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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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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10·12·13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무교회주의적 성향’입니다.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교회에 깊이 들어갈수록 시간을 빼앗기고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재빨리 빠져 나가버립니다. 그래야 교회에 시간을 빼앗기거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신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교회에 소속이 되고 교제에 힘써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서로 어울려서 잡담이나 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일을 위하여 힘을 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모이고 교제하면서 신앙이 자라게 하셨고, 그런 가운데서 또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으로는 신앙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혼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붙들어 주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견고해집니다.
혼자서는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선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시종일관 함께 팀을 이루어 선교해 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실 때 한 사람씩 보내시지 않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남남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신 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은사와 힘과 가능성을 총동원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며 복음을 전하다 보면 고난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고난을 함께 극복하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만일 혼자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얼마나 더 힘들었겠습니까?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교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함께 교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제야말로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아름다운 교제 가운데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살펴봅시다.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피하여 이고니온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1절)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동쪽으로 약 160km 거리에 있는 도시로, 현재는 터키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인 Konya입니다.
14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두 사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의 정의를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 분의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임명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라 하면 열두 제자와 바울이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바나바를 바울과 함께 사도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사도라는 말은 교회들에 의하여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의해 보냄을 받은 그 교회의 사도들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함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항상 성령이 충만한 모습입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나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했습니다. 핍박을 받는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늘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일하는 모습은 무엇을 해도 늘 ‘충만’이었습니다. 기쁨 충만, 은혜 충만, 사랑 충만…
이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도 언제나 충만한 자세로 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세는 곤란합니다. 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 한 시간 참석하는 것도 충만한 마음으로 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항상 예배 시간에 늦게 나옵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충만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예배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은혜받기도 어렵습니다. 전도도 그렇습니다. 충만한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전도는 열매를 맺기 어렵고 피곤할 뿐입니다. 늘 성령 충만하여 뜨거운 마음과 열심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핍박 가운데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한 핍박과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상-27)
바울은 이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나약해지거나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울은 그 모든 핍박을 받으면서도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일에 충성하고자 할 때도 역시 어려움과 핍박이 따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결코 약해지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하다가 혹시 실망스러운 일을 당했다 해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핍박이나 고난으로 인하여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왕성해집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함
핍박을 당할 때 바울과 바나바는 낙심하거나 약해지지 않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3상) 이 사람들이 본래 그렇게 담대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3-4)
사실 바울도 연약하여 두려워하며 떨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도하는 것이 승리하며 열매를 맺는 전도의 비결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할 때 우리는 약하여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그 두려움과 약함과 떨림이 극복될 때 능력 있는 전도, 열매 맺는 전도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대상자들을 위하여 먼저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며, 성령을 힘입어야 우리가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반대와 핍박 속에서도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주를 힘입어,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말씀 전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표적과 기사
이런 반대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심으로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하) 이 이적은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고 있는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용기와 힘을 얻었겠습니까? 이적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자 할 때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과,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은 이런 이적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고니온에서 일어난 이러한 기사와 이적이 어디서나 항상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매우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이적과 기사가 일어났지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바울의 설교 외에는 다른 이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시다아 안디옥에서의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12장에서 야고보는 순교하고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구출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는 저주를 받았고 베드로는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야고보에게도 영광이었고 베드로에게도 영광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이적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졌으며, 이고니온에서는 이적을 통하여 복음이 더욱 효과적으로 전해진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고 복음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경우를 들어서 그것을 절대적인 법칙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은사가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자유롭게,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더욱 성령을 사모하여 성령을 충만하게 받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주심을 힘입어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분열
바울의 선교 여행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이 분열을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4절). 바울 일행이 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소동과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도시마다 동요를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언제나 양극단으로 갈라졌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복음은 언제나 분열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타협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며 책망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되지만, 거절하는 자들은 반대와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항상 분열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할 때 이것을 예상하고 놀라거나 두려워말고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똑같이 바울의 설교를 들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많이 받고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별로 받지 못합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설교를 듣고 있는데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여기서 우리는 다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는 4가지 종류의 밭이 나오는데, 결국은 옥토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 밭과 같습니까?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4:20) 오늘 당신의 마음이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전도할 사람들의 마음도 옥토와 같이 되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도망
반대하는 자들이 이제는 사도들을 능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두 사도는 그곳으로부터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5-7절) 그들은 도망을 가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을 당하여도 복음을 전하고, 핍박을 피하여 도망해가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무것도 그들을 잠잠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도전을 주는 모습입니까?
오늘 우리는 너무나도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을 매우 두려워하고 주저합니다. 심지어는 전도대상자 이름을 적어내라고 해도 안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날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핍박을 받고 있습니까? 복음 때문에 집과 가정을 멀리 떠나가야 합니까? 아프리카나 중국으로 가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욱 열심을 내어 담대하게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데글리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복음 전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후로 그 교회가 어떻게 부흥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사에 성자로 존경받는 사람 중에 ‘데글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고니온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데글리’라는 사람이 교회를 충성되게 섬겼으며, 나중에는 순교하여 성자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극심한 핍박을 받아 도망하고 말았지만, 그 때 전한 복음을 듣고 이렇게 훌륭한 일군이 배출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전도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했는데도 열매를 거두지 못할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복음의 씨를 부지런히 뿌리면 반드시 결실하게 됩니다.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열심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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