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시50:1-23 |
---|---|
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예배
본문: 시편50편 1- 23
뉴잉글랜드 교회에 고래잡이 배의 선장이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한 동료교인이 그 선장에게 물었습니다.
“선장님, 오늘 예배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그 선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전 아무것도 느낀 게 없네요. 요즘 통 고래가 잡히질 않아서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를 하는 동안에도 줄곧 어디로 가면 고래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이렇듯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경외함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 역시 속으로는 세상 걱정이나 다른 생각에 사로잡힌 채 몸만 앉아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을 때, 책망과 심판을 받습니다.
예배생활에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크리스천이 예배생활에 승리하면 모든 일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배를 등한히 하고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하면 일시적으로는 별 탈 없이 돈도 잘 벌고 모든 일이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영육 간에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예배를 받으십니다.(요4:23, 24)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이러한 예배를 통하여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합당한 은혜를 받으며, 영적인 능력을 얻고, 새 생명 새 소망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 됩니다.
예배에는 기도와 찬송과 말씀증거와 성령의 감동 받음과 헌물을 드리는 순서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고, 찬송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 말씀을 통하여 영의 양식을 먹어 강건하게 되며,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담대함을 얻게 되고, 헌금을 통하여 물질의 축복을 얻게 됩니다. 예배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면 사람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생명을 다루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교회에서 집사 직분까지 받았으나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너무 지겨워했습니다. 그는 주일 날 아침만 되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예배를 드리지 않을 궁리만 했습니다. 하루는 “여보, 오늘 우리 두 사람 중에 당신이 대표로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구려. 나는 대표로 남아서 집을 볼게.”라고 하면서 아내 혼자만 보냈습니다. 그는 예배 시간에 집에 혼자 남아 낮잠을 자다가 문득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천국 문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을 지키고 있던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지요? 그럼 대표로 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오시오!”
집사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예배를 지루하게 여기며 자원해서 드리기를 거부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다시는 예배에 빠지지 않고 성도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배를 가볍게 여기고 방해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결국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사는 동안 예배를 통해 주님을 친히 뵙고 교제하는 일을 무한한 특권으로 여겨야 합니다.
셩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시96:9)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전능하신 자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하나님의 각기 다른 명칭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권위와 능력, 그리고 그분이 인간 역사의 지배자요 주권자임을 강력히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온 민족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그분의 우주적 통치권에 관한 언급입니다.
전능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해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부르셨습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시온은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도성이며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종종 빛이나 불꽃, 그 밖의 것들을 통해 자신을 현현해 보이시기도 하십니다. 한편 하나님이 진리와 참 생명의 근원이심을 들어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시27:1, 요1:5)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어둠의 세상을 밝히시기 위해 자신의 계시의 빛을 비춰 인간들로 하여금 참된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 3, 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본 절은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온 세계의 심판자도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며 이스라엘에서는 재판을 할 때 그 공정성을 꾀하기 위하여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증인을 채택합니다.(신19:15)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 즉 전 우주를 증인들로 채택하시며 그들 앞에서 말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평양 어떤 공장 지하교회 성도들이 기도회를 갖고 있을 때다. 이들에게는 성경이나 찬송가가 없으므로 종이 쪽지에 성경 귀절을 적어서 돌려가며 읽고 입만 벙긋벙긋 벌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노동당 반장이 뒤에 와서 서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소리 없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그 반장이 다가와 `동무들, 무엇하고 있는 거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한 대담한 여공 성도가 `우리는 지금 독보회를 하고 있소. 동무도 같이 앉아서 안하시려오?`라고 했습니다. 영문도 무르고 그 반장은 한참 앉아 있다가 `동무들이나 많이 하소`라고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순간 이들은 그 반장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눈을 뜨고 기도드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생명을 걸고 드리는 성도들의 예배와 수 명이 모였으나 마음은 세상에 가 있는 형식적인 예배가 있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느 것을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데도 이를 소홀히 한다면 분명히 그때를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의 주제자이십니다. 북 이스라엘이 왜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갔을까요? 남 유다는 왜 다시 회복될 수 있었을까요? 예배의 보존 여부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였으나 남 유다는 바벨론 포로 후에도 70년만에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큰 이유는 북 이스라엘은 예배를 변질 시켜 우상화 시켰기 때문이요, 남쪽 유다는 범죄는 하였지만 예배와 절기와 규례는 그대로 보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변질은 멸망의 원인이 되나, 범죄 중에도 예배를 보존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 참 예배를 보존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언약의 백성은 예배를 드림으로 그 언약에 참여합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8:10)
