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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

더깊은신앙으로 이현주 목사............... 조회 수 2370 추천 수 0 2011.06.24 2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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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daum.net/wuwu09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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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

사이비 영성인을 가려내고 속지 않는 방법 글│이현주 목사  (월간 정신세계 2000 년 12 월호)

 

살아있는 사람이란 언제 어디서나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내 몸은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여기 말고는
아무 데도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여기 있는 내 몸이 이게 과연 생명인가?

 

‘생명’이라는 말을 가운데 놓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적어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생명이라! 생각을 해보는데 할수록 막막해진다. 우선 나는 무엇이 생명인지를 잘 모른다. 안다 한들 그것을 말(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실 누가 ‘무엇’에 관하여 글을 쓸 때 그가 그 ‘무엇’을 제대로 다 알고 쓴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안하지만 착각이다. 소크라테스도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는데 나 같은 범부(凡夫)가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해서, 머리를 굴리지 말고 ‘생명’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내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기로 한다. 편집실에서 읽어보고, 별 내용이 없다 싶으면 이 원고를 없애버리면 될 것이다. 그래도 물론 나는 상관없다.
  
  내가, 아아, 살아있다는 게 그런 거구나, 하고 이른바 ‘생명’에 대하여 뭘 좀 짐작이나마 할 수 있으려면 죽어봐야 할 터인데 아직 죽어보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살아있는 동안에 생명을 제대로 알기는 틀린 일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종이 위에 글을 쓰면서 밖에서 우는 수탉 울음소리도 듣고 있으니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건, 다시 말해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가만, 내가 생명을 지니고 있는 걸까? 아니면 생명이 나를 이렇게 있도록 한 걸까? 이쪽 저쪽 다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이겠지. 이럴 때는 둘 다 함께 말하든지 어느 쪽도 말하지 말든지 그래야 한다. 어느 한쪽만 말하면, 그게 바로 ‘틀린 말’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 내 몸이 이게 살아있다면, 생명이 내 몸을 가지고 있든 내 몸이 생명을 가지고 있든 좌우지간에 ‘생명’이라는 그것이 지금 여기 있다는 얘기다. 어디 다른 때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말이다. 내가 생명을 알 수 있으려면 별 수 없이 지금·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지금·여기)에만 생명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모든 명상가들이 오직 지금·여기에 존재함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하는구나! 그러니까 그 말은 아주 참 동글게 생명으로 존재하겠다는 말이렷다.
 
  살아있는 사람이란 언제 어디서나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다. 그건 내 몸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내 몸은 살아있는데 어디 있느냐 하면 ‘여기’에 있고 언제 있느냐 하면 ‘지금’ 있다. 내 몸은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여기 말고는 아무 데도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여기 있는 내 몸이 이게 과연 생명인가? 아니 그보다 먼저 물어볼 것이 있다. 이게 과연 ‘나’인가?
  
아래에 옮겨 적는 것은 어느 잡지에서 필자인 나를 소개한 글이다.
 
  “이현주 목사는 충주에서 태어나 71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78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64년 조선일보에 동화로 등단하여 현재 동화작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동서양을 두루 아우르는 글들을 집필하며 대학, 교회 등의 강연활동과 번역일을 해오고 있다. 『사람의 길, 예수의 길』…등의 저서와 『예수』…등의 번역서가 있다.” 이로써 과연 ‘나’는 소개가 된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위에 적어놓은 것은 나를 눈곱만큼도 드러내지 못한다. 가끔 강연이라는 걸 하는데 그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는 순서가 강사를 소개하는 시간이다. 사회자가 강사인 나를 소개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좀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것이, 흡사 내 장례식에 와 앉아있는 느낌이다. 장례식에서 빠뜨리지 않는 순서가 고인의 약력소개 아닌가?
 
  어디서 태어나 무슨 학교를 다녔고 무슨 직함을 가지게 되었고 무슨 책을 내었으며 무슨 상 또는 벌(대개 벌받은 일은 얘기하지 않지만)을 받았으며…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장황하고 자세하여도 결국 ‘나’를 소개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 모양으로 이 땅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남긴 흔적을 소개랍시고 늘어놓은 것일 뿐이다. 내 이름이 내가 아니고 내 몸뚱이가 내가 아니듯이 나의 발자국 또한 내가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나의 내력(來歷)을 자세히 소개해도 그것으로 내가 소개된 것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자기 이름에 누가 흠을 조금 내면 살을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콩팔칠팔 날뛰는 것은 무지의 열매가 얼마나 서글프게 웃기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자, 그러면 소개받아야 할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이 분명 지금·여기에 있는 줄은 알겠는데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구나. 내 글을 읽는 사람들보다, 내 강연을 듣는 사람들보다, 내가 먼저 ‘그것’을 만나야겠는데, 지금·여기에 있는 그것을 만날 길이 없구나. 인생이란 결국 내가 나를 만나기 위해 지금·여기로 돌아오(가)는 길인가? 그것을 어떤 사람은 중생이 부처를 만나는 것(만나서 부처로 흡수통일되는 것)이라고 했지.
  
