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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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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오늘 본문에는 설교 시간에 졸다가 삼 층 창밖으로 떨어진 청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즘 우리 성도들은 조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참석해 본 사람들은 교회가 참 은혜로운 분위기라고 말들 합니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예배 시간에 좀 더 일찍 나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분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데 지각을 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갈 때 지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만나 뵙는 예배 시간에 지각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며, 하나님을 만나 뵙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 늘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으며,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곳은 에베소였습니다. 그는 이제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지역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에베소를 떠나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목표하는 최종 선교지는 로마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와 헬라를 방문하고, 드로아와 밀레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20장에 나오는 바울의 전도 여행이 사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지막 전도 여행이 되는 셈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결국 죄수가 되어 로마로 호송되는 길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그의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기록했는데, 그의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장면은 매우 흡사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구속의 길을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①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여행했습니다(행20:4/눅10;38). ②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직면했습니다(행20:3,19/눅6:11,22:1-4). ③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가 고난 받을 것에 대해 3번 연속적으로 예언을 하거나 예언을 받았습니다. ④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겼습니다(행21:14/눅22:42). 누가는 아마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 뒤를 따라가고 있음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언제나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에베소를 떠남
에베소를 떠나기에 앞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을 불러다가 여러 말로 그들을 권면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권면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7절 이하를 참고해 볼 때 우리는 그의 권면의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핍박이 있더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고 주님께 충성을 다할 것을 권면했을 것이며, 또 하나님 백성다운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촉구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권면한 후, 바울은 앞서 마게도냐로 보낸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뒤쫓아 갈 작정으로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야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나 동안 더 있으니라”(행19:22)
마게도냐에서의 바울
마게도냐에서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를 방문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지역들에서 복음 전하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성으로, 루디아의 집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던 곳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려 점을 치던 한 여종에게서 귀신이 쫓겨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었습니다. 그러나 그 처참한 감옥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찬송하며 기도했는데, 그 때 감옥 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유대인들의 극심한 핍박을 받고 베뢰아로 피하여 갔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세워진 교회는 그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며 칭찬받는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보다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상고함으로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던 곳입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시 방문한 바울의 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바울이 마게도냐를 방문하는 동안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일은 예루살렘 교회의 곤궁한 성도들을 돕는 연보를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4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는 연보를 맡아 가지고 바울과 함께 가는 각 교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가이오와 및 데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보낸 일은 예수 안에서 하나된 교회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헬라에서
바울이 마게도냐를 거쳐 도착한 곳은 헬라였는데, 헬라는 아가야 지방을 가리킵니다. 그는 거기서 석 달을 머물렀는데, 아마도 고린도를 방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2년 동안 사역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으며, 유대인들의 대적과 훼방을 받았었습니다. 그 날 밤 주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은 바울은 그 후에도 1년 6개월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도 역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울은 거기서 석 달을 머물렀습니다. 아마도 겨울이어서 배가 출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석 달 후에 막 출항하려 하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3절)
바울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타고자 했는데, 바울처럼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이런 수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배를 타게 되면, 바울에 대하여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바울을 살해할 위험이 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획을 바꿔서 마게도냐로 다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예루살렘으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
4절에는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가이오와 및 데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바울은 혼자 여행한 적이 거의 없었으며, 혼자 있을 때면 동역자들과의 교제를 열망했습니다. 아테네에서 혼자 있을 때는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에게 자기에게로 속히 오라고 전갈했으며(17:15,16),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는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딤후4:9,21). 1차 전도여행 때 바울은 바나바와 마가와 함께 했으며, 2차전도 여행 때는 실라와 디모데가 동행했고, 3차 전도여행 때는 4절에 기록된 사람들과 동행했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도 성도의 교제를 그리워했으며,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철저한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의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교제와 동역하는 원리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에게 주신 매우 귀한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혼자 신앙생활하고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하는 형제들을 귀하게 여기고 늘 교제하기를 힘씁시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려 하지 말고, 형제를 세워주며 함께 일하는 것을 기뻐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주의 날
이들은 드로아에 도착하여 거기서 7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드로아에서 그들은 안식 후 첫 날 함께 모였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7상) 7절은 주일 집회에 대한 최초의 언급입니다. 초대 교회는 안식일에 모이다가 차차 주일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이 주일로 대치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는데, 이 날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언약의 징표였습니다. 왜냐면 이 날을 지킴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위해 모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주님께 대한 의무입니다. 주일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님의 제자임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드로아에서 주일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7하-8절) 그들은 아직 함께 모일 성전이나 회당도 없었으며,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 집의 다락방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불편하고 비좁은 장소였지만, 그들은 기꺼이 함께 모였습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힘쓰던 초대 교회 성도들의 열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만이 아니라 목장 모임에도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드로아의 밤 예배
드로아의 다락방은 비좁은데다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등불을 많이 켜 놓았기 때문에 열기와 기름 냄새가 났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강론은 초저녁부터 시작되어 한 밤 중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두고의 죽음과 소생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어 동틀 때까지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초저녁부터 모여서 밤이 새도록 말씀을 들으며 성찬과 애찬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 볼 때 얼마나 놀라운 모습입니까? 비좁고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모여서 밤이 새도록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열심을 그들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모이기를 더욱 힘쓰고,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졸다가 떨어진 청년
유두고라는 청년이 다락방의 창에 걸터앉아 깊이 졸고 있었는데, 바울이 밤이 깊도록 계속 설교하자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내려가서 일으켜 보니 죽었습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9절)
바울은 내려가 떨어져 죽은 청년 위에 엎드려 그의 몸을 안았습니다. 이 장면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에게 한 것과 같았으며,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에게 한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바울은 ‘그에게 생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다시 살아났는데,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청년이 죽지는 않았던 것이며, 아마도 기절을 했다가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사인 누가는 분명히 이 청년이 죽었다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바울이 그를 끌어안고 기도한 결과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들에게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기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것에 대해서 엇갈린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졸게 된 것은 불가피했다고 동정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 청년은 하루 종일 일했을 것이며, 젊은 사람이 밤이 깊어지면서 졸음을 이기지 못한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바울의 설교가 특별히 길었으며, 장소는 비좁았고, 많은 등불을 켰기 때문에 덥고 기름 냄새가 나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졸음을 이기기 위해 창에 걸터앉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것에 대하여 그를 비난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것은 별로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가 창에 걸터앉은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로는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중해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왜 유두고는 그렇게 졸고 있었단 말입니까?
두 가지 견해가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예배는 나 자신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나와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들어야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음을 다하여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상습적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데, 빨리 고쳐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또 상습적으로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창조주 앞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바울이 사역하는 모습과 초대 교회의 예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열정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무리 앞에서나 홀로 있을 때나,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 앞에서나 사랑하는 형제들 앞에서나, 그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빌4:12). 오늘 당신은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열정에 불타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순수한 믿음과 주님을 사모하는 열심이 뜨거웠었습니다. 그 어떤 핍박과 어려움도 그들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했으며, 그들의 기도는 기적으로 응답받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운 교회를 위해 특별헌금을 모아 가지고 먼 길을 찾아가는 뜨거운 사랑과 하나됨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회복되고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 모두 마음과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써,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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