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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기독교 공동체의 ‘삐딱이들’13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607 추천 수 0 2013.04.10 19: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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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0:16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10.16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삐딱이들’13
요10:16

요한복음 공동체가 분파적인 집단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유대교 체제만이 아니라 당시 예수운동 주류파 공동체들과도 불화 했습니다. 여기서 ‘불화’했다는 것은 요한공동체가 그 성격상 문제가 있어서 누구하고나 시비를 일으켰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 신앙 공동체 중에서 가장 핵심에 근접하여 판단하고 사고하는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연합논리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요한공동체였습니다. 어찌 보면 독불장군같이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본질을 따라 살겠다는 측면에서는 귀한 판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자신들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엣세네 신앙 공동체가 그런 것처럼, 자신들만 빛의 자식들이고, 자신들만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폐쇄주의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구원파’ 같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함께, 너와 나’라는 뜻이 아니라 ‘울타리, fold’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자기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긍정입니다.

미셀 푸코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성적인 장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이곤 하면,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정체성에 ‘여성다움’ 또는 ‘남성다움’이라는 방식이 있어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남자와 여자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남성’ ‘여성’이 되게 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한다는 이론입니다. 푸코는 이것이 사회가 인간을 통제하는 하나의 양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 남성과 여성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자나 여자로 사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이 되려면 사회 속에 장치된 이런 ‘성적 장치’를 교란시키라는 것입니다.

요한공동체 이야기를 하다가 무슨 뚱딴지처럼 미셀 푸코의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요한공동체가 이해하기에 예수의 실천이 바로 이것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종교 현실에도 남녀의 구별이라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여성은 제자의 반열에 낄 수 없었으며, 사회적인 인격체도 아니었고, 여성들에게는 진리를 위한, 진리를 향한 그 어떤 역할도 불가능했습니다. 다른 공동체의 여자들은 예수 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지배적인 성적관념을 생산하는 장치에 의해서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공동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요한복음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다수 예수님의 중요 행위에 등장하는 이들이 여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장치된 것들에 대해서 저항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요한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운동이 점차 제도화 되어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도화의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가 했습니다. 왜 ‘교회’가 예수운동의 주력이 되었는가하면, 교회 모델이 다른 유형보다는 그리스도교적 정체성과 인간 개개인이 지닌 가치와의 접촉점을 가장 극대화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운동의 주역을 ‘교회’가 맡다 보니까 본래 예수운동이 지닌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이 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정치인이 정당에 들어가기 전에는 조금 과격하고 실천적이었다가 정당에 소속이 되면 흐지부지 그 성향이 퇴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운동이 ‘교회’라는 제도를 갖기 이전에는 아주 실천적이고 혁명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견고히 하려다보니까 그만 그 신선도가 떨어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초대교회의 ‘교회’라는 제도는 예수운동을 훼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서양문명이 들어올 무렵 Y.M.C.A 같은 사회선교단체는 역동적이고 신선한 활동의 주체였습니다. 세상을 변혁시키는 혁명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것들이 제도화되면서는 사교클럽이 되고, 돈놀이나 하고, 그저 흐지부지 유명무실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제도란 이렇게 본성을 약화시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향유 이야기와 가룟 유다의 등장은 바로 이런 변화를 해석하는 적절한 텍스트가 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하는 두 사람의 부류를 보지만, 사실은 이 이야기는 요한공동체가 추구하는 예수의 텍스트와 이미 ‘교회’라는 제도화를 추구해 가고 있던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선한 예수 모임과 신선도가 떨어진 다른 모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마르다 이야기가 등장하는 성서 분문은 눅 10:38-42, 요11:17-44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저 나사로 가정의 개인사, 특별히 마르다가 허툰 일에 분주했다는 정도의 에피소드를 전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논점입니다. 우리가 아주 많이 설교를 통해 들었던 것처럼, 마리아는 당시의 남자들처럼 부엌데기 노릇을 거부하고 예수의 발치에 앉아 설교를 듣는 장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해방주의의 성공같이 보이기도 하고, 열린 공간의 대화에 적극 참여하는 진취성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걸 해야 한다고 강요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누군가 그러려면 누군가는 식당에 가서 그 하찮게 여겨지는 부엌데기 노릇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르다 같은 여인도 있는 게 사실 아닙니까? 마르다는 그저 당연한 일을 묵묵히 한 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마르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고, 그걸 거부하고 뽀송뽀송하게 앉아 설교를 듣는 마리아가 옳다고 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애시 당초 예수님은 마르다 더러 그러지 말고 너도 들어와 마리아처럼 이래라고 해야 옳습니다. 한마디 하지 않다가 다 끝난 마당에 너는 나쁘고 너는 옳다 하신다는 게 옳은 것입니까?  