  밖에서 찾지 말아라
  멀리 벗어날수록
  나한테서 더욱 멀어지나니.
  내 홀로 가는 길
  발길 닿는 곳마다
  그를 만나네.
  그는 바로 나인데
  나는 그가 아니로다.
  이와같이 깨우쳐야
  바야흐로 부처를 만나리.
  
  동산양개(洞山良价) 스님의 게(揭)다. 밖에서 찾지 말아라(切己從他覓). 내가 찾는 그(渠)가 내 몸 바깥 어디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찾는 한 그를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몸에는 ‘바깥’이라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 없는 데서 무엇을 찾으니 찾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만나야 할 부처(깨달은 나)는 내 ‘안’에 있다. 그러니 바깥에서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수고를 많이 할수록 그만큼 ‘나’한테서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사실 나는 그를 늘 만나고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에서 그를 만나고 있다. 얘기가 어째 붕 뜨는 느낌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라니 도대체 거기가 어딘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시작해보자.

“우주가 바로 나다. 왜냐하면 나뭇잎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부분과 전체는 동떨어진 존재일 수 없다. ‘하나’라는 얘기다. 따라서,
지금·여기에서 원고지에 글을 쓰고 앉아있는 이 물건과 이 물건을
부분’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전체’인 우주는 한 몸인 것이다.
한 몸이니 우주가 곧 나요 내가 곧 우주 아닌가? ”

나는 내가 우주라는 것을,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소우주(小宇宙)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없는 우주가 바로 나다. 왜냐하면 나뭇잎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부분과 전체는 동떨어진 존재일 수 없다. ‘하나’라는 얘기다. 따라서, 지금·여기에서 원고지에 글을 쓰고 앉아있는 이 물건과 이 물건을 ‘부분’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전체’인 우주는 한 몸인 것이다. 한 몸이니 우주가 곧 나요 내가 곧 우주 아닌가?
 아하, 그러니 내가 어디로 가든 발길 닿는 곳마다에서 그를 만난다는 말이 그말인가 보다. 이런 쯧쯧, 그렇다면 그동안 순간마다 만나고 있으면서 그를 만나야 한다고 안달이었더란 말인가? 논리로만 말하면야 그렇지만, 내가 아직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는지 모르는 것이 엄연한 진실인데, 어찌 내가 나를 만났다고(안다고) 할 수 있으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거짓말이니까. 그래서 동산 스님은 노래했구나.
 
  “그는 바로 나인데 나는 그가 아니로다(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부처인 나는 중생인 나를 알고 있는데(늘 만나고 있는데) 중생인 나는 부처인 나를 아직 모르고 있는(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게 그런 줄 알고(내가 나를 만나고 있으면서 아직 만나지 못했음을 알고) 계속 그렇게 나를 만나려는 마음을 품고 살다보면 문득 나와 완전히 하나로 된 나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方得契如如) 그런 얘긴가보다.
  
  생명이란 ‘살아있음’인데, 살아있음은 나의 숙명이다. 나는 살아있지 않을 수가 없는 물건이다. 물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육신은 머잖아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불로 돌아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겁내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게 실은 없다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서다. 내 몸(육신)을 나라고 착각하니까 그런 결과(죽음을 싫어하거나 겁내는)가 생기는 것이다. 그건 내 옷을 내 몸으로 아는 것과 똑같은 착각이다. 그런데 이 착각이 사람의 한평생을 터무니없는 고통과 불안으로 시달리게 하고 있으니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다.
  
내가 죽을 수 없는 까닭은 하느님(무슨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이 살아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말하기를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라”고 하셨다. 그럴 수밖에. 당신이 살아있는데 당신의 몸이 어찌 죽어있을 수 있겠는가? 전체가 살아있는데 부분이 어떻게 죽느냔 말이다. 아아, 그러니 내가 굳이 살아있고자 애쓸 까닭이 없구나.
 
살아있음은 ‘열려있음’이다. 사람 몸에 구멍이 개수로 치면 아홉 개인데(아는 척하지 말아라. 어찌 아홉 개 뿐이랴? 땀구멍은 구멍 아니냐?) 그 구멍이 열려 있어서(열렸다 닫혔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열려있음이다)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송장을 염할 때 솜 같은 것으로 구멍마다 틀어막는 행위는 분비물 따위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실용적인 이유로만 그러는 건 아닐 게다. 이미 막혀버린 구멍들(뚫려 있어도 그리로 아무 것도 드나들지 못하면 막힌 구멍이다)을 다시 막아서 이 물건은 이제 살아있는 생명이 아님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닐까?
 
 우리 피부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멍과 구멍으로 이어져 있는, 말 그대로 ‘구멍 투성이’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몸이 뻥 뚫려 있어서 천지사방 사통오달로 통하기 때문에 아직 이렇게 살아있다.
 
