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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하5: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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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살다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나면
왕하5:10-14
제가 한 20년 전에 청년 대학생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수련회를 갔을 때가 있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참여했는데 산 속에 들어가 텐트를 치고 자고 성경공부를 하고 전도하는 수련회였습니다. 천황봉 정상까지 정복하고 하산하는 길이었는데 그만 길을 잘 못 선택해 버렸습니다. 식량과 반찬거리를 3일 동안 산에서 먹을 것만 준비하고 각자의 배낭에 메고 올라갔는데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미역만 남아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잘못된 길로 내려왔기 때문에 등산객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어 텐트를 치고 미역을 물에 끓여 대 식구가 먹었습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어느 날 절벽같은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납니다. 특별한 걱정 근심이 없이 앞날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사는데 뜻하지 않게 인생의 절벽이 다가옵니다. 사람들이 부러울 만큼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가지고 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넘을 수 없는 절벽이 다가옵니다. 미래가 기대되고 장래가 촉망한 사람인데 지난 인생의 업적들을 송두리째 삼켜 버릴 듯한 절벽이 다가 옵니다. 질병의 절벽, 사고의 절벽, 경제 위기의 절벽, 인간 관계의 절벽 등 갖가지 절벽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반응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반응은 그 절벽의 원인이 타인이나 타자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그 절벽을 가져다 준 사람과 환경을 원망하며 분노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도 그 때 같이 갔던 자매 2분이 집사님이 되어 나오고 있지만 학생들은 저를 믿고 한 사람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반응은 그 절벽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자책하고 자학하고 심지어는 자살해 버리기도 합니다. 인도자인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반응은 그 절벽의 원인이 너무나 큰 목표 즉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포기해 버립니다. 이제 내려 갈 수 없다고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목표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 성도님은 살다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아람나라 군대 장관 나아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1. 살다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믿음
나아만 장군은 참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의 뜻이 “즐거움”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고조선 때 쯤 이야기입니다. bc 850년쯤이 이야기입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야 지역의 최강대국은 앗수르였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국내 문제로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고 아람 나라가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역사에 나오는 시리아 나라입니다. 이 때 국방부 장관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의 이력서를 보십시오. 1절입니다. 국방부 장관으로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로 여김받았습니다. 크다는 말은 힘이 있다는 말이고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존귀하다는 말은 인격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대접받았다는 말입니다. 귀하게 여김받았다는 말입니다.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아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미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쟁에서 아람을 구원한 사람입니다. 구국 공신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조국이 위태로울 때 적을 무찔러 그 나라를 구원한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얼마나 세상 살맛나겠습니까?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자리에까지 올라 오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겠습니까? 이제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안락한 삶을 살 때였습니다. 그런데 잘 나가는 인생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그에게 절벽이 다가 왔습니다. 그는 “큰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습니다. “였으나”가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뜻하지 않게 “였으나”가 다가옵니다. 어느 대학 교수였으나 학생 폭력으로 잘 나가는 인생에 절벽이 다가 온 것입니다. 잘 나가는 권력자였으나 뇌물 문제로 절벽이 다가온 것입니다. 사장이었으나 부도의 위기로 절벽이 다가 온 것입니다. 부자였으나 자녀가 탈선으로 절벽이 다가 온 것입니다. 결혼하였으나 남편의 탈선으로 절벽이 다가 온 것입니다. 박사를 받았으나 직장이 없어 절벽이 다가 온 것입니다. 아름다웠으나 사고를 만나 장애로 절벽이 다가 온 것입니다. 잘 나가는 직장이었으나 질병으로 절벽이 다가 온 것입니다. “아들을 낳았으나, 딸을 낳았으나, 합력했으나, 성공했으나, 승진했으나, 목사가 되었으나...” 사소한 약점이나 문제가 아닙니다.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모든 것을 순식간에 날려 버릴 것같은 위기입니다. 모든 희망을 꺾어버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나아만은 그의 권력과 명예, 돈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권력도, 그의 명예도, 그의 돈도, 그의 인격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 전쟁에서 전쟁 포로로 끌고 온 이스라엘 소녀가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요즈음 말하면 전도받은 것입니다. 미천한 자 통해 복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26-29) 당신 나라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 나라에 가보십시오. 당신의 궁전에 있는 사람들처럼 대단하지는 않지만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에게 가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에게 가면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 보십시오. 문제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 보십시오. 불행이 바뀌어 행복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 보십시오. 치유받는 길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 보십시오. 일어 설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전도를 받은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로 가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누구를 만났습니까?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합니다.
