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가장 수지 맞는 일"(The Most Profitable Thing)
디모데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807 추천 수 0 2011.04.30 23:51:29| 성경본문 : | 딤전4:6-10 |
|---|---|
| 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 2. 4
새해에 받은 말씀 4;
"가장 수지 맞는 일"(The Most Profitable Thing) "
디모데전서 4:6-10; 마태복음 6:22-23
1.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은 웬만하면 결딜 수 있지만,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문제뿐 아니라, 그로 인해 어지럼증을 겪어야 합니다. 또한 보이는 사물이 정확하지 않아서 발을 헛디뎌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흐릿하게 보고 사는 것이 낫지,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은 참고 살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22-2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한 눈'과 '성하지 못한 눈'은, 원어의 의미에 의하면, '시력 좋은 눈'과 '시력이 나쁜 눈'이 아니라, '초점 맞은 눈'과 '초점이 맞지 않은 눈' 입니다.
눈은 마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즉, 예수님은 여기서 '초점이 맞추어진 마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초점이 잘 맞추어지면, 인생 전체가 밝은 빛 가운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눈의 초점이 맞으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듯, 마음의 초점이 맞으면 하루 하루의 삶이 흔들림 없이 서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강조점 중 하나가 바로 '초점 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전체가 6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거듭 거듭, 영성 생활에 있어서 초점을 잃지 말고,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라고 권고합니다. 바울 사도가 이 점에 대해 이토록 마음을 쓰는 이유는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살던 상황 때문입니다.
2.
디모데전서는 에베소에서 활동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쓰여진 편지인데, 그 내용은 에베소 교인들을 지도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에베소가 어떤 도시였는지를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바울이 활동하던 지역들을 여행하고 돌아오신 집사님께서 그곳에서 구입한 책들을 제게 잠시 빌려 주셨는데, 그 가운데 에베소에 관한 책도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에 대해 잘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서쪽 끝에 있는 해변 도시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 도시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거점 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했고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었습니다. 디모데 전서가 쓰여질 당시, 어림잡아 25만명 정도가 살았다고 하니, 고대 도시로서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 살던 여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꿈이 에베소에 가 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없는 물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에베소에는 수 많은 종교 사상과 신화와 철학이 유입되어 서로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world) 중 하나라고 하는 아데미 신전(the temple of Artemis)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중심 신전이었던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 정도 더 큰 것으로서, 에베소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데미'(Artemis)는 로마인들이 '다이아나'(Diana)라고도 불렀던 여신으로서, 풍요와 다산과 쾌락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이 신전에서는 매우 부도덕하고 열광적인 종교 행위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특히, 이 신전에 살던 거룩한 여인들 즉 신녀들과 예배자들이 벌였던 성적인 방종은,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성인용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였습니다.
아데미 신전과 이 신전에서 행해지는 광적인 종교 행위는 에베소의 영적 분위기를 암시해 줍니다. 그곳에서는 수 많은 종교들이 선전되고 있었고, 그 도시민들은 시장에 가서 쇼핑을 하듯, 자기의 기호에 맞는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언제라도, 더 솔깃해 보이는 종교가 생기면, 마치 낡은 모델의 셀폰을 바꾸듯, 종교를 바꿨습니다. 한가한 사람들은 삼삼 오오 모여서 종교에 대해 혹은 신화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종교를 꿰고 있느냐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신화를 알고 있느냐가 당시로서는 교양의 척도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디모데전서를 읽으면, 바울 사도가 왜 그토록 자주, 마음의 초점을 잃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제게 절제력이 있어 보입니까, 절제력이 없어 보입니까? 어떤 분은 제가 고도의 절제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어떤 분은 절제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3.
