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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대구매일동화당선작
빨간 공이 팽그르르 돌아갑니다.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올망졸망 모여든 아이들의 눈도 공을 따라서 어지럽게 돌아갑니다. 열심히 뺑뺑이를 돌던 공은 점점 느려지더니 13번에서 멈춰 설 듯 합니다. 13번은 피카츄인형입니다. “이야, 서라, 서!”
둘러 선 아이들은 하나같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빨간 공은 설 듯 말 듯 망설이더니 14번으로 뒤뚱 넘어가 멈추어 버립니다. “아이구, 미미인형이구나. 좋겠네. 옜다”.
문방구 아저씨는 연주의 손에 파란 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하나 건넵니다. 인형을 받아드는 연주 입이 삐쭉 튀어나옵니다. “치, 이번엔 될 줄 알았는데…”.
“또 할래?”
아저씨는 연주를 쳐다보며 빙글빙글 웃습니다.
“싫어요”.
연주는 바닥에 던져 두었던 신주머니를 휙 낚아채 올려 일어납니다. 곁에서 연주를 기다리고 섰던 다희도 쫓아서 뒤따라 나옵니다. 아파트로 가는 골목 어귀까지 오면서 연주는 내내 심드렁합니다. 그끄저께부터 피카츄인형을 뽑으려고 학교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날마다 인형뽑기 기계에 오백원 씩을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번번이 ‘꽝’에 걸려 받아간 사탕이랑 과자를 엄마에게 들켜 혼이 났는데, 미미?曠活?갖고 들어가면 엄마는 오늘도 뽑기를 한 줄 아시고 연주를 혼낼 겁니다.
“이거 순 싸구려다. 이게 뭐야. 여기 옷도 떨어졌잖아”.
“이쁘기만 하네, 뭐. 연주야, 한 번만 만져보자좫.
다희는 연주가 내미는 미미인형을 받아서 요리조리 만져봅니다. 찢어진 뒷단이 안 보이게 드레스도 매만져 주고 헝클어진 머리도 가지런히 빗어줍니다. 연주는 인형을 다독이는 다희를 흘낏 쳐다 봅니다. “그거, 너 줄까?”
다희는 눈이 동그래집니다.
“그래도 돼?”
“우리 집에 가면 진짜 바비인형 있어. 병원놀이 하는 거, 쇼핑 센터에 가는 거, 미용실 놀이 세트. 아빠가 백화점에서 사다 줬어. 이런 싸구려랑은 비교도 안돼. 그건 너 가져좫. “진짜? 고마워좫.
다희는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빨리 집에 가서 엄마에게 자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과자 사 먹으라고 주신 백 원짜리도 그대로 남겨두었고 갖고 싶었던 인형도 하나 생겼으니 엄마는 다희를 품에 포옥 안아 주실 지도 모릅니다. 다희는 손이 시린 줄??모르고 미미 인형을 꼬옥 거머쥐고 골목을 내달립니다. 한 쪽 끈이 헐거워진 가방이 자꾸만 덜렁거려서 고쳐 매야 하지만 한 시라도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다희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달려갑니다. “엄마!”
다희는 대문을 밀치면서 큰 소리로 엄마를 부릅니다. 다희 목소리에 부엌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내다보는 사람은 엄마가 아닙니다. “할머니이좫.
다희 목소리는 그만 풀이 죽어 버립니다.
“그래. 우리 다희, 학교 댕겨 오나?”평리동 할머니가 와 계신다는 건 또 엄마와 아빠가 멀리 갔기 때문이란 걸 이젠 다희도 잘 압니다. 다희네 엄마, 아빠는 이불 장사를 합니다. 커다란 트럭에다 이불을 싣고는 여기 저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같은 데 가서 이불을 주욱 펴 놓고 팝니다. 가까운 곳에 가는 날은 아빠 혼자서 나가지만, 멀리 가서 며칠씩 걸리는 날은 엄마도 같이 갑니다. 그러면 평리동 할머니가 오셔서 다희 밥도 챙겨 주고 빨래도 해 주곤 합니다.
“와? 할매가 와서 싫나?”
다희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듭니다. 할머니가 싫지는 않습니다. 할머니는 맛있는 것도 해 주시고, 옛날 얘기도 재미있게 해 주십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계시면, 엄마가 없기 때문에 다희는 그게 싫은 것이지요. “다희야, 얼릉 숙제 해 놓고 놀아라좫.
“예좫.
다희는 가방을 열었습니다. 책상 대신 쓰는 귀퉁이 부서진 밥상 위에다 알림장을 꺼냅니다. ‘읽기 책 95쪽 96쪽 밑줄 그은 낱말 10번씩 써 오기’
다희는 선생님이 적어 주신대로 읽기 책과 숙제장을 꺼냅니다.
“엄마한테 불러 달래서, 안 보고 적어야 해요. 그래야 공부가 되니까. 보고 적어 오는 어린이는 없겠죠?” 오늘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다희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불렀습니다.
“할머니, 나 이거 좀 불러줘요좫.
“먼데?”
“여기 줄 그어 놓은 거 불러 주면 돼요좫.
다희는 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으로 읽기 책을 디밀었습니다.
