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모임 중요 메시지 요약]
일시:2011.11.11
장소:열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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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푸른교회 담임목사 김만식 목사님의 설교를 참고용으로 퍼왔습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ο φυσικοs)
제가 어렸을 때는 종이비행기나 연을 만들어 날리며 놀았습니다. 동네 꼬마들이 종이 비행기를 만들어 누가 멀리 날아가는가 시합을 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멀리 날아갈까 골몰하며 좀 더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기도 하고 앞 부분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 보기도 하고 날개 부분은 더 넓게 만들어 시험해보기도 했습니다. 속도는 좀더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는 게 유리하고 고지대에서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날리려면 적당히 얇은 종이가 좋습니다. 앞부분은 좀더 날렵하고 날개는 적당히 넓고 아래쪽 몸통은 밑으로 너무 처지면 안 좋습니다. 후엔 종이비행기를 만들기 전에 이 원리들을 먼저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먼저 목적과 기능을 생각하며 완벽한 세상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과 동식물 빛과 물 등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기 목적을 이루도록 적당한 기능까지 고려해서 만드셨습니다. 액체 상태의 물은 섭씨 0도 이하이면 얼음으로 변해 바위처럼 단단해지고 100도가 넘으면 기체로 변해 공중에 날아다닙니다. 창조주가 물을 이렇게 다른 형태로 변하게 만든 것은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 기체로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대기 상태가 어찌 되겠습니까? 비가 내릴 수 있겠습니까? 비가 내리지 않는 초목과 토지는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도 목적과 기능을 고려해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돌보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답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에 맞게 첫 사람 아담을“하나님의 형상대로”(창1:27) “영과 혼과 몸”(살전5:23)으로 구성된 존재로 창조했습니다.‘영과 혼과 몸'이 서로 다른 기능을 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과 혼과 몸이 무엇이고 어떤 기능을 하도록 계획된 것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πνευμα는 성령을 나타낼 때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과 인간의 영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영은 우리 존재 가운데 하나님을 닮은 부분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영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담은 영이 살아있었기에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이 영의 지배를 받고 통제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다음 ‘혼’, ψυχη는 이성(지성), 감성(느낌), 의지(결단력)입니다. 이성은 추론하고 생각하고 논리를 세우고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일을 합니다. 감성은 슬픔이나 기쁨 같은 느낌을 갖게 해줍니다. 의지는 이성과 감성에 입력된 것을 기반으로 행동방침을 결정합니다. 본질적으로 혼은 컴퓨터 본체처럼 정보 처리하는 system입니다. 혼 그 자체는 영계와 직접 소통하지 못합니다. 혼은 영이 전달해주는 영적 수준의 정보를 받아서 처리하고 저장하고 그 테이터를 기초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끝으로 몸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육신의 모습입니다. 몸은 우리 주변의 자연계, 물리적인 영역과 관계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육체의 몸은 피가 흐르고 신경조직이 있고 몸의 각 지체 눈, 코, 입, 손, 발, 피부 등을 통해 외부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며 생활합니다. 몸 자체에 욕망과 생리적 욕구가 있습니다. 몸이 중요한 점은 영과 혼이 머무는 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몸은 혼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통로는 이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영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인간은 ‘생령’(the living being)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the breath of life)를 불어넣자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그 장면은 상상해보세요. 생령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ψυχη와 ζωη가 합쳐진 말로 ‘생명을 가진 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혼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들어가자 혼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얻는 순간에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헬라어에서 영으로 번역되는 πνευμα는 ‘생기, 숨결, 입김’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성스러운 입김’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입김, 곧 성령이 아담 안에 들어가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영으로 하나님은 공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공존한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와 영적으로 하나라고 말했습니다(16절).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혼이 담당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타락하기 전에 아담의 혼은 영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이해와 논리까지 모두 직접 받았습니다. 아담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정보들을 아담의 혼에 저장되었습니다. 아담의 혼은 그 정보를 기초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아담이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아담의 영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영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의 혼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 것처럼 아담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 아담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교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기 전까지 아담은 영을 통해 하나님과 교감하고 혼을 통해 주변환경과 소통하며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아담은 우리처럼 육신의 몸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영에 속한 사람’(πνευματικοs이었습니다. 