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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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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 (누가복음 15장 8-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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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썽꾸러기 자녀가 청개구리처럼 살다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집이 멀어 객지에서 자취하는데 부모 품을 떠나 자유롭게 사니까 처음에는 참 신났습니다. 그녀는 자취방에서 스스로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자취방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눈물을 왈칵 쏟았습니다. 그때서야 엄마의 고마움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날 자취방으로 엄마의 전화가 왔는데 전화하다가 다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엄마에게 진정으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엄마! 감사해요! 오래 사세요.”
사람에게는 반드시 낮은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 인생이 진정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실패에도 감사하고, 연약함에도 감사하고, 수치에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하나님은 약한 곳부터 찾아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거하는 토양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낮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신앙은 오히려 깊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을 원하면 자기의 내면 깊이 내려가 보십시오. 그렇게 깊이 내려가다 보면 그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에 목말라하는 자신의 영혼이 보일 것입니다. 그 영혼을 볼 때 그곳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님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없으면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도 인간의 영혼이 없으면 도무지 기쁨이 없도록 하나님이 스스로 규정하셨습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 작은 하나의 의미 >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3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3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애타게 찾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그 중에 본문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가 나옵니다. 왜 본문의 여인은 열 드라크마 중에서 잃어버린 한 개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썼습니까?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도 매우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청년들이 약혼녀에게 열 드라크마로 만든 장신구를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약혼녀는 그것을 잘 간직했다가 결혼식 때 머리에 장식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장신구에 있는 열 드라크마는 사랑의 정표로 모두 다 소중합니다.
그처럼 우리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정표입니다. 그러므로 ‘한 영혼의 가치’를 우습게 알지 마십시오. 자신의 가치도 우습게 알지 마십시오. 공동체에서 왕따가 되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10명의 공동체에서 왕따가 되면 자신 외에 나머지 9명을 왕따시켜 버리십시오. 100명의 공동체에서 왕따가 되면 자신 외에 나머지 99명을 왕따시켜 버리십시오. 자신 혼자만 있다면 비참한 마이너인생이지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면 자신과 하나님 둘만이라도 최고의 메이저그룹이란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가끔 첫째 딸 은혜가 말합니다. “아빠는 근자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물었습니다. “은혜야! 근자감이 뭐니?” 알고 보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을 근자감이라고 합니다. 딸이 보기에 아빠가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늘 자신감을 가지고 기쁘게 사는 모습이 자기 생각에는 너무 근거가 없으니까 ‘근자감’이 너무 충만한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근자감’이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빽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혈연, 학연, 지연이 다 없어도 하나님과의 연줄인 ‘신연’만 있으면 결코 자신을 작게 보지 마십시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킵니다. 이곳에도 앞으로 큰불을 일으킬 작은 불꽃이 웅크리고 있을 줄 믿습니다. 작은 불꽃에서 큰 가능성을 보고 작은 불꽃을 위로해주십시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볼 줄 알고 작은 사람을 살펴주는 넉넉한 믿음이 있을 때 신연의 줄은 더욱 굵어질 것입니다.
가끔 보면 자기도 어려우면서 남을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이제 돕는 일을 남에게만 미루지 마십시오. 고통 받는 자를 보면서 무언가 책임감을 느낄 때부터 자신의 삶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사람들보다 낮고 비천한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하나의 드라크마도 소중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 >
그처럼 소중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상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그것을 찾았습니다. 왜 등불을 켭니까? 그 드라크마가 지금 어둠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왜 집을 씁니까? 그 드라크마가 지금 죄악의 먼지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드라크마가 제자리를 떠나면 죄와 어둠에 처하게 됩니다. 그처럼 사람은 제자리에 있어야 가장 복된 삶이 펼쳐집니다.
성도가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제자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주일에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어떤 성도는 주일에 빈자리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만은 어떻게 하든지 주일예배 자리를 지키려고 애씁니다. 얼마나 든든하고 감동이 됩니까? 큰 능력이 없어도 좋고 큰 헌신을 못해도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제자리를 힘써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복된 태도입니다.
일전에 한 개그맨이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에게는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가지 말라면 더 가고 싶고.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삶을 ‘재미있게’ 살려고 하기보다 항상 ‘의미 있게’ 살려고 하십시오. 조금 재미없어도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굳게 지킬 때 그때부터 의미 있는 인생이 시작됩니다.
반면에 제자리를 이탈하면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려진 드라크마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려진 드라크마가 자기가 잃어버려진 존재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갈등과 싸움이 가득한 곳에 그대로 머물면서 제자리를 찾지 못해 신음하는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계획하신 자신의 최고의 축복된 운명이 있습니다. 그 복된 운명을 향해 제자리를 찾아 나서십시오.
충성이란 발전도 없고 비전도 없는 곳에서 죽을 때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된 계획 속에서 제자리를 찾기 위해 과감하게 현재의 자리를 떠나 복된 운명을 향해 나가는 것도 충성입니다.
