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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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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 (마태복음 21장 1-11절)
< 하나님께 합한 사람 >
1998년 6월 29일, 뉴욕에 있는 임병철 목사님 교회 산상수련회를 인도하러 갈 때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비행기가 경유를 위해 잠시 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하려고 비행기가 이륙 장소에 섰는데 계기판에 이상신호가 떠서 이륙을 못했습니다. 그 후 5시간 동안 고장원인을 밝히지 못해 결국 그날 저녁 오사카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공항에서 왠지 한국으로 전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화하니까 “간암으로 투병하던 첫째 누님이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급히 돌아와 누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수의를 입힐 때 누님의 볼을 만지며 혼자 속으로 말했습니다. “누님! 이렇게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비행기를 멈추셨군요.”
만약 그때 비행기 고장이 없었다면 누님의 마지막 모습도 못 보고 큰 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극적으로 누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지금 누님이 천국에서 기다린다고 확신하니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끔 기도와 묵상을 통해 먼저 천국에 가신 아버님 및 누님과 영적인 교제를 합니다. 그러면 좋았던 시절의 아름다운 영상이 그려지면서 큰 힘을 얻습니다. 그처럼 천국소망은 사람을 기쁘고 들뜨게 하는 최대의 소망입니다.
돌아가신 누님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서 가끔 가족들의 오해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실한 여종이었습니다. 나이 50이 되었을 때 누님은 영혼과 가정을 치유하는 기독교 상담학 교수가 되겠다고 가족들이 반대하는 미국 유학길을 떠났습니다. 당시 안수집사였던 매형은 너무 당황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떨어져 살 수 없으니 꿈으로라도 확신을 주소서!”
어느 날, 매형이 2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누님이 태평양 저편의 미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는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태평양 저편을 바라보는데 신비한 은빛 세계에서 부모님이 아주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님이 갑자기 태평양을 순식간에 건너 매형의 집 베란다로 나타나 슬픈 표정으로 “여보!” 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매형도 “여보! 어떻게 된 일이오!”라고 하면서 놀라서 깼습니다.
그 꿈 얘기를 하며 매형이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이번에 미국에 가면 안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소!” 그러자 누님이 말했습니다. “당신 꿈에 제가 미국에 가 있었잖아요? 그 꿈은 제가 미국에 가는 꿈일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꿈은 미국에 가는 꿈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꿈이었습니다.
얼마 후, 두 번째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누님이 너무 사랑스럽게 보여서 매형이 가까이 다가가 “여보!”하고 사랑스럽게 등을 만질 때 손이 등으로 쑥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아닌 혼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도 너무 놀라서 “여보!” 하고 소리치며 깼습니다.
그 두 번째 꿈 얘기를 하며 매형이 말했습니다. “여보! 이번 미국 유학행은 아무래도 취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왠지 다시는 못 볼 곳으로 떠날 것 같아요.” 그때도 걱정 말라면서 유학을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네브래스카의 오마하 주립대학 기숙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배가 아파서 2달 동안 거의 식사도 못하고 잠도 못 잤습니다. 결국 14센티짜리 암 덩어리를 발견하고 급히 귀국한 후에 50일간 투병 후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사람 생각으로는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해서 괜히 죽음을 자초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합한 진실한 전도사’였던 누님을 빨리 곁에 두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천사 같은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있는 최상의 행복을 주시려고 남보다 조금 일찍 부르실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누님 돌아가신 후 매형이 말했습니다. “아내가 주의 종이 된 후 12년 동안 아내는 천사였습니다. 제가 천사와 살면서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살다 보면 지혜롭게 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마음만은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제 곧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살다가 천국 문에 이르면 신랑이신 예수님이 얼마나 반겨 맞이하겠습니까? 또한 먼저 간 성도들과 기쁨의 재회를 하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 천국 소망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이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찬란한 내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슬픔에 너무 매달리지도 마십시오. 우리 민족은 과거의 한을 담고 살았기에 과거를 뜻하는 단어는 많았습니다. ‘어저께, 그저께, 그끄저께’란 단어가 다 고유한 한글 단어입니다. 반면에 내일을 말하는 고유한 단어는 거의 없어서 할 수 없이 ‘내일(來日)’이란 한자어를 차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내일이 없었던 민족에게 교회가 들어와서 무엇을 주었습니까? ‘내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 항상 내일이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지금은 미약해도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면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믿고 나가십시오.