성일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먼 옛날 중국에서 조조가 나라를 다스릴 때, 봄철이면 군인들이 술을 먹고 말을 탄 채 보리밭과 밀밭에 뛰어들어 전쟁놀이를 하는 통에 농사를 망가뜨리곤 했습니다. 때문에 농부들은 크게 낙심을 하고 농사를 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실을 안 조조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술을 먹고 말을 탄 채 밀밭이나 보리밭에 들어가는 군인은 극형에 처하겠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 엄명을 어긴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조조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말을 타고 오는데 그만 이 말이 습관적으로 보리밭으로 뛰어들어 밭을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뒤늦게 술이 깨어 이 사실을 안 조조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틀에 자신의 목을 얹고 ‘당장 내 목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와 백성들이 크게 놀라 극구 말렸고 간신히 조조 대신 말의 목을 치는 것으로 문제를 수습했습니다. 이런 조조의 솔선수범하는 자세에 감동을 받은 군인들은 이후 다시는 술에 취해 밀밭이나 보리밭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과 공평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백성아!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5)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예배자에게 증거하십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증거를 예배를 통해 듣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전 5:1)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명을 듣고 뜻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하나님 말씀 하옵소서 우리가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영광이 임하고, 성령의 감동역사가 시작되며, 심령은 변화되고, 능력을 받고 힘을 얻고 깨우침을 받고 목표를 보게 됩니다. 참 예배자는 들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마귀의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다 깨뜨리고 들어야 합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느8:6)
백성이 아멘으로 말씀을 받았다. 말씀이 들리면 영광이 임하고(성령의 감동역사가 시작)
변화되고, 능력을 받고 힘을 얻고 깨우침을 받고 목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예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예배자는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있습니다.
찬양을 드립니다. 기도를 드립니다. 헌물을 드립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받습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제물이나 예배 형식 등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예배 본질은 아닙니다. 예배의 외적인 요소입니다. 예배 전부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감사가 예배자의 심장에 넘쳐야 합니다. 그를 찬양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즐기라고 초대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는 동기가 의무감이 아닌 사랑, 감사 그리고 즐거움이길 바라십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우리가 그 안에서 만족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크게 나타난다 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즐기고 사랑하며, 우리가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그분에게 드려지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너의 온 몸을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을 하는 데 사용하라”(롬6:13)
밤중에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욥처럼 밤중에도 감사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건강적인 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업의 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어떤 깜깜한 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5절을 보겠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평생을 바다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이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과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목숨을 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 ‘단 두 명뿐이라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삼십 년도 넘게 일한 자네가 단 두 명밖에 못 구했다고? 농담하지 말게나.’ 인명구조원은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구해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지. 하지만 그 후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날 찾아온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네. 난 그 두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도 같다고 할 수 있지.’
인생의 험난한 바다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어려움을 넘기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망각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한 마디의 감사와 진정한 헌신이야말로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요 찬사일 것입니다.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임재하심을 알고 주께 아뢰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십니다. 이런 기도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성도는 기도와 그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4: 9- 10)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끝이 없지만 어제의 복을 구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어제 받았어야할 복을 다 받지 못한 셈입니다.
본문 16-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본 절에서 시인은 스스로 참된 이스라엘 백성임을 내세우며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실행에 옮기지 않는 자들, 곧 외형적인 제사 외식만을 경건의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을 향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며 도적과 한통속이 되고 간음하는 자와 다를 바 없는 부패한 삶을 영위하고, 자신의 입을 모든 악한 말, 특히 사기와 속임수에 사용하는 데 내 맡기고 사람들의 모여 앉은 자리에서 동족을 비방하고 멸시하고 중상 모략하기 일쑤인 악인들의 오만하고 강퍅한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앞에(목전에) 낱낱이 드러나게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행악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징벌하시지 않자 악인들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지 아니하고 더욱 더 행악하기를 서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죄악을 용납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심판을 유보하고 계실 뿐인데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되면 엄정하고도 철저한 보응이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때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고 계심을 무시하고 행악한 죄인에게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드러나게 하여 그 행위대로 엄정하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은 껍데기만 하나님께 속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늘 그분을 기억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위선적인 신앙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생각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요구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면 아무도 살아날 수 없습니다. 또한 찬양은 최선의 제사입니다. 그 가운데 진심 어린 감사가 담긴 찬양은 지극히 아름다운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 위에 묶인 소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찬양을 듣기 원하십니다. 나는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의 구원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어떤 농부네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았더랍니다. 농부는 너무 기뻐서 아내에게 새끼 두 마리를 함께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이것들을 잘 길러 그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네 마리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송아지가 몇 개월동안 잘 자라던 어느 날, 송아지 한 마리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습니다. 남편이 낭패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면서 하는 말, “여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어요.”