이러한 영적 분위기 안에서 살던 에베소 교인들은 영성의 초점을 제대로 맞추고 살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다른 에베소 시민들처럼 여러 가지 종교들을 시험해 보면서 신전을 전전했습니다. 어느 종교가 가장 능력 있고, 어떤 제사가 가장 이로운지를 따져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밤 늦도록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 보내기를 즐겼습니다. 용하다는 제사장에게 찾아가 운명을 점치고 액운을 때우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와 신화를 버리고,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참된 종교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믿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 많은 종교와 신화들 속에 살면서 마음의 초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맞추어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나사렛 예수 이야기도 흥미롭기는 했지만, 제우스의 이야기나 여신 아프로디떼 이야기 혹은 탄탈루스나 다른 신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더 재미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때로는 다른 종교도 매력있어 보였고, 유익해 보였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신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유쾌한 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달리 생각했습니다. 편지 서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신화와 끝 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1: 3-4). 4장 7절에서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마지막 부분에서는 또 이렇게 명령합니다. "디모데여, 그대에게 맡긴 것을 잘 지키십시오. 속된 잡담을 피하고, 거짓 지식의 반대 이론을 물리치십시오. 이 반대 이론을 내세우다가 믿음을 잃은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6:20-21)
여기서 바울의 어조는 아주 단호하고 분명해 보입니다. 신앙의 초점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한 눈을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호기심을 따라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가한 잡담, 무익한 토론, 그리고 해로운 변론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미 있어도, 마음의 초점을 흐뜨러놓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귀를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이교 신전에 가서 머리 조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에 정진하며, 그 안에서 진보하도록 힘쓰라는 말입니다.
4.
이 권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울림이 큽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신앙의 초점을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며, 때로 그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만큼이나 우리가 사는 오늘 와싱톤 지역에도, 신앙의 초점을 흐뜨러 놓는 요소들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초점 잃은 신앙으로 인해 비틀거리고 휘청거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치인이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은 뉴스 거리도 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집회에서 한 마디 잘 못하면 여론의 뭇매를 맞습니다. 물론, 정치인들이 기독교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쏟아놓는 지나친 발언을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똑 같은 사람이 동계 올림픽의 성 사를 위해 돼지 머리를 차려놓고 드린 천제에 참여하여 절하는 것은 뉴스 거리가 될 뿐 아니라, 여론이 칭찬을 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신론자가 방송에 나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운데, 기독교인이 신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점쟁이나 영매나 무당이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너그럽게 보아 주면서, 목회자가 출연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가 큽니다.
저도, 기독교인들이 방송에 출연하여 전도할 심산으로 드러내 놓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큽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신앙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다짐하고 방송을 시작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에 대해 혹은 미신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매우 너그러운데, 역사를 통해 검증된 전통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까다롭게 대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분위기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점을 치거나 무당을 찾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저희 어릴 적에는 점 치는 것이나 굿 하는 것을 '미신'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부끄러이 여겼는데, 이제는 민속 문화라는 이름으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영매가 TV에 나와 쑈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TV 카메라 앞에서 방청객이 만나고 싶어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어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되자, 믿는다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그것 대로 유익한 면이 있고,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 유익하니, 다 해보겠다는 심산입니다.
우리 교우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전쟁 때, 작은 아버님을 잃어 버렸는데, 그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어머님께서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아들의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어서, 독립문 근처 영천에 있는, 가장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잃어버린 아들의 혼을 불러 보았습니다. 이 어머니는 예수를 믿는 분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한 참이나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던 무당이 갑자기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죽은 아들의 혼이 찾아온 것입니다. 어머니는 무당을 통해 찾아온 아들의 혼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어머니께서는 작은 아들이 죽었다고 믿고 제사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작년, 남북 이산 가족 찾기 본부에서 그분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북에 있는 아들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찾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금강산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영매라는 존재들이 이런 것입니다. 굿과 점이라는 것이 결국은 우리를 악한 영의 손아귀에 팔아 넘기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재미로, 호기심으로, 혹은 다급한 김에 마음을 팔 일이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참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성화시키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영적 생활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앞길이 막막하십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하십니까? 불안한 미래에 대해 뭔가 속 시원한 말이라도 듣고 싶으십니까?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자신의 수하로 만들어 착취하고자 하는 악한 영의 장난임을 간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시편 저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리라"(시 42:5)고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자신을 가르치십시다. 아무리 경황 없는 일을 당해도, 마음의 초점이 흔들리지 않게 하십시다. 믿음의 길에서 비틀거리지도, 휘청거리지도 마십시다. 주님의 길에 견고하게 서 있으면, 그분이 우리의 길을 열어가실 것입니다.
5.