<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 >
어렸을 때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내가 선생님께 필요한 존재구나!”라고 생각하고 얼마나 신나게 그 심부름을 했습니까? 그처럼 누군가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본문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새끼를 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1. 선택된 사람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 감람산 벳바게에서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 맞은편 마을은 바로 베다니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베다니로 가면 나귀와 나귀새끼가 있는데 그것들을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다.”
왜 주님이 나귀를 끌고 오게 했습니까? 주전 490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메시야가 나귀를 타신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4절). 하나님은 나귀 한 마리에 대해서도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에 대한 계획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자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물건을 살 때 천원을 내고 얻는 물건은 ‘천 원짜리’라고 하고, 만원을 내고 얻는 물건은 ‘만 원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지불하고 구원받았기에 ‘예수님짜리’입니다. 그처럼 가치 있는 성도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이 없겠습니까?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멋지게 쓰임 받는 삶을 꿈꾸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있느냐? 얼마나 아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때 무한한 가치와 행복을 느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을 향한 분명하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주인공이 나다!”란 확신을 가지고 사십시오.
자신의 부족함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이렇게 핀잔을 줄 수 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뭘 하겠어? 돈도 없이 어떻게 하려고 해! 이런 장소에서 어떻게 성공하겠어? 정말 그렇게 큰 비전을 이룰 수 있겠어?” 그때마다 본문 3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스스로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겠나?” 그때도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부족해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연약한 나귀새끼도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쓰임 받았는데 하물며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가 왜 쓰임 받지 못하겠습니까? 지금도 ‘갈대인 시몬’이 ‘반석인 베드로’가 되는 원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2. 순수한 사람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새끼를 함께 끌고 왔을 때 주님은 어느 나귀를 탔을까요? 어미나귀는 경험이 많은 프로지만 새끼나귀는 아마추어입니다. 그러면 인간적으로는 어미나귀를 타야 하지만 마가복음 11장과 누가복음 19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험 많고 돈을 목적으로 일하는 프로보다 순수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므로 프로 이상의 실력은 갖추되 항상 아마추어리즘을 잃지 마십시오. 절대 하나님보다 돈이 앞서게 하지 말고 교인들끼리 다단계 등으로 돈거래를 하는 일도 없게 하십시오. 교회생활에서 돈 문제를 개입시키면 결코 진정한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보다 순수하고 겸손한 아마추어를 쓰십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왜 주님은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까? 주님이 순수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님의 겸손함은 말씀을 이루려는 삶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4절).” 결국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삶이 겸손한 삶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축복받은 후에는 한 가지를 더 잘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새끼나귀가 환호하는 군중들을 보고 자기가 대단해서 환호 받는다고 여기면 얼마나 큰 착각입니까? 예수님이 등에 타지 않았다면 누가 그 나귀를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그처럼 착각에 빠져 등에서 예수님을 내리게 하면 그때부터 자신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함을 잃지 마십시오. 그래야 끝까지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3. 헌신된 사람
본문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은 베다니에 가 보지도 않고 거기 나귀가 있는 것을 아셨을까요? 또한 다짜고짜 낯선 사람이 나귀를 풀어 가면 누군가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아! 왜 허락 없이 내 나귀를 끌고 가!” 그때 주님은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 말 한 마디로 순순히 나귀를 내줄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그 나귀들은 베다니에 있는 누구의 나귀였을까요?