“우짜꼬? 다희야, 할매는 글자 모른다. 할매는 학교 못 댕기가 이런 거 읽을 줄 모른다좫. 할머니는 미안한 듯이 다희를 쳐다봅니다.
“다희야, 이거 니가 보고, 요래 쓰면 안 되나?”
“안 돼요. 선생님이 엄마 보고 불러 달래서 안 보고 써야 한다 했어요좫.
“보고 써 가도 선생님이 모르이께네 보고 썼뿌라. 자좫.
“안 돼요. 선생님이 보고 쓰면 안 된다 했단 말에요좫.
“야가…. 그라면 우짜노?”
다희가 들고 있던 읽기 책 위로 굵은 눈물 방울이 투둑 떨어집니다.
“야가 와 이카노?”
“으허엉. 으엉. 할머니 거짓말쟁이. 할머닌 나빠요. 엄마가 불러줘야 하는데, 엄마 언제와? 빨리 엄마 오라고 해좫. 한 번 터진 울음에 다희는 자꾸만 서러운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엄마가 날마다 집에 있을 땐 다희 숙제도 도와주었는데. 다희는 아빠가 일 나가고, 엄마가 집에서 기다려 주던 때가 생각이 나서 더 서럽게 웁니다. 다희네 엄마, 아빠가 처음부터 이불장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아빠는 동네 뒤에 있는 커다란 가구 공장에 다녔습니다. 연주네 아파트를 지을 때도 거실 장식장, 서랍장이며 현관 신발장들을 모두 아빠와 아빠 공장 아저씨들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올 봄에 공장을 ?琉?두고 나서는 엄마도 일을 하러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동네가 깜깜해지고, 이웃집 개 짖는 소리가 컹컹 크게 들립니다. 할머니는 다희 머리맡에 앉아서 다리를 툭탁입니다. 할머니는 다리가 아파서 오래 서 있으면 저녁마다 다리가 쑤신다고 합니다. “그거는 어데서 났노?”
할머니는 다희가 안고 있는 미미인형을 보고 물었습니다.
“연주가 안 이쁘다고 나 줬어요. 요기 뜯어졌다고좫.
다희는 미미인형을 돌려서 드레스 뒷단을 보여 줍니다.
“그거는 바늘로 집어만 되겠구만. 일로 도 봐라. 할매가 집어 주께좫.
할머니는 장롱에서 바느질 꾸러미를 꺼냅니다. 그리고 파란 실을 바늘에다 끼웁니다. 그런데 눈이 나빠서 실꼬리는 자꾸만 바늘 귀를 비껴 나갑니다. “할머니, 이리 줘 봐요. 내가 할께요좫.
다희는 바늘 귀를 잘 잡아 불빛에 비추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쏘옥 끼워냅니다. “됐다. 할머니, 됐어요좫.
할머니는 드레스를 꼼지락 꼼지락 몇 번 만지는 것 같더니 금새 기워 버립니다. 할머니는 바느질을 잘 하십니다. 언젠가 다희가 넘어져서 찢어 온 청바지에 예쁜 곰돌이 그림을 붙여서 깜쪽같이 새 옷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지요. “자, 다 됐다. 예쁘제?”
정말 할머니가 기워주신 파란 드레스는 처음보다 훨씬 더 예쁩니다. 그날 밤, 다희는 할머니가 기워주신 미미인형을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잤습니다.할머니는 다희가 잠들 때까지 다희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우리 다희 착하제? 엄마하고 아빠하고 이불 팔러 갔다가 돈 마이 벌어서 안 오나. 돈 마이 벌어서 우리 다희 맛있는 것도 사 주고 할 낀데, 그자?”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립니다. 겨울비는 추적추적 내려 마당을 질퍽질퍽 짓이겨 놓습니다. 할머니는 다희가 아침밥을 먹는 동안도 밖에 나가서 하늘만 쳐다보십니다. “우짠 비가 이래 많이 오노? 이불 한 번 피이 보도 못하겠네. 아이구, 그 먼 데까정 가서 아깝아서 우짜노?” “할머니, 그럼 엄마랑 아빠, 오늘 와요?”
“어언지, 낼이나 모레 되야 오제. 근데 비가 자꾸 와서 우짜꼬?”
할머니 말씀처럼 비가 계속 오면 엄마, 아빠가 이불을 못 파는데, 다희도 덩달아 걱정입니다. 학교에 가서 오전수업을 마칠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습니다. 다희는 점심을 다 먹고 미미인형을 꺼내서 무릎 위에 앉혔습니다. “미미야, 너도 비 좀 그만 오라고 빌어 줘좫.
다희는 미미인형의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어 봅니다.
“다희야, 그거 되게 예쁘다. 나도 한 번 만져보자좫.
언제 왔는지 짝궁 윤영이가 손을 내밉니다. 다희가 건네 준 인형을 받아 든 윤영이는 인형 다리를 주욱 펴서 선 모양새를 만들어 냅니다. “자, 여기는 파티장이야. 넌 공주님이니까 춤을 춰야지좫.
윤영이는 책상 위를 휘저으며 춤을 추느라 미미인형을 들고 엉덩이를 들썩입니다. 그때, 교실 뒤에서 공기놀이를 하던 연주가 뛰어왔습니다. 연주는 윤영이의 손에 들린 미미인형을 냉큼 낚아챕니다. “야, 이거 내 거잖아. 누구 맘대로 만지니?”
