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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17:4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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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삼상17:41-49
오늘 거대한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다윗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 인생에 주어진 거대한 일들을 두려움을 극복하고 어떻게 담대하게 이룰 수 있는가를 교훈받으려고 합니다.
두려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두려움입니다. 이 긍정적인 두려움은 우리의 삶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긍정적인 두려움은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줍니다. 어두운 밤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럴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면 빨리 사람이 많은 곳으로 밝은 곳으로 피하여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을 추구하게 합니다. 얇은 얼음 위를 걷기 두려워하는 것, 병과 사고를 두려워하여 의료보험을 드는 것은 믿음의 결핍이 아니라 미리 주의하게 하는 지혜를 줍니다. 위험한 동물을 만났을 때, 시험 볼 때, 연설하려 할 때 겪게 되는 정상적인 두려움은 사람을 좀 더 각성하거나 예민해지게 하여 직면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잘 해결해 나가도록 합니다. 합리적이며 유익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건전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자동차 사고를 두려워 할 줄 알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비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적당히 먹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됩니다.
둘째는 부정적인 두려움입니다. 지금 골리앗 앞에 처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입니다. 필연적으로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지면 생명을 빼앗길 뿐 아니라 재산 상의 손실은 물론 노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반드시 이겨야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싸우려고 하지 않고 벌벌 떨고만 있는 것입니다. 위기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게 합니다. 이 부정적인 두려움은 네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첫째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두려움이란 괴물은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쓸 기회를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나폴레옹 힐은 "공포는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모든 자신감을 꺾어 버리고, 모든 열성을 지워버리며, 모든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직 심리학 박사인 앨런 다운스는 [리더여, 두려움을 극복하라]라는 책에서 인생 성공의 핵심이 바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능을 개발하는데 가장 커다란 적이 바로 공포 즉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그 재능의 극대화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재능의 숨통을 죄고 있는 공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비난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피해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셋째는 우리의 행복을 방해합니다. 두려움은 대인 공포증, 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 질환공포증, 죽음공포증 등과 같은 심각한 만성 공포증 환자가 되어 버립니다. 워즈워드는 "두려움은 수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힌다" 라고 했습니다. 세네카라는 사람은「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행복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넷째는 우리의 성공을 방해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린다 새퍼딘은 "두려움이 나를 망친다"라는 책에서 두려움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소심하게 하고, 늘 경계심을 품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자신이 없게 만들고, 매사에 비판적이게 하여 자신을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함으로 맡겨진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1.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분리되어 홀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연구한 미실딘 박사는 인간의 두려움은 영아기의 3대 기초적 두려움의 연장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떨어지는 두려움(Fear of falling) 둘째, 큰소리에 대한 두려움(Fear of loud noise) 셋째, 버려지는 두려움(Fear of being abandoned)이 영아기 3대 기초적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녁에 홀로 산 길을 걸어가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일찍 아이들을 홀로 잠자게 하지 않으면 초등학교 다니는데도 두려워 홀로 자지 못합니다. 저희 집 아이들 어릴 때를 보면 새벽기도 나오면 어느새 깨서 두려워 울다가 이웃집에 가서 자는 때도 있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분리의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처음 두려워한 것은 아담입니다. 죄짓고 두려워 도망간 아담이 하나님께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0)"라고 고백합니다. 요나도 죄를 짓고 도망가 두려워합니다. 베드로도 죄짓고 도망하여 두려워합니다. 분리 공포입니다. 떨어지는 두려움, 버려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합니다. 거인 골리앗을 만났는데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인데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수술을 해야 합니다. 의사는 90% 위험하다고 합니다. 사업에 재기하려고 합니다. 자금도 부족하고 직원도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90% 실패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쟁 경험도 없는 어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용기 배배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의 칼과 창과 단창보다 더 크신 분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칼과 창과 단창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워 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개입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요단 강이 갈라집니다. 무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전술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의 우리 인생에 힘과 권능과 능력이 되십니다. 