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오늘의

읽을꺼리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야베스는과연 어떤 기도를 했던 것일까?

영성묵상훈련 한종호 목사............... 조회 수 3712 추천 수 0 2002.10.27 08:44:08
.........
출처 :  
야베스의 기도가 귀중한 이유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장기 베스트 셀러 1위의 반열에 올랐다며 지인(知人)으로부터 받아든 부피가 얼마 되지 않은 책을 단숨에 읽고 나는 서글픔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수준과 내용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책의 부제는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라고 되어 있었다. 살기 힘겨운 현실에서 기적을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도 대단한 노력과 비법이 아니라 기도 하나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누군들 매력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책의 내용에는 기도와 하나님 나라의 관심사가 관련되어 있지 않다.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식의 메시지가 압도하고 있는 이 책에서 독자들은 '기도의 신비'에 대한 주장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올바른 대답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자신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는 삶을 일깨우기보다는 현재 자신이 바라는 것을 기도를 통해서 얻으라는 식의 기복주의적 권고에 치중해 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그의 예증과 중심 메시지는 그렇지 못하다.  

야베스와 관련된 역대상 4장 9절과 10절의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 보다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고, 나의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간구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표준 새번역).

이 책의 저자 브루스 윌킨슨은 이 짧은 본문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해야 할 기도의 모형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강조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여러 가지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는 '복'이란 "성경적인 의미에서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뜻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니 이 초자연적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과연 어떤 기도를 했던 것일까?

야베스의 삶은 고통으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이러한 실존적 현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복이란 더 이상의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여 그의 삶을 곤고하게 하는 것, 그의 인생 역정을 어긋나게 하는 것, 그래서 그의 삶이 본래 지니고 있던 귀중한 가치들이 사장되거나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는 길을 여는 것이 그에게 복이 된다. 그러니 야베스가 복에 대한 기도를 했던 것은 고난의 인생사가 끝나고 자신의 삶 가운데 주어진 가치와 기회, 그리고 능력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질고와 역정에 찬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그로써 모두가 비극으로 인식했던 야베스의 삶에 예상치 못했던 차원의 지평이 열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비운으로 시작한 인생은 비운으로 끝날 것이라는 세상의 판단이 이로써 뒤집어 지게 된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귀중한 이유

이 야베스의 인생과 그 진로는 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체험하고 있던 현실을 그대로 상징해주고 있다. 야베스의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난으로 절박해진 인생과 역사의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성서는 고난의 과정에서 그 고난을 저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통로로 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현실의 힘에 압도당해 주눅들지 않고, 그 성품이 가파르지 않으며 크고 높은 전망을 가지고 사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지리도 복 없게 태어나서 지지리도 복 없게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적 사슬을 힘있게 극복한 존재의 삶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귀중한 것은, 그래서 고통에 억눌려 살 희망을 잃어버리거나 또는 그로 인해 마음에 분이 끓어 그 성품이 독해지기 쉬운 현실을 극복하고 높은 꿈과 성숙하고 존귀한 인간성을 길러나간 마음에 있다. "야베스가 그의 형제들 보다 존경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 대목은  어렵고 힘든 상황과 현실에서도 그의 인간적 성품과 격조가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고난을 뚫고 일어난 사람의 영혼이 지닌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으로 찌들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많은 인간형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도 누구에게나 존경받을 만한 인품으로 성장하면서 그의 역할이 한 개인을 넘어서서 공동체적 지도력을 갖춘 존재가 된 것에 이 기도의 진정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나의 영토를 넓혀 주시고"라는 이 대목은 따라서 토지 소유에 대한 열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감당해야 할 인생과 역사에서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기도는 단지 대토지 소유의 야망을 담은 자의 기원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브루스 윌킨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야베스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상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그 약속의 땅을 분배해주고 있던 때였다. 야베스는 그 당시의 상황을 보고 '나는 이 보다 더 많은 것을 위해 태어났음이 분명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의 지경(地境)을 넓혀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농부나 목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는 가족들이 남겨준 땅을 바라보며 그 경계를 눈으로 확인하고, 경계를 표시하는 말뚝을 찾아보며 그 잠재력을 평가해본 후 '하나님, 내 관리 아래에 주신 모든 것을 취하시고 넓혀 주십시오'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만일 야베스가 월 스트릿트에서 일을 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하나님, 제가 투자한 주식의 가치를 올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모독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토지분배는 매우 평등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지파나 개인도 부당한 방식으로 남들 보다 더 많이 차지하는 가능성을 최대한 막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역사적 상황이 이럴 진데 야베스의 기도가 자신에게 분배된 땅의 규모에 불만을 품고 그보다 많은 범위의 것이 자신의 관리 아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하나님에게 기원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본정신을 위배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혹 토지의 소유범위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기도라고 한다면, 그가 겪고 있던 고통의 내용이 그의 출생과 관련해서 불리하고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라는 상상이 또한 가능하다.  

