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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수가 있을까?˝
궁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가 않았다.
모나리자 오민애 선생님과의 일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없었던 일로 치자고 몇 번이나 생각을 바꿔먹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생각을 바꿔먹어야겠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또렷하게 그 일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던 게 실수였다고.˝
궁이는 선생님이 미웠다.
선생님이 얄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담임인 오민애 선생님과 키다리 장필봉 선생님의 일
을 사실 그대로 일기장에 썼을 뿐인데 그게 말썽을 일으
키게 될 줄이야.
더구나 모나리자 오민애 선생님은 아이들의 일기를
검사하실 때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사실대
로 꾸밈없이 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을 하시지 않
았던가.
˝젠장맞을 일기장 같으니.˝
궁이는 급기야 애궂은 일기장을 입에 올리며 투덜거
렸다. 당장이라도 일기장을 박박 찢어 날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꼴도 보기 싫은 일기장이었다.
마지막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반장의 차려 경례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우루루 교실
을 빠져나가고 있는 북새통속에 선생님이 돌연 궁이를
불러 세웠다.
˝윤궁, 잠깐 남아라. 일기장을 가지고 가야지.˝
´맙소사. 내 정신 좀 봐. 하마터면 일기장을 빠뜨리고
그냥 갈뻔 했잖아. 다른 친구들은 모두 일기장을 돌려
받았는데 어째 내 일기장만 소식이 없다 싶었더니만….´
선생님과 눈길이 마주친 궁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를 일이었다.
분명히 반장의 차려 경례소리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흐뭇한 웃음을 담고 있던 선생님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있는 게 아닌가.
까닭이 뭘까?
궁이는 일찍이 보지 못한 선생님의 얼굴 표정에 긴장
을 했다.
˝교실 출입문 닫고 일루 와.˝
휑하게 열려있는 교실 뒤쪽의 출입문을 가리키며 선
생님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눈자위를 내리깔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 평소의 선생님답지 않게 무
엇 때문에 이렇게 딱딱하고 데면데면하게 나오시는지 말
야.´
난데없는 선생님의 태도에 출입문을 닫아걸고 있는
궁이는 손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 핑 현기증이 일 지경이
었다.
˝거기 섯!˝
다분히 명령적인 선생님의 목소리. 궁이가 미처 선생
님 앞으로 다가와 서기도 전에 떨어진 명령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한 순간에 싹 달라질 수 있을
까?´
언제 보아도 모나리자의 미소가 끊일 새 없이 솟아나
던 선생님의 얼굴에 느닷없이 내천자가 그어질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선생님 얼굴에 내천자라니 이건 잘못 돼도 뭔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여간해서 두 눈썹 사이에 내천자를 긋는 것을 본 적
이 없었던 선생님. 한 마디로 매력 만점의 오민애 선생
님이었다.
선생님이 모나리자의 미소를 지을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사르르 떨리고는 하던 긴 속눈썹의 매력을 어찌 말
로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박속처럼 희고 가지런한 잇속의 매력은 또 어떻고?
선생님의 매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간혹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면 선녀의 날개옷 같은
예쁜 한복으로 단장을 하고 나오셔서 스무 명이 넘는 다
른 여선생님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
었다.
이처럼 예쁜 선생님을, 그것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 선생님을 담임으로 모시고 공부를 하는 아이들의
행복함이란 무엇으로도 비할 바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 오민애 선생님의 어디에 그처럼 무섭고 앙
칼진 구석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윤궁, 누가 일기장에다 이런 소리를 쓰라고 했지? 이
것도 일기라고 쓴 거니?˝
선생님이 어제 쓴 궁이의 일기를 가리키며 눈꼬리를
모았다.
´올커니,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제야 감이 잡히는군.´
궁이는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갑자기 선생님이 그렇
듯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좋기만 하던 선생
님이었다.
매를 때려도 싫지 않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너무 좋아 일부러 말썽을 피워 선생님께 매
를 맞는 것을 자청할 정도로 마음씨가 비단결 같다고 생
각했던 선생님이었다.
´어제 일기가 어때서? 나는 그저 본 일을 사실대로 썼
을 뿐인데 그게 어쨌다고 선생님께서 이러시는 걸까?´
˝모범생이라고 믿었더니만 어떻게 감히 이 딴 소리를
일기장에다 써놓을 수 있단 말이냐?˝
´이 딴 소리?´
궁이는 선생님의 말씀이 심히 지나치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선생님이라 하더라도 애써 쓴 일기를 이 딴 소리
란 말로 내리까는 일은 너무 한 것 같았다. 나중 일이야
어찌 되던 따질 건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기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점을 꾸밈없이 사
실대로 솔직하게 쓰는 거예요.˝
일기장 검사를 하고 나실 때마다 누누이 강조 말씀을
하신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사람을 이렇게 납짝코를 만들
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마구 해도 된다는 법
이 어딨는가?