이와는 달리, 다른 종교 전통에, 혹은 유행하는 사이비 영성 운동에, 혹은 새롭게 주의를 끌고 있는 신화 이야기에 마음이 팔려 초점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즈음 식자 층에서 회자되는 아주 인기있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종교인은 아닙니다만, 영적인 사람입니다"(I am not a religious person, but I am spiritual.)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마치 깨어 있는 사람의 특징인양,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영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인정하므로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편협하게 어느 한 종교에 매이는 잘못은 범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양한 종교들을 다 섭렵하여, 가장 폭 넓고 가장 차원 높은 영성을 추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 종교, 저 종교, 이 단체, 저 단체를 기웃거립니다.
이제는 완전히 열기가 식었습니다만, 작년까지 큰 관심을 끌었던 '다 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Dan Brown)의 인터뷰 기사 중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당신은 기독교인입니까?"(Are you a Christian?) 이라고 묻자, 댄 브라운이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여러 종교를 배우는 학도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질문은 더 많아집니다. 저에게 있어서 영적인 탐구는 일생 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I consider myself a student of many religions. The more I learn, the more questions I have. For me, the spiritual quest will be a life-long work in progress.). 얼마나 멋진 대답입니까? 기독교만을 고집하는 저같은 사람보다 얼마나 넓어 보이고 교양있어 보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아주 위험한 함정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댄 브라운은 자신의 영적 탐구 과정에서 여러 종교를 연구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의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차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 탐구는 결국 '자신이 만든 신'을 '자신의 방식대로' 신봉하는 '자신의 종교'로 귀착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는 그 사람을 두둔해주고 위로해 주기만 하는 우상 종교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취사선택하는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호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으로 따질 때, 여러 종교들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하려는 태도보다, 하나의 종교 전통을 고수하며 그 종교의 본질을 신실하게 추구해 나가는 것에 더 큰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 있다 해도,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깨달아 나아가면, 나의 영적 시야가 점점 넓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경험으로 증언하는 바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무엇이든지 다 믿고 따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사들은 아주 믿음이 특별하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매우 존중하거나 매우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을 의심 없이 다 믿는 목사님이 계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제가 믿는 바를 납득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의문이 나는 점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아직도, 기독교의 전통이므로 제가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납득하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제 평생에 다 납득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겸허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대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골라 내고 이해 되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제 영적 시야가 활짝 열리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제, 저의 영적 여정을 되돌아 봅니다. 과거에는 전혀 납득할 수 없던 것들 가운데 이제는 환히 이해가 되는 것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과거에는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제거했으면 싶었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던 요소들 중, 이제는 기독교 신앙의 기둥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저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기를 거부합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 앞에 겸손히 서서, 하나씩 하나씩 마음에 담아보려고 힘쓸 따름입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6.
영성 생활의 초점을 분명히 하십시다. 이것이 새 해에 받는 네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영성 생활의 초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경건의 훈련'이 바로 그것입니다. '경건'(eusebeia)이라는 말은 '일상 생활 속에서 신앙인 답게 살아가는 것"(the Christian religion as expressed in daily life)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영성 생활의 초점입니다. 그것을 4장 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대가 이런 교훈으로 형제자매를 깨우치면, 그대는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지금까지 좇고 있는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이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자는 것도 아니고, 액운을 없애자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얻자는 것도 아닙니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높은 차원의 지식을 가지자는 것도 아니며, 종교에 대해 '많이 알자'는 것도 아닙니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경건의 훈련을 하자는 데 있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 사도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빈껍데기 영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딤후 3:5). 가장 중요한 경건의 능력은 하루 하루의 일상 생활에서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다운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 믿는 사람다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 그리고 믿는 사람다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산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 생활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초점입니다.
"영성 목회로 성숙되는 교회"라는 말이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이것을 하자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분명히 하고, 비틀거리지 말고, 휘청거리지 말고, 견고한 걸음으로 영성 훈련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종교에 해박한 지식인도 아니고, 종교에 파묻혀 사는 광신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기를 꿈꾸며 영성 생활에 힘쓰자는 말입니다. 우리 각자가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경건의 훈련을 하자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속회로 예배와 찬양과 선교와 교육과 봉사를 통해 성도들의 경건의 훈련을 돕자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과 속회 활동과 교회 전체의 목회 활동의 초점을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7.