하필 왜 죽은 송아지가 하나님의 것이더란 말입니까? 이게 이 농부의 이야기이겠습니까? 항상 좋은 것은 내 것, 찌꺼기는 하나님의 것, 속 배추는 내 것, 우거지는 하나님의 것, 호두알은 내 것, 껍데기는 하나님의 것, 항상 이런식이 아니였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오늘 우리가 그랬습니다. 수입이 적어지면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 날아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감사로 예배드리는 사람, 감사로 바치는 사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영원한 빛 곧 영생을 주신다.”
감사하는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기적이 있습니다. 불평한 운명을 바꾸는 유일한 길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날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온 생에 대한 감사가 일어납니다. 남편에게 감사하고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남편이 내 남편이 되고 그 아내가 내 아내가 되는 겁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온 생이 새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제사는 심령에서 우러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솟아나는 순종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즉 '감사의 제사'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하여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억지로 끌려 나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닌 자원하고, 감격하여 굴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질 끌려가는 굴복이 아니라, 노예적인 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귀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끌려 굴복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받기 위하여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굴복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은혜받기 위하여 엎드려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엎드려 굴복하여야 합니다. 물론 엎드리면 하나님이 또 다른 은혜를 주시고 새로운 체험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드릴 때에 감사한 마음이 앞서 있어야 참된 신령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그 뜻대로 복종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공은 삶의 승리를 가져옵니다. 참 예배자에게는 삶의 승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예배의 실패는 삶의 실패로 이어지고, 삶의 성공은 예배의 성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과 그 제사는 받으셨습니다.(창 4:3-5) 가인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에서 온 것입니다. 예배에 대하여 바른 태도를 가진 자는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진리를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영적 세계를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 기도: 진정한 예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온전한 예배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예배에 성공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더 깊은 헌신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게 하소서. 예배가 진정 나의 기쁨과 의미가 되게 하시고 늘 결단과 새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소서.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다운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이 되게 하소서. 다윗은 값을 치르지 않은 번제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고백했는데, 저는 너무 쉽고 편하게만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본문: 시편50편 1- 23
뉴잉글랜드 교회에 고래잡이 배의 선장이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한 동료교인이 그 선장에게 물었습니다.
“선장님, 오늘 예배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그 선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전 아무것도 느낀 게 없네요. 요즘 통 고래가 잡히질 않아서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를 하는 동안에도 줄곧 어디로 가면 고래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이렇듯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경외함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 역시 속으로는 세상 걱정이나 다른 생각에 사로잡힌 채 몸만 앉아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을 때, 책망과 심판을 받습니다.
예배생활에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크리스천이 예배생활에 승리하면 모든 일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배를 등한히 하고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하면 일시적으로는 별 탈 없이 돈도 잘 벌고 모든 일이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영육 간에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예배를 받으십니다.(요4:23, 24)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이러한 예배를 통하여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합당한 은혜를 받으며, 영적인 능력을 얻고, 새 생명 새 소망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 됩니다.
예배에는 기도와 찬송과 말씀증거와 성령의 감동 받음과 헌물을 드리는 순서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고, 찬송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 말씀을 통하여 영의 양식을 먹어 강건하게 되며,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담대함을 얻게 되고, 헌금을 통하여 물질의 축복을 얻게 됩니다. 예배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면 사람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생명을 다루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교회에서 집사 직분까지 받았으나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너무 지겨워했습니다. 그는 주일 날 아침만 되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예배를 드리지 않을 궁리만 했습니다. 하루는 “여보, 오늘 우리 두 사람 중에 당신이 대표로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구려. 나는 대표로 남아서 집을 볼게.”라고 하면서 아내 혼자만 보냈습니다. 그는 예배 시간에 집에 혼자 남아 낮잠을 자다가 문득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천국 문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을 지키고 있던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지요? 그럼 대표로 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오시오!”
집사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예배를 지루하게 여기며 자원해서 드리기를 거부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다시는 예배에 빠지지 않고 성도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배를 가볍게 여기고 방해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결국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사는 동안 예배를 통해 주님을 친히 뵙고 교제하는 일을 무한한 특권으로 여겨야 합니다.
셩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시96:9)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전능하신 자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하나님의 각기 다른 명칭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권위와 능력, 그리고 그분이 인간 역사의 지배자요 주권자임을 강력히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온 민족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그분의 우주적 통치권에 관한 언급입니다.
