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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성찬이다”(Life Is Sacramental)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14 추천 수 0 2011.07.31 23:20:23
.........
성경본문 : 요17:15-19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0.4.11 (김 영봉 목사)

“인생은 성찬이다”(Life Is Sacramental)
--요한복음 (John) 17:15-19

1.

여러분이 의식하셨는지 의식하지 못하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지난 1월 17일부터 단기 연속 설교를 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적 음모’(spiritual conspiracy of Jesus)라는 주제 하에 그분이 율법주의와 벌이셨던 싸움에 대해, 그리고 율법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분이 제안한 복음적 삶의 태도에 대해 살펴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주의깊게 이 설교 시리즈를 경청하신 분들이라면, 정확히 잡아낼 수 없는 묘한 의문 혹은 불안감을 느끼실지 모릅니다. 아니, 그러한 느낌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왜냐구요? 저와 여러분이 자라 왔고 또한 지금 몸 담고 있는 한국 교회의 풍토가 매우 율법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저와 여러분은 율법주의적인 사고와 전통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자주 말씀 드렸지만, 율법주의는 안전한 피난처와 같습니다. 그곳에 숨으면 편안하고 안전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가 허물어질 것 같으면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번 연속 설교에서 나눈 주제들을 한 번 정리해 볼까요?

1.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성전은 없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어디나 성전이다.
1.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제사장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두가 제사장이다.
1. 성직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직업이 성직이다.
1. 예배는 제사가 아니다. 제사는 폐지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삶이 곧 제사다.
1.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지 말라.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모두가 거룩하다. 믿음으로 받으면 다 거룩하다.
1. 주일 예배는 안식일 예배가 아니다. 안식일 율법은 완성되었다.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매일이 성일이다.
1. 율법은 완성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거룩해지는 것이다.

율법주의의 짐 아래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에게는 이 진리 하나 하나가 얼마나 자유케 하는, 해방감을 주는 소식인지 모릅니다. 이제 마음껏 숨을 쉴 것 같은 기분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불안합니다. 그동안 나를 붙들어 매고 있던 끈으로부터 풀려나 적막한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맬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겁니다. 율법주의’(legalism)에서 풀려나는 것은 좋은데, 그렇게 하다가 ‘무법주의’(antinomianism)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무법주의’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끝났으니, 이제는 내 마음껏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2.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불러 신성화시키고, 교인들로 하여금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며, 마치 성전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주일성수의 원칙을 율법처럼 가르치면서 주일 예배를 한 번만 빠져도 큰 벌이 떨어질 것처럼 위협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목사를 제사장으로 가르치고 그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율법주의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모두 ‘썩어빠질 일’이며, 교회 일과 선교만이 ‘주의 일’ 즉 ‘거룩한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우리는 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은 무법주의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보이는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으니, 이 땅에 그 어떤 형태의 종교적인 건물도 세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법주의입니다. 예수께서 제사장 제도를 폐하셨으니, 교황, 신부, 목사 등 모든 교권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법주의입니다. 예수께서 제사와 제물을 부정하셨으므로 십일조와 헌금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법주의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일하셨으니, 어느 하루를 떼내어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법주의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폐지하셨으니, 나는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겠다고 착각하는 것이 무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거나 무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욕심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잠시 잠깐이라도 우리의 타락한 욕심에 대해 방심하면, 우리는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에 기대어 죄를 탐하거나 무법주의자가 되어 죄를 즐기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두 극단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날 것을 권고하면서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갈 5:1)

반면, 율법주의에서 해방되어 무법주의에 흐를 것을 염려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 5:13)

3.

율법주의도 아니고 무법주의도 아니라면, 우리가 설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배당, 예배, 주일, 목사, 십일조 등에 대해 율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은 속박되는 것이요 무법주의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은 방탕으로 기우는 것이라면, 도대체 그런 것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저는 우리가 지키는 성례전(sacraments), 즉 성찬(holy communion)과 세례(baptism)를 생각해 보기를 권합니다. 성례전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율법주의도, 무법주의도 아닌, 제 3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을 나눕니다. 성찬을 위해 강단 성찬대에 빵과 포도즙이 마련됩니다. 그 빵과 포도즙을 가리켜 ‘성찬’ 즉 ‘거룩한 음식’이라고 부릅니다. 성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즙은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찬 위원들이 가게에서 산 것입니다. 또한 세례를 베풀 때, 이 강단에 물이 마련됩니다. 그것을 보통 ‘성수’(holy water)라고 부릅니다. 그 물도 역시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입니다.