“무슨 소리야, 이거 다희 거야좫.
“이게 왜 다희 거야. 다희가 하루만 갖고 논다고 해서 빌려 준건데. 오다희! 너도 웃긴다, 얘. 니 거도 아닌데 왜 니 맘대로 아무나 만지게 해? 빨리 줘좫. 연주는 정말 심술쟁입니다. 늘 저렇게 제멋대로입니다.
“니가 나 준다고 했잖아좫.
“내가 언제. 너 거짓말쟁이구나. 이리 내좫. 거짓말쟁이라니…. 혹시 연주가 어저께 받아쓰기 숙제를 보고 쓴 걸 알고 그러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인형은 틀림없이 연주가 준 건데. 할머니가 드레스도 다 기워 줬는데. 다희는 억울했지만 아무 말 하지 못합니다. 연주 입에서 거짓말쟁이란 소리가 또 나올까 봐 조마조마해집니다.
숙제 검사를 할 때도 다희는 가슴이 콩콩 떨려서 혼이 났습니다. 혹시 선생님이 보고 쓴 걸 아시면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이 다희 숙제를 찬찬히 쳐다볼 때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자, 내일은 자기가 커서 여행하고 싶은 외국을 하나 정해서 그림을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써 오세요. 백과사전을 찾아도 좋아요좫. 선생님이 숙제를 내 주시자마자, 아이들의 웅성거림 속으로 연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프랑스에 대해 써 와야지. 에펠탑도 그리고. 우리 아빠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다 오셨거든. 아빠한테 물으면 다 가르쳐 줄 거야좫. 다희는 선생님이 ‘외국’이라고 하실 때, 필리핀을 떠올립니다. 필리핀, 망그로브 아저씨의 나라. 아빠가 공장에 다닐 때 다희네 집에는 아빠와 같이 일하는 외국인 아저씨들이 자주 놀러왔습니다. 다희와 동무들이 잘 아는 미국,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가 아니라,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라고 하는 나라에서 온 아저씨들입니다. 다희가 외우기도 어려운 나라 이름?湧訣熾? 그 곳 사람들은 피부색도 좀더 가무잡잡하고 키도 작습니다. 다희는 처음엔 아저씨들이 무서워서 아빠 옆에 찰싹 붙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들은 잘 웃고 친절해서 다희와 금세 친해졌습니다. 다희가 유난히 좋아했던 사람은 필리핀에서 온 망그로브 아저씨입니다. 망그로브 아저씨는 다희를 부를 때 ‘따히’라고 하기도 하고 ‘타이’라고도 합니다. 아저씨는 자기 이름을 ‘망그로브’라고 얘기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필리핀의 작은 섬 사마시타. 아저씨의 고향인 그 곳에서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면 마을의 집들이 날아가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해안선을 따라서 나무를 심는다고 합니다.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나무들이?熾? 그 나무 이름이 ‘망그로브’입니다. 바로 아저씨의 이름이기도 하고요.
아저씨는 다희에게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도 얘기해 주었습니다. 필리핀도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처럼 스페인이라고 하는 나라에게 오랫동안 지배를 받아왔답니다. 그때, 필리핀을 독립시키기 위해 열심히 싸운 독립영웅인 보니파쇼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가??構?배운 것도 없지만 보니파쇼는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웠답니다. 돈 많은 사장도 아니고 의사도, 판사도 아닌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였지만 누구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요. 다희는 아빠에게 ‘독립 영웅’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유관순 언니나 안중근 아저씨 같은 분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다희도 유관순 언니를 좋아합니다. 유치원을 다닐 땐 유관순 언니가 태극기를 만든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글자를 모르고 본 그림책에 유관순 언 니가 태극기를 만드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학교에 가서 글자를 배우고 나서야 유관순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망그로브 아저씨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면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습니다. 다희가 커서 필리핀에 오면 코코넛을 실컷 먹게 해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저씨는 마을에서도 코코넛 나무에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다 합니다. 다희에게 나무에 얼마나 빨리 오르는지 보?㈐斂渼鳴?하면서 벙글벙글 웃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그 약속을 영영 지킬 수 없게 돼 버렸습니다. 올 봄에 가구 만드는 커다란 통나무에 발이 깔려서 한 쪽 다리를 못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네 공장 사장님은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저씨를 치료비도 안 주고 쫓아냈습니다. 아빠는 아저씨에게 ?》梳晝?줘야 한다고 날마다 사장님과 싸웠습니다. 사장님은 우리나라 사람이면서도 딴 나라 사람들 편을 든다고 아빠도 쫓아냈습니다. 아빠는 한 동안 회사 앞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고, 법원에 가서 무언가 알아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날마다 한숨을 쉬었습니다. 가끔은 엄마가 몰래 부엌에서 혼자 우는 것도 보았습니다. 망그로브 아저씨는 다친 다리로 돈 한 푼 없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다희는 저녁을 먹고 크레파스를 꺼냈습니다. 밥상 위에 펼쳐놓은 하얀 도화지를 보면서 아저씨가 말 해준 사마시타를 떠올립니다. 아저씨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서있는 보니파쇼의 동상과 아저씨 집에서 키운 날개가 까맣고 반지르르 윤이 나는 닭 두 마리를 먼저 그 려봅니다. 마을 어귀에 높다랗게 서 있는 코코넛 나무엔 코코넛이 주렁주렁 달려 있겠지요. 마지막엔 아저씨와 이름이 같은 망그로브 나무를 섬 주위로 돌아가며 그려넣습니다. 그림을 그리다가 다희는 깜빡 잠이 듭니다.
