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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울지 않으면
네 사람의 장수가 있었다.
첫째 장수는 새가 울지 않으면 한칼에 베어버리고
둘째 장수는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고
셋째 장수는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고
넷째 장수는 새가 울면 우는 대로 울지 않으면 않는 대로 그대로 두고 보았다.
이 이야기는 곧잘 일본 전국시대의 명장들의 덕성을 비유해서 각색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첫째 장수는 일방주의다. 힘으로 밀어 붙이고 힘으로 제압하는 약육강식의 생리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이다. 어쩌면 이 시대의 우리 모두는 힘만 있다면 한칼에 베는 방식을 선택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 방식을 결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민주적 양식이 발달해서가 아니라 한 칼에 벨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둘째 장수는 전략적이다. 한방에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 방에 끝낼 힘이 없을 때, 그 힘의 공백을 용의주도한 전략으로 보완하면서 주관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 이 유형이다. 첫째 장수와 그 욕망이 질적으로 다른 바는 없다. 다만 우회적으로 관철할 수 있는 용의주도함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셋째 장수도 주관의 의지를 관철시키는데서 전락적이다. 그 점에서는 둘째 장수와 다르지 않다. 흔히 이런 유형을 덕장(德將)이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덕장은 아니다. 전략 중에서도 최고의 전략가다. 말하자면 남들이 보아서 전략을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전략을 구사하면서 끝내 흡수통일의 야망을 실현한다. 둘째 장수와의 차이는 승리의 결정적 시점을 포착할 때까지는 포용이라는 덕성으로 자기의 야망을 철저하게 감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본 첫째, 둘째, 셋째 장수들은 어떻든, 정벌에 의한 것이든 회유에 의한 것이든 포용에 의한 것이든 자신의 야망과 주관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것은 다를 바 없다. 다만 그 실현 기법과 전략의 기술적 수준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그 차이라는 것이 결코 작은 것일 수는 없지만.
이제 넷째 장수를 보자. 이 경우는 앞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주관을 상대에 이입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며 또 상대를 전략적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주관을 절대화하지 않고 주관을 상대화한다. 주관과 객관을 등가적으로 위치시킨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상호주관의 관계성, 상응(相應)의 관계성을 갖고 있다. 간명하게 관계의 미학을 말할 수 있는 지점이다. 달리 말해서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넘어가는 탈중심화(脫中心化)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지점이 바로. 각자 제목소리를 내면서 어우러질 수 있는 상생(相生)의 지점이다. 우리가 흔히 말로는 상생(相生)을 말하지만 그것들은 대개의 경우 일시적 타협의 지점을 의미할 뿐이며 차라리 상생이라는 언어마저도 오염되어서 상생의 진실한 뜻마저도 모르게 되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