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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2:1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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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11·06·18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 하나는, 다른 종교들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신 종교라는 점입니다. 유한하고 죄인 된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상 신을 찾고자 했던 인간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와 그를 부르셨으며, 도망하던 야곱을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찾아오신 기록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절정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종교라는 점은 우리의 구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금까지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일찍부터 유명한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하게 율법을 배웠으며,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으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헬라 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지만, 그것으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도,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매 우리를 불러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또 다른 택하심과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명과 관련된 택하심과 부르심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이것을 올바로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거꾸러진 바울은 주님의 말씀대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을 찾아와 그를 위해 기도하여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22:14-15) 9장 15-16절을 보면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말해준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처럼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은 바울은 다메섹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그가 받은 사명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환상 중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17-18절) 이로써 바울에 대하여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그러나 처음에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바울의 반응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19-20절)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극심하게 핍박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혹독하게 핍박을 했던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주동자 역할을 했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독교를 핍박한 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잘 알 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바울이 이제는 완전히 변하여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극적인 변화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면 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게 해주시라고 간청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예루살렘을 떠날 것을 명령하셨고, 그를 이방인의 선교사로 보내셨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1절).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방인들에게 보내고자 하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바울도 자기의 뜻을 고집하려고 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을 명령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55:8-9보십시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아나니아도 처음에는 사울에게 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이의를 제기했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얼마나 잔혹하게 핍박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이번에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이 다메섹에 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저더러 그 자를 만나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주님의 계획을 듣고 나서 아나니아는 순종하여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울을 만나러 갔습니다. 결국 아나니아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를 부르시는 주님의 놀라운 계획에 극적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뜻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완전하고 선하신 것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내 뜻을 꺾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 가장 복되고 유익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힘쓰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으면 과감하게 내 뜻을 포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것보다 더 온전하고 좋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며 밝히 깨달아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새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게 해주시라는 바울에게 주님께서는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절). 지금까지는 유대인들만 하나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도 교회는 예루살렘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셔서 이 새 일을 맡기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옛 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경직된 자세로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 어렵습니다. 자칫하면 그것은 내 뜻을 고집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 놀라운 일을 계획해 놓으시고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가 내 생각과 옛날 생각만 하고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께 쓰임 받기가 어렵습니다. 크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새 일을 계획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 순종하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반응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의 입에서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갑자기 흥분하여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흥분한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동등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율법과 많은 계율을 지키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할례 받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은 부정하게 여겨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를 이방인들에게 보내셨으며, 이방인들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완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방인들에게 보내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완악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편견과 오만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자기들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 민족들 앞에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은 사랑하시고, 이방인들은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만 돌보시지 이방인들은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을 나타내실 때 그것을 거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은 날마다 세계 선교를 위하여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내가 비록 선교사가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어떻게든지 이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원과 열망이 있습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안 믿는 사람들을 볼 때 가슴이 뜨거워집니까?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안 믿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게 될 때까지 쉬지 말고 전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적이요,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당신은 바울처럼 이 일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편견에 사로잡힌 채 나 홀로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로마인들 앞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다시금 흥분하여 소요가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로마 군병들은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소요의 원인이 바울에게 있다고 보고 바울을 채찍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24절) 당시 채찍질은 끔찍스러운 고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채찍은 가죽 끝에 쇠붙이가 달려 있어서, 그 채찍에 맞으면 살점이 패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채찍질을 당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채찍질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형틀 위에서 죽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이 채찍질하기 위해서 바울을 형틀에 묶을 때 바울은 곁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혔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25절) 당시 로마 시민은 비록 그가 범죄했을지라도 재판을 받지 않고서는 함부로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천부장은 하마터면 중대한 범법 행위를 저지를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했습니다.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29절) 이렇게 해서 바울은 채찍질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법적으로 면할 수 있는 폭행을 일부러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는 일이 없는 한 세상 법률의 보호를 받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라도, 그것을 사용함이 은혜롭지 못하거나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흥분하고 소란을 일으킨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 천부장은 바울을 매질하여 그 원인을 알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천부장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바울을 심문하고자 했습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30절)
이제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그리고 벨릭스 총독 앞에서, 신임 총독 베스도 앞에서, 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구원하시고, 다시 부르셔서 사명을 주십니다. 이 사명을 깨닫고 순종하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오늘 당신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 사명을 따라 충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명 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당신을 이 자리에 부르셨으며, 왜 교회의 일군으로 삼으셨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신 사명을 따라 충성을 다하여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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