˝네 일기장을 엄마가 보기라도 하는 날엔 선생님의
체면이 어떻게 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고 썼니? 명색
이 모범생이라고 하는 애가 어쩌면 그렇게도 엉뚱할 수
가 있단 말이니? 어제 일 같은 것은 봐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갔어야지. 아유, 끔찍해. 일기장 검사를 하기를 천만
다행이지 어물쩍 그냥 넘어갔더라면 어쩔 뻔했겠니?˝
선생님은 도저히 궁이를 못 봐주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뭐니?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렴.˝
선생님이 흰눈을 해 보이며 궁이의 말꼬리를 잇대고
나섰다.
˝선생님께서 일기는 항상 거짓없이 솔직하게 써야 한
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뭐야? 그 그래. 그랬었지.˝
선생님의 음성이 갑자기 축 쳐져내렸다.
´옳지, 마침내 선생님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왔구
나.´
궁이는 마치 기회를 엿보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은
근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는 누구보다도 선생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 모
범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어제 쓴 이 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본 일을 숨김없이 일기장에다 털어놓
았을 뿐인데 선생님께서는 자꾸만 이상한 말씀을 하시지
뭐예요.˝
˝뭣이 어쩌고 어째? 버릇없이 선생님한테 따지고 들
다니?
˝저는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을 뿐이라고요 선생님.˝
˝사실? 좋다. 윤궁 네 말대로 그게 사실이라고 치자.
일기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꾸밈없이 솔직하
게 써야 한다는 말엔 변함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윤궁
넌 이제 겨우 초등학교 5학년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지. 초등학교 5학년이면 아직 어린애라는 것
을 말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야. 어린이는 어디까지나
어린이다워야 하는데, 넌 엉뚱하게도 어른들이 할 소리
를 일기장에다 써놓았으니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니고 뭐
겠니? 선생님 말씀 무슨 뜻인지 알겠니?˝
˝몰라요. 저는 다만 어제 방과 후 교실에서 보았던 일
을 사실대로 솔직하게 일기장에다 썼다는 것밖에는….˝
˝너같은 모범생이 그걸 모른다고 하다니? 설마 선생
님을 놀리는 것은 아니겠지?˝
˝제가 선생님을 놀리다니요?˝
궁이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고
나섰다.
˝윤궁 너 얌전하고 착한 모범생으로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로구나. 그래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제 쓴 이 일
기 어떡할 셈이냐?˝
˝어떡하긴요?˝
궁이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뻥해 있을 때였다. 소프
라노로 울려 퍼지고 있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착 가라앉으며 궁이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요는 그러니까 선생님의 말은 어제 네가 쓴 일기는
우리 반 모범생의 일기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지. 그래서 선생님이 생각해 봤는데 어제 일기를 다시
썼으면 어떨까 하고 말야. 일테면 공부 시간에 선생님에
게 칭찬을 받았다던가,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도중
에 친구들이 오락실에 들렀다 가자는 것을 극구 뿌리쳤
다던가 하는 내용으로….˝
선생님의 이야기는 거의 사정에 가까웠다. 얼마나 다
급했으면 선생님께서 직접 이렇게 사정을 하고 나설 정
도가 되었을까?
궁이는 난처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선뜻
좋은 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일기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점을 거짓없이 솔직
하게 써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는 언제고 이젠 거꾸로 어
제 쓴 일기를 다른 내용으로 고쳐 써주기를 바라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선생님 말씀대로 일기를 다시 쓴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불행히도 궁인 어제 공부 시간에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하교 길에 오락실엘 들렀다 가자고 꼬드긴 친구는 더
더구나 없었다.
모범생인 궁이와 오락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사정을 하시는데 어쩌면 좋다
지?´
궁이는 일기장이 원망스러웠다.
본 일을 솔직하게 일기로 담아낸 것이 마냥 후회스러
웠다. 아니 어쩌다 그 일을 목격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당번만 걸리지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터였
다.
방과 후 당번이었던 궁이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막 교
실로 들어섰다고 느꼈을 때였다.