그의 혼과 몸은 영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이런 상태가 하나님의 인간을 창조할 때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까지도 죽음의 의미를(창2:17) 몰랐습니다. 모르기는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을 받아 먹으면 죽게 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더 이상 범죄한 아담과 이브 안에 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체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인류는 창조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 하나님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 같은 절대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 놀랄게 없습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을 두 종류로 표현했습니다. 고전2장 14절에는 ο φυσικοs 가 사용되었습니다. 고전 3장 1,3절에는 ο σαρκικοs 를 사용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둘 다 ‘육에 속한 사람’으로 번역되었습니다. ο φυσικοs는 혼(이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 ο σαρκικοs는 육체적 본능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성과 감성에 따라 사는 사람, ο φυσικοs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보는 이유는 성령의 지배를 벗어난 인간의 이성은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세상에 속한 것 밖에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영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정보를 얻는 대신에 혼의 능력인 지성, 감성, 의지로 외부 세계에 대해 학습하고 정보를 처리하고 논리체계를 수립하며 하나님 없는 폐쇄된 자연세계의 가치관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이 세계 안에서는 인간이 창조주를 대신하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자신의 기원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좀더 똑똑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주장과 설명을 받아들여 자신를 이해합니다. 이것이 창조론보다 진화론을 선호하는 이유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뭔가 대안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인간은 자신들이 주장해온 이론 곳곳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기존의 오류를 또 다른 가설로 대체합니다. 나중에 그 가설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진리를 찾기에 지친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며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는 문제가 무신론적 이념이나 세속적 가치관이든, 부패한 마음이든, 중독이나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저속한 습관이든 주님 말씀에 합당하지 못한 것들은 모두 우리 혼의 영역에서 시작된 문제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인간의 문제는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식 대신에 자신의 지식을 가지기로 결단한 순간에 시작된 것들입니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영이 죽은 인간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하더라도 예수 믿어 구원얻으라는 권면을 거부하며 교만하게 비웃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특징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삿21:25) 살아가는데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규범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밀치고 자신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온갖 불의와 탐욕과 방탕에 빠져 살면서 그걸 옳다고 주장하는 격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혼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기며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으로 가득 차 질투와 살인과 다툼과 사기와 서로 헐뜯고, 건방지고, 교만하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악한 일을 궁리해내고, 부모를 거역하고 신의도 없고, 인정도 없는 무자비한 악당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사는 게 옳다고 우겨댑니다((롬1:25, 28-32).
이것은 거의 2000년 전에 바울이 로마사람들에게 인간의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 동안 학식이 얼마나 발달하고 교육에 열을 올렸습니까? 그런데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 모습이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인간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한심해진 것은 바로 타락 이후 지금까지 성령과 단절된 상태의 혼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혼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성령 받으라는 말은 어리석게 보이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고전2:14).
‘어리석게’로 번역된 헬라어 μωρια 에서 veil(덮개)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리석게 된 것은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하도록 눈이 베일에 가려있기 때문입니다. 물리학, 생화학, 수학, 공학 이런 분야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데는 잼병이고 자신이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진리와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바보들의 책쯤 되는 줄로 압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작동하도록 만드셨는지 그걸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영은 영계와 통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영은 하나님이 활동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령받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들으면서 하나님과 교통하기 시작합니다. 혼은 자연계와 통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 자연계는 세속적인 정보들만 존재하는 곳입니다. 인간은 영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이 떠난 후 우리 영은 더 이상 영적 안테나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영이 제 역할을 못하지 혼, 즉 이성,감성,의지가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혼은 자연계를 통해 영적 세계에 접근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창조주는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 피조물을 우상으로 떠받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 인간의 혼은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을 부정하는 거짓된 종교와 세속적 철학과 이론과 세계관을 만들어냈습니다.
