 임하셔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야.”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정령 다 쫓아내리니”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합니까? 강조점이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앞으로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린 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홉 번째까지 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1년이나 새벽기도회를 나왔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홉 번이나 전도했는데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잘해 주었는데 떠났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계속 실패만 다가온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마지막 한 가지가 더 남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스스로 여러 번은 두 번이라고 다섯 번이라고 아홉 번이라고 기준을 삼고 그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수는 그 여러 번이 열 번이었습니다. 이루어질 때까지였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다시 말씀합니다. 백성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 말을 들으면 황당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출 11:3)”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노예로만 보던 사람들입니다. 멸시하고, 조롱하고, 핍박하고, 자신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열등인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애굽 백성들이 노예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의 필요를 따라 극진히 대접해 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세를 어떻게 본다는 말입니까? 아주 위대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를 무서워하는 것보다 모세를 더 무서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권위보다 더 권위 있게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심히 크게 뵈었더라”라는 것 입니다.애굽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바로가 여러 번에 걸쳐 모세 앞에 용서를 구하며 재앙을 중지시켜 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입니다(10:16, 17). 하나님께서 "너로 바로에게 신(神)이 되게 하리라" (7 : 1)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결국 대적자들이 인정해 주고 무시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인정해 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개 미디안 목동에 불과했던 모세, 살인자 도망자인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세의 말을 듣고 은금 패물을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결국 나올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장 35-3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출 12:35-36)” 이것은 이미 출애굽할 것을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해 주었는데 그 약속을 하나님이 성취시켜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4을 보세요.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4)”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히 이루어집니까?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민족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자주민이자, 마치 전쟁의 승리자처럼 많은 재산과 명예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 붙들고 일하면서 기대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야 정령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은 결국 보상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주십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들이 하는 선한 사업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들이 품고 있는 가족 구원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들의 비전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은 내 능력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에 약속 붙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4-8)./자신의 무능력

사람이 낙심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입니다. 낙담하게 됩니다. “나는 할 수 없구나, 나는 별 수 없구나.”라고 포기합니다. 낙담이란 담력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낙망합니다. 소망이 떨어져 버립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꿈을 잃어버리고 포기해 버립니다. 나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아홉 번에 걸쳐 시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안 된다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바로는 아홉 번이나 시도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주기는커녕 자신 앞에 나타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경고합니다. 자신의 무능력 앞에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애를 쓰지마 능력부족을 늘 느낍니다. 기도할 수 밖에 없어 기도하지만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얼마나 낙심이 됩니까? 장로님 건물 문제로 수년동안 기도했습니다. 좋은 결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낙심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이제 민족 해방은 물 건너 간 일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 번만 더”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이제까지 안 되었는데 또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낙심하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출 11:4)” 바로에게 담대히 나아갑니다.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재앙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네가 나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한 간접 재앙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재앙이 어떤 재앙이라는 말씀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왕의 장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감히 누가 바로의 후계자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바로가 모세를 죽이기 전에 왕의 후계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백성의 장자, 몸종의 장자까지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너는 나 만나면 죽인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 당신의 장자를 당신 백성의 장자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가축의 처음 난 것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생축'이란 그들의 재산입니다. 종교적인 성수(聖獸)로 여겨져 사육되고 보호받던 모든 종류의 동물입니다. 결국 애굽의 종교와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친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전무후무한 부르짖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고역으로 탄식하였지만 이제 애굽 백성이 슬픔으로 울부짖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개 한 마리도 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위에 가장 민감한 것이 개인데 애굽의 큰 곡성과는 완전히 상반되게 이스라엘 각 집에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고요한 평온만이 깃들 것이기 때문에 개조차 조용히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바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보호하신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신하 앞에서 모세는 어떤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3절에서 모세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에게 심히 크게 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실제적으로 모세 앞에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완전히 굴종하며 예의를 갖추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세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할 것이고 신격화 되었던 바로의 명예가 처절히 추락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시하고 비난하고 조롱했던 사람들이 모세 앞에 무릎을 끓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모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 : 10)라고 했던 모세가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능력 없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힘이 없다고, 지능의 부족하다고, 재물이 없다고, 건강치 못하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말을 사람들이 들어 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하고, 변두리 인생같고, 연약한 것같지만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 주시면 위대한 사역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약속 붙들고 나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의 능력을 행함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만듭니다. 