어릴 적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녀 오시면서 요단강 물을 떠오셔서 그 물로 세례를 베푼 기억 납니다. 그 때, 이례적으로 많은 교인들이 세례를 신청했습니다. 요단강 물로 세례 받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단강 물이나 포도맥강 물이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의 성분을 분석해 보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요단강 물은 거룩하고 포토맥강 물은 덜 거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찬을 나눌 때, 집례 목사는 빵과 포도즙을 성별하는 기도를 올리고, 세례를 베풀 때는 물을 성별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별된 것이니,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뜻을 이루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렇게 성별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그 빵과 포도즙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화체설’(doctrine of 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하는 겁니다. 반면, 개신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즙과 물 자체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은총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성찬을 거룩하게 받아 먹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밝혀 주셔서 모든 사람과 사물로부터 거룩성을 보고 이 세상을 거룩하게 살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예배당에서 나눈 성찬은 거룩한 것이고, 집에서 먹는 밥은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예배당에서 떼는 빵과 포도즙은 다른 빵과 포도즙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무법주의입니다. 성례전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감사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성찬을 거룩하게 대하고, 그 은혜를 힘 입어 일상에서 대하는 모든 식탁을 거룩하게 대하게 됩니다.

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성찬 식탁에 올려진 빵과 포도즙을 대하듯 모든 것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와 무법주의의 함정을 피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거대 예배당 건축 문제로 말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당을 짓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방법과 절차 면에서 덕이 안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예배당 짓는 것이 무조건 악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과 뜻과 기도를 모아 정갈하고 기품 있는 예배당을 지었다면, 그것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 성별된 공간이기에 거룩하게 인정받고 또한 사랑 받아야 마땅합니다. ‘성전’이라고 부르며 신성화시키는 잘못에 빠지지는 말아야 하지만, 성찬대에 놓은 빵과 포도즙을 대하는 것 같은 마음 자세로 예배당을 거룩하게 대해야 합니다.

성탄 카드 그림 중에 우리 모두에게 눈 익은 정경이 하나 있습니다. 눈 덮인 마을에 군데 군데 집들이 있고, 저 뒷편 언덕에 예배당이 서 있는 광경입니다. 그 예배당의 존재로 인해 마을 전체가 거룩해 보이는 것은 저만의 감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당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가 사는 공간 중에서 일부를 떼어 내어 거룩한 목적을 위해 바칩니다. 그 장소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거룩합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예배당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세계에 집중함으로써, 온 세상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온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이 월요일보다 본질적으로 더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날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기에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그 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킵니다. 그렇게 하루를 떼내어 거룩하게 지킬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매일을 주일처럼 살 수 있게 됩니다. 일 주일에 하루를 ‘주님의 날’로 구별하여 지키고, 나머지 6일을 ‘나의 날’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산다면,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주일이나 다른 날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예배도 폐하고 모이기도 폐하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매일을 산다면, 그것은 무법주의입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대학원 학생들을 지도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학생이<바울의 기도 신학>이라는 제목의 졸업 논문을 썼습니다. 논문 심사를 하는 자리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그 학생에게 여담처럼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그래, 기도에 대해 참 좋은 논문을 썼네. 그러면 자네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고,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그랬더니, 그 학생은 아주 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저는 삶이 곧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기도하려고 노력할 뿐, 따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무법주의로 왜곡시키고, 그것으로써 ‘기도를 쉬는 죄’를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삶이 곧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구별하여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기도에 전념해야만 합니다. 저도 그같은 유혹에 빠져 기도 없이 생활해 보았기 때문에 체험적으로 압니다. 일정한 시간을 성별해 바치지 않으면, 내 시간 전체를 거룩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매일 같이 아침 일찍 혹은 늦은 밤에 기도에 전념하는 시간을 구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까?

십일조 헌금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율법주의적인 태도와 무법주의적인 태도로 나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수입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며, 나머지 십분의 구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드리고는, 마치 나머지 십분의 구를 마음대로 사용할 자격을 얻은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반면, 무법주의적인 사고 방식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끝났으므로 십일조 헌금도 폐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우리 자신의 타락한 욕심에 속은 것입니다. 우리는 많고 많은 빵과 포도즙 가운데 일부를 구별하는 것처럼, 우리 손에 맡겨진 수입 중에서 십분의 일을 구별하는 겁니다. 정기적으로 그렇게 구별하여 바치면서 우리는 물질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의 소유와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목회자도 성찬 식탁에 올려진 빵과 포도즙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를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본질적으로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거룩한 일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거룩한 일에 성별된 존재로서 구별됨이 드러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도들도 그 구별됨을 인정하고 배려해 주고 또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를 보면서,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부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

자,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가 나옵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성찬 식탁에 올려진 빵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온 세상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거룩하게 성별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지만, 다르게 되도록 구별하셨고,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르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에게 선택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여겼고,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책임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혈통을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선택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선민으로 선택받은 ‘영적 나라’(spiritual nation)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선민(new Israel)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응답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예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혹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거룩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얼마 전, 운전을 하다가 이 지역 방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느 복음성가 가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날의 주제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찬양을 들려 주면서 중간 중간에 멘트를 하는 식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진행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들을 다 제쳐 두고 나같이 못난 사람을 선택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운전하는 시간이 길어서 저는 그 프로그램을 꽤 오래 듣게 되었는데, 그 진행자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과 책임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라디오를 끄고 차에서 내리면서 저는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 자아도취적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저래서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험한 소리가 나오나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선민으로서의 자격을 빼앗은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것에 응답하게 하셔서 먼저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몸인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특권이면서 동시에 책임인 것을, 그 진행자는 잊고 있었습니다. 먼저 믿는 우리는 성찬 식탁에 놓인 빵과 포도즙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두고 기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15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만의 천국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우리끼리 즐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18절)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그리고 믿는 사람들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정갈하고 가지런하게 식탁에 올려진 성찬처럼, 혹은 빛나는 접시에 정성스럽게 올려진 예물처럼, 믿는 이들의 존재와 삶 속에 ‘구별됨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7, 19절)