꿈 속에서 다희는 망그로브 아저씨가 사는 마을에 갔습니다. 꿈 속에서도 아저씨는 목발을 짚고 있었습니다. 다희는 그런 아저씨가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한 쪽 다리로 코코넛 나무를 감싸안고서 씩씩하게 잘 오릅니다. 맨 꼭대기까지 정말 빨리 오릅니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코코넛 열매를 따 와서 다희에게 건네줍니다. 달짝지근한 코코넛 과즙이 목구멍으로 주르륵 넘어갑니다. “따히, 씩씩하게 잘 지내지?”
“예, 아저씨. 엄마, 아빠 없어도 할머니랑 잘 지내요좫.
“따히는 씩씩해서 좋아좫.
아저씨는 다희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햇볕에 따끈해진 아저씨의 손이 보드랍습니다. “어, 엄마?”
다희를 쓰다듬어 주던 아저씨의 손은 어느새 엄마 손으로 변했습니다.
“으응, 우리 다희 깼네. 잘 지냈어?”
엄마는 머리 맡에서 다희를 보고 싱긋이 웃습니다.
“엄마! 이불 다 팔았어?”
“그래, 다희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잘 지내 준 덕분에 이불 다 팔았어좫.
할머니와 얘기하고 있던 아빠가 무언가를 들고 다희에게 다가옵니다.
“다희야, 이거 우리 다희 선물좫.
아빠가 준 것은 예쁜 한복 차림의 각시 인형입니다.
“안계 장에서 샀다. 예쁘지?”
“응, 정말 예뻐좫.
다희는 각시인형을 꼭 끌어안습니다. 다희 얼굴은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다희는 각시인형이 생긴 것보다 엄마, 아빠가 이불을 다 팔고 돌아와 줘서 더 행복합니다. 할머니는 다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십니다. 아마 다희 맘을 다 알고 있다는 말씀 이겠지요.
어느새 비가 그쳤는지 창 밖으로 별들이 총총 떠오릅니다.
[당선소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요? 살수록 예전 어른들이 말한 세 끼 밥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을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두 끼만 먹어도 살 것 같았습니다. 더 인간다운 세상, 더 고른 세상을 꿈꾸는데 기꺼이 한 끼를 보탰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를 위해 한 끼를 더 줄이는 용기를 내어 보았습니다.
그 용기가 결실을 맺게 되어 기쁩니다. 글을 쓰는 것이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에 앞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단 제 믿음을 버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더 기쁘고요.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아동문학이 그나마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자본의 발걸음이 더 재빨라서 아이들을 이용하는 글들이 넘쳐납니다. 그 숨막히는 현실에 작은 바늘 구멍이라도 낼 수 있다면 열심히 글을 쓰겠습니다.
내 양심의 저울추인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지역의 여성활동가들께 고맙단 인사를 드립니다. 또 함께 공부하는 글쓰기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없었다면 누가 내 글의 지킴이 노릇을 해 주었을까요. 그리고 부르는 것 만으로도 눈물 고이는 어머니께 늦게나마 이 자리를 빌려서 고백할 게 있습니다.
어릴 때 난전에서 배추장사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체 하기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고. 그 한 번의 부끄러움이 줄곧 내 심장에 가시로 박혀 있었다고.
하지만 그 가시가 오늘까지 내 삶을 찔러 거짓과 삿됨에서 깨워 주었다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노동의 소중함을 삶으로 가르치신 당신을 막내딸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당당한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사평]
70여편의 작품 가운데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작품은 모두 열편이었다. 이 중에서 참신한 소재와 무리없는 전개로 재미있게 읽히기는 했으나 문단 첫칸 들여쓰기 등 기본적인 형식에 다소 흠을 보인 ‘똥과자 할머니’와 ‘고무신과 해당화’.‘과자 굽는 은행나무’를 우선 제외했다.
다음으로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세밀하고 주제의식도 비교적 튼튼했으나 스토리 전개에서 다소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작품이 ‘떡볶이’와 ‘백두산에 두고 온 반달곰’.‘춤추는 바람개비’ 등이었다. 또한 이색적인 소재로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킬 수는 있었으나 구성이 보다 치밀했으면 하는 아쉬움과 교훈성 노출로 품격을 다소 떨어뜨린 듯한 느낌의 ‘은어 이야기’.‘너구리 꽃두루’.‘우물 할아버지의 비밀’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 ‘엄마 없는 날에도’는 오늘날 우리 둘레 어린이들이 겪고 있는 여러문제, 이를테면 따돌림.가족애.빈부.인종차별 등 각종 사회문제를 비교적 깊이있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물론 에피소드 간의 무리한 연결에서 오는 리얼리티 결여, 극적 상황 부족, 다소 장황한 구성 등이 염려되기는 했으나 다양한 소재를 별 무리없이 융합시킨 역량이 믿을 만 했다. 더욱 큰 정진이 있기를 바란다.