8절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경건의 훈련은 장차 올 세상의 생명 즉 영생에 대해서도 약속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생명에도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은 단지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하루 하루 생활 속에서 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것들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수지 맞는 일은 경건의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9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 말은 참말이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입니다"라고 확인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약속을 믿어 보십시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까지 강한 어조로 보장을 했으니, 한 번 믿어 보십시다. 그리고 앞으로 영성 목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십시다. 교회에서 안내하는 대로, 매일 매일 경건 생활을 하는 일에 힘써 보십시다. 새로 재편되는 속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경건의 훈련에 참여해 보십시다. 예배로 모이고, 성경 공부로 모이고, 찬양으로 모여, 경건의 훈련에 힘써 보십시다. 선교로, 봉사로, 봉헌으로, 헌신으로 경건의 훈련을 다져 보십시다. 바울 사도의 약속을 시험해 보십시다.
제가 믿기로는, 시험해 보나 마나, 우리 자신도 믿기지 않는 변화가 우리 개인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속회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지역 사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더욱, 그 믿음 위에 서서 이 일을 추구해 나가십시다. 이생과 내생에 참으로 약속 있는 이 경건의 훈련을 우리 삶의 초점을 삼아 보십시다. 주님께서 필경 넘치는 은총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시험해 보나 마나, 우리 자신도 믿기지 않는 변화가 우리 개인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속회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지역 사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더욱, 그 믿음 위에 서서 이 일을 추구해 나가십시다. 이생과 내생에 참으로 약속 있는 이 경건의 훈련을 우리 삶의 초점을 삼아 보십시다. 주님께서 필경 넘치는 은총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시험해 보나 마나, 우리 자신도 믿기지 않는 변화가 우리 개인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속회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지역 사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더욱, 그 믿음 위에 서서 이 일을 추구해 나가십시다. 이생과 내생에 참으로 약속 있는 이 경건의 훈련을 리 삶의 초점을 삼아 보십시다. 주님께서 필경 넘치는 은총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갈라져 있고 분산되어 있는 저희의 마음을
주님의 영으로 치유하여 주소서.
가장 위대한 안과 의사의 능숙한 솜씨로
저희 마음의 초점을 잡아 주소서.
한 마음 한 뜻으로
경건의 훈련에 힘쓰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게 하시고
그렇게 살게 하소서.
아멘.
새해에 받은 말씀 4;
"가장 수지 맞는 일"(The Most Profitable Thing) "
디모데전서 4:6-10; 마태복음 6:22-23
1.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은 웬만하면 결딜 수 있지만,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문제뿐 아니라, 그로 인해 어지럼증을 겪어야 합니다. 또한 보이는 사물이 정확하지 않아서 발을 헛디뎌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흐릿하게 보고 사는 것이 낫지,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은 참고 살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22-2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한 눈'과 '성하지 못한 눈'은, 원어의 의미에 의하면, '시력 좋은 눈'과 '시력이 나쁜 눈'이 아니라, '초점 맞은 눈'과 '초점이 맞지 않은 눈' 입니다.
눈은 마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즉, 예수님은 여기서 '초점이 맞추어진 마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초점이 잘 맞추어지면, 인생 전체가 밝은 빛 가운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눈의 초점이 맞으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듯, 마음의 초점이 맞으면 하루 하루의 삶이 흔들림 없이 서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강조점 중 하나가 바로 '초점 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전체가 6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거듭 거듭, 영성 생활에 있어서 초점을 잃지 말고,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라고 권고합니다. 바울 사도가 이 점에 대해 이토록 마음을 쓰는 이유는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살던 상황 때문입니다.
2.
디모데전서는 에베소에서 활동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쓰여진 편지인데, 그 내용은 에베소 교인들을 지도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에베소가 어떤 도시였는지를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바울이 활동하던 지역들을 여행하고 돌아오신 집사님께서 그곳에서 구입한 책들을 제게 잠시 빌려 주셨는데, 그 가운데 에베소에 관한 책도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에 대해 잘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서쪽 끝에 있는 해변 도시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 도시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거점 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했고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었습니다. 디모데 전서가 쓰여질 당시, 어림잡아 25만명 정도가 살았다고 하니, 고대 도시로서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 살던 여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꿈이 에베소에 가 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없는 물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에베소에는 수 많은 종교 사상과 신화와 철학이 유입되어 서로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world) 중 하나라고 하는 아데미 신전(the temple of Artemis)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중심 신전이었던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 정도 더 큰 것으로서, 에베소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데미'(Artemis)는 로마인들이 '다이아나'(Diana)라고도 불렀던 여신으로서, 풍요와 다산과 쾌락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이 신전에서는 매우 부도덕하고 열광적인 종교 행위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특히, 이 신전에 살던 거룩한 여인들 즉 신녀들과 예배자들이 벌였던 성적인 방종은,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성인용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였습니다.