타락이전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학자 주다이트(Spiros Zodhiates)는 로고스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지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지성의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성의 원천이 하나님 대신에 마귀와 자연을 통한 인간 사유의 산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쓸만한 소리를 하나도 할 줄 모르고 마귀에게 속아 거짓말 천지가 됐습니다. 눈이 베일에 가린 사람들은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걸 학문이니 철학이니 지성이니 그러면서 말입니다
눈에 베일이 가려져있다는 거, 이거 아주 겁나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4장 3,4절을 봅시다. "And even if our gospel is veiled, it is veiled to those who are perishing. The god of this age has blinded the minds of unbelievers, so that they cannot see the light of the gospel of the glory of Christ". 이 구절은 사단이 혼이 지배하는 불신자들의 마음의 눈을 덮어서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설교를 들어도 영적 세계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영적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작용으로 눈의 덮개가 떨어져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최고의 학식을 가진 지식인이요 하나님에 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을 가지고 사욕없이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스데반이 예수님을 증거하며 돌에 맞아 순교당할 때 현장에서 스데반의 증거를 듣고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식도 그의 열정도 그의 헌신도 복음을 깨닫게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청년이라 생각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날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갑자가 하늘에서부터 빛이 내려와 둘러 비췄습니다. 놀란 바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소리 주인공은 자신을 예수라고 주장했습니다. 잠시 후 일어나 보니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리둥절한 바울에게 그 목소리는 성으로 들어가면 누군가 와서 뭘 지시해줄 것이라 일렀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놀랍고 황당했을까 상상이 갑니까? 바울은 삼일 동안 식음을 전패하고 암흑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주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고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영적인 눈도 열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즉시 각 회당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행9장).
하나님을 떠난 인간 이성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견고한 진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숨어서 자기만의 이론과 논리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속의 견고한 성부터 깨뜨려야 합니다. 이 사단의 요새를 무너뜨리려면 상대보다 강한 무기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항하여 스스로 높아진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고후10: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무시하고 스스로 높아진 ‘주장과 생각’의 헬라어는 λογισμοs와 υψωμα 입니다. Λογισμοs가 KJV엔 imagination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철학에 근거한 변론과 주장들을 가리킵니다. υψωμα란 말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가진 휩시스토스υψιστοs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지금 인간은 성경의 계시를 무시하고 인본주의적 세계관이나 철학들로 무장하고 스스로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망령된 혼 ψυχη가 하는 짓입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처럼 성령이 떠난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께 적대적이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지성인이라는 말이 썩 좋은 건만은 아닙니다. 성령의 지배를 벗어난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고 받아들일만하다는 뜻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보는 것이면, 거기엔 하나님도 성령도 없을지 모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려운 문제를 겪고 마음 속에 갈등을 느끼고 심기가 혼란스러운 모든 문제들은 이 혼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간이 어떻게 육에 속한 사람이 되었고 그 특징이 무엇이지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이 아니하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이유를 잘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고후10:4
잠재의식과 견고한 진
지난 주일 육에 속한 사람의 특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The man without the Spirit,고전2:14). 오늘은 잠재의식 속의 부정적 신념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의 요새가 되고 있는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영역에서는 예수 믿고 거듭난 후에도 육에 속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깜짝 놀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단이 활동할 수 있는 약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견고한 진’이라고 합니다(고후10:4).
그리스도인에게 ‘견고한 진’은 마음 속에서 내적 전투가 벌어지는 약점들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고 거듭난 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잔존하는 쓰레기 같은 옛 습관들로, 종종 정욕, 자존심, 쓴 뿌리,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불만, 질투, 탐심, 미움, 그리고 이와 비슷한 감정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 약점들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요새로 이용합니다.
주님을 닮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습관이나 죄악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 견고한 진이 잠재의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차리고 의식하고 있을 때는 피해가는데 조금 방심하면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곤 합니다. 견고한 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재의식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에는 잠재의식(subconsciousness)이라고 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안에 기억력이 존재합니다. 기억력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과 그에 대한 정보는 물론 그 때 경험한 감정까지 저축해 놓은 정보은행과 같습니다. 기억력은 지성과 감성을 동원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모두 기록해 놓습니다. 혀끝에 맴돌며 생각이 안 나는 경우, 당장 의식으로 불러내지 못할 뿐 그 정보는 기억력에 저장되어 있답니다.