당시 베다니에는 예수님이 지극히 사랑했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3남매가 살았습니다. 갈릴리 출신인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주무시지 않고 주로 예루살렘에서 4킬로 정도 떨어진 베다니 3남매의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베다니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들도 예수님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눅 24:50-53). 그때 그곳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초대 교회 상당수의 핵심 성도들은 베다니 출신들이었습니다. 그처럼 깊은 애정이 있었기에 베다니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는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헌신도 행했습니다(막 14장). 그렇게 헌신된 베다니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 나귀 한두 마리를 못 바치겠습니까? 그 모든 장면을 종합해보면 예수님 안에 베다니 사람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처럼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쓰시고 저의 것도 마음대로 쓰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무명의 헌신자는 단순히 나귀를 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으로 알았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주님을 위해 어떤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 4:15).” 베다니의 헌신자들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몸으로도 사랑했습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참 사랑은 내게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어떻게 베다니 사람처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나를 사셨다! 나는 예수님짜리다!”란 사실만 분명히 인식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정말 우리를 구원한 구세주라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생명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은사와 물질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처럼 무명의 베다니 사람이 즉시 나귀를 드리자 수많은 사람들도 자기 겉옷을 벗어드리면서 나귀 위에 얹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며 주님의 길에 동참했습니다(7-8절). 그처럼 누군가의 헌신은 또 다른 누군가의 헌신을 초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헌신은 결코 작은 헌신이 아닙니다.
<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 >
이제 항상 본문 3절 말씀에 나오는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사십시오.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큐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가슴속에 주님의 보혈에 대한 넘치는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예! 주님! 언제든지 저의 것을 쓰십시오.”라고 고백하십시오.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가슴새>란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 잿빛 털을 가진 새를 만드시고 그 이름을 진홍가슴새라고 붙여주셨습니다. 그 새가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졌는데 왜 진홍가슴새란 이름을 주셨나요?”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네가 언젠가 참 사랑을 베풀면 그 이름에 맞는 깃털을 가지게 될 거야.”
어느 날, 한 진홍가슴새의 둥지가 있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어떤 분이 매달렸습니다. 호기심이 생겨서 진홍가슴새는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에게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그분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그 새는 그분의 이마에 있는 가시를 작은 부리로 하나씩 뽑아냈습니다. 그때마다 피가 솟구쳐서 그 새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가시를 다 뽑고 둥지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도 몸에 묻은 피가 잘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핏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때부터 그 새가 낳는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 털이 생겼습니다. 이 진홍가슴새는 구원받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으면서 그 가슴에 예수님의 선명한 피 흔적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에 감동되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지금도 물으십니다. “아무개야! 내가 네 것을 좀 쓸까?” 그때 자기에게 매인 나귀를 풀어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사업과 물질의 묶임도 풀리고, 가정과 자녀의 묶임도 풀리고, 질병과 고통의 묶임도 풀릴 것입니다. 주님이 묶으시면 능히 풀 자가 없고 주님이 풀어주시면 능히 묶을 자가 없습니다.
거룩한 일에 쓰여야 할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건강을 잘못 쓰면 풀렸던 것들도 다시 묶이고, 결국 그것을 마귀가 쓰게 됩니다. 반면에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자기 것을 힘써 내어드리면 하나님이 그를 멋지게 쓰실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여러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려고 온갖 몸부림을 쳤지만 돌이켜 보면 지치도록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일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축복도 받고 마음에 큰 행복감도 얻습니다. 이제 크게 받고 나서 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크게 일하면 크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아무개야! 너를 쓰고 싶다.”고 감동을 주실 때 “아멘!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소서.”라고 고백하고 열심히 뛰십시오. 그러면 기적적으로 사는 길도 열리고 문제도 풀리고 거룩한 비전 동역자도 붙여주실 것입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된 때는 언제입니까? “주님과 교회와 가정을 위해 아직도 내가 필요한 존재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때입니다.