아데미 신전과 이 신전에서 행해지는 광적인 종교 행위는 에베소의 영적 분위기를 암시해 줍니다. 그곳에서는 수 많은 종교들이 선전되고 있었고, 그 도시민들은 시장에 가서 쇼핑을 하듯, 자기의 기호에 맞는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언제라도, 더 솔깃해 보이는 종교가 생기면, 마치 낡은 모델의 셀폰을 바꾸듯, 종교를 바꿨습니다. 한가한 사람들은 삼삼 오오 모여서 종교에 대해 혹은 신화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종교를 꿰고 있느냐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신화를 알고 있느냐가 당시로서는 교양의 척도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디모데전서를 읽으면, 바울 사도가 왜 그토록 자주, 마음의 초점을 잃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제게 절제력이 있어 보입니까, 절제력이 없어 보입니까? 어떤 분은 제가 고도의 절제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어떤 분은 절제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3.
이러한 영적 분위기 안에서 살던 에베소 교인들은 영성의 초점을 제대로 맞추고 살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다른 에베소 시민들처럼 여러 가지 종교들을 시험해 보면서 신전을 전전했습니다. 어느 종교가 가장 능력 있고, 어떤 제사가 가장 이로운지를 따져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밤 늦도록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 보내기를 즐겼습니다. 용하다는 제사장에게 찾아가 운명을 점치고 액운을 때우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와 신화를 버리고,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참된 종교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믿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 많은 종교와 신화들 속에 살면서 마음의 초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맞추어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나사렛 예수 이야기도 흥미롭기는 했지만, 제우스의 이야기나 여신 아프로디떼 이야기 혹은 탄탈루스나 다른 신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더 재미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때로는 다른 종교도 매력있어 보였고, 유익해 보였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신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유쾌한 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달리 생각했습니다. 편지 서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신화와 끝 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1: 3-4). 4장 7절에서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마지막 부분에서는 또 이렇게 명령합니다. "디모데여, 그대에게 맡긴 것을 잘 지키십시오. 속된 잡담을 피하고, 거짓 지식의 반대 이론을 물리치십시오. 이 반대 이론을 내세우다가 믿음을 잃은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6:20-21)
여기서 바울의 어조는 아주 단호하고 분명해 보입니다. 신앙의 초점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한 눈을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호기심을 따라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가한 잡담, 무익한 토론, 그리고 해로운 변론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미 있어도, 마음의 초점을 흐뜨러놓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귀를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이교 신전에 가서 머리 조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에 정진하며, 그 안에서 진보하도록 힘쓰라는 말입니다.
4.
이 권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울림이 큽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신앙의 초점을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며, 때로 그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만큼이나 우리가 사는 오늘 와싱톤 지역에도, 신앙의 초점을 흐뜨러 놓는 요소들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초점 잃은 신앙으로 인해 비틀거리고 휘청거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치인이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은 뉴스 거리도 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집회에서 한 마디 잘 못하면 여론의 뭇매를 맞습니다. 물론, 정치인들이 기독교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쏟아놓는 지나친 발언을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똑 같은 사람이 동계 올림픽의 성 사를 위해 돼지 머리를 차려놓고 드린 천제에 참여하여 절하는 것은 뉴스 거리가 될 뿐 아니라, 여론이 칭찬을 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신론자가 방송에 나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운데, 기독교인이 신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점쟁이나 영매나 무당이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너그럽게 보아 주면서, 목회자가 출연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가 큽니다.