심후섭(아동문학가)
빨간 공이 팽그르르 돌아갑니다.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올망졸망 모여든 아이들의 눈도 공을 따라서 어지럽게 돌아갑니다. 열심히 뺑뺑이를 돌던 공은 점점 느려지더니 13번에서 멈춰 설 듯 합니다. 13번은 피카츄인형입니다. “이야, 서라, 서!”
둘러 선 아이들은 하나같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빨간 공은 설 듯 말 듯 망설이더니 14번으로 뒤뚱 넘어가 멈추어 버립니다. “아이구, 미미인형이구나. 좋겠네. 옜다”.
문방구 아저씨는 연주의 손에 파란 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하나 건넵니다. 인형을 받아드는 연주 입이 삐쭉 튀어나옵니다. “치, 이번엔 될 줄 알았는데…”.
“또 할래?”
아저씨는 연주를 쳐다보며 빙글빙글 웃습니다.
“싫어요”.
연주는 바닥에 던져 두었던 신주머니를 휙 낚아채 올려 일어납니다. 곁에서 연주를 기다리고 섰던 다희도 쫓아서 뒤따라 나옵니다. 아파트로 가는 골목 어귀까지 오면서 연주는 내내 심드렁합니다. 그끄저께부터 피카츄인형을 뽑으려고 학교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날마다 인형뽑기 기계에 오백원 씩을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번번이 ‘꽝’에 걸려 받아간 사탕이랑 과자를 엄마에게 들켜 혼이 났는데, 미미?曠活?갖고 들어가면 엄마는 오늘도 뽑기를 한 줄 아시고 연주를 혼낼 겁니다.
“이거 순 싸구려다. 이게 뭐야. 여기 옷도 떨어졌잖아”.
“이쁘기만 하네, 뭐. 연주야, 한 번만 만져보자좫.
다희는 연주가 내미는 미미인형을 받아서 요리조리 만져봅니다. 찢어진 뒷단이 안 보이게 드레스도 매만져 주고 헝클어진 머리도 가지런히 빗어줍니다. 연주는 인형을 다독이는 다희를 흘낏 쳐다 봅니다. “그거, 너 줄까?”
다희는 눈이 동그래집니다.
“그래도 돼?”
“우리 집에 가면 진짜 바비인형 있어. 병원놀이 하는 거, 쇼핑 센터에 가는 거, 미용실 놀이 세트. 아빠가 백화점에서 사다 줬어. 이런 싸구려랑은 비교도 안돼. 그건 너 가져좫. “진짜? 고마워좫.
다희는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빨리 집에 가서 엄마에게 자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과자 사 먹으라고 주신 백 원짜리도 그대로 남겨두었고 갖고 싶었던 인형도 하나 생겼으니 엄마는 다희를 품에 포옥 안아 주실 지도 모릅니다. 다희는 손이 시린 줄??모르고 미미 인형을 꼬옥 거머쥐고 골목을 내달립니다. 한 쪽 끈이 헐거워진 가방이 자꾸만 덜렁거려서 고쳐 매야 하지만 한 시라도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다희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달려갑니다. “엄마!”
다희는 대문을 밀치면서 큰 소리로 엄마를 부릅니다. 다희 목소리에 부엌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내다보는 사람은 엄마가 아닙니다. “할머니이좫.
다희 목소리는 그만 풀이 죽어 버립니다.
“그래. 우리 다희, 학교 댕겨 오나?”평리동 할머니가 와 계신다는 건 또 엄마와 아빠가 멀리 갔기 때문이란 걸 이젠 다희도 잘 압니다. 다희네 엄마, 아빠는 이불 장사를 합니다. 커다란 트럭에다 이불을 싣고는 여기 저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같은 데 가서 이불을 주욱 펴 놓고 팝니다. 가까운 곳에 가는 날은 아빠 혼자서 나가지만, 멀리 가서 며칠씩 걸리는 날은 엄마도 같이 갑니다. 그러면 평리동 할머니가 오셔서 다희 밥도 챙겨 주고 빨래도 해 주곤 합니다.
“와? 할매가 와서 싫나?”
다희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듭니다. 할머니가 싫지는 않습니다. 할머니는 맛있는 것도 해 주시고, 옛날 얘기도 재미있게 해 주십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계시면, 엄마가 없기 때문에 다희는 그게 싫은 것이지요. “다희야, 얼릉 숙제 해 놓고 놀아라좫.
“예좫.
다희는 가방을 열었습니다. 책상 대신 쓰는 귀퉁이 부서진 밥상 위에다 알림장을 꺼냅니다. ‘읽기 책 95쪽 96쪽 밑줄 그은 낱말 10번씩 써 오기’
다희는 선생님이 적어 주신대로 읽기 책과 숙제장을 꺼냅니다.
“엄마한테 불러 달래서, 안 보고 적어야 해요. 그래야 공부가 되니까. 보고 적어 오는 어린이는 없겠죠?” 오늘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다희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불렀습니다.
“할머니, 나 이거 좀 불러줘요좫.
“먼데?”
“여기 줄 그어 놓은 거 불러 주면 돼요좫.
다희는 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으로 읽기 책을 디밀었습니다.
“우짜꼬? 다희야, 할매는 글자 모른다. 할매는 학교 못 댕기가 이런 거 읽을 줄 모른다좫. 할머니는 미안한 듯이 다희를 쳐다봅니다.