잠재의식을 뜻하는 영어 subconsciousness에서 sub은 ‘-의 밑에’라는 뜻입니다. 의식의 밑에서 일어난다는 뜻인데 잠재의식은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학자들은 두뇌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의 85~90%가 잠재의식에서 일어난다고 추정하고 있답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에 잠재의식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잠재의식은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지쳐서 쉬지도 않습니다. 잠을 잘 때 우리 의식은 닫히지만 잠재의식은 아무 통제도 받지 않고 ‘와 신난다. 꿈이다’ 외치며 돌아다닙니다. 이런 이유로 성령님은 꿈을 통해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의 저항없이 좀더 쉽게 말씀하시는 것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비몽사몽 간에 환상이나 계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그것은 의식의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잠재의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일들을 모두 흡수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답니다. 소리, 색깔, 느낌, 반응, 등 모든 것을 저장합니다. 우리 눈을 스쳐가는 장면이나 귀에 흘려 들은 소리까지 모두 입력해 놓는답니다. 카네기 멜론 대학교 컴퓨터공학과의 로봇공학연구소 한스 모라벡(Hans Moravec)에 의하면 두뇌는 1초에 100조나 되는 많은 지시사항을 처리할 수 있답니다. 우리 두뇌의 정보 저장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잠재의식은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만 하는 게 아닙니다. 잠재의식에 저장된 정보들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갑니다. 잠재의식은 저장된 정보를 이용해 기술을 습득하게 해줍니다. 처음 컴퓨터 자판을 배울 때 생각납니까? 알파벳 위치가 어디에 있는 지 그걸 보면서 각 손가락에 맞는 배열을 생각하며 하나 하나 쳐내려갔습니다. 지금은 자판을 보지 않아도 손아 알아서 움직입니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 T자 크랭크 일렬주차 하나 하나 구분동작으로 조작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익숙해지면 차를 마시고 전화를 받으면서도 차선을 바꾸며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엔 의식이 주도하지만 익숙해진 후엔 잠재의식으로 넘어갑니다. 몸의 일부처럼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잠재의식의 기능 때문입니다.
잠재의식은 신념과 사고체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잠재의식은 지각, 사고, 감정, 그에 따른 반응에 작용합니다. 잠재의식에 저장된 정보가 성격, 습관, 행동과 반응을 통제하는 방법 등을 결정한답니다. 정보를 모아 마음 속에 이미지를 만들어 신념 체계를 세웁니다. 이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여러분이 나름대로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는 정보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잠재의식 속의 정보가 모두 진실에 근거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틀린 것을 옳다고 생각하여 잠재의식에 저장된 정보들도 신념과 패러다임 형성에 기여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행동은 먼저 패러다임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후 실행됩니다. 사람마다 일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업운영, 인종문제, 영성, 결혼, 사랑, 하나님에 대해 ‘이것은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패러다임입니다. 이런 사고의 틀은 우리 기억력 저장고에 들어 있는 내용에 따라 모양새가 결정됩니다.
기억력 저장고에 들어있는 정보들은 얼마나 자주 듣고, 얼마나 자주 반복적으로 행동하며 그 때마다 어떤 감정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신념(지배적인 기억)이 되거나 아니면 단순한 정보로 남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과 애정 어린 포옹을 계속 경험한 어린이는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반면에 형편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학대받고 거절당하는 경험을 반복해서 겪은 어린이는 스스로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합니다.
충격적인 사건들은 한 한번의 경험으로도 혼에 각인되어 지배적인 기억으로 남습니다. 강간, 낙태, 실연, 이혼, 배신, 납치, 테러, 사별 같은 경험이나 버려진 아이들이 겪는 정신적 충격은 되풀이 해서 경험하지 않아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쌓이면서 부정적인 신념체계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거듭난 후에도‘견고한 진’이 되어 괴롭힙니다.
바울은 우리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말할 때 ‘견고한 진’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10장 4절을 보면,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견고한 진’으로 번역된 헬라어 오쿠로마 (οχυρωμα) 는 ‘산성, 요새, 피난처’ 또는 ‘고수하다, 집착하다’는 뜻입니다. 피난처나 요새는 긍정적인 의미지만 여기서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의식과 잠재의식을 포함하는 신념체계가 우리를 포로로 붙잡아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이 견고한 진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냅니다. 사단과 악령은 마음에 요새를 만들도록 인간을 기만합니다. 사탄은 우리 잠재의식에 들어오는 생각과 느낌에 자신의 해석을 불어넣어 사람들이 거짓된 신념을 갖도록 부추깁니다. 사단이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고 선악을 알게 된다고 속삭인 것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우리 생각 속에서 실재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요새를 만듭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 속에 부정적 이미지가 생겨나고 그것이 신념체계에 영향을 주어 요새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신념이 만들고 선택한 잠재의식 속의 이미지들이 실제라고 속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의식 속에는 실재가 되어버린 거짓 주장들이 많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진실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니다. 배신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진실된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종종 가정폭력과 비극이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어나곤 합니다. 가족을 모두 쏴 죽이고 자살한 가장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받았던 이 남자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품고 살았습니다. 성인이 된 후 남편이나 아버지로서 실패자라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다 자살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사람 앞에서 발표하다 창피를 당한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가 말하는데 두려움을 느낍니다. 어른이 되어 이제 그런 일을 기억속에서 사라질 때도 되었건만 사람들 앞에서면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뛰고 음성이 떨리고 생각이 잘 안납니다. 잠재의식 속에 저장된 부정적 이미지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잠재의식에서 믿는 대로 행동에 나타납니다. 생각과 달리 왜 자꾸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잠재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견고한 진 때문입니다.
