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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http://blog.daum.net/wuwu09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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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
살아있는 사람이란 언제 어디서나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내 몸은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여기 말고는
아무 데도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여기 있는 내 몸이 이게 과연 생명인가?
‘생명’이라는 말을 가운데 놓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적어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생명이라! 생각을 해보는데 할수록 막막해진다. 우선 나는 무엇이 생명인지를 잘 모른다. 안다 한들 그것을 말(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실 누가 ‘무엇’에 관하여 글을 쓸 때 그가 그 ‘무엇’을 제대로 다 알고 쓴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안하지만 착각이다. 소크라테스도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는데 나 같은 범부(凡夫)가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내가, 아아, 살아있다는 게 그런 거구나, 하고 이른바 ‘생명’에 대하여 뭘 좀 짐작이나마 할 수 있으려면 죽어봐야 할 터인데 아직 죽어보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살아있는 동안에 생명을 제대로 알기는 틀린 일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종이 위에 글을 쓰면서 밖에서 우는 수탉 울음소리도 듣고 있으니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건, 다시 말해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가만, 내가 생명을 지니고 있는 걸까? 아니면 생명이 나를 이렇게 있도록 한 걸까? 이쪽 저쪽 다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이겠지. 이럴 때는 둘 다 함께 말하든지 어느 쪽도 말하지 말든지 그래야 한다. 어느 한쪽만 말하면, 그게 바로 ‘틀린 말’이다.
아래에 옮겨 적는 것은 어느 잡지에서 필자인 나를 소개한 글이다.
밖에서 찾지 말아라
멀리 벗어날수록
나한테서 더욱 멀어지나니.
내 홀로 가는 길
발길 닿는 곳마다
그를 만나네.
그는 바로 나인데
나는 그가 아니로다.
이와같이 깨우쳐야
바야흐로 부처를 만나리.
동산양개(洞山良价) 스님의 게(揭)다. 밖에서 찾지 말아라(切己從他覓). 내가 찾는 그(渠)가 내 몸 바깥 어디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찾는 한 그를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몸에는 ‘바깥’이라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 없는 데서 무엇을 찾으니 찾을 수 있겠는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시작해보자.
부분과 전체는 동떨어진 존재일 수 없다. ‘하나’라는 얘기다. 따라서,
지금·여기에서 원고지에 글을 쓰고 앉아있는 이 물건과 이 물건을
부분’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전체’인 우주는 한 몸인 것이다.
한 몸이니 우주가 곧 나요 내가 곧 우주 아닌가? ”
생명이란 ‘살아있음’인데, 살아있음은 나의 숙명이다. 나는 살아있지 않을 수가 없는 물건이다. 물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육신은 머잖아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불로 돌아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겁내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게 실은 없다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서다. 내 몸(육신)을 나라고 착각하니까 그런 결과(죽음을 싫어하거나 겁내는)가 생기는 것이다. 그건 내 옷을 내 몸으로 아는 것과 똑같은 착각이다. 그런데 이 착각이 사람의 한평생을 터무니없는 고통과 불안으로 시달리게 하고 있으니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다.
내가 죽을 수 없는 까닭은 하느님(무슨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이 살아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말하기를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라”고 하셨다. 그럴 수밖에. 당신이 살아있는데 당신의 몸이 어찌 죽어있을 수 있겠는가? 전체가 살아있는데 부분이 어떻게 죽느냔 말이다. 아아, 그러니 내가 굳이 살아있고자 애쓸 까닭이 없구나.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mystery)인데 그걸 두고 아무리 이러쿵 저러쿵 말을 늘어놓아도 그것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입 다물고 가만히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게 상책이겠다.
글쓴이 이현주 목사는
현재 충주 엄정면 시골마을에서 땅과 하늘의 기운을 호흡하며
글쓰기와 강연 일을 하고 있다.
댓글 '4'
김재익
"생명"이라는 주제라서 기대에 가득차서 읽었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거듭남 이후에 일어나는 성화 과정에서의 영성수양의 중요성,
관상의 의미심장함 등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체"가 생명의 본질이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에 "복음의 능력"이 빠졌다면 자연주의자나 절간의 스님의 설파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으리요?
지금까지 목사님의 모든 글 많이 읽어 왔습니다.
매우 감수성 있고 맛깔납니다.
아쉬운 것은 목사님의 타이틀을 가지고 쓰시는 글들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어서 감히 몇 자 적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글쓴이 이현주선생은
현재 충주 엄정면 시골마을에서 땅과 하늘의 기운을 호흡하며
글쓰기와 강연 일을 하고 있다" " 라는 Sub-title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
깊지 못한 영성과 수련과 수준에 죄송합니다.
미국에서 소생 올림
김재익
원죄로 인해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원래 창조목적과 축복을 회복시키는 당위성으로서 죄성의 자아를 비움 이후에
성령으로 채워져야한다는 보다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개념입니다. 요즈음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짚어 볼 때 비움이라는 경건화 작업에 너무 소홀히 해서 되돌아 보게 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산상수련이 불교의 수행과 같을 수 없고 관상기도가 스님의 염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상의 차이겠지요.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 담그기를 포기하고 소금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장이나 소금물이나 짜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짜다고 해서 장과 소금물이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간장 담그기의 원조인 분이라고 자처하면서 간장과 소금물은 짜니까 똑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퇴폐하고
세속화 되어 가는 크리스챤의 불미스러움에 대한 반사작용이라면....
도올선생께서 쓰신 글이었다면... It's OK...
대학교수 도올 선생이 말씀하시는 진리하고
목사님으로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겹칠 수는 있겠으나 필요충분한 상태 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복음이 배제된 진리가 소위 목사님의 글에서 난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금강경은 다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소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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