오늘 그 사실을 재발견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정말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고 빛을 잃어가는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존재입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주님의 오실 날을 예비하는 ‘세계선교’를 위해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입니다. 살면서 양보할 것이 많지만 헌신만은 양보하지 마십시오. 항상 예수님이 피 흔적을 가슴에 새기며 거룩한 비전을 위해 열심히 달려 나감으로 더욱 멋지게 쓰임 받고 축복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 하나님께 합한 사람 >
1998년 6월 29일, 뉴욕에 있는 임병철 목사님 교회 산상수련회를 인도하러 갈 때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비행기가 경유를 위해 잠시 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하려고 비행기가 이륙 장소에 섰는데 계기판에 이상신호가 떠서 이륙을 못했습니다. 그 후 5시간 동안 고장원인을 밝히지 못해 결국 그날 저녁 오사카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공항에서 왠지 한국으로 전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화하니까 “간암으로 투병하던 첫째 누님이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급히 돌아와 누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수의를 입힐 때 누님의 볼을 만지며 혼자 속으로 말했습니다. “누님! 이렇게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비행기를 멈추셨군요.”
만약 그때 비행기 고장이 없었다면 누님의 마지막 모습도 못 보고 큰 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극적으로 누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지금 누님이 천국에서 기다린다고 확신하니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끔 기도와 묵상을 통해 먼저 천국에 가신 아버님 및 누님과 영적인 교제를 합니다. 그러면 좋았던 시절의 아름다운 영상이 그려지면서 큰 힘을 얻습니다. 그처럼 천국소망은 사람을 기쁘고 들뜨게 하는 최대의 소망입니다.
돌아가신 누님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서 가끔 가족들의 오해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실한 여종이었습니다. 나이 50이 되었을 때 누님은 영혼과 가정을 치유하는 기독교 상담학 교수가 되겠다고 가족들이 반대하는 미국 유학길을 떠났습니다. 당시 안수집사였던 매형은 너무 당황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떨어져 살 수 없으니 꿈으로라도 확신을 주소서!”
어느 날, 매형이 2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누님이 태평양 저편의 미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는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태평양 저편을 바라보는데 신비한 은빛 세계에서 부모님이 아주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님이 갑자기 태평양을 순식간에 건너 매형의 집 베란다로 나타나 슬픈 표정으로 “여보!” 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매형도 “여보! 어떻게 된 일이오!”라고 하면서 놀라서 깼습니다.
그 꿈 얘기를 하며 매형이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이번에 미국에 가면 안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소!” 그러자 누님이 말했습니다. “당신 꿈에 제가 미국에 가 있었잖아요? 그 꿈은 제가 미국에 가는 꿈일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꿈은 미국에 가는 꿈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꿈이었습니다.
얼마 후, 두 번째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누님이 너무 사랑스럽게 보여서 매형이 가까이 다가가 “여보!”하고 사랑스럽게 등을 만질 때 손이 등으로 쑥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아닌 혼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도 너무 놀라서 “여보!” 하고 소리치며 깼습니다.
그 두 번째 꿈 얘기를 하며 매형이 말했습니다. “여보! 이번 미국 유학행은 아무래도 취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왠지 다시는 못 볼 곳으로 떠날 것 같아요.” 그때도 걱정 말라면서 유학을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네브래스카의 오마하 주립대학 기숙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배가 아파서 2달 동안 거의 식사도 못하고 잠도 못 잤습니다. 결국 14센티짜리 암 덩어리를 발견하고 급히 귀국한 후에 50일간 투병 후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사람 생각으로는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해서 괜히 죽음을 자초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 합한 진실한 전도사’였던 누님을 빨리 곁에 두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천사 같은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있는 최상의 행복을 주시려고 남보다 조금 일찍 부르실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누님 돌아가신 후 매형이 말했습니다. “아내가 주의 종이 된 후 12년 동안 아내는 천사였습니다. 제가 천사와 살면서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살다 보면 지혜롭게 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마음만은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제 곧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살다가 천국 문에 이르면 신랑이신 예수님이 얼마나 반겨 맞이하겠습니까? 또한 먼저 간 성도들과 기쁨의 재회를 하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 천국 소망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이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찬란한 내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슬픔에 너무 매달리지도 마십시오. 우리 민족은 과거의 한을 담고 살았기에 과거를 뜻하는 단어는 많았습니다. ‘어저께, 그저께, 그끄저께’란 단어가 다 고유한 한글 단어입니다. 반면에 내일을 말하는 고유한 단어는 거의 없어서 할 수 없이 ‘내일(來日)’이란 한자어를 차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내일이 없었던 민족에게 교회가 들어와서 무엇을 주었습니까? ‘내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 항상 내일이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지금은 미약해도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면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믿고 나가십시오.