문제를 당할 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과학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풀지 못한 숙제도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아무다 다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방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입니다. 성경은 이미 나아만을 하나님이 알았고 나아만을 손에 붙들고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그가 나라를 구원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종을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은총으로 초대하기 위한 은혜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아만의 병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연이 아닙니다. 그 병으로 사마리아로 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고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하나님을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나만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명예와 권세를 얻는 존귀한 자가 된 것이 자기 힘으로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나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나아만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세상 우연이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날 때 하나님이 나를 부르는 메가폰을 들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순탄하면 하나님께 절실하게 나아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메가폰을 들고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절벽도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내 인생의 궁극적 문제의 답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절벽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국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구세주로 믿어야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한나가 절벽같은 브닌나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한갓 시골 목동이지만 골리앗 때문에 민족 영웅이 된 것입니다. 내게 다가온 절벽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려고 나를 부르는 초청장이라고 받아들이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 7:7-8)”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6)”
2. 살다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껍질을 벗어버리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겸손
나아만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신의 지략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포로 소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자기를 내려 놓지 못합니다.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오기는 나왔지만 자기 교만을 내려 놓지 못합니다.
나아만이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러 갈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껍질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진정 만날 수 있는 껍질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포장하고 위장하고 과장합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에 인생의 절벽같은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데 껍질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전히 물질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권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물질로 권력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질병을 치료받으러 가는 사람이 무엇을 준비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왕의 허락을 받고 무엇을 준비합니까? 은 십달란트와 금 육천개, 의복 열벌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은 십달란트는 60,000 드라크마와 같은데 여기서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므로 노동자가 약 165년간 일하여서 번 돈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루에 만원만 쳐도 6억이며, 3만원을 치면 18억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금 육천개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게를 달아서 화폐의 가치를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무게를 사용하는 기본적인 단위가 세겔 이였는데, 나아만은 바로 금 6천 세겔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여기서,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60일의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6,000세겔은 약 986년간 일해서 번 돈에 해당하며,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에 3만원을 쳤을 경우, 약 108억이라는 돈 입니다. 그리고 그는 의복 열 벌을 가져갔습니다. 당시에는 의복이 비싸다기 보다는 굉장히 귀하여서, 그는 좋은 의복 10벌을 구하여가져 간 것입니다. 이것을 좋게 생각하면 그만큼 정성을 다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치료비가 아닙니다. 돈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돈을 줄 터이니 그것으로 치료해 달라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살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6절을 보십시오. 여전히 자신의 지위에 의하여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잇습니다. 이스라엘에 당도하자마자 왕을 찾아가 아람왕의 친서를 전해 주었습니다. 친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달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도 힘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라고 말합니다. 아람왕이 시비를 걸어 전쟁을 도모하는 것으로 압니다. 결국 자신의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 집에 왔을 때 엘리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만나주지고 않고 종을 보냅니다. 자신의 돈과 권력을 보며 자신을 융성하게 대접해 줄 줄 알았는데 만나 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종을 통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깨끗하게 치료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 명예와 권력, 부귀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진정 만날 수 없으니 그 껍질 다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계급장 다 떼고 물속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때 나아만은 크게 날뛰면서 분노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을 읽어 보십시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위에 손을 흔들어서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돈 앞에 절절 매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엘리사는 진짜 목사입니다. 요즈음 목사에도 4 종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사는 예수를 진실로 믿고 그의 말씀도 믿어 겸손하게 실천 하는자라고 합니다. 독사는 예수는 믿는 다고 하면서 그의 말씀은 가르치기는 하는데 자신은 실천하지 않고 양들 에게만 강요하며 그 위에 군림하는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마23;33)이라고 말한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먹사는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 먹고 살기 위하여 말씀을 이용하는 종교 장사꾼이라고 합니다(딤후 3;2). 잡사는 예수를 빙자하여 음행 등 추잡한 일 들을 일삼는 저질 목사라는 것입니다(엡5;3). 껍데기에 불과한 돈이나 권력 앞에 눈깜짝하지 않는 진짜 목사를 만나니까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일국의 국방장관이니까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접하며 고쳐줄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한 지위를 가지고 교회에 나왔으니 목사님이 대접해 주고 교인들이 특별대우를 해 줄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접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병 고치러 왔다는 이 중대한 목적을 지금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인정을 받는데, 더 커다란 관심이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렸지만, 하나님 보다는 인간 엘리사의 대접에 더 커다란 관심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엘리사가 나와 그를 정중히 대접하면서 특별히 안수하여 났게 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는 것입니다. 모든 껍질을 벗어 버리고 알몸으로 물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자기 과시, 자기 자랑, 자기 대접받기 위해 온 것 아닙니다. 아부 소리 들으려고 온 것 아니다. 인정받으려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다. 껍데기 치장하고 포장하러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다. 내 알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말씀으로 치료받고 깨끗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껍질 벗어 버리고 참으로 알몸이 되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려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인정 못받아 분노하고, 엘리사 만나주지 않는다고 분노할 입장이 아닙니다.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나와 개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 부스러기 은혜라도 사모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 인생의 절벽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기 교만입니다. 그 교만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은혜의 강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상식적 수준의 믿음으로 끝나버립니다. 간혹 보면 사회에서 유명인들이 인생의 절벽을 만나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깊은 은혜의 강을 체험받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인 껍질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 껍질들이 그 깊은 은혜의 강을 체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인생의 절벽은 그 껍질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요단강 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껍질들을 다 벗어 던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문둥병을 감추기 위한 껍질이 아니라 깨끗한 몸을 더 아름답게 하는 좋은 것으로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 그 껍질들 나병 걸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끝까지 붙들 것같지만 자리 내려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 끊어지면 하나도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없습니다.