“다희야, 이거 니가 보고, 요래 쓰면 안 되나?”
“안 돼요. 선생님이 엄마 보고 불러 달래서 안 보고 써야 한다 했어요좫.
“보고 써 가도 선생님이 모르이께네 보고 썼뿌라. 자좫.
“안 돼요. 선생님이 보고 쓰면 안 된다 했단 말에요좫.
“야가…. 그라면 우짜노?”
다희가 들고 있던 읽기 책 위로 굵은 눈물 방울이 투둑 떨어집니다.
“야가 와 이카노?”
“으허엉. 으엉. 할머니 거짓말쟁이. 할머닌 나빠요. 엄마가 불러줘야 하는데, 엄마 언제와? 빨리 엄마 오라고 해좫. 한 번 터진 울음에 다희는 자꾸만 서러운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엄마가 날마다 집에 있을 땐 다희 숙제도 도와주었는데. 다희는 아빠가 일 나가고, 엄마가 집에서 기다려 주던 때가 생각이 나서 더 서럽게 웁니다. 다희네 엄마, 아빠가 처음부터 이불장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아빠는 동네 뒤에 있는 커다란 가구 공장에 다녔습니다. 연주네 아파트를 지을 때도 거실 장식장, 서랍장이며 현관 신발장들을 모두 아빠와 아빠 공장 아저씨들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올 봄에 공장을 ?琉?두고 나서는 엄마도 일을 하러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동네가 깜깜해지고, 이웃집 개 짖는 소리가 컹컹 크게 들립니다. 할머니는 다희 머리맡에 앉아서 다리를 툭탁입니다. 할머니는 다리가 아파서 오래 서 있으면 저녁마다 다리가 쑤신다고 합니다. “그거는 어데서 났노?”
할머니는 다희가 안고 있는 미미인형을 보고 물었습니다.
“연주가 안 이쁘다고 나 줬어요. 요기 뜯어졌다고좫.
다희는 미미인형을 돌려서 드레스 뒷단을 보여 줍니다.
“그거는 바늘로 집어만 되겠구만. 일로 도 봐라. 할매가 집어 주께좫.
할머니는 장롱에서 바느질 꾸러미를 꺼냅니다. 그리고 파란 실을 바늘에다 끼웁니다. 그런데 눈이 나빠서 실꼬리는 자꾸만 바늘 귀를 비껴 나갑니다. “할머니, 이리 줘 봐요. 내가 할께요좫.
다희는 바늘 귀를 잘 잡아 불빛에 비추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쏘옥 끼워냅니다. “됐다. 할머니, 됐어요좫.
할머니는 드레스를 꼼지락 꼼지락 몇 번 만지는 것 같더니 금새 기워 버립니다. 할머니는 바느질을 잘 하십니다. 언젠가 다희가 넘어져서 찢어 온 청바지에 예쁜 곰돌이 그림을 붙여서 깜쪽같이 새 옷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지요. “자, 다 됐다. 예쁘제?”
정말 할머니가 기워주신 파란 드레스는 처음보다 훨씬 더 예쁩니다. 그날 밤, 다희는 할머니가 기워주신 미미인형을 가슴에 꼬옥 끌어안고 잤습니다.할머니는 다희가 잠들 때까지 다희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우리 다희 착하제? 엄마하고 아빠하고 이불 팔러 갔다가 돈 마이 벌어서 안 오나. 돈 마이 벌어서 우리 다희 맛있는 것도 사 주고 할 낀데, 그자?”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립니다. 겨울비는 추적추적 내려 마당을 질퍽질퍽 짓이겨 놓습니다. 할머니는 다희가 아침밥을 먹는 동안도 밖에 나가서 하늘만 쳐다보십니다. “우짠 비가 이래 많이 오노? 이불 한 번 피이 보도 못하겠네. 아이구, 그 먼 데까정 가서 아깝아서 우짜노?” “할머니, 그럼 엄마랑 아빠, 오늘 와요?”
“어언지, 낼이나 모레 되야 오제. 근데 비가 자꾸 와서 우짜꼬?”
할머니 말씀처럼 비가 계속 오면 엄마, 아빠가 이불을 못 파는데, 다희도 덩달아 걱정입니다. 학교에 가서 오전수업을 마칠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습니다. 다희는 점심을 다 먹고 미미인형을 꺼내서 무릎 위에 앉혔습니다. “미미야, 너도 비 좀 그만 오라고 빌어 줘좫.
다희는 미미인형의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어 봅니다.
“다희야, 그거 되게 예쁘다. 나도 한 번 만져보자좫.
언제 왔는지 짝궁 윤영이가 손을 내밉니다. 다희가 건네 준 인형을 받아 든 윤영이는 인형 다리를 주욱 펴서 선 모양새를 만들어 냅니다. “자, 여기는 파티장이야. 넌 공주님이니까 춤을 춰야지좫.
윤영이는 책상 위를 휘저으며 춤을 추느라 미미인형을 들고 엉덩이를 들썩입니다. 그때, 교실 뒤에서 공기놀이를 하던 연주가 뛰어왔습니다. 연주는 윤영이의 손에 들린 미미인형을 냉큼 낚아챕니다. “야, 이거 내 거잖아. 누구 맘대로 만지니?”