언제 왔는지 무궁화 반의 키다리 장필봉 선생님이 오
민애 선생님의 볼에 뽀뽀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말았
다. 그 순간 당혹해하시던 오민애 선생님의 표정이라니.
동시에 키다리 장필봉 선생님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마치 꼭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들 같았다고나 할
까?
궁이는 언제까지나 두 선생님들의 놀란 표정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궁이는 저녁에 그 일을 일기장에 담았다.
일기를 쓰면서도 궁인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몰랐
다. 더불어 담임인 오민애 선생님과 키다리 장필봉 선생
님이 결혼을 하면 참으로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도 잊
지 않고 써넣었다.
도대체 흉될 게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두 선생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은근히 좋아하
는 사이라는 것을 알만한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렇듯 두 선생님 사이가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인데
오민애 선생님의 볼에 키다리 장필봉 선생님이 뽀뽀를
하다 들켰대서 그게 무슨 큰일 날 일이라고 한사코 감추
려하시는 걸까?
˝윤궁, 왜 대답을 하지 않지? 일기를 다시 쓰는 게 싫
은가 보구나. 내키지 않으면 할 수 없지. 대신 이렇게 하
면 어떨까? 선생님이 얼마동안 이 일기장을 간직해두기
로 하고 일기장을 새로 사서 오늘 일기부터 쓰기로 한다
면 말야. 설마 그것마저 안 된다고는 하지 않겠지?˝
선생님의 가늘고 하얀 손이 어느 사이엔가 궁이의 두
뺨을 감싸고 있었다.
˝선생님 소원이라면요.˝
˝그래 소원이다. 남의 얘기 좋아하는 어른들이 네 일
기장을 훔쳐보고 소문 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 편
이 훨씬 안전할 테니까.˝
´선생님은 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실까? 새로 산 일
기장에 오늘 있었던 일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째서 생각 못 하실까?´
˝윤궁, 고맙다. 넌 역시 모범생이다.˝
´천만에요 선생님. 전 어쩌면 내일 이맘때쯤 또 다시
선생님 앞에 서 있게 될지 모른다고요. 보고 듣고 생각
하고 느낀 점을 거짓없이 솔직하게 일기로 썼다는 이유
로 말예요.´
궁이를 바라보고 있는 선생님의 입가에 솜사탕 같은
모나리자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끝--
궁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가 않았다.
모나리자 오민애 선생님과의 일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없었던 일로 치자고 몇 번이나 생각을 바꿔먹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생각을 바꿔먹어야겠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또렷하게 그 일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던 게 실수였다고.˝
궁이는 선생님이 미웠다.
선생님이 얄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담임인 오민애 선생님과 키다리 장필봉 선생님의 일
을 사실 그대로 일기장에 썼을 뿐인데 그게 말썽을 일으
키게 될 줄이야.
더구나 모나리자 오민애 선생님은 아이들의 일기를
검사하실 때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사실대
로 꾸밈없이 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을 하시지 않
았던가.
˝젠장맞을 일기장 같으니.˝
궁이는 급기야 애궂은 일기장을 입에 올리며 투덜거
렸다. 당장이라도 일기장을 박박 찢어 날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꼴도 보기 싫은 일기장이었다.
마지막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반장의 차려 경례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우루루 교실
을 빠져나가고 있는 북새통속에 선생님이 돌연 궁이를
불러 세웠다.
˝윤궁, 잠깐 남아라. 일기장을 가지고 가야지.˝
´맙소사. 내 정신 좀 봐. 하마터면 일기장을 빠뜨리고
그냥 갈뻔 했잖아. 다른 친구들은 모두 일기장을 돌려
받았는데 어째 내 일기장만 소식이 없다 싶었더니만….´
선생님과 눈길이 마주친 궁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를 일이었다.
분명히 반장의 차려 경례소리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흐뭇한 웃음을 담고 있던 선생님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있는 게 아닌가.
까닭이 뭘까?
궁이는 일찍이 보지 못한 선생님의 얼굴 표정에 긴장
을 했다.
˝교실 출입문 닫고 일루 와.˝
휑하게 열려있는 교실 뒤쪽의 출입문을 가리키며 선
생님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눈자위를 내리깔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 평소의 선생님답지 않게 무
엇 때문에 이렇게 딱딱하고 데면데면하게 나오시는지 말
야.´
난데없는 선생님의 태도에 출입문을 닫아걸고 있는
궁이는 손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 핑 현기증이 일 지경이
었다.
