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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네 기둥(1) - 박학(博學)
공부의 네 기둥은, 배움의 학(學)/ 물음의 문(問)/ 변별할 변(辨)/ 생각할 사(思)인데 이를 고전에서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명변(明辨), 신사(愼思)로 말한다, 이에 대해서 이제마가 말하는 바를 따라서 하나 씩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배움은 넓어야 한다, 즉 박학(博學)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학은 단순히 배움의 반경을 넓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천하가 넓으니까 천하에 통하기 위해서는, 천하의 공도(公道)를 익히기 위해서 널리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좁은 식견, 주관의 편협성을 탈피하기 위해서 널리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심(私心)을 떨치기 위해서, 천하의 공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심을 떨쳐야 하고 사심을 떨치기 위해서 널리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학(大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널리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의 이치를 알자는 것이 배움의 목적일 것이다.그러나 주관을 넘어 객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심을 떨쳐야 한다. 그것을 떨치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가 없다. 사리사욕의 넘어서,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것이 배움의 길이다.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넘어서기 위해서 천하의 사람으로, 세상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배운다는 것이다.
● 우리들의 통상적 개념으로는 배움이란 것 자체를 사적 재산을 마련하기 위해서 배운다. 남보다 좀 더 배워서 그것을 밑천삼아서 남을 이기고 남의 머리위에 서고자 배운다, 그러니까 사심을 떨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심을 충족하고자 배운다. 공교육은 이미 무너지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미친듯이 사교육을 해도 인재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다, 사심이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사교육에서 천하에 통할 공도(公道)에 나아갈, 객과세계로 나아갈 인재가 나올리 없다. 차라리 나라와 사회의 재앙을 불러올 엘리트(?)를 만들 뿐이다,
● 이제마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사심을 떨치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고 한다. 私心이 재앙을 만드는 것이니 세상경영에 재앙을 막기 위해서 널리 배워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르다. 배움의 개념이 확연히 다르다, 사심으로 배운자, 그렇게 지식으로 무장한 자는 편협할 것이고 인색할 것이다, 사심을 떨치고자 배운 자는 천하를 향한 뜻 -성의(誠意)를 세울 것이다. 성(誠)의 개념은 사적 반경을 넘어서 객관세계로 넘어가는 개념이다. 본성(本性)에 통할 수 있는 개념, 천하와 소통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이다,
그래서 이제마는 말한다, 배움의 목적은 다른대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구하는데 있다’고 한다, 뜻을 구하는데서 자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고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널리 배운다는 것, 지식을 넓히는데 있지 않다. 주관과 사심을 떨치고 성(性)을 아는데 있고 성(性)을 알아서 자신이 마치고 가야할 일에 뜻을 세우는데 있다. 천하의 존재로 거듭 나는데 있다고 말한다,
심문(審問)
1.
학문(學問)과 學과 問의 합성어이다.
박학(博學)과 심문(審問), 널리 배우고 깊이 묻는다의 합성어이다,
배움이 없는 물음, 물음이 없는 배움은 어느 것도 성립할 수 없다,
정말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물음이 있기 때문에
알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배울 것이다,
그리고 배우는 바로부터 다시 물게 될 것이다,
사실 물음이 없는 배움이란 것, 죽은 공부다,
우리가 고전을 봐도 그렇고 같은 책을 봐도 그렇다,
자신의 물음, 그 물음의 깊이만큼 배운다,
같은 책이라도 그냥 책을 보았다면 보나마나할 것이고
정말 문제의식을 철저히 가졌다면 철저히 배울 것이다,
배움은 선험적인 것이다,
남의 경험으로부터 앞서간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고
물음은, 배움을 자기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험과 자신의 경험의 충돌에서 물음이 나온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하고 합당한지 체화하는 과정에서 물음이 나온다,
2
물음이 없다면, 이미 공부는 정체된 것이다,
더 나아감이 없다는 반증이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자기 도취와 교만에 빠졌다는 반증이다,
진리가 아님에도 정도가 아님에도
자신이 진리의 분면에 정도의 분면에 올라서 있는 것으로
그렇게 행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물음의 중요성이 있다,
심문(審問) - 깊이 물어야 한다고 한다,
자신이 옳은 것으로 믿고 있는 그것에 다시 한번 물음을 던지는 것,
철저하게 물음을 던지는 것, 그것이 방심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묻지 않는다는 것, 물음이 없다는 것은 방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대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살아있다는 것은, 물음이 살아있을 때만이다.
