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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6:2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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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 그 모든 고난들은 결국 선을 이룹니다. 고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고난당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심한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쁨으로 찬양할 때 우리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며,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놀랄 것이고 그 이유를 묻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 실례를 볼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 일어난 기적
빌립보에서 순조롭게 복음을 전하던 바울 일행은 뜻밖의 곤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들려 점을 잘 치던 한 여종이 있었는데, 바울이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린 여종을 이용하여 많은 돈을 벌고 있던 주인들이 자신들의 수입원이 없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많은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던 그 날 밤에 감옥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기도하며 찬송했습니다. 그러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들이 열렸으며, 죄수들의 차꼬가 다 풀어졌습니다. 그리고 완악한 간수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기적의 의미를 자세히 생각해봅시다.
첫 번째 기적
먼저 생각할 것은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절) 이것이야말로 지진이 일어난 것 못지않은 기적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25절에 언급된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며 경배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감옥에서 한탄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그 감옥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을 사모하며 찬양하는 그런 기도와 찬송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은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던져졌으며, 감옥은 음침하고 어둡고 습기 차고 추웠습니다. 매를 맞은 상처 때문에 온 몸이 쑤시고 아팠습니다. 위안이 될 만한 것은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지진 못지않은 기적이었습니다. 기도하며 찬송하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활짝 열려졌으며, 비록 감옥이었지만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뵙고 기쁨과 감격으로 경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하는 올바른 마음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습니까? 이곳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면서 감격과 흥분에 휩싸여 있습니까? 오늘 찬송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큰 기쁨과 감격으로 힘을 다해 찬송했습니까? 찬송을 부를 때 무엇을 느꼈습니까? 기도할 때 당신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뜨거운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까? 예배가 지루합니까, 아니면 예배드리는 것이 당신의 가장 큰 기쁨입니까?
“주께와 엎드려 경배 드립니다. 주 계신 곳엔 기쁨 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이 예배 시간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지며 여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 뵙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기적
옥문이 열리고 석방될 때는 누구라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감옥 안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역경 가운데서도 찬양하는 사람입니까? 비록 몸은 차꼬에 채워져 있었지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과의 온전하고도 자유로운 교제를 누리면서 만족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날마다 하나님과 막힘없는 교제를 누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누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속히 제거하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며 찬송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린 기도와 찬송을 기쁘게 받으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으로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옥 터가 움직이며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벗겨졌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2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셨다는 증거요,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받으셨다는 응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감옥에서 구해 주시라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기도와 찬송을 드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응답을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능력 있는 기도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은 오늘도 일어나는데 그 기적을 맛보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역경을 만났을 때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놀라우신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기적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기적은 간수의 마음이 열리고 그가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간수는 심한 매를 맞은 바울과 실라가 감방에 들어왔을 때, 그들의 상처와 아픔에 대하여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쳐 넣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평하게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간수는 매우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는 동안에 지진이 일어났고 옥문이 열렸으며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습니다. 놀라서 일어난 간수는 이제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검을 꺼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법률에 의하면 죄수를 놓쳤을 때는 간수가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간수는 처형을 당하느니 자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바울과 실라가 말했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28절). 이제 간수는 처형을 당하거나 벌을 받을 염려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안심해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29절) 죄수도 도망하지 않았고 염려하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간수는 무엇을 무서워하면서 떨었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두려움이요 죄책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이 간수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큰 죄인인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두려움이 간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하고 외쳤습니다(30절). 이 간수의 절규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했다(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 속에는 복음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자신 만이 아니라 집, 즉 온 가족이 구원을 얻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부모님이 믿지 않았는데,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마침내 온 가족이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오늘 홀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가족을 구원해 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 간수와 온 집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기고 음식을 차려 주었습니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2-34절)
이 장면은 마치 시23:5을 상기시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 ” 잔인하고 포악한 간수가 이렇게 변화된 것 또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간수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의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이 변화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변화되었습니까? 주님을 영접하고 말씀을 들었으며, 심지어는 말씀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잘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 중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통하여 변화되고 있습니까?
복음 전파의 결과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주님을 영접하고 변화가 일어났으며,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오늘 당신에게 이 기쁨이 있습니까?
든든히 서가는 빌립보 교회
다음 날 아침에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35절) 이제 바울과 실라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선뜻 나가려 하지 않고 자기들은 로마 시민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인 자기들을 재판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때리고 옥에 가둘 수 있는 것이냐고 항의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37절) 이 말을 들은 상관들은 두려워하며 직접 와서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감옥에서 나갔으며, 제발 빌립보 성에서 떠나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을 떠나기를 청하니”(38-39절)
바울과 실라는 왜 석방되는 마당에 자신들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항의를 했을까요? lex Julia에 보면 로마 시민은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매를 맞거나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 시민은 단지 'sivis Romanus sum'이라고만 말하면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이 거짓으로 그렇게 했을 때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시민인 바울과 실라를 임의로 매질하고 옥에 가둔 것은 중대한 과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와서 정중하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앞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자 했습니다.
깡패 출신인 김익두 목사님이 어느 날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가는데 더워서 웃옷을 벗고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술 취한 청년 하나가 비틀거리며 올라오더니 다짜고짜로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고 하면서 한 방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그 청년이 때리는 대로 다 맞은 후에 청년의 손을 마주 잡고 “형님 다 때렸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는 “내가 김익두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사색이 되어 살살 빌었습니다. ‘김익두’라면 천하에 소문난 깡패 두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청년에게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더라면 너는 여기에다 묘를 쓰고 마는 거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어서 네가 산거야. 그러니까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았다.” 청년이 물었습니다.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따라와야지.” 하면서 청년을 부흥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 청년은 찍소리 못하고 따라갔다가 예수 믿게 되었고 나중에 장로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한 일이 바로 이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를 위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을 위로함
감옥에서 나온 바울과 실라는 형제들이 염려하며 기도하고 있는 루디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형제들을 위로했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40절) 죽도록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고생하고 온 사람들이 위로를 받아야 마땅할 것인데, 왜 그들이 형제들을 위로했다고 되어 있을까요? 아마도 빌립보에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험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이 죽도록 고생을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초신자들은 얼마든지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위로했던 것입니다. 뭐라고 위로했을까요? 그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를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기적들을 말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간증을 듣고 감격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빌립보의 어린 신자들은 이 일로 인하여 신앙의 도전과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국자들도 빌립보 교회를 함부로 핍박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일 후 빌립보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간증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믿음 좋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기뻐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실 것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가 전도의 기회이며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역경 가운데서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 모든 역경을 넉넉히 이기며 의연하게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역경 속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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