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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첫눈 오시는 날

창작동화 백승자............... 조회 수 1091 추천 수 0 2005.06.08 18:01:01
.........
규리는 오늘도 나와 눈맞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교실 문 앞에서 잠깐 마주쳤지만, 그 애는 요즘의 날씨만큼이나 찬바람이 쌩쌩 도는 표정으로 내 앞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아휴, 어떻게 해야 규리의 꽁꽁 언 마음이 풀어질까?’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 한 가지로 가득 찼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몇 번이나 선생님께 지적을 받았을 정도로 말이에요.
“이지훈!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선생님이 내 귀를 잡아 흔들며 하신 말씀에 우리 반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나도 그만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지요. 바로 뒤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웃고 있을 규리를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한나절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토요일의 4교시 수업이 끝나고 교실 청소가 시작되었을 때, 복도 끝에서 규리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이따 청소 끝나고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곰실이가 새끼를 네 마리나 낳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나만 외톨이로 남겨 놓고, 규리는 별로 친하지 않던 친구에게까지 친절하게도 말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눈길을 먼 창밖에 두고서 규리의 목소리에 귀를 곤두세웠습니다.
“우리 엄마가 강아지를 주위 사람에게 나눠준다고 하셨어.”
그 한마디에 아이들이 규리 곁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규리는 더욱 신이 나는지, 곰실이가 새끼를 낳아서 키우는 이야기를 수다스럽게도 풀어 놓았습니다. 규리 아빠한테 야단을 맞은 곰실이가 골이 나서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식탁 아래 엎드려 있었다는 이야기에는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우리 규리네 집에 놀러 가자.”
“혹시 누가 아니? 예쁜 강아지를 선물로 받을 수 있을지!”
청소를 끝낸 친구들 대여섯 명이 규리네 집으로 몰려갔습니다. 규리도 나를 한번 힐끗 돌아보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나는 왁자지껄한 친구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혼자서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었습니다.
‘규리고 뭐고, 여자애들이란 어쩔 수 없어. 밴댕이마냥 속이 좁아터졌다니까!’
죄없는 돌멩이를 걷어차는 내 마음은 참으로 답답하고 무거웠습니다.
‘아, 그 조그맣던 곰실이가 어느새 자라서 새끼를 낳았구나! 새끼들이 곰실이를 닮았다면 얼마나 귀여울까…?’
나는 규리네 집에 갔을 때 함께 놀았던 곰실이를 떠올렸습니다.
하얗고 긴 털이 복슬복슬한 목덜미에 분홍색 리본을 맨 곰실이, 머루알처럼 까만 눈동자와 차가운 콧망울이 정말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때 규리는 강아지 키우는 게 소원인 나에게 이 다음에 예쁜 강아지가 태어나면 한 마리를 주겠다고 자기가 먼저 약속을 했습니다.
‘쳇! 그만한 일로 이렇게 배신하는 거냐.’
나는 조금씩 규리가 야속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꼭 일주일 전에 규리가 토라질 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지요. 같은 반 은주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나는 가슴이 잔뜩 설레어 선물 가게로 들어섰습니다. 규리 외에는 여자 친구의 생일 초대를 받은 게 처음이기도 했지만, 은주는 오래 전부터 내가 맘속으로 좋아하는 아이였거든요.
물론 규리와는 유치원 때부터 단짝 친구로 소문이 났을 만큼 친해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규리는 남자애들보다 더 씩씩해서 힘으로 대결을 해도 내가 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규리와 달리, 은주는 우리 반에서 가장 얌전하고 착해서 남자애들이 남몰래 좋아하는 아이였지요.
아껴 모은 용돈을 다 털어 은주에게 줄 인형을 사서 안아 들었을 때입니다. 규리가 선물 가게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게 아니겠어요?
“어머나! 지훈이가 웬일이야?”
규리는 인형을 안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한지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아, 이건……. 우리 사촌 동생에게 주려고….”
세상에, 있지도 않은 사촌 동생 핑계까지 대고 나는 얼른 가게를 빠져 나왔지요. 그 바람에 예쁘게 포장을 해주겠다는 가게 아주머니의 말씀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생각보다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한 시간 뒤 은주의 생일 잔치 자리에서 규리를 다시 만났으니까요.
“어? 규, 규리야!”
나는 왜 그 자리에 규리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요.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내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오호! 언제부터 지훈이랑 은주랑 사촌이 되셨나? 그 달콤한 비밀을 지키느라고 꽤 힘들었겠는걸!”
규리는 은주에게 선물을 건네고는 바쁜 일이 있다고 금세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규리는 나에게 말없는 벌을 주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다음 일요일 아침, 유난히 찬 기운에 내가 자꾸만 이불 속으로 파고들 때였습니다.
“올해 첫눈은 일찍도 내리시네…….”
밖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후다닥 이불을 걷어찼습니다.
“첫눈? 정말 첫눈이 내린다고요?”
창밖에는 고운 눈발이 소리도 없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아!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다!”
나는 급하게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집 뒤의 공원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서서 뛰는 가슴을 어루만졌습니다.
그 공원의 느티나무 아래, 규리가 오도카니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가슴에는 곰실이를 꼭 닮은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서.
“규리야, 고마워……. 너도 약속 잊지 않았구나!”
“물론이지. 첫눈이 내리는 날, 우리 이 자리에서 만나자고 한 사람이 나였잖아!”
규리가 하얗게 눈을 흘기며 말했지만, 그 마음 속에 담긴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까닭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규리야! 내년에도 우리 만날까? 첫눈이 오시는 날, 이 자리에서.”
“넌 그걸 꼭 말로 해야 하겠어?”
곰실이와 꼭 닮은 강아지를 건네받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분이었습니다.
드문드문 휘날리는 첫눈도 아름다운 약속이 이루어진 걸 축복하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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