“무슨 소리야, 이거 다희 거야좫.
“이게 왜 다희 거야. 다희가 하루만 갖고 논다고 해서 빌려 준건데. 오다희! 너도 웃긴다, 얘. 니 거도 아닌데 왜 니 맘대로 아무나 만지게 해? 빨리 줘좫. 연주는 정말 심술쟁입니다. 늘 저렇게 제멋대로입니다.
“니가 나 준다고 했잖아좫.
“내가 언제. 너 거짓말쟁이구나. 이리 내좫. 거짓말쟁이라니…. 혹시 연주가 어저께 받아쓰기 숙제를 보고 쓴 걸 알고 그러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인형은 틀림없이 연주가 준 건데. 할머니가 드레스도 다 기워 줬는데. 다희는 억울했지만 아무 말 하지 못합니다. 연주 입에서 거짓말쟁이란 소리가 또 나올까 봐 조마조마해집니다.
숙제 검사를 할 때도 다희는 가슴이 콩콩 떨려서 혼이 났습니다. 혹시 선생님이 보고 쓴 걸 아시면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이 다희 숙제를 찬찬히 쳐다볼 때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자, 내일은 자기가 커서 여행하고 싶은 외국을 하나 정해서 그림을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써 오세요. 백과사전을 찾아도 좋아요좫. 선생님이 숙제를 내 주시자마자, 아이들의 웅성거림 속으로 연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프랑스에 대해 써 와야지. 에펠탑도 그리고. 우리 아빠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다 오셨거든. 아빠한테 물으면 다 가르쳐 줄 거야좫. 다희는 선생님이 ‘외국’이라고 하실 때, 필리핀을 떠올립니다. 필리핀, 망그로브 아저씨의 나라. 아빠가 공장에 다닐 때 다희네 집에는 아빠와 같이 일하는 외국인 아저씨들이 자주 놀러왔습니다. 다희와 동무들이 잘 아는 미국,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가 아니라,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라고 하는 나라에서 온 아저씨들입니다. 다희가 외우기도 어려운 나라 이름?湧訣熾? 그 곳 사람들은 피부색도 좀더 가무잡잡하고 키도 작습니다. 다희는 처음엔 아저씨들이 무서워서 아빠 옆에 찰싹 붙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들은 잘 웃고 친절해서 다희와 금세 친해졌습니다. 다희가 유난히 좋아했던 사람은 필리핀에서 온 망그로브 아저씨입니다. 망그로브 아저씨는 다희를 부를 때 ‘따히’라고 하기도 하고 ‘타이’라고도 합니다. 아저씨는 자기 이름을 ‘망그로브’라고 얘기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필리핀의 작은 섬 사마시타. 아저씨의 고향인 그 곳에서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면 마을의 집들이 날아가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해안선을 따라서 나무를 심는다고 합니다.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나무들이?熾? 그 나무 이름이 ‘망그로브’입니다. 바로 아저씨의 이름이기도 하고요.
아저씨는 다희에게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도 얘기해 주었습니다. 필리핀도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처럼 스페인이라고 하는 나라에게 오랫동안 지배를 받아왔답니다. 그때, 필리핀을 독립시키기 위해 열심히 싸운 독립영웅인 보니파쇼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가??構?배운 것도 없지만 보니파쇼는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웠답니다. 돈 많은 사장도 아니고 의사도, 판사도 아닌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였지만 누구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요. 다희는 아빠에게 ‘독립 영웅’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유관순 언니나 안중근 아저씨 같은 분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다희도 유관순 언니를 좋아합니다. 유치원을 다닐 땐 유관순 언니가 태극기를 만든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글자를 모르고 본 그림책에 유관순 언 니가 태극기를 만드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학교에 가서 글자를 배우고 나서야 유관순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망그로브 아저씨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면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습니다. 다희가 커서 필리핀에 오면 코코넛을 실컷 먹게 해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저씨는 마을에서도 코코넛 나무에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다 합니다. 다희에게 나무에 얼마나 빨리 오르는지 보?㈐斂渼鳴?하면서 벙글벙글 웃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그 약속을 영영 지킬 수 없게 돼 버렸습니다. 올 봄에 가구 만드는 커다란 통나무에 발이 깔려서 한 쪽 다리를 못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네 공장 사장님은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저씨를 치료비도 안 주고 쫓아냈습니다. 아빠는 아저씨에게 ?》梳晝?줘야 한다고 날마다 사장님과 싸웠습니다. 사장님은 우리나라 사람이면서도 딴 나라 사람들 편을 든다고 아빠도 쫓아냈습니다. 아빠는 한 동안 회사 앞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고, 법원에 가서 무언가 알아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날마다 한숨을 쉬었습니다. 가끔은 엄마가 몰래 부엌에서 혼자 우는 것도 보았습니다. 망그로브 아저씨는 다친 다리로 돈 한 푼 없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다희는 저녁을 먹고 크레파스를 꺼냈습니다. 밥상 위에 펼쳐놓은 하얀 도화지를 보면서 아저씨가 말 해준 사마시타를 떠올립니다. 아저씨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서있는 보니파쇼의 동상과 아저씨 집에서 키운 날개가 까맣고 반지르르 윤이 나는 닭 두 마리를 먼저 그 려봅니다. 마을 어귀에 높다랗게 서 있는 코코넛 나무엔 코코넛이 주렁주렁 달려 있겠지요. 마지막엔 아저씨와 이름이 같은 망그로브 나무를 섬 주위로 돌아가며 그려넣습니다. 그림을 그리다가 다희는 깜빡 잠이 듭니다.