저도, 기독교인들이 방송에 출연하여 전도할 심산으로 드러내 놓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큽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신앙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다짐하고 방송을 시작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에 대해 혹은 미신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매우 너그러운데, 역사를 통해 검증된 전통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까다롭게 대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분위기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점을 치거나 무당을 찾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저희 어릴 적에는 점 치는 것이나 굿 하는 것을 '미신'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부끄러이 여겼는데, 이제는 민속 문화라는 이름으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영매가 TV에 나와 쑈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TV 카메라 앞에서 방청객이 만나고 싶어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어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되자, 믿는다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그것 대로 유익한 면이 있고,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 유익하니, 다 해보겠다는 심산입니다.
우리 교우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전쟁 때, 작은 아버님을 잃어 버렸는데, 그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어머님께서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아들의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어서, 독립문 근처 영천에 있는, 가장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잃어버린 아들의 혼을 불러 보았습니다. 이 어머니는 예수를 믿는 분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한 참이나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던 무당이 갑자기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죽은 아들의 혼이 찾아온 것입니다. 어머니는 무당을 통해 찾아온 아들의 혼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어머니께서는 작은 아들이 죽었다고 믿고 제사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작년, 남북 이산 가족 찾기 본부에서 그분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북에 있는 아들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찾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금강산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영매라는 존재들이 이런 것입니다. 굿과 점이라는 것이 결국은 우리를 악한 영의 손아귀에 팔아 넘기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재미로, 호기심으로, 혹은 다급한 김에 마음을 팔 일이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참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성화시키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영적 생활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앞길이 막막하십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하십니까? 불안한 미래에 대해 뭔가 속 시원한 말이라도 듣고 싶으십니까?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자신의 수하로 만들어 착취하고자 하는 악한 영의 장난임을 간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시편 저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리라"(시 42:5)고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자신을 가르치십시다. 아무리 경황 없는 일을 당해도, 마음의 초점이 흔들리지 않게 하십시다. 믿음의 길에서 비틀거리지도, 휘청거리지도 마십시다. 주님의 길에 견고하게 서 있으면, 그분이 우리의 길을 열어가실 것입니다.
5.
이와는 달리, 다른 종교 전통에, 혹은 유행하는 사이비 영성 운동에, 혹은 새롭게 주의를 끌고 있는 신화 이야기에 마음이 팔려 초점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즈음 식자 층에서 회자되는 아주 인기있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종교인은 아닙니다만, 영적인 사람입니다"(I am not a religious person, but I am spiritual.)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마치 깨어 있는 사람의 특징인양,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영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인정하므로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편협하게 어느 한 종교에 매이는 잘못은 범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양한 종교들을 다 섭렵하여, 가장 폭 넓고 가장 차원 높은 영성을 추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 종교, 저 종교, 이 단체, 저 단체를 기웃거립니다.
이제는 완전히 열기가 식었습니다만, 작년까지 큰 관심을 끌었던 '다 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Dan Brown)의 인터뷰 기사 중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당신은 기독교인입니까?"(Are you a Christian?) 이라고 묻자, 댄 브라운이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여러 종교를 배우는 학도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질문은 더 많아집니다. 저에게 있어서 영적인 탐구는 일생 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I consider myself a student of many religions. The more I learn, the more questions I have. For me, the spiritual quest will be a life-long work in progress.). 얼마나 멋진 대답입니까? 기독교만을 고집하는 저같은 사람보다 얼마나 넓어 보이고 교양있어 보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아주 위험한 함정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댄 브라운은 자신의 영적 탐구 과정에서 여러 종교를 연구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의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차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 탐구는 결국 '자신이 만든 신'을 '자신의 방식대로' 신봉하는 '자신의 종교'로 귀착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는 그 사람을 두둔해주고 위로해 주기만 하는 우상 종교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취사선택하는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호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으로 따질 때, 여러 종교들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하려는 태도보다, 하나의 종교 전통을 고수하며 그 종교의 본질을 신실하게 추구해 나가는 것에 더 큰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 있다 해도,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깨달아 나아가면, 나의 영적 시야가 점점 넓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경험으로 증언하는 바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무엇이든지 다 믿고 따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사들은 아주 믿음이 특별하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매우 존중하거나 매우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을 의심 없이 다 믿는 목사님이 계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제가 믿는 바를 납득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의문이 나는 점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아직도, 기독교의 전통이므로 제가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납득하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제 평생에 다 납득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겸허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대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골라 내고 이해 되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제 영적 시야가 활짝 열리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제, 저의 영적 여정을 되돌아 봅니다. 과거에는 전혀 납득할 수 없던 것들 가운데 이제는 환히 이해가 되는 것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과거에는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제거했으면 싶었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던 요소들 중, 이제는 기독교 신앙의 기둥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저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기를 거부합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 앞에 겸손히 서서, 하나씩 하나씩 마음에 담아보려고 힘쓸 따름입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6.