전능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해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부르셨습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시온은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도성이며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종종 빛이나 불꽃, 그 밖의 것들을 통해 자신을 현현해 보이시기도 하십니다. 한편 하나님이 진리와 참 생명의 근원이심을 들어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시27:1, 요1:5)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어둠의 세상을 밝히시기 위해 자신의 계시의 빛을 비춰 인간들로 하여금 참된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 3, 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본 절은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온 세계의 심판자도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며 이스라엘에서는 재판을 할 때 그 공정성을 꾀하기 위하여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증인을 채택합니다.(신19:15)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 즉 전 우주를 증인들로 채택하시며 그들 앞에서 말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평양 어떤 공장 지하교회 성도들이 기도회를 갖고 있을 때다. 이들에게는 성경이나 찬송가가 없으므로 종이 쪽지에 성경 귀절을 적어서 돌려가며 읽고 입만 벙긋벙긋 벌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노동당 반장이 뒤에 와서 서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소리 없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그 반장이 다가와 `동무들, 무엇하고 있는 거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한 대담한 여공 성도가 `우리는 지금 독보회를 하고 있소. 동무도 같이 앉아서 안하시려오?`라고 했습니다. 영문도 무르고 그 반장은 한참 앉아 있다가 `동무들이나 많이 하소`라고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순간 이들은 그 반장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눈을 뜨고 기도드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생명을 걸고 드리는 성도들의 예배와 수 명이 모였으나 마음은 세상에 가 있는 형식적인 예배가 있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느 것을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데도 이를 소홀히 한다면 분명히 그때를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의 주제자이십니다. 북 이스라엘이 왜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갔을까요? 남 유다는 왜 다시 회복될 수 있었을까요? 예배의 보존 여부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였으나 남 유다는 바벨론 포로 후에도 70년만에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큰 이유는 북 이스라엘은 예배를 변질 시켜 우상화 시켰기 때문이요, 남쪽 유다는 범죄는 하였지만 예배와 절기와 규례는 그대로 보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변질은 멸망의 원인이 되나, 범죄 중에도 예배를 보존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 참 예배를 보존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언약의 백성은 예배를 드림으로 그 언약에 참여합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8:10)
성일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먼 옛날 중국에서 조조가 나라를 다스릴 때, 봄철이면 군인들이 술을 먹고 말을 탄 채 보리밭과 밀밭에 뛰어들어 전쟁놀이를 하는 통에 농사를 망가뜨리곤 했습니다. 때문에 농부들은 크게 낙심을 하고 농사를 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실을 안 조조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술을 먹고 말을 탄 채 밀밭이나 보리밭에 들어가는 군인은 극형에 처하겠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 엄명을 어긴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조조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말을 타고 오는데 그만 이 말이 습관적으로 보리밭으로 뛰어들어 밭을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뒤늦게 술이 깨어 이 사실을 안 조조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틀에 자신의 목을 얹고 ‘당장 내 목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와 백성들이 크게 놀라 극구 말렸고 간신히 조조 대신 말의 목을 치는 것으로 문제를 수습했습니다. 이런 조조의 솔선수범하는 자세에 감동을 받은 군인들은 이후 다시는 술에 취해 밀밭이나 보리밭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과 공평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백성아!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5)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예배자에게 증거하십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증거를 예배를 통해 듣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전 5:1)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명을 듣고 뜻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하나님 말씀 하옵소서 우리가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영광이 임하고, 성령의 감동역사가 시작되며, 심령은 변화되고, 능력을 받고 힘을 얻고 깨우침을 받고 목표를 보게 됩니다. 참 예배자는 들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마귀의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다 깨뜨리고 들어야 합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느8:6)
백성이 아멘으로 말씀을 받았다. 말씀이 들리면 영광이 임하고(성령의 감동역사가 시작)
변화되고, 능력을 받고 힘을 얻고 깨우침을 받고 목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예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예배자는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있습니다.
찬양을 드립니다. 기도를 드립니다. 헌물을 드립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받습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제물이나 예배 형식 등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예배 본질은 아닙니다. 예배의 외적인 요소입니다. 예배 전부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감사가 예배자의 심장에 넘쳐야 합니다. 그를 찬양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즐기라고 초대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는 동기가 의무감이 아닌 사랑, 감사 그리고 즐거움이길 바라십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우리가 그 안에서 만족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크게 나타난다 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즐기고 사랑하며, 우리가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그분에게 드려지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너의 온 몸을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을 하는 데 사용하라”(롬6:13)
밤중에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욥처럼 밤중에도 감사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건강적인 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업의 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어떤 깜깜한 밤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5절을 보겠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평생을 바다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이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과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목숨을 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 ‘단 두 명뿐이라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삼십 년도 넘게 일한 자네가 단 두 명밖에 못 구했다고? 농담하지 말게나.’ 인명구조원은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구해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지. 하지만 그 후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날 찾아온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네. 난 그 두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도 같다고 할 수 있지.’