<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 >
어렸을 때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내가 선생님께 필요한 존재구나!”라고 생각하고 얼마나 신나게 그 심부름을 했습니까? 그처럼 누군가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본문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새끼를 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1. 선택된 사람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 감람산 벳바게에서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 맞은편 마을은 바로 베다니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베다니로 가면 나귀와 나귀새끼가 있는데 그것들을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다.”
왜 주님이 나귀를 끌고 오게 했습니까? 주전 490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메시야가 나귀를 타신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4절). 하나님은 나귀 한 마리에 대해서도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에 대한 계획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자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물건을 살 때 천원을 내고 얻는 물건은 ‘천 원짜리’라고 하고, 만원을 내고 얻는 물건은 ‘만 원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지불하고 구원받았기에 ‘예수님짜리’입니다. 그처럼 가치 있는 성도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이 없겠습니까?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멋지게 쓰임 받는 삶을 꿈꾸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있느냐? 얼마나 아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때 무한한 가치와 행복을 느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을 향한 분명하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주인공이 나다!”란 확신을 가지고 사십시오.
자신의 부족함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이렇게 핀잔을 줄 수 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뭘 하겠어? 돈도 없이 어떻게 하려고 해! 이런 장소에서 어떻게 성공하겠어? 정말 그렇게 큰 비전을 이룰 수 있겠어?” 그때마다 본문 3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스스로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겠나?” 그때도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부족해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연약한 나귀새끼도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쓰임 받았는데 하물며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가 왜 쓰임 받지 못하겠습니까? 지금도 ‘갈대인 시몬’이 ‘반석인 베드로’가 되는 원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2. 순수한 사람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새끼를 함께 끌고 왔을 때 주님은 어느 나귀를 탔을까요? 어미나귀는 경험이 많은 프로지만 새끼나귀는 아마추어입니다. 그러면 인간적으로는 어미나귀를 타야 하지만 마가복음 11장과 누가복음 19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험 많고 돈을 목적으로 일하는 프로보다 순수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므로 프로 이상의 실력은 갖추되 항상 아마추어리즘을 잃지 마십시오. 절대 하나님보다 돈이 앞서게 하지 말고 교인들끼리 다단계 등으로 돈거래를 하는 일도 없게 하십시오. 교회생활에서 돈 문제를 개입시키면 결코 진정한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보다 순수하고 겸손한 아마추어를 쓰십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왜 주님은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까? 주님이 순수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님의 겸손함은 말씀을 이루려는 삶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4절).” 결국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삶이 겸손한 삶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축복받은 후에는 한 가지를 더 잘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새끼나귀가 환호하는 군중들을 보고 자기가 대단해서 환호 받는다고 여기면 얼마나 큰 착각입니까? 예수님이 등에 타지 않았다면 누가 그 나귀를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그처럼 착각에 빠져 등에서 예수님을 내리게 하면 그때부터 자신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함을 잃지 마십시오. 그래야 끝까지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3. 헌신된 사람
본문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은 베다니에 가 보지도 않고 거기 나귀가 있는 것을 아셨을까요? 또한 다짜고짜 낯선 사람이 나귀를 풀어 가면 누군가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아! 왜 허락 없이 내 나귀를 끌고 가!” 그때 주님은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 말 한 마디로 순순히 나귀를 내줄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그 나귀들은 베다니에 있는 누구의 나귀였을까요?