잠재의식은 신념을 형성하는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잠재의식은 가치관 형성에도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잠재의식에 저장된 기억에 화폐처럼 가치를 붙여두기도 합니다. 어떤 이미지는 1달러, 어떤 이미지는 10달러 이런 식입니다.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지성보다 미모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자는 우선 얼굴이 이쁘고 몸매가 잘 빠져야 한다”. 형제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물론 개인에 따라 이미지의 가치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데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잠재의식 속의 이 가치가 바뀌기 전에는 설교를 들어도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성격이나 습관을 바꾸기 어려운 것도 이 잠재의식 때문입니다. 어떤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굳게 마음 먹고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에는 잠시 달라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평상심으로 돌아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 습관이 살아납니다. 두뇌활동의 상당수가 잠재의식에서 일어나고 잠재의식이 가치와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재의식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사람이 변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못된 습관이나 생각을 고치려고 노력해도 잘 안돼서 고민하는 분들은 오늘 그 이유를 잘 이해하기 바랍니다. 분노를 폭발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라앉고 나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 마음 속의 민감한 부분이 건드려지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을 터뜨리고 맙니다.
우리가 의식을 통해 외부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으면 그것은 잠재의식으로 넘어가 과거의 아픈기억이나 상처를 통과한 후 다시 우리 의식으로 돌아옵니다. 그때서야 의식은 이 정보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합니다. 하지만 이 정보에 대한 생각과 가치는 잠재의식을 통과할 이미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이 평소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과 다른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실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잠재의식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 행동과 삶을 결정합니다. 인간은 어리섞게도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잠재의식이 사실로 믿는 정보를 받아가지고 신념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거짓도 진리라고 믿으면 거짓이 그 사람의 인생을 지배합니다. 심리학자나 최면술사들은 인식의 힘만으로 자신만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뱀을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 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무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피부에 부착된 감지기는 땀이 나는 걸 확인했습니다. 최면술사가 최면에 걸린 사람의 손 위에 얼음조각을 올려놓고 불타는 석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최면에 빠진 실험자는 즉시 얼음조각을 떨어뜨렸고 잠시 후 그 손바닥에 화상으로 물집이 생겼습니다. 잠재의식이 얼음을 불타는 석탄덩어리로 믿어 화상을 입은 것입니다. 잠재의식은 불덩이에 닫았을 때 일어나는 고통의 파일을 찾아내고 신경자동시스템을 가동시켜 물집이 생기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잠재의식의 거짓 정보와 힘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최면은 의식을 뛰어넘어 잠재의식에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인간을 조종할 수 있고 악령의 힘을 우리 혼에 심어 놓을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잠재의식의 기능과 힘을 바로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잠재의식 속에 만들어진 견고한 진을 사단이 이용해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견고한 진이 우리가 세운 것이든, 외부의 억압과 폭력에 노출되어 생긴 것이든, 이것을 깨뜨려야 새롭게 변할 수 있습니다. 엉망인 사람에게 ‘좀더 잘 하라!”고, 격려하든 야단치든 효과가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잠재의식의 요새를 무너뜨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해결책은 타락하기 전 아담에게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이 성령의 인도아래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을 때 잠재의식의 방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화평했고 매일 매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회복시켜 주시려는 관계입니다. 다음 주에는 견고한 진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6:12-14
욕망의 유혹에 저항하라
지난 주일 잠재의식과 견고한 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잠재의식은 깨뜨려 없애지는 것이 아닙니다. 잠재의식이 없어지면 기억력 상실증에 걸려 큰일납니다. 다만 잠재의식 속에 견고한 진이 되어 사단이 역사하는 통로가 되고 있는 우리의 부정적이고 거짓된 패러다임이나 죄악된 습관 같은 것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무기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먼저 그것은 육신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무기는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무기는 뭡니까? 그것은 성령과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혼의 지혜가 뛰어났던 소크라테스도 "오 사람이든 신이든 아무 상관없으니 아무라도 나타나서 하나님을 보여주기나 하면 좋겠소" 말했답니다. Chicken Soup for the Soul 책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남동생이 태어나자 어린 사치는 갓 태어난 아가와 단둘이만 있게 해 달라고 부모님께 더욱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마침내 부모님은 사치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어린 사치는 남동생에게로 걸어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가야, 나한테만 하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말해 줘, 난 이제 거의 까먹었어'" 이 예화는 영적으로 눈이 먼 혼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거듭남’에 관한 표현은 단 두 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하실 때(요3:3), 그리고 베드로의 말씀에(벧전1:23). «여러분이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헬라어 아나겐나오(αναγενναω)는 ‘또 다시’라는 뜻의 ‘ανα’ 와 ‘낳다, 생기게 하다’의 뜻인 ‘γενναω’의 합성어입니다. 