이 승리는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통쾌한 승리는 다윗 개인에게도 평생을 잊지 못할 짜릿한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건강할 때도, 질병에 걸려 있을 때도, 부도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수술을 받을 때도, 성공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는 야곱에게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말씀합니다. 야곱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쫓기며 두려워하시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가 죽고 모세 대신 민족을 인도하여 가난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라고 말씀합니다. 주어진 큰 과업을 놓고 두려워 망설이는 분이 있습니까? 여호수아의 하나님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는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시간적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도 홀로가 아닙니다. 홀로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의 늪에 갇혀서는 안됩니다. 문제 앞에 두려워 떨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2.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승리케 해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실존주의 자들은 인간의 두려움을 자신의 제한성에 직면할 때 특히 죽음이라고 하는 피할 수 없는 한계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뒤탈-가능성"의 "뚜렷함"에 대한 기분이라고 말합니다. "뒤탈의 불가능성의 사실"이 뚜렷해진다면, 두려움은 사그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미리 예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예측 능력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예측 능력으로 미리 실패할 것이라고 잘 못될 것이라고 예단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수술을 예약해 놓은 환자가 이 수술로 잘못될 것이고 생각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수술을 통하여 건강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수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단해 버리면 그 좋은 재능이 있다하여도 두려움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들은 강한 파도를 기다립니다. 연을 날리는 아이들은 바람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날 때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함으로 나아가려면 그 일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회로 주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승리케 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절박한 위기를 당한 다윗을 보십시오. 46절입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4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골리앗을 이길 뿐 아니라 블레셋 나라를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구원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여호와게 속한 것 처럼 전쟁의 승패도 여호와의 주권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믿음입니다.(대하20:15; 시127:1; 144:1) 붙이시리니는 “물리쳐 승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물리쳐 자기 백성들을 완전히 승리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물맷돌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갑니다. 자꾸 우리는 수로 비교하기 때문에 능력으로 비교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포기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그에게 물매와 돌은 단순한 물매와 돌이 아닙니다. 믿음없이 물매와 돌만 바라보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물매와 돌을 잡으면 하나님이 사용하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도구가 문제가 아닙니다. 재능이 문제가 아닙니다. 실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것 평소에 간직한 것 하나님께 붙들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광야에서 양을 모는 지팡이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림 받으니까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나타냅니다. 물을 펑펑 쏟아 내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초기 낭만파를 대표하는 유대계인 독일의 작곡가 연주가로서 유명한 멘델스죤(Felix Mendelssohn, 1809-47)이 유럽에서 최상의 올갠의 하나를 가진 예배당을 방문한 일이 있었답니다. 그는 잠시 동안 올갠의 연주에 귀를 귀울이고 있다가, 올갠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올개니스트에게 자기에게도 한번 탈 수 있도록 부탁했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니까요. 어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올갠을 타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대 음악가는 끈질기게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얻어 냈답니다. 멘델스죤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달리고, 발은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 때 예배당에는 올개니스트가 지금까지 들은 일이 없는 굉장한 멜로디로 가득 찼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올개니스트는 멘델스죤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음악의 거장은 조용히 대답했답니다. "멘델스죤입니다." 그때 그 올개니스트는 "멘델스죤! 멘델스죤에게 이 올갠을 타지 못하게 하려 하다니. 아, 이 늙은 나는 얼마나 멍청이인가?"라고 말했답니다. 재능이 없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믿음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물맷돌이 힘이 있어 이긴 것 아닙니다. 짐승을 쫓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면 민족을 구원하고 자신을 왕이 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주신 재능 작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사용받으시길 바랍니다. 주신 시간, 주신 재물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미 주어진 기도의 능력을 믿음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보여질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골리앗은 결코 하나님보다 클 수가 없습니다. 도단성의 엘리사가 믿음의 눈으로 기도할 때 종 게하시의 눈을 열려 하늘의 군대를 보았듯이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면 우리를 도우는 하늘의 천군 천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신 믿음의 주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보며 나아갈 때 우리는 골리앗처럼 달려드는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함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필립 부룩스의 말처럼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능력에 맞는 일 구하지 않고 일에 맞는 능력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두려움 앞에 하나님이 승리케 하신다는 확신만 가진다고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위르겐 횔러는 늑대를 만났을 때의 비유를 들어 '두려움의 상대성'을 설명하였습니다. 