물음은 없고 알고 싶다는 것은 거짓이다, 허영일 뿐이다.
공부의 네 기둥(3) - 신사(愼思)
a) 공부의 네 기중은 학문(學問)과 사변(思辨)이다,
학문, 배우고 묻는 것은
자기중심적 세계를 벗어나서 진리를 향한 것이고
신사(愼思) -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처신과 행실에 그에 합당한가에 대한 성찰적 사고를 말한다,
행(行)의 정의성과 지행합일의 정합성에 대한 성찰을 말한다.
b) 공부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게으름이다,
마음만 앞서고 몸이 따라가지 않는 것,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것이 게으름이다,
게으름에서 삶은 정체되고 타락한다,
무능(無能)하게 만드는 것도 게으름이다,
시소에 합당한 처신을 하는 것이 유능(有能)함이고
시소에 합당한 처신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무능(無能)함이기 때문이다,
불의(不義)로 빠져들게 되는 것도 게으름 때문이다.
해야할 바를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게으름이다,
그래서 무능함과 게으름을 구제하는 것이 신사(愼思)다,
자신이 삶의 기준선에 올려져 있는가를 거듭 성찰하는 것,
그것이 신사다,
c) 인간은 머물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그래서 틈만나면 안일을 구한다.
그러나 안일을 구하는데서 게을러지고 일도 공부도 다 그르친다.
안일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도가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 사(思)자를 보면, 밭 전(田) + 마음 심(心)이다.
마음으로 밭을 가는 것이 생각이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안주하지 않고 그에서 한번 더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이 부족한가, 혹시라도 어딘가 문제가 없는가,
빠트린 것이라도 없는지,
이것들을 바로잡을 방도가 없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생각은 오락가락하는 생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밭을 갈듯이 생산성이 있고
자신을 전진하게 하는 힘이 생각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안알에 빠져 있다는 반증이고
게으르다는 반증이다.
더 나아갈 생각도 없고 자신을 고칠 필요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안일하고 게으른 것이다.
d) 동무는 이렇게 말한다.
思所以愼也 乂極廣也.(사소이신야 예극광야)
생각이 신중해야 하는 까닭은 처신의 정리가 극광(極廣)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신중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행동거지가 의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리가 의미하는 바는,
공명정대하게 자신(自身)을 가꾸는 자기 성찰이다.
‘정리가 극광하다’는 것은, 천하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천하가 광대한 것이기 때문에 천하에 통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거듭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사(愼思)는 천하의 처신(處身)을 기준한다,
자신을 천하와 마주할 수 있는 기준선에 올려놓지 않는한
천하의 진리와 마주할 수는 있는 공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부의 네 기둥(4) - 명변(明辨)
명변(明辨)은 명쾌하게 따지는 것이다,
公과 私를 분명하게 하고 시비곡직을 따지는 것이다,
공부의 네 기둥, 그 하나로서 명변을 강조하는 것은
사리사욕에 어두운 자기중심적 인생경영에 대한 자기 성찰과 자기비판이
명변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명변에서 득해야 하는 것이 근(勤)이다,
근은 부지런하다는 의미인데,
일신의 이익을 위해서 부지런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자리이타의 이익을 위해서, 대동의 이익을 위한 근면을 의미하고 있다,
말하자면 보생활인(保生活人)의 정신,
사단으로는 仁의 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하의 대동적 가치를 위해서 헌신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명변(明辨)에서 물러서면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인다,
공익을 사익으로 약탈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공익으로 둔갑시킨다,
사기치고 속이는, 속고 속이는 인생경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명변이 안되면 거기서 공부도 끝이다,
公私가 구분이 안되고 공사의 엄정한 구분이 이미 안되는데
알아들을 진리도 더 이상 알아야 할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명변이란 것, 公的인 분면에 자신을 올려세우는 부단한 정진과정이다,
公道의 궤적으로부터 일탈하는 자신을
다시 끌어올리는 비판력, 반성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