그처럼 본문의 잃어버려진 드라크마가 제자리를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꼭 불행한 존재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찾는 여인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도가 늘 행복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를 찾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가서 열심히 전해주십시오. 성도가 가장 많이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란 말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생활을 잘 하다가 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찾아가서 위로한다면서 어떤 분은 곤란한 질문을 합니다. “집사님! 무슨 일이 있어요? 제게만 말해보세요. 교회에서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혹시 누구한테 시험 드셨어요?” 그런 말은 상대방을 생각해주고 위로해주는 말 같지만 교회 전체로는 좋은 말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누구한테 시험 들었어도 가만히 있으면 곧 차분해지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데 옆에서 채근해서 누구 때문에 시험 들었다고 입으로 말해버리면 그 말 때문에 미안하니까 나중에는 더 교회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 든 얘기를 꼭 들으려고 하지 말고 그저 이런 말만 해주십시오. “집사님! 당신은 소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도 사람들에게 고통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게 하심으로 “내가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문제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고통의 이유를 알려고 여기저기 상담하러 다니지 마십시오. 그렇게 다니지 않아도 얼마 후에는 대개 저절로 깨닫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결코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 영혼 구원에 힘쓰십시오 >
이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다른 영혼도 그렇게 사랑하실 것을 생각하며 한 영혼을 찾이 구원하기에 힘쓰십시오. 등불을 켜고 열심히 구석구석을 훑어보십시오. 전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의 나태함입니다. 그런 나태함을 버리고 자신의 신앙과 사랑과 충성을 무엇보다 전도의 현장에서 나타내십시오.
1921년 뉴욕 할렘가 싱싱 교도소에 루이스 로웨스란 사람이 소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어느 날 소장의 아내 캐더린이 재소자 중 한 명이 장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를 찾아가 점자책을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점자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다시 재소자 한 명이 귀머거리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수화를 배워 그에게 성경을 알려주었습니다. 점차 재소자들은 그녀를 ‘사랑의 천사’로 불렀습니다.
1937년 어느 날, 캐더린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악명 높은 싱싱 교도소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장례식 때 교도소 정문에는 재소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당시 교도소장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을 보면서 믿음이 생겨서 교도소 문을 열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장례식장에 참석해도 좋소. 그러나 오늘 밤 안으로는 다 돌아오십시오.”
그때 두목급 재소자들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절대 탈옥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인간도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모든 재소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따라서 말했습니다. “만약 오늘 탈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인간도 아닙니다.” 그날만은 재소자들이 모두 참된 인간이 되었고 천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재소자 점호를 할 때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었습니다. 그 뒤 악명 높았던 싱싱 교도소는 가장 모범적인 교도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증인의 삶을 살았던 한 여인 때문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증인의 삶을 나타내십시오. 생각만 하고 말만 하지 마십시오. 구체적으로 찾아 나서십시오. 믿음은 말이 아닙니다. 생각도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그럴듯한 종교인의 모습보다 한 영혼을 구하려고 애쓰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 전도는 안 한다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해방 전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말을 잘 하는 논객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양주동 박사님이었고 또 한 명은 채필근 목사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둘이 한 토론장에서 말 대결을 했습니다. 막상막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양주동 박사님이 조금 나아 보였습니다. 결국 채필근 목사님이 패배를 시인하며 말했습니다. “졌습니다! 양주동 박사가 양 주둥아리로 공격하니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네요!” 그 말에 좌중은 폭소를 터뜨렸고 그 마지막 한마디 말로 채필근 목사님이 오히려 토론에서 판정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최권능 목사님이 평양시내에서 전도할 때 채필근 목사님이 근처를 지나가자 최 목사님이 항상 하던 대로 채 목사님에게 소리쳤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 소리를 듣고 채 목사님이 자기 명성을 믿고 말했습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제가 채필근 목삽니다.” 그때 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전도를 못하면 벙어리 목사지요.” 그처럼 전도하지 않는 벙어리 영혼은 되지 마십시오.
현대 성도에게는 세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기적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주일성수를 등한시하는 기적이고, 둘째 기적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기적이고, 셋째 기적은 주일성수도 안 하고 전도도 안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얘기입니까? 이제 영혼 구원에 최대관심을 두십시오. 영혼 구원이 없으면 다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 사랑으로 애태우십시오 >
결국 본문의 여인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드라크마 하나를 찾았다고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아마 잔치를 벌이느라고 수십 드라크마도 더 들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많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혼을 찾기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대가를 치러야 영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전에 거지 한 분이 저희 교회에 찾아와 손을 내밀었습니다. 천 원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더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천 원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목사님! 내가 거지인 줄 아세요?” 거지가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고 소리치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런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요새 얼마의 돈으로는 거지의 마음도 얻기 어려운 각박한 사회가 되었구나!”