영성 생활의 초점을 분명히 하십시다. 이것이 새 해에 받는 네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영성 생활의 초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경건의 훈련'이 바로 그것입니다. '경건'(eusebeia)이라는 말은 '일상 생활 속에서 신앙인 답게 살아가는 것"(the Christian religion as expressed in daily life)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영성 생활의 초점입니다. 그것을 4장 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대가 이런 교훈으로 형제자매를 깨우치면, 그대는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지금까지 좇고 있는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이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자는 것도 아니고, 액운을 없애자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얻자는 것도 아닙니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높은 차원의 지식을 가지자는 것도 아니며, 종교에 대해 '많이 알자'는 것도 아닙니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경건의 훈련을 하자는 데 있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 사도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빈껍데기 영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딤후 3:5). 가장 중요한 경건의 능력은 하루 하루의 일상 생활에서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다운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 믿는 사람다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 그리고 믿는 사람다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산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 생활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초점입니다.
"영성 목회로 성숙되는 교회"라는 말이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이것을 하자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분명히 하고, 비틀거리지 말고, 휘청거리지 말고, 견고한 걸음으로 영성 훈련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종교에 해박한 지식인도 아니고, 종교에 파묻혀 사는 광신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기를 꿈꾸며 영성 생활에 힘쓰자는 말입니다. 우리 각자가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경건의 훈련을 하자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속회로 예배와 찬양과 선교와 교육과 봉사를 통해 성도들의 경건의 훈련을 돕자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과 속회 활동과 교회 전체의 목회 활동의 초점을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7.
8절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경건의 훈련은 장차 올 세상의 생명 즉 영생에 대해서도 약속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생명에도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은 단지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하루 하루 생활 속에서 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것들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수지 맞는 일은 경건의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9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 말은 참말이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입니다"라고 확인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약속을 믿어 보십시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까지 강한 어조로 보장을 했으니, 한 번 믿어 보십시다. 그리고 앞으로 영성 목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십시다. 교회에서 안내하는 대로, 매일 매일 경건 생활을 하는 일에 힘써 보십시다. 새로 재편되는 속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경건의 훈련에 참여해 보십시다. 예배로 모이고, 성경 공부로 모이고, 찬양으로 모여, 경건의 훈련에 힘써 보십시다. 선교로, 봉사로, 봉헌으로, 헌신으로 경건의 훈련을 다져 보십시다. 바울 사도의 약속을 시험해 보십시다.
제가 믿기로는, 시험해 보나 마나, 우리 자신도 믿기지 않는 변화가 우리 개인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속회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지역 사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더욱, 그 믿음 위에 서서 이 일을 추구해 나가십시다. 이생과 내생에 참으로 약속 있는 이 경건의 훈련을 우리 삶의 초점을 삼아 보십시다. 주님께서 필경 넘치는 은총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시험해 보나 마나, 우리 자신도 믿기지 않는 변화가 우리 개인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속회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지역 사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더욱, 그 믿음 위에 서서 이 일을 추구해 나가십시다. 이생과 내생에 참으로 약속 있는 이 경건의 훈련을 우리 삶의 초점을 삼아 보십시다. 주님께서 필경 넘치는 은총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시험해 보나 마나, 우리 자신도 믿기지 않는 변화가 우리 개인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속회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지역 사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더욱, 그 믿음 위에 서서 이 일을 추구해 나가십시다. 이생과 내생에 참으로 약속 있는 이 경건의 훈련을 리 삶의 초점을 삼아 보십시다. 주님께서 필경 넘치는 은총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갈라져 있고 분산되어 있는 저희의 마음을
주님의 영으로 치유하여 주소서.
가장 위대한 안과 의사의 능숙한 솜씨로
저희 마음의 초점을 잡아 주소서.
한 마음 한 뜻으로
경건의 훈련에 힘쓰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게 하시고
그렇게 살게 하소서.
아멘.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