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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5:1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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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그리스도인들은 편협하다거나 융통성이 없다거나 배타적이라는 말을 간혹 듣습니다. 당신은 이런 평가가 과연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넓고 양보하기를 잘하며, 이해심이 깊은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부정적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편협하다거나 배타적이라는 평가를 들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진리에 관해서입니다. 이 진리에 관한 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구원의 진리가 변질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신이시며, 창조주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에 관한 한 우리는 결단코 타협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배타적이라거나 편협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보다 더 심한 말을 듣는다 해도 진리만큼은 타협 없이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와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관대하고 이해심이 깊은 사람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교회의 일치와 성도의 교제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진리를 지키며 신앙을 지키는 데에는 소홀하면서, 이해가 걸린 문제나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을 가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투고 싸웁니다. 경찰서에서나, 또는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직종의 사람들에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이기적이고 양보할 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그런 면이 있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구원의 문제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진리를 사수한 후에 교회의 평화와 일치, 그리고 형제의 양심을 위하여 모든 것을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절대적으로 지키는 것과 그 외의 것에는 관대한 것,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구원은 무엇으로 얻는가?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유대인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들만 하나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인들 외에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대거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면서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의 진수가 다시 한 번 확실히 정립되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 것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율법과는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합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고 율법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공회의 의제는 이방인의 구원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가능한가? 이 문제를 두고 장시간 논란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되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 의견
초대 교회는 대부분이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적인 율법과 전통들에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까지도 한 때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반대되는 입장에 서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을 따라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체험하고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마친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말을 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사실상 베드로가 경험했던 일이 이방의 도시들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을 증거하는 말이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른 이방 도시들에서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어떤 의식을 거치지 않고도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와 성령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러한 일들을 제1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수도 없이 경험하고 확인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발언
충분한 논의가 끝난 다음에 야고보가 일어나 회의를 마무리 짓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신약성경의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교회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단순히 사람의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14절)
그리고 그는 베드로나 바울과 바나바가 겪었던 모든 일들, 즉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은 구약의 예언과 완전히 부합된다는 것을 아모스 9:11-12을 인용하여 증명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15-18절) 야고보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뒤늦게 궁리해내신 방편이 아니라, 예언자들에 의하여 오래 전부터 이미 예언되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하신 일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결론을 내릴 때는 그것이 성경에 일치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교회가 내린 결론이 진정한 권위를 가지려면 그것이 성경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거나, 특히 성경과 상충되는 결론은 아무리 훌륭하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론은 반드시 성경에 일치하는 것이어만 합니다.
예루살렘 공회는 결국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은혜로 되는 것이지 할례나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할례나 율법의 모든 규정들을 지키도록 강요함으로서 그들에게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19절)
이방인들이 지켜야 할 것
이와 같이 구원의 진리를 확정한 후에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이 주의해서 지켜야 할 것 4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20절)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의무일까요? 이것은 오늘 우리도 지켜야 하는 규정일까요? 그것은 율법을 폐지하고 다시 다른 율법적인 규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야고보가 이러한 제안을 한 것은 주 안에서 한 형제된 유대인들의 양심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고 한 형제가 된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워서는 안 되는 것처럼, 유대인들을 위해서도 그와 같은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21절).
유대인들이 흩어져 사는 곳이면 어디나 회당이 세워져 있었고, 그들은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배웠고 그것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율법들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무시해버린다거나,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이 싫어하고 금기시하는 것들을 내놓고 어긴다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겠습니까? 그들은 전통적으로 율법을 지켜왔으며, 그것이 구원받는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비록 구원의 조건은 아닐지라도, 이방인 신자들도 최소한 이 정도의 짐은 감당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나의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나는 그것을 포기하고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임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는 것을 단호히 반대했지만 예루살렘 공의회가 결정한 이 4가지 금지 조항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바울로서는 이것도 필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확고히 정립된 이상, 본질적인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양보했던 것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 4가지 사항을 금지하면 유대인 신자들의 양심을 편하게 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제와 일치를 촉진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만 확고히 선다면, 교회의 일치와 성도의 교제와 연합을 위하여 우리는 그 무엇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에 있어서는 자유를, 이 둘에 대해서는 사랑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를 누리되, 형제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결정을 내리는 원리
우리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과 방법에서 귀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결정을 지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28절)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으며, 거기에 겸손히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그 누구도 논쟁을 벌이면서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원리입니다. 교회의 일은 사람의 뜻과 주장을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켜야만 하겠다는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말씀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 어떤 결정도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편지와 사절을 보냄
예루살렘 교회는 이 결정 사항을 정식 서류로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이 결의 사항을 이방인 교회에 전하기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다와 실라를 택하여 보냈습니다. 편지에서는 다음 3가지 중요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소위 ‘할례당’이라는 사람들, 즉 자기들이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보냄을 받은 것처럼 허세를 부리면서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24절) 둘째, 소위 ‘할례당’이라는 사람들과는 달리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완전한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27절) 그리고 셋째로, 예루살렘 교회는 이 요긴한 것들, 즉 앞에서 살펴보았던 4가지 특별한 금지사항들 외에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아무런 짐도 지우지 말도록 만장일치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전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유다와 실라는 여러 말로 형제들은 권면하며 그들의 믿음을 굳게 했으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거하면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 가운데서 갈등과 위기를 슬기롭고 아름답게 극복하고 힘차게 전진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6장부터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거둔 두 가지 승리
예루살렘 공회를 통하여 교회는 두 가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은혜의 복음을 확증하고 사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유대인들의 민감한 양심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양보함으로써 교회의 일치와 교제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교회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자세를 교훈 받게 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여기에는 털끝만큼의 양보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진리만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하여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관하여는 불굴의 전사가 되며, 사랑에 관하여는 한 없이 부드럽고 양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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