꿈 속에서 다희는 망그로브 아저씨가 사는 마을에 갔습니다. 꿈 속에서도 아저씨는 목발을 짚고 있었습니다. 다희는 그런 아저씨가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한 쪽 다리로 코코넛 나무를 감싸안고서 씩씩하게 잘 오릅니다. 맨 꼭대기까지 정말 빨리 오릅니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코코넛 열매를 따 와서 다희에게 건네줍니다. 달짝지근한 코코넛 과즙이 목구멍으로 주르륵 넘어갑니다. “따히, 씩씩하게 잘 지내지?”
“예, 아저씨. 엄마, 아빠 없어도 할머니랑 잘 지내요좫.
“따히는 씩씩해서 좋아좫.
아저씨는 다희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햇볕에 따끈해진 아저씨의 손이 보드랍습니다. “어, 엄마?”
다희를 쓰다듬어 주던 아저씨의 손은 어느새 엄마 손으로 변했습니다.
“으응, 우리 다희 깼네. 잘 지냈어?”
엄마는 머리 맡에서 다희를 보고 싱긋이 웃습니다.
“엄마! 이불 다 팔았어?”
“그래, 다희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잘 지내 준 덕분에 이불 다 팔았어좫.
할머니와 얘기하고 있던 아빠가 무언가를 들고 다희에게 다가옵니다.
“다희야, 이거 우리 다희 선물좫.
아빠가 준 것은 예쁜 한복 차림의 각시 인형입니다.
“안계 장에서 샀다. 예쁘지?”
“응, 정말 예뻐좫.
다희는 각시인형을 꼭 끌어안습니다. 다희 얼굴은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다희는 각시인형이 생긴 것보다 엄마, 아빠가 이불을 다 팔고 돌아와 줘서 더 행복합니다. 할머니는 다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십니다. 아마 다희 맘을 다 알고 있다는 말씀 이겠지요.
어느새 비가 그쳤는지 창 밖으로 별들이 총총 떠오릅니다.
[당선소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요? 살수록 예전 어른들이 말한 세 끼 밥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을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두 끼만 먹어도 살 것 같았습니다. 더 인간다운 세상, 더 고른 세상을 꿈꾸는데 기꺼이 한 끼를 보탰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를 위해 한 끼를 더 줄이는 용기를 내어 보았습니다.
그 용기가 결실을 맺게 되어 기쁩니다. 글을 쓰는 것이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에 앞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단 제 믿음을 버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더 기쁘고요.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아동문학이 그나마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자본의 발걸음이 더 재빨라서 아이들을 이용하는 글들이 넘쳐납니다. 그 숨막히는 현실에 작은 바늘 구멍이라도 낼 수 있다면 열심히 글을 쓰겠습니다.
내 양심의 저울추인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지역의 여성활동가들께 고맙단 인사를 드립니다. 또 함께 공부하는 글쓰기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없었다면 누가 내 글의 지킴이 노릇을 해 주었을까요. 그리고 부르는 것 만으로도 눈물 고이는 어머니께 늦게나마 이 자리를 빌려서 고백할 게 있습니다.
어릴 때 난전에서 배추장사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체 하기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고. 그 한 번의 부끄러움이 줄곧 내 심장에 가시로 박혀 있었다고.
하지만 그 가시가 오늘까지 내 삶을 찔러 거짓과 삿됨에서 깨워 주었다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노동의 소중함을 삶으로 가르치신 당신을 막내딸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당당한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사평]
70여편의 작품 가운데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작품은 모두 열편이었다. 이 중에서 참신한 소재와 무리없는 전개로 재미있게 읽히기는 했으나 문단 첫칸 들여쓰기 등 기본적인 형식에 다소 흠을 보인 ‘똥과자 할머니’와 ‘고무신과 해당화’.‘과자 굽는 은행나무’를 우선 제외했다.
다음으로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세밀하고 주제의식도 비교적 튼튼했으나 스토리 전개에서 다소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작품이 ‘떡볶이’와 ‘백두산에 두고 온 반달곰’.‘춤추는 바람개비’ 등이었다. 또한 이색적인 소재로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킬 수는 있었으나 구성이 보다 치밀했으면 하는 아쉬움과 교훈성 노출로 품격을 다소 떨어뜨린 듯한 느낌의 ‘은어 이야기’.‘너구리 꽃두루’.‘우물 할아버지의 비밀’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 ‘엄마 없는 날에도’는 오늘날 우리 둘레 어린이들이 겪고 있는 여러문제, 이를테면 따돌림.가족애.빈부.인종차별 등 각종 사회문제를 비교적 깊이있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물론 에피소드 간의 무리한 연결에서 오는 리얼리티 결여, 극적 상황 부족, 다소 장황한 구성 등이 염려되기는 했으나 다양한 소재를 별 무리없이 융합시킨 역량이 믿을 만 했다. 더욱 큰 정진이 있기를 바란다.
심후섭(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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