사실 이것이 지난 날 한국 교회의 신앙의 정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운동의 역동적인 실제성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그 신선도는 떨어지고 관념과 이론 제도와 형식만이 신앙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신앙공동체가 점차 회칠한 무덤이 되어가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를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마리아는 소극적인 여자로 봅시다. 그러면 마르다는 아주 적극적인 여자가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서는 그 마르다의 행동을 뭐라고 적고 있냐 하면, ‘디아코네인-섬기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뭘 시중드는 그런 걸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 운동당시 예수의 제자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을 ‘디아코네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단어를 쓸 때도 남자 여자 구분 없이 ‘봉사’또는 ‘섬김’을 나타날 때 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디아코네인’인 없는 여자고 마르다는 제자들처럼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디아코네인’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섬기는 여인과 소극적으로 처신하는 여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두둔한 예수님의 속내는 뭘까요?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교회가 여자들이 교회에서 나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칭찬하는 것으로 해석을 했고, 은근히 마르다처럼 나대면서 교회 일에 나서는 여자를 경계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들어보면 그럴 듯하기도 합니다. 잘난 여자는 교회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라 뭐 그런 거죠. 이렇게 헷갈리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나사로가 위험하다는 전갈이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떠나지 않습니다. 이틀을 더 지체합니다. 그 후 마르다의 집이 있는 베다니에 이르니 이미 나사로는 사흘 전에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마을에 당도했다는 전갈을 듣고 마르다는 얼른 나와 영접을 했고 마리아는 그저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라비가 죽은 경황없는 상황입니다. 마리아가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럼에도 예의를 차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대단히 강하며, 공적 활동에 익숙한 여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와 예수와의 대화를 들어 봅시다. “주님이 계셨으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예의 바른 말이죠. “나사로는 다시 살아 날거야” 위로의 말치고는 약간 뜬금이 없습니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위로를 건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그 뜬금없는 예수의 말에 “그걸 믿습니다”이럽니다. 예수에 대한 신뢰를 내 보일 때 이보다 더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신실성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예수의 상식 밖의 말과 자신의 상식을 조화시켜 이해 할 만큼 능숙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녀의 그런 응수를 바탕으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마르다는 마지막 때에 살아날 거라고 믿고 있는데 예수님은 지금, 죽지 않았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는 이 말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마르다가 거창하게 대답하죠? 뭡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오로지 베드로만 이 말을 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쓸모없는 짓을 한 것 같은 마르다가 이 말을 합니다.

다시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로 가 봅시다. 예수님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갑니다. 그리고는 언니처럼 말합니다. 뉘앙스는 같지만 상황은 다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보자마자 통곡을 해댑니다.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예수님의 마음도 산란해 졌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어디 있느냐. 어디에 묻혔느냐?”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매를 각기 만난 예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마르다는 감정을 절제하고 세례문답처럼 정답을 냅니다. 올곧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감정에 복 받혀 엉엉 웁니다. 예수님도 웁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두 사람의 케릭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활동적이라면 마리아는 소극적이며 다소곳하고 감정적인 여자입니다. 마르다가 다른 사람을 우선시 하는 인물이라면 마리아는 자기중심적인 감정의 여자입니다. 마르다는 공적인 상황에 익숙하고 마리아는 사사로운 친밀감에 익숙한 여자입니다. 마르다는 어머니 같은 여성성을 가진 반면 마리아는 딸 같은 여성성을 가졌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마르다는 탈 여성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믿음직한 여자라면 마리아는 귀여운 여인인 것입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성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구분 짓는 양상들을 보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말씀 사역을 다른 봉사활동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활동적인 여성보다는 후원에 힘쓰는 여성을 보다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여성 지도자는 시중드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마르다는 설치는 여자로 보이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제도화 되어가는 교회, 남성 중심의 교회는 마르다 같은 여자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서가 이렇게 성적인 것을 규율하는 장치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이 더욱 도드라지게 그랬습니다. 적극적인 복음의 행위자가 되레 방해자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소극적인 마리아 보다 변화에 적극적인 마르다를 해석의 중심에 뒀었더라면, 섬기는 것을 가치로 삼는 마르다를 우선했더라면 세상은 훨씬 강력한 예수운동의 변화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역동적인 혁명의 신앙이 ‘교회’라는 제도의 틀 속에 갇혀 버린 문제를 직시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마르다와 마리아를 읽을 때, 마르다는 억세고 하찮고, 마리아는 가치 있고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제도에 함몰된 편견의 소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뛰어 넘으려는 열망이 우리의 신앙행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요한복음공동체와 같은 신앙의 이상을 가졌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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