˝거기 섯!˝
다분히 명령적인 선생님의 목소리. 궁이가 미처 선생
님 앞으로 다가와 서기도 전에 떨어진 명령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한 순간에 싹 달라질 수 있을
까?´
언제 보아도 모나리자의 미소가 끊일 새 없이 솟아나
던 선생님의 얼굴에 느닷없이 내천자가 그어질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선생님 얼굴에 내천자라니 이건 잘못 돼도 뭔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여간해서 두 눈썹 사이에 내천자를 긋는 것을 본 적
이 없었던 선생님. 한 마디로 매력 만점의 오민애 선생
님이었다.
선생님이 모나리자의 미소를 지을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사르르 떨리고는 하던 긴 속눈썹의 매력을 어찌 말
로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박속처럼 희고 가지런한 잇속의 매력은 또 어떻고?
선생님의 매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간혹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면 선녀의 날개옷 같은
예쁜 한복으로 단장을 하고 나오셔서 스무 명이 넘는 다
른 여선생님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
었다.
이처럼 예쁜 선생님을, 그것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 선생님을 담임으로 모시고 공부를 하는 아이들의
행복함이란 무엇으로도 비할 바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 오민애 선생님의 어디에 그처럼 무섭고 앙
칼진 구석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윤궁, 누가 일기장에다 이런 소리를 쓰라고 했지? 이
것도 일기라고 쓴 거니?˝
선생님이 어제 쓴 궁이의 일기를 가리키며 눈꼬리를
모았다.
´올커니,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제야 감이 잡히는군.´
궁이는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갑자기 선생님이 그렇
듯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좋기만 하던 선생
님이었다.
매를 때려도 싫지 않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너무 좋아 일부러 말썽을 피워 선생님께 매
를 맞는 것을 자청할 정도로 마음씨가 비단결 같다고 생
각했던 선생님이었다.
´어제 일기가 어때서? 나는 그저 본 일을 사실대로 썼
을 뿐인데 그게 어쨌다고 선생님께서 이러시는 걸까?´
˝모범생이라고 믿었더니만 어떻게 감히 이 딴 소리를
일기장에다 써놓을 수 있단 말이냐?˝
´이 딴 소리?´
궁이는 선생님의 말씀이 심히 지나치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선생님이라 하더라도 애써 쓴 일기를 이 딴 소리
란 말로 내리까는 일은 너무 한 것 같았다. 나중 일이야
어찌 되던 따질 건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기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점을 꾸밈없이 사
실대로 솔직하게 쓰는 거예요.˝
일기장 검사를 하고 나실 때마다 누누이 강조 말씀을
하신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사람을 이렇게 납짝코를 만들
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마구 해도 된다는 법
이 어딨는가?
˝네 일기장을 엄마가 보기라도 하는 날엔 선생님의
체면이 어떻게 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고 썼니? 명색
이 모범생이라고 하는 애가 어쩌면 그렇게도 엉뚱할 수
가 있단 말이니? 어제 일 같은 것은 봐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갔어야지. 아유, 끔찍해. 일기장 검사를 하기를 천만
다행이지 어물쩍 그냥 넘어갔더라면 어쩔 뻔했겠니?˝
선생님은 도저히 궁이를 못 봐주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뭐니?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렴.˝
선생님이 흰눈을 해 보이며 궁이의 말꼬리를 잇대고
나섰다.
˝선생님께서 일기는 항상 거짓없이 솔직하게 써야 한
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뭐야? 그 그래. 그랬었지.˝
선생님의 음성이 갑자기 축 쳐져내렸다.
´옳지, 마침내 선생님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왔구
나.´
궁이는 마치 기회를 엿보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은
근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는 누구보다도 선생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 모
범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어제 쓴 이 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본 일을 숨김없이 일기장에다 털어놓
았을 뿐인데 선생님께서는 자꾸만 이상한 말씀을 하시지
뭐예요.˝
˝뭣이 어쩌고 어째? 버릇없이 선생님한테 따지고 들
다니?
˝저는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을 뿐이라고요 선생님.˝
˝사실? 좋다. 윤궁 네 말대로 그게 사실이라고 치자.
일기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꾸밈없이 솔직하
게 써야 한다는 말엔 변함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윤궁
넌 이제 겨우 초등학교 5학년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지. 초등학교 5학년이면 아직 어린애라는 것
을 말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야. 어린이는 어디까지나
어린이다워야 하는데, 넌 엉뚱하게도 어른들이 할 소리
를 일기장에다 써놓았으니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니고 뭐
겠니? 선생님 말씀 무슨 뜻인지 알겠니?˝
˝몰라요. 저는 다만 어제 방과 후 교실에서 보았던 일
을 사실대로 솔직하게 일기장에다 썼다는 것밖에는….˝
˝너같은 모범생이 그걸 모른다고 하다니? 설마 선생
님을 놀리는 것은 아니겠지?˝
˝제가 선생님을 놀리다니요?˝
궁이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고
나섰다.