영어 단어 gene, genetic, gender도 ‘겐나오’에서 유래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 된 것을 ‘양자’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양자로 번역된 헬라어 υιοθεσια (huiothesia)(엡1:5; 롬8:15)는 ‘아들의 위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미 가족의 구성원이었다가 성인이 된 후 자기 권리를 되찾은 아들(‘υιοσ)이란 뜻입니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권리 회복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겁니다. 남의 아들을 집에 데려와 호적상으로 아들을 삼은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베드로전서1장 23절에 나오는 씨, σπερμα 는 ‘정액, 포자’ 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어 sperm(a)이 나왔습니다. ‘씨’는 한 종의 특성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되는 방법입니다. 거듭남을 표현할 때 ‘γενναω’와 ‘σπερμα’ 이런 단어가 사용된 것은,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과 특성이 우리 안에 심겨진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생물학적 부모로부터 DNA를 물려 받는 것처럼 영의 아버지로부터 영적 DNA를 물려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DNA가 우리 영에 심겨져 그의 형상대로 자라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씨앗 속에 미래의 형체가 들어있습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 속에서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씨앗 속에 각 식물의 미래 형상을 담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앗 속에 거듭난 사람의 장래의 모습을 저장해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 영에 하나님의 씨앗이 심겨집니다. 이 씨앗이 자라서 속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속 사람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자라게 될 지 미리 계획해두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면서 예정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1장 5절을 봅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예정하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προοριζω입니다. 접두사προ는 ‘시간에 앞서’라는 뜻이며 οριζω는 ‘경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 지 미리 경계를 지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운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5장 17절을 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인생의 목적에서 볼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게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후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습관이나 나쁜 생각들 때문에 약간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예수 믿고 경건하게 사려는 사람일수록 ‘어째서 잘 안 되는지’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배운 술 담배를 끊어버리려고 하는데 그것도 잘 안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는데 그럼 나는 뭔가 이런 의구심이 들고 실망감이 몰려오고 그럴 겁니다. 그래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새로워진 것은 영이지 혼이나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거듭나는 순간 우리 영은 즉시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입니다. 그러나 혼은 아직 대부분이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영이 아니라 혼입니다. 영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해도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혼이라 뭐가 잘 안됩니다. 개심하고 각성한 후엔 크게 변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다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자신을 보고 실망합니다. 옛날의 나쁜 생각, 아집과 습관이 여전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신앙도 흔들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거듭난 후에도 이런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혼이 아직 프쉬키코스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구원받았을 때 혼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는 시작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혼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영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바뀌어야 합니다. 영이 거듭난 후에도 혼은 종종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혼 자신을 높이는 일에 열중합니다. 이 교만한 혼 때문에 소위 ‘구원받았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자만심을 버리지 못하고 급한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위선자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 육신의 욕망을 따라 방탕하게 살던 사람은 거듭난 후에 잠재의식 속에 견고한 진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개심 전에 바람피고 도박에 빠지고 음란물이나 마약에 중독되었던 사람은 예수믿어 죄 사함 받은 후에도 그 유혹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혼은 여전히 과거의 습관이나 욕망과 내적 전투를 벌어야 하고 때로 잘난 척하며 죄를 짓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의심하지 말고 대신에 혼을 변화시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신학에서는 영의 구원을 칭의로 표현하고 혼의 구원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칭의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화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이루어지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나쁜 습관하나도 당장 소멸되지 않습니다. 