혼자 숲 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100미터 앞에 굶주린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만약 이때 느낀 두려움의 정도를 1부터 10까지 중에서 책정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10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손에 칼이나 창이 있다면 9정도로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옆에 동행자가 있다면 두려움의 정도는 5나 6정도로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여섯 명이 똑같이 무장하고 있다면? 혹은 손에 창 대신에 총이 들려 있다면? 바로 옆에 나를 이런 위험에서 탈출하게 도와줄 오토바이나 자동차가 있다면?뭔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 많다면 두려움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방어 수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정도는 그에 비례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19:26)” 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리고 방어 수단을 하나씩 하나씩 더해 갑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문제만 조목조목 늘어 놓고 두려워 하지 말고 문제의 해결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동역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그리고 담대하게 용기를 가지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실제적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양들을 지켰던 물매와 돌을 가지고 실행했습니다.
3.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영광받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닷가 개는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겁내지 아니한다는 속담입니다. 그래서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두려움은 학습에 의해 생긴다고 말합니다. 아이에게 흰 쥐를 가져다주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쥐를 만지려고 손을 뻗칠 때마다 큰소리로 아이를 놀라게 하면 곧 이어 아이는 흰쥐를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타당한 이론입니다. 사람은 학습에 의해 소중한 것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갖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골리앗을 만난 다윗은 학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전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식해서 무지로 용감하게 나아갔을까요? 아닙니다. 분명하게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양을 기르는 목동으로 맹수와 접해 본 경험이 많았을 것입니다. 위협을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두려움을 잠재우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겠습니까?
46절을 보십시오. “온 땅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계실 줄 알게 하겠고”입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어떻게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과감하게 도전합니다. 분명한 목표가 없으면 어려움 문제가 다가오면 두려워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표가 생기면 담대해 집니다. 아들이 전철에 떨어져 보세요. 어머니가 두여워 떨며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들이 파도에 휩쓸려 가는데 아버지가 두려워 떨며 구경만 하고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어가는데 두려워 떨고만 있겠습니까? 다윗에게는 이 절박한 위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야 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가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 분명한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백성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모욕을 받지 아니하신 다는 사실을 알리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는 것도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서입니다. 건강한 것도 출세하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권력을 얻는 것도 여호와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싸워 보십시오, 두려움이 없어지고 담대함이 생깁니다.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전환하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어 집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처가 마을에서 열 명의 공처가들이 마누라들의 독살스러운 바가지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기들끼리 조직을 만들었답니다. 첫 모임을 하는데 이미 남편들의 낌새를 눈치챈 열 명의 부인들이 갑자기 그 현장을 덮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홉명의 남편은 피신하였는데 한 명만이 자진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남겠다고 했답니다. 도망가던 아홉 명의 남편들이 대표성을 그에게 부여하기 위해 그를 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이미 부인들이 오기도 전에 두려워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해쳐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보장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확실한 목표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다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신 31:8)"
광야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말씀합니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신 1:3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바로 왕에게서 나왔을 때 바로가 마음 바꾸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애굽의 모든 전차를 동원하고 군인들을 거느리고 추격합니다.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습니다. 백성들을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움과 공포에 쌓여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의 입술을 통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홍해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움의 늪에 갇혀 절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앞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모세의 앞길을, 여호수아의 앞길을, 야곱의 앞길을, 요셉의 앞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만족할 수 있도록 인도할 줄 믿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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