당시 베다니에는 예수님이 지극히 사랑했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3남매가 살았습니다. 갈릴리 출신인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주무시지 않고 주로 예루살렘에서 4킬로 정도 떨어진 베다니 3남매의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베다니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들도 예수님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눅 24:50-53). 그때 그곳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초대 교회 상당수의 핵심 성도들은 베다니 출신들이었습니다. 그처럼 깊은 애정이 있었기에 베다니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는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헌신도 행했습니다(막 14장). 그렇게 헌신된 베다니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 나귀 한두 마리를 못 바치겠습니까? 그 모든 장면을 종합해보면 예수님 안에 베다니 사람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처럼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쓰시고 저의 것도 마음대로 쓰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무명의 헌신자는 단순히 나귀를 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으로 알았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주님을 위해 어떤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 4:15).” 베다니의 헌신자들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몸으로도 사랑했습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참 사랑은 내게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어떻게 베다니 사람처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나를 사셨다! 나는 예수님짜리다!”란 사실만 분명히 인식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정말 우리를 구원한 구세주라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생명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은사와 물질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처럼 무명의 베다니 사람이 즉시 나귀를 드리자 수많은 사람들도 자기 겉옷을 벗어드리면서 나귀 위에 얹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며 주님의 길에 동참했습니다(7-8절). 그처럼 누군가의 헌신은 또 다른 누군가의 헌신을 초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헌신은 결코 작은 헌신이 아닙니다.
<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 >
이제 항상 본문 3절 말씀에 나오는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사십시오.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큐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가슴속에 주님의 보혈에 대한 넘치는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예! 주님! 언제든지 저의 것을 쓰십시오.”라고 고백하십시오.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가슴새>란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 잿빛 털을 가진 새를 만드시고 그 이름을 진홍가슴새라고 붙여주셨습니다. 그 새가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졌는데 왜 진홍가슴새란 이름을 주셨나요?”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네가 언젠가 참 사랑을 베풀면 그 이름에 맞는 깃털을 가지게 될 거야.”
어느 날, 한 진홍가슴새의 둥지가 있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어떤 분이 매달렸습니다. 호기심이 생겨서 진홍가슴새는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에게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그분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그 새는 그분의 이마에 있는 가시를 작은 부리로 하나씩 뽑아냈습니다. 그때마다 피가 솟구쳐서 그 새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가시를 다 뽑고 둥지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도 몸에 묻은 피가 잘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핏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때부터 그 새가 낳는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 털이 생겼습니다. 이 진홍가슴새는 구원받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으면서 그 가슴에 예수님의 선명한 피 흔적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에 감동되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지금도 물으십니다. “아무개야! 내가 네 것을 좀 쓸까?” 그때 자기에게 매인 나귀를 풀어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사업과 물질의 묶임도 풀리고, 가정과 자녀의 묶임도 풀리고, 질병과 고통의 묶임도 풀릴 것입니다. 주님이 묶으시면 능히 풀 자가 없고 주님이 풀어주시면 능히 묶을 자가 없습니다.
거룩한 일에 쓰여야 할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건강을 잘못 쓰면 풀렸던 것들도 다시 묶이고, 결국 그것을 마귀가 쓰게 됩니다. 반면에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자기 것을 힘써 내어드리면 하나님이 그를 멋지게 쓰실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여러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려고 온갖 몸부림을 쳤지만 돌이켜 보면 지치도록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일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축복도 받고 마음에 큰 행복감도 얻습니다. 이제 크게 받고 나서 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크게 일하면 크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아무개야! 너를 쓰고 싶다.”고 감동을 주실 때 “아멘!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소서.”라고 고백하고 열심히 뛰십시오. 그러면 기적적으로 사는 길도 열리고 문제도 풀리고 거룩한 비전 동역자도 붙여주실 것입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된 때는 언제입니까? “주님과 교회와 가정을 위해 아직도 내가 필요한 존재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때입니다.
오늘 그 사실을 재발견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정말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고 빛을 잃어가는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존재입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주님의 오실 날을 예비하는 ‘세계선교’를 위해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입니다. 살면서 양보할 것이 많지만 헌신만은 양보하지 마십시오. 항상 예수님이 피 흔적을 가슴에 새기며 거룩한 비전을 위해 열심히 달려 나감으로 더욱 멋지게 쓰임 받고 축복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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