습관을 고치려면 여러분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하나님 말씀에 동의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그 다음 혼과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부활을 경험하게 되면 신기하게도 혼과 몸이 영의 지배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혼의 영역과 몸의 영역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술 담배를 끊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 말씀으로 볼 때 술먹고 담배 피우는 것은 잘못된 습관이고 죄가 된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엔 술먹고 담배피우는 습관을 미워해야 합니다. 혐오감을 느껴야합니다. 마음 속으로 좋아하면 유혹은 그 만큼 강해집니다. 그 다음 혼과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죄의 권능과 욕망의 유혹이 약해지고 소멸됩니다. 이 과정에서 혼은 그게 뭐가 잘못이고 죄가 되느냐고 반발하려고 할 겁니다.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혼의 생각을 편들어주면 습관을 고치기는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혼이 지배하는 사람에서 영이 지배하는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헌신과 순종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혼의 습성을 버리기까지는 오랜 시간 너그럽고 참을성 있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제로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성령의 도움을 청하고 하나님께 우리 의지를 넘겨드리고 순종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혼의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변화의 속도는 각 개인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순종에 따라 다릅니다. 혼의 성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혼의 영역인 지식, 자만, 아집 이런 게 전혀 없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내세울 게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사람들이 잘났다고 내세우는 건 가문, 권세, 돈, 지식, 용모 이런 겁니다. 예수님은 이 중에 어느 것도 뛰어난 게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 가문도, 헤롯 대왕가문도, 제사장 가문도 아닌 피지배자 유대인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요셉은 가난했고 권세나 권력과는 상관없는 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소유의 집 한 채도 없었고 걸치고 다니는 옷이 소유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에겐 조롱받고 침 뱉음을 당하고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수려한 풍채도 없고 화려한 위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볼품이 없었다”(사53:2)고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종이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 자기 프쉬케를 드높이도록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을 취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며 세상에서는 하나님처럼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과 이브를 무너뜨린 것과 같은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혼은 자신을 높이는 대신에 영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혼을 다스리는 방법은 자기 의지로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지를 내세웁니다. ‘의지의 인간’, ‘인간 승리!’ 이것은 TV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들어본 말입니다. 인간의 혼을 한껏 높이는 말입니다. 이런 말 앞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반대로 혼을 죽어야 영생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을 봅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구절 속에 나오는 두 번의 생명은 모두 혼( την ψυχην)입니다. 뒤에 나오는 영생은 ζωην αιωνιον입니다. 25절의 뜻을 풀어보면 혼을 사랑하고 혼을 위해 사는 사람은 혼의 생명을 잃게 될 것이지만 혼의 생명을 미워하고 죽이면 오히려 영의 생명, 즉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영의 생명이 힘을 쓰게 하려면 혼을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와 인간 이성의 지혜가 결정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는 맛에 삽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생을 얻으려면 미워하고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닫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복음 외에 잠재의식의 견고한 진을 다스리는 데 무슨 특별한 비책이라도 있을까 기대한 사람들은 복음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으로 봐야 할 겁니다. 혼을 죽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됩니까? ‘혼을 죽어야 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죽음을 의미하거나 혼의 기능을 모두 멈추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혼이 주도하게 놔 두지 말고 영의 영향력 아래 둬야 한다는 말입니다. 혼의 기능, 사고하고 추론하고 정보를 저장하고 감정을 발산하고 행동의 올바른 순서를 정하는 능력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다만 혼을 영의 지배 아래 둠으로써 간접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후원아래 혼을 다스릴 책임은 이제 여러분 각자에게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를 범한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죄의 욕망을 느낄 때 굴복해서 옛 습관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 순간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며 죄의 권능에 저항하기 바랍니다. 죄가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하도록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얻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육체의 욕망이나 옛 습관의 유혹을 받는 순간 이건 생사가 달린 영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마귀는 죄악의 욕망에 빠져 혼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도록 유혹할 것입니다. 죄악의 욕망으로 얻는 쾌락을 포기하지 못해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사단의 유혹에 죽기까지 저항하기 바랍니다. 저항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사단의 유혹은 무력화됩니다. 혼과 육체의 욕망도 줄어들고 영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