그같은 구별됨의 증거를 가지고 우리는 이 세상에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를 반대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줍니다. 그렇게 어울리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영향력에 휩쓸리는 것이 무법주의입니다. 그들과 어울리되, 자신의 구별됨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받은 부름이며, 성찬 식탁에 올려진 빵처럼 사는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 성찬과 같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신성화시키고 우리를 영적인 노예로 만들려는 율법주의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세속화시키고 우리를 우리 자신의 타락한 욕심의 노예로 만들려는 무법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배당을 성찬 떡처럼 대하고 드나들면서 온 세상이 다 거룩하다는 사실에 눈을 뜰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성찬 떡처럼 대하여 나의 삶 전체가 예배임을 확인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목사를 대할 때 성찬 떡처럼 대하여 자신도 역시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음을 확인할 것입니다. 나의 소유 중에 구별하여 바치는 헌금을 성찬 떡처럼 대하여 남겨진 소유 전체가 거룩하게 사용되기를 소망할 것입니다. 주일을 맞고 준비할 때 성찬 떡처럼 대하여 주어지는 모든 시간을 거룩하게 살아갈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구원의 길로 부름받은 자신이 주님의 거룩한 손으로 구별된 성찬 떡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세상으로부터 더욱 구별되기 위해 힘쓰며, 자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의 영적 허기를 채우는 일에 사용되기를 열망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의 맛과 색깔과 열매가 얼마나 달라질까요? 이같은 변화가 한꺼번에 완전하게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면서 이같은 변화가 점점 깊어져 간다면, 우리 인생의 깊이와 질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 때로 겪는 환난과 고난을 만났을 때, 담대하게 그리고 평온하게 그 어려움을 뚫고 나갈 영적 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 언젠가 우리 인생의 종착점에 도달했을 때, 어느 시인처럼, 참 즐거운 소풍이었다고 감사하며 주님께 안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에 우리가 유익하게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아, 진실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까지 쉴 목숨인지는 모르지만, 이 덧없는 인생 속에 영원의 흔적이 남겨지면 좋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이 성찬 식탁에 올려진 빵처럼 거룩하게 구별되고 또한 남김없이 쪼개어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참된 생명을 얻는 데 제 인생이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다 간다면, 마지막 숨을 쉴 때, 저도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하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라고 기도하며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원이 저에게 그리고 저와 같은 소망을 가진 모든 분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저희를 불러 내시어
이 세상을 위한 성찬 식탁 위에 얹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 주님,
저희를 도우시어
율법주의의 피난처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무법주의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게 하소서.
성찬 식탁에 올려진 빵과 포도즙처럼
거룩하게 구별되게 하시며
그 구별됨의 증거를 가지고
세상 속에 들어가게 하소서.
저희를 통해
이 세상이 거룩해지도록
저희를 쪼개시고 나누시고 먹이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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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9 요한복음 나같은 하나님, 나같은 인간”(God Like Me, Human Like Me) 요1: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9
5598 누가복음 루저들에게 임하는 성탄의 은혜"(The Christmas Is For the Losers) 눅2:1-1  김영봉 목사  2011-07-31 2961
5597 누가복음 고민을 멈추면 썩는다”(Holy Agony) 눅3:7-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382
5596 말라기 금을 연단하는 불같이”(Like a Refiner’s Fire) 말3: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658
5595 누가복음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눅21:29-36  김영봉 목사  2011-07-31 2515
5594 히브리서 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10:19-2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39
5593 마가복음 진리는 때로 부담스럽다”(Truth Is Often Burdensome) 막12:38-44  김영봉 목사  2011-07-31 2637
5592 시편 예배가 나를 만든다”(Worship Forms Me) 시24:1-10  김영봉 목사  2011-07-31 3672
5591 시편 따뜻한 관심(Radical Hospitality) 시34: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436
5590 마가복음 우리에게 부족한 것”(One Thing We Lack) 막10:17-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552
5589 마가복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By All Means) 막9:42-48  김영봉 목사  2011-07-31 2889
5588 시편 시냇가에 심긴 나무”(A Tree Planted By the Streams of Water) 시1:1-6  김영봉 목사  2011-07-31 3241
5587 마가복음 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막8:27-30  김영봉 목사  2011-07-31 2308
5586 야고보서 두 개의 영적 전립선”(Two Spiritual Prostates) 약2:14-17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4
5585 요한복음 영생에 이르는 열매”(The Crop for Eternal Life) 요4:3-9  김영봉 목사  2011-07-31 2745
5584 시편 순례길에 오른 캐라반”(Caravan on Pilgrimage) 시133:1-3  김영봉 목사  2011-07-31 2582
5583 요한계시 3 가지 새로움 계21:1  강종수 목사  2011-07-3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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