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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박학다식(博學多識)을 말하는 것일까?
박학다식(博學多識),
널리 배우고 많이 안다는 것인데
옛사람들이 왜 이것을 그토록 강조했을까?
학식은 무형적 재산이기에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라고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다,
자신의 식견, 주관을 깨트리기 위해서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
자신의 편벽됨을 탈출하기 위해서
그래서 천하에 소통하기 위해서
널리 배울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널리 배우라는 것,
‘널리’를 강조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 세계를 탈출하라는 그런 의미다,
널리 배워서
배운 것을 밑천으로 간직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널리 배운다는 것,,,그것을 연장하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배움에 끝이 없다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이미 갖고 있는 배움이나 식견에 머물지 말라는 이야기다,
거듭 자신의 식견을 부정하라는 이야기다,
그점에서 우리는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널리 배우고 많이 알아야 더 똑똑해지고
그래야 세상에서 행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세하기 위해서 널리 배우고 많이 알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박학다식’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만큼 학문이 타락하고 교육이 타락했다는 이야길 것이다,
똑똑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많이 배워서 많이 알아 똑똑해지는 것일까?
그게 아니다,,,
많이 알든 적게 알든 자신에 가두어지면 그게 어리석은 것이다,
자신의 주관과 식견을 깨고 나올 때 똑똑한 것이고
그때 지혜가 열린다,
박학다식,,, 그것이 사람을 똑똑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박학다식을 통해서
사람이 똑똑해지는 것으로 알지만 그게 아니다,
박학다식이란 것,
자기 부정의 힘을 갖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식견을 깨트리는 계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세상을 향해 열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박학다식해도
그것에 가두어진다면
그것을 사유재산으로 삼아서 지배의 도구로 삼는다면
박학다식은 똑똑한게 아니라 악한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의 장본이 된다,
선악의 기준이 무엇일까?
세상을 향해서 열려 있고
관계적 정합성을 지향하는 것, 그게 선이다,
그맇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관계적 정합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
세상과의 상호연관을 부정하는 것, 그것이 악이다,
지혜는 관계적 정합성에서 빛을 발하고
관계적 정합성을 부정하는데서 지혜는 죽는다,
박학다식에서 배울 것도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