약하다고 부족하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어부입니다. 무식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쓰시니까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니 그는 메시야의 계보에 들어갔습니다. 야곱은 여러차례 사기를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를 붙들어 쓰니까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한갓 목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받는 성군이 되었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입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자식도 없이 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니까 예수님의 족보에 든 여인이 되었습니다. 폐품도 예술가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인 "황소의 머리"도 자전거의 좌석과 손잡이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랜 전 영국 런던 다리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한 노인이 바이올린을 켜며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한 외국 사람이 지나다보니 그 노인이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해 그 노인에게 바이올린을 좀 만져보자고 했답니다. 그렇잖아도 손이 시렸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낡은 바이올린을 그에게 건네주었는데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순간 행인들의 발길은 멈췄고 한 푼 두 푼 노인의 모자에는 던진 돈이 수북하게 쌓여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고 군중 속에서 “파가니니다! 파가니니!”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이태리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였답니다. 똑같은 악기이지만 누구의 손에 쓰임받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집니다.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부족함도 은혜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부족함을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라고 고백했습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약속 붙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9-10)/방법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붙들고 일하다가 때때로 왜 낙심합니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원치 않았습니다. 원수들이 다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박 넝쿨 밑에서 낙심되어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워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아홉 번이나 재앙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바로가 계속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도 모세는 아홉 번까지 계속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약속 붙들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바로의 마음은 강퍅합니다. 자녀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육을 했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녀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해도 안 되는 구나, 별수 없구나, 포기할 수밖에 없구나.” 모세도 기대했을 것입니다. 두 번 세 번하면 바로의 마음이 변하여 민족을 내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 번이나 재앙이 내렸는데도 여전히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고 이제는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직접 밤에 바로의 장자를 죽인다는 경고를 하는데도 모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정도면 들을 줄 알았는데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애굽 땅에 나의 기사를 더하리라.”라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 이 약속한 기적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바로가 이렇게 재앙을 당하면서 이스라엘을 보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기사 즉 지금까지 내려졌던 아홉 재앙 뿐 아니라 최종적인 재앙 열번째 재앙을 내렸는데도 바로의 마음이 강퍅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은혜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유기해 놓았기 때문에 강퍅한 대로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호렙 산 소명 사건 이후 근 6개월 이상 지연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바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당장이라도 출애굽이 가능했으나, 그토록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푸신 이후 출애굽을 시킨 것은 분명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출애굽기 9장 16절을 보세요.
“네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9:16)” 여러 차례 바로가 징계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10장 2절을 보세요.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10: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확립시키고 후손들에게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을 초토화시키고 결국 광야 생활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유월절 어린양을 통해 창세기 3장 15절부터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적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10번째 재앙이 없었다면 유월절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최종적으로 유월절 어린양에게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셔서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형이 구약에서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이미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유월절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 5:7)”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의 모형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성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결국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될 예수님께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내 방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끔 물이 동하는데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이 나았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가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치는 방법이 물에 들어가야만 낫는 줄 알았습니다. 그 방법으로 낫지 못하니까 실망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6)” 병자는 말합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7)” 그러나 주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물에 들어가는 방법이 아니라 말씀 한 마디로 치료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내 방법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가 원하는 방법으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교인들이 목회자가 자신의 방법과 다르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목사님이 유능해야 부흥된다고 생각하면 우리 목사님이 유능하지 못하니까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님 한 분 한 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사업이 사장님이 무능해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원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업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그 과정을 꼭 필요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입덧도 생명을 출생시키는 과정입니다. 수술을 받는데 고통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통도 치료의 과정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단 두 차례 재앙으로 부드러워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10번째까지 경고했는데도 여전히 강퍅한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 계셨답니다. 열심히 사역을 하였지만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웠고 진리에 대해 적대적이었답니다. 목사님이 섬겼던 기간 동안 회심하거나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낙심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 중 헌금 쟁반이 돌려지고 있을 때, 한 어린 소년이 쟁반을 바닥에 놓고는 일어서서 그 쟁반 위로 올라섰답니다. 드릴 헌금이 없어 자신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했답니다. 쟁반 위에 올라섰던 소년이 바로 181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간 최초의 선교사 보비 모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내 방법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실을 맺어주실 것입니다(갈 6:9).