3. 살다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제적인 능력을 체험받아야 합니다./순종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나아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나병을 치유받습니까? 오늘날 우리 인생의 절벽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무너집니까? 나아만을 보십시오.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1절을 읽어 보세요. “내 생각에는” 이 말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이미 다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자기에게 올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질병 부분 위에서 흔들어 나병을 고쳐 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림몬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처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니까 분노하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이 강하면 은혜 체험을 받기 힘듭니다. 자기 본위로 생각하면 자가당착에 빠져 버립니다. 내 생각 앞세울수록 하나님의 은혜 더디 체험받습니다.
또 그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아바나와 바르발 강이 훨씬 요단강보다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비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제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왕년에 새벽기도도 해보았고, 금식기도도 해보았고, 제자훈련도 받아 보았고, 청년부 회장도 해보았고, 직분도 받아 보았고 다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도 다녀보았고, 큰 목사도 만나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더러운 요단강에 들어간다고 되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실제적인 순종이 없는 것입니다.
모순되는 것 같고,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할 때 기적을 체험받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하고 떠나려고 하자 그의 종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선지자가 더 큰일을 시켰어도 행해야 할 판인데 물로 씻는 것 뭐 대수냐는 것입니다. 순종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뭐 대단한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합니다. 계산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학식과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처럼 절박함을 가지고 “아멘”라고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단순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대의 놋뱀만 바라보아도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민21:6-9).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믿기만 하면 구원(요3:14-16)을 받습니다.
내 생각을 접고 하나님 생각으로 내 생각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합리적이고 고상하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되면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잡아온 포로지만 그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될 때는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자기 상식과는 맞지 않는 요구를 하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되면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이 감히 건의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되면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며 자기를 부정합니다. 계급장 띠는 것입니다. 종들 앞에서 수치스럽지잠 옷을 벗는 것입니다. 더러운 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유치한 것 같지만 흙탕물 속으로 몸을 일곱 번 잠그는 것입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무덤까지 내려갔습니다. 꽃잎이 땅바닦에 떨어지는 순간 열매 맺습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야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회의가 다가오더라도 끝까지 말씀 붙들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모순된 것같고 이해되지 않아도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쳤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라고 말씀합니다. 밤새도록 해 보았는데 한 마리로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자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요 21:6)” 정도로 잡았습니다. 만선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우리 인생도 순종하면 만선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일곱 번 몸을 씻을 때 얼마나 회의가 들겠습니까? 한 번 씻습니다. 났지 않습니다. 두 번, 세 번, 얼마나 긴장이 되고 회의가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실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14절 말씀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14)”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회복되고 깨끗해지는 인생이 펼쳐질 줄 믿습니다. 인생 절벽을 당할 때 문제 해결의 열쇠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돈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 번의 순종으로 끝내서는 아니됩니다.
나아만이 진짜 목사인 엘리사에게 예물을 주려고 합니다. 거금입니다. 자신의 고쳐주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채지 않습니다.
이 때 나아만이 어떻게 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흙을 실고 가서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왕이 림몬 신을 섬깁니다. 자신은 왕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순종은 일상의 문제 앞에 솔직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에 완벽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나아만의 신앙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4:27)”
우리 부족하지만 절벽을 만났을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에게 이미 은혜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나병으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은혜 받은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기 위해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것은 살인 행위입니다. 당시 제사법에도 맞지 않습니다. 사람을 잡아 바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전혀 엉뚱한 것을 요구하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가를 보시길 원했습니다. 믿고 순종할 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지 않습니까?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전능의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아담 하와가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함으로 에덴의 축복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모세가 잘 나가다 홍해라는 절벽을 만났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출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하나님은 한 나무를 지시하시면서 그것을 물에 던지라고 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비평의 원리, 인관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처럼 여리고를 일곱바뀌 도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다 체험하지 못했지만 순종하는 종들을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소경 바디매오, 중풍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가. 손마른 사람이, 배부장의 하인이, 독자가 죽은 나인성 과부가, 야이로의 딸이, 소경 바디매오가 모두 믿음의 결과인 순종으로 인생의 절벽을 뛰어 넘었습니다.
어떤 인생의 절벽이 앞에 놓여 있습니까?
살다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믿음
살다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껍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겸손
살다가 절벽같은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제적인 능력을 체험받아야 합니다./순종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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