인생의 험난한 바다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어려움을 넘기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망각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한 마디의 감사와 진정한 헌신이야말로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요 찬사일 것입니다.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임재하심을 알고 주께 아뢰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십니다. 이런 기도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성도는 기도와 그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4: 9- 10)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끝이 없지만 어제의 복을 구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어제 받았어야할 복을 다 받지 못한 셈입니다.
본문 16-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본 절에서 시인은 스스로 참된 이스라엘 백성임을 내세우며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실행에 옮기지 않는 자들, 곧 외형적인 제사 외식만을 경건의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을 향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며 도적과 한통속이 되고 간음하는 자와 다를 바 없는 부패한 삶을 영위하고, 자신의 입을 모든 악한 말, 특히 사기와 속임수에 사용하는 데 내 맡기고 사람들의 모여 앉은 자리에서 동족을 비방하고 멸시하고 중상 모략하기 일쑤인 악인들의 오만하고 강퍅한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앞에(목전에) 낱낱이 드러나게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행악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징벌하시지 않자 악인들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지 아니하고 더욱 더 행악하기를 서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죄악을 용납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심판을 유보하고 계실 뿐인데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되면 엄정하고도 철저한 보응이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때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고 계심을 무시하고 행악한 죄인에게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드러나게 하여 그 행위대로 엄정하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은 껍데기만 하나님께 속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늘 그분을 기억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위선적인 신앙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생각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요구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면 아무도 살아날 수 없습니다. 또한 찬양은 최선의 제사입니다. 그 가운데 진심 어린 감사가 담긴 찬양은 지극히 아름다운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 위에 묶인 소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찬양을 듣기 원하십니다. 나는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의 구원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어떤 농부네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았더랍니다. 농부는 너무 기뻐서 아내에게 새끼 두 마리를 함께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이것들을 잘 길러 그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네 마리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송아지가 몇 개월동안 잘 자라던 어느 날, 송아지 한 마리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습니다. 남편이 낭패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면서 하는 말, “여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어요.”
하필 왜 죽은 송아지가 하나님의 것이더란 말입니까? 이게 이 농부의 이야기이겠습니까? 항상 좋은 것은 내 것, 찌꺼기는 하나님의 것, 속 배추는 내 것, 우거지는 하나님의 것, 호두알은 내 것, 껍데기는 하나님의 것, 항상 이런식이 아니였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오늘 우리가 그랬습니다. 수입이 적어지면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 날아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감사로 예배드리는 사람, 감사로 바치는 사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영원한 빛 곧 영생을 주신다.”
감사하는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기적이 있습니다. 불평한 운명을 바꾸는 유일한 길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날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온 생에 대한 감사가 일어납니다. 남편에게 감사하고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남편이 내 남편이 되고 그 아내가 내 아내가 되는 겁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온 생이 새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제사는 심령에서 우러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솟아나는 순종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즉 '감사의 제사'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하여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억지로 끌려 나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닌 자원하고, 감격하여 굴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질 끌려가는 굴복이 아니라, 노예적인 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귀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끌려 굴복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받기 위하여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굴복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은혜받기 위하여 엎드려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엎드려 굴복하여야 합니다. 물론 엎드리면 하나님이 또 다른 은혜를 주시고 새로운 체험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드릴 때에 감사한 마음이 앞서 있어야 참된 신령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그 뜻대로 복종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공은 삶의 승리를 가져옵니다. 참 예배자에게는 삶의 승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예배의 실패는 삶의 실패로 이어지고, 삶의 성공은 예배의 성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과 그 제사는 받으셨습니다.(창 4:3-5) 가인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에서 온 것입니다. 예배에 대하여 바른 태도를 가진 자는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진리를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영적 세계를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 기도: 진정한 예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온전한 예배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예배에 성공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더 깊은 헌신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게 하소서. 예배가 진정 나의 기쁨과 의미가 되게 하시고 늘 결단과 새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소서.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다운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이 되게 하소서. 다윗은 값을 치르지 않은 번제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고백했는데, 저는 너무 쉽고 편하게만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