 몸뚱이는 열려 있어서 숨도 쉬고 땀도 흘리고 밥도 먹는데 마음은 닫혀 있어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고 옆에서 누가 신음을 하면서 죽어가는데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인간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몸(육신)이 곧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보면 물론 그는 살아있는, 그것도 아주 씩씩하게 살아있는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체를 몸(육)이 아니라 얼(영)로 보는 예수 같은 사람이 볼 적에는 그런 자들이야말로 ‘죽은 자들’이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mystery)인데 그걸 두고 아무리 이러쿵 저러쿵 말을 늘어놓아도 그것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입 다물고 가만히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게 상책이겠다.
 
 그렇긴 하지만, 요즘 무슨 유행이나 되는 것처럼 영성(spiritualism)이란 말이 사방에서 들리고 명상, 요가, 채널링을 한다는 이들이 이곳 저곳에서 얼굴을 내보이고 있는데, 이런 현상 또한 한 가지 시대의 징조이긴 하겠지만, 자고로 비싸고 좋은 것일수록 ‘가짜’가 많은 것이 세상 이치일진대, 속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는 얘기는 말이 나온 김에 해두고 싶다. 그런 ‘가짜’들한테 속지 않는 비결은, 그들이 자기 ‘몸(육신)’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는 것이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그런 자들이 밥을 어떻게 먹는지 눈여겨본다. 오래 볼 것도 없다. 몇 숟갈만 함께 먹어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을 볼 때 눈빛이 어떤지, 입꼬리에 혹시 무지한 자들에 대한 경멸이 묻어있는지, 정말로 제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주 드러내 보이는지, 말로나 글로 천상낙원을 헤매다가도 돈 얘기만 나오면 얼굴색이 달라지지 않는지, 말끝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하고 명령투를 달고 다니는지, 아무튼 그가 제 몸 가지고 어떻게 처신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러면 대강 알 수 있다.
 
 석가세존 말씀마따나,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해서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직접 자기 머리로 헤아려보고(따져보고) 자기 몸으로 살아본 뒤에 옳다고 생각되면 그 말씀을 받아들일 일이다.
 
 나야말로 여태껏 쥐뿔도 모르면서 횡설수설 말이 많았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이 글을 읽으신 분들, 제 말에 속지 마십시오. 모두 잊어버리시고, 지금 식사시간이거든 밥 맛있게 드십시오. 모든 게 다 잘 되겠지요.
글쓴이 이현주 목사
현재 충주 엄정면 시골마을에서 땅과 하늘의 기운을 호흡하며
글쓰기와 강연 일을 하고 있다. 


댓글 '4'

들꽃편지509

2011.07.04 14:21:34

그래 우선 지금은 밥이나 잘 먹자...

김재익

2011.07.12 13:41:19

존경하는 이현주 목사님...
"생명"이라는 주제라서 기대에 가득차서 읽었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거듭남 이후에 일어나는 성화 과정에서의 영성수양의 중요성,
관상의 의미심장함 등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체"가 생명의 본질이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에 "복음의 능력"이 빠졌다면 자연주의자나 절간의 스님의 설파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으리요?
지금까지 목사님의 모든 글 많이 읽어 왔습니다.
매우 감수성 있고 맛깔납니다.
아쉬운 것은 목사님의 타이틀을 가지고 쓰시는 글들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어서 감히 몇 자 적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글쓴이 이현주선생은
현재 충주 엄정면 시골마을에서 땅과 하늘의 기운을 호흡하며
글쓰기와 강연 일을 하고 있다" " 라는 Sub-title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

깊지 못한 영성과 수련과 수준에 죄송합니다.

미국에서 소생 올림

헤븐

2011.07.19 15:07:07

예수와 부처가 하나이다... ? 하나님이 無이다? 하나님 없이는 나도 없고 나 없이는 하나님도 없다? 무엇보다도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예수를 공부하여 알고 믿는 결과가 아닐런지요. (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에서)

김재익

2011.07.22 14:55:40

비움을 통해서 얻어지는 무아의 경지가 성불의 정점이라면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비움 이후에 채움의 충만을 전제로합니다.
원죄로 인해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원래 창조목적과 축복을 회복시키는 당위성으로서 죄성의 자아를 비움 이후에
성령으로 채워져야한다는 보다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개념입니다. 요즈음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짚어 볼 때 비움이라는 경건화 작업에 너무 소홀히 해서 되돌아 보게 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산상수련이 불교의 수행과 같을 수 없고 관상기도가 스님의 염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상의 차이겠지요.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 담그기를 포기하고 소금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장이나 소금물이나 짜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짜다고 해서 장과 소금물이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간장 담그기의 원조인 분이라고 자처하면서 간장과 소금물은 짜니까 똑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퇴폐하고
세속화 되어 가는 크리스챤의 불미스러움에 대한 반사작용이라면....
도올선생께서 쓰신 글이었다면... It's OK...
대학교수 도올 선생이 말씀하시는 진리하고
목사님으로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겹칠 수는 있겠으나 필요충분한 상태 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복음이 배제된 진리가 소위 목사님의 글에서 난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금강경은 다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소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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