˝윤궁 너 얌전하고 착한 모범생으로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로구나. 그래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제 쓴 이 일
기 어떡할 셈이냐?˝
˝어떡하긴요?˝
궁이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뻥해 있을 때였다. 소프
라노로 울려 퍼지고 있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착 가라앉으며 궁이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요는 그러니까 선생님의 말은 어제 네가 쓴 일기는
우리 반 모범생의 일기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지. 그래서 선생님이 생각해 봤는데 어제 일기를 다시
썼으면 어떨까 하고 말야. 일테면 공부 시간에 선생님에
게 칭찬을 받았다던가,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도중
에 친구들이 오락실에 들렀다 가자는 것을 극구 뿌리쳤
다던가 하는 내용으로….˝
선생님의 이야기는 거의 사정에 가까웠다. 얼마나 다
급했으면 선생님께서 직접 이렇게 사정을 하고 나설 정
도가 되었을까?
궁이는 난처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선뜻
좋은 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일기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점을 거짓없이 솔직
하게 써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는 언제고 이젠 거꾸로 어
제 쓴 일기를 다른 내용으로 고쳐 써주기를 바라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선생님 말씀대로 일기를 다시 쓴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불행히도 궁인 어제 공부 시간에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하교 길에 오락실엘 들렀다 가자고 꼬드긴 친구는 더
더구나 없었다.
모범생인 궁이와 오락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사정을 하시는데 어쩌면 좋다
지?´
궁이는 일기장이 원망스러웠다.
본 일을 솔직하게 일기로 담아낸 것이 마냥 후회스러
웠다. 아니 어쩌다 그 일을 목격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당번만 걸리지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터였
다.
방과 후 당번이었던 궁이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막 교
실로 들어섰다고 느꼈을 때였다.
언제 왔는지 무궁화 반의 키다리 장필봉 선생님이 오
민애 선생님의 볼에 뽀뽀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말았
다. 그 순간 당혹해하시던 오민애 선생님의 표정이라니.
동시에 키다리 장필봉 선생님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마치 꼭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들 같았다고나 할
까?
궁이는 언제까지나 두 선생님들의 놀란 표정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궁이는 저녁에 그 일을 일기장에 담았다.
일기를 쓰면서도 궁인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몰랐
다. 더불어 담임인 오민애 선생님과 키다리 장필봉 선생
님이 결혼을 하면 참으로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도 잊
지 않고 써넣었다.
도대체 흉될 게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두 선생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은근히 좋아하
는 사이라는 것을 알만한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렇듯 두 선생님 사이가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인데
오민애 선생님의 볼에 키다리 장필봉 선생님이 뽀뽀를
하다 들켰대서 그게 무슨 큰일 날 일이라고 한사코 감추
려하시는 걸까?
˝윤궁, 왜 대답을 하지 않지? 일기를 다시 쓰는 게 싫
은가 보구나. 내키지 않으면 할 수 없지. 대신 이렇게 하
면 어떨까? 선생님이 얼마동안 이 일기장을 간직해두기
로 하고 일기장을 새로 사서 오늘 일기부터 쓰기로 한다
면 말야. 설마 그것마저 안 된다고는 하지 않겠지?˝
선생님의 가늘고 하얀 손이 어느 사이엔가 궁이의 두
뺨을 감싸고 있었다.
˝선생님 소원이라면요.˝
˝그래 소원이다. 남의 얘기 좋아하는 어른들이 네 일
기장을 훔쳐보고 소문 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 편
이 훨씬 안전할 테니까.˝
´선생님은 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실까? 새로 산 일
기장에 오늘 있었던 일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째서 생각 못 하실까?´
˝윤궁, 고맙다. 넌 역시 모범생이다.˝
´천만에요 선생님. 전 어쩌면 내일 이맘때쯤 또 다시
선생님 앞에 서 있게 될지 모른다고요. 보고 듣고 생각
하고 느낀 점을 거짓없이 솔직하게 일기로 썼다는 이유
로 말예요.´
궁이를 바라보고 있는 선생님의 입가에 솜사탕 같은
모나리자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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