우리는 내 방법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방법을 기대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약속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엡 3:13)”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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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5092 창세기 아브라함의 손님접대와 중보기도 창18:1-33  한태완 목사  2011-04-20 3161
5091 사무엘상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 자의 최후 삼상31:1-13  이윤식 목사  2011-04-18 2638
5090 사무엘상 이스라엘의 참된 왕 다윗 삼상 30:16-31  이윤식 목사  2011-04-18 2308
5089 전도서 인생의 허무와 성도의 자세 전9:1-18  한태완 목사  2011-04-18 2513
5088 사무엘상 하나님을 힘 입어라 삼상30:1-15  이윤식 목사  2011-04-18 2264
5087 사무엘상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 삼상29:1-11  이윤식 목사  2011-04-18 2371
5086 사무엘상 사울의 그린 마일(Green Mile) 삼상28:15-25  이윤식 목사  2011-04-18 2350
5085 사무엘상 하나님의 침묵에 절망하는 사울 삼28:3-14  이윤식 목사  2011-04-18 2633
5084 사무엘상 찢겨진 왕권 삼상15:24-35  이윤식 목사  2011-04-18 2341
5083 사무엘상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15:17-23  이윤식 목사  2011-04-18 5873
5082 사무엘상 후회 하시는 하나님 삼상15:10-16  이윤식 목사  2011-04-18 3157
5081 사무엘상 성전(聖戰)과 불순종 삼상15:1-9  이윤식 목사  2011-04-18 2404
5080 사무엘상 고통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삼상1:9-20  이윤식 목사  2011-04-18 1383
5079 사무엘상 하나님께서 하신 일 삼상1:1-8  이윤식 목사  2011-04-18 2580
5078 시편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43:1-5  한태완 목사  2011-04-18 3329
5077 누가복음 기도로 십자가를 지라 눅22:42-44  강종수 목사  2011-04-17 2349
5076 창세기 아브라함과 축복의 언약 창17:1-27  한태완 목사  2011-04-16 3366
5075 마태복음 십자가와 세 사람의 손 마26:47-48  하원양 목사  2011-04-16 3243
5074 마가복음 예수님의 기도생활 막1:35-39  이동원 목사  2011-04-15 1814
5073 출애굽기 하나님의 인도하심 출13:17-22  김필곤 목사  2011-04-13 3217
5072 출애굽기 내가 남길 위대한 유산은? 출13:1-16  김필곤 목사  2011-04-13 2740
5071 출애굽기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출12:29-42  김필곤 목사  2011-04-13 2622
5070 출애굽기 마지막까지 꼭 기억해야 할 일 출12:15-28  김필곤 목사  2011-04-13 2604
5069 출애굽기 보혈의 능력 출12:1-14  김필곤 목사  2011-04-13 3577
» 출애굽기 약속 붙들며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출11:1-10  김필곤 목사  2011-04-13 2401
5067 출애굽기 흑암 재앙의 교훈 출10:21-29  김필곤 목사  2011-04-13 2755
5066 전도서 인간의 지혜와 인생의 허무 전8:1-17  한태완 목사  2011-04-10 2757
5065 고린도전 건전한 신비 고전14:15-19  강종수 목사  2011-04-10 2053
5064 사도행전 남에게 주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행20:35  한태완 목사  2011-04-10 2201
5063 신명기 공부하는 즐거움 신6:4-9  이정수 목사  2011-04-08 2496
5062 신명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신6:4-9  이정수 목사  2011-04-08 3638
5061 히브리서 버려라! 닦으라! 정돈하라! 히12:1-2  이정수 목사  2011-04-08 2167
5060 디모데전 예의범절의 힘(The Power of Manners) 딤전3:1-13  이정수 목사  2011-04-08 2923
5059 잠언 日常(일상)의 힘(The Power of Everyday Life) 잠4:18-19  이정수 목사  2011-04-08 2003
5058 창세기 억척의 힘(The Power of Tough) 창25:19-49:33  이정수 목사  2011-04-08 2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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