이제 몇 푼의 물질로 영혼을 구하려는 환상을 깨십시오. 한 영혼을 구하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자세를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그런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죽게 하신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처럼 대가를 치를 줄 알아야 믿음도 견고해지고, 나눠줄 줄 알아야 삶에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만두 장사가 제일로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속 터진다!"는 말입니다. 왜 속이 터집니까? 만두피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왜 신앙의 속이 터집니까? 실천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실천의 옷은 입지 않고 교단, 교파, 예배형식, 교회정치, 직분, 찬양형식 등 사소한 문제에 너무 집착하면 정말 속 터지는 공동체가 됩니다.
요새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파당을 만들고, 교회정치를 하고, 서로 미워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는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본질적인 사랑에 더욱 충실한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주님도 우리 손을 붙들어주시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복된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고 절망합니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망을 극복하는 최적의 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살기 힘들면 누구나 한번쯤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절망감은 대개 자신이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찾아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친구들은 하나 둘 떠나고, 기력도 쇠해지면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구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바꾸십시오. 왜 우리가 쓸모없습니까? 우리는 이웃에게 줄 것이 여전이 많은 아주 유용한 존재입니다.
복음성가 가사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구요/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한 자도 없어요." 절망을 극복하려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십시오.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누군가를 보살펴주려고 애쓸 때 나타납니다. 그처럼 손을 뻗쳐 남의 손을 잡아줄 때 ‘덧없는 인생’은 ‘살 만한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초는 초를 태워 빛을 내지만 사람은 사랑으로 애태워 빛을 냅니다.
요새 필리핀 정운교 선교사님이 나가(Naga) 원주민촌에 100평짜리 단층 예배당을 건축 중입니다. 예산을 3700만원 세웠는데 현재까지 1600만원이 기적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한국에서 100평짜리 예배당을 건축하려면 최소한 3억 원은 필요합니다. 그런 한국적인 시각에서 보면 얼마나 예배당이 초라하겠습니까? 그래도 자기 예배당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지금 선교사님은 기쁘게 휘파람을 불며 원주민 성도들과 함께 직접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예배당에서 이뤄질 영혼 구원의 역사를 생각하며 같이 마음으로 벽돌을 쌓아주십시오.
<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 >
살면서 한 영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잊지 마십시오. 한 영혼이 구원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본문 10절 말씀처럼 한 영혼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쁨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한 영혼을 가치 있게 보십니다.
일전에 새벽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질문을 마음속에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두 딸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축복과 네 지경과 영향력이 크게 넓혀지는 축복 중에 어느 것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느 축복을 선택할래.” 그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둘 다 주세요. 두 딸도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주시고 저의 지경과 영향력도 크게 넓혀주세요.”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목사야! 네가 참 욕심이 많구나! 둘 중에 어느 쪽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축복을 선택할래?” 그때 할 수 없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둘 중에 꼭 하나만 택하라면 저는 두 딸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축복을 택할래요.” 그렇게 기도 중에 두 딸과 관련된 축복을 선택하면서 그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놀라운 축복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 분당 샛별제단을 향한 놀라운 축복의 계획도 가지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규정하는 대로 자신을 규정하지 말고 하나님이 규정하신 대로 자신을 규정하십시오. 남이 자꾸만 나쁜 말로 딱지를 붙이려고 하면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기름이 온 몸에 흐르게 해서 그 딱지가 자신에게 붙지 못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는 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휴식 때도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밖에서 놀았지만 그는 책상에서 수학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며 수많은 별명으로 그에게 딱지를 붙였습니다. “고집쟁이, 공부벌레, 서생, 책벌레, 괴짜...”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공부에 정진했습니다. 그리고 15년 후에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판사님!”
누가 자신에게 나쁜 딱지를 붙여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제 코스로 가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 목표를 향해 나가면서 자신에게 주신 찬란한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나중에 이렇게 부를 것입니다. “판사님! 검사님! 장관님! 의사 선생님! 사장님!....” 더 나아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이런 복된 명칭으로 불릴 것입니다. “성도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남들이 붙인 잘못된 딱지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그 딱지로 인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찬란한 계획이 저지되지 않게 하십시오. 교만한 사람들이 질투해서 붙이는 딱지에 왜 연연합니까? 누구도 자신의 허락이 없이는 자신에게 딱지를 붙이지 못합니다. 아무리 남이 나쁜 딱지를 붙이려고 해도 자신만 그 딱지를 붙이지 않으면 됩니다. 그처럼 당당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하면 그는 반드시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생각하십시오. “나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의외로 강하다! 하나님이 나를 돕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가 나를 뒤따르고 있다! 나는 지구상의 유일 무비한 존재다! 나는 놀랍고 경이로운 존재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런 생각을 계속 하면 그 생각이 자신의 주위를 흐르는 성령의 기름이 되어 어떤 잘못된 딱지도 들러붙지 못할 것입니다. 항상 자신을 고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멋지게 쓰임 받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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