야베스의 생김새나 출신이나 또는 육신적 결함이 사회적 멸시의 대상이 되어 그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몫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기도라면 그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주식투자의 승산을 하나님에게 거는 방식으로 이 기도가 이해된다면 그것은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실로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투기적 주식시장의 현실을 정당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경계되어야 한다. 가령, "하나님, 제가 이번에 한판 크게 벌일 작정이니 제가 건 몫이 왕창 늘어나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의 기도가 정말 제대로 된 기도이겠는가?

그런데 브루스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를 이렇게 정리해놓고는, 다행히도 후반에 가서는 '지경(地境)'의 의미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임무로 해석하는 노력을 보인다. 하나님 나라를 넓히는 것으로 그 뜻을 되새긴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 자체에 이러한 해석이 적용되었다면 월 스트릿트 운운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경' 이해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의 하나님 나라 확장 신학은 오늘의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의 근본적 원인과 현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몇 년 전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기독교 대학에서 일주일 동안 강의를 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더 많은 복과 더 많은 영향력을 구하는 야베스의 기도를 하도록 도전했다. 2,000명으로 구성된 학생회에 학교의 명예에 걸 맞는 사역목표를 세워볼 것을 제안했다. '세계 지도를 보고 한 섬을 정하면 어떻겠는가? 그 섬을 정하고 나면 팀을 구성하고, 비행기를 한 대 전세 내서 하나님을 위하여 그 섬을 취하러 가라'고 제안해주었다.  ....그들의 목표는 자비량 학생 선교팀을 조직하고 당신도 짐작하듯이 제트 비행기를 전세 내어 여름 사역을 위해 트리니다드 섬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트리니다드 인들을 지배해온 월 스트릿트의 자리

그의 하나님 나라 확장과 지경의 확대 논리는 서구의 정복주의적 선교개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한 섬을 찍어 "그 섬을 취하러" 가겠다고 하는 발상이나, 그것이 또한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놓여 온갖 고난을 겪었던 트리니다드 섬이라는 사실은 브루스 윌킨슨 류의 선교관이 갖는 한계를 보여준다. 야베스의 기도에 충실하려면 오늘날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 처한 백성들의 삶을 깊이 주목하고, 이들의 고통이 중단되도록 하는 일에 뛰어들어야 마땅하다. 서구 노예제도의 희생물이 되었던 트리니다드 섬에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신앙을 정복주의적으로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가 저질러온 죄악을 회개하고 이들 트리니다드인들이 처한 고난의 현실을 극복하는 일에 함께 하는 헌신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 트리니다드 인들이 식민지적 처지에 처해 위축된 역사의 경계선을 넘어서 오늘의 세계사적 현실에서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섬기는 일이 이들이 해야 할 바이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이러한 생각과 구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백인들의 정복주의적 선교전략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지경의 확대를 운운하는 오만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세가 과거 식민주의적 지배를 얼마나 정당화해왔는가를 돌이켜 보지 못하는 역사의 무지가 그의 신학에 스며 있음을 우리는 꿰뚫어 봐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트리니다드인들이 드리는 절박한 '야베스의 기도'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야베스라는 이름대로 노예적 현실에 처해 고통에 찬 삶을 살아오면서, 그리고 식민주의적 상처가 아직도 깊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수난을 브루스 윌킨슨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들 트리니다드 주민들을 다만 선교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브루스 윌킨슨은 실로 노예 출신의 히브리 백성, 그 일 지파인 '야베스의 기도', 그 실존과 역사의 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트리니다드 인들을 지배해온 월 스트릿트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으나 브루스 윌킨슨의 책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내시고자 하는 진정한 꿈과 비전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독후감이다. 좀 신랄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본주의적 물질관에 노예가 되어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해 이 책은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의 현실에 드려야 할 기도는 고난에 찬 민족적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갈구하고, 강대국의 압박 가운데 둘러싸인 시대적 한계를 돌파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적 역할의 경계가 넓어지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이 만방의 존경을 받을 만한 성품으로 변모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진실한 내용에 눈을 뜨기보다는, 초자연적 복과 영향력과 능력에만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사탄의 함정에 빠뜨리게 되는지는 지난 기독교 역사가 그대로 증명해주고 있다. 이를 각성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나사렛 예수의 주변에 이적만을 바라며 모여들었다가, 십자가 앞에서 흩어지고 말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게 될 뿐이다.
한종호 (2001-11-14 오후 5:24:24)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9 수필칼럼사설 [무연] 교회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조효근 2002-11-13 3248
98 영성묵상훈련 공동체 사역? 핸리 나웬 2002-11-03 2945
97 北山편지채희동 [채희동] 마음 한 자락 환해지는 말 채희동 2002-11-03 3153
96 수필칼럼사설 [이철재] 평신도에게 목회 사역을 돌려주자 이철재 2002-11-03 3422
95 수필칼럼사설 [홍사중 문화마당] 希望의 商人 홍사중 2002-11-03 3126
94 인기감동기타 사이버 공간 속의 보이지 않는 종교전쟁 기독교신문 2002-11-03 3295
93 생명환경자연 [나눔] 자연을 돌보는 인간 무명 2002-11-03 2859
92 목회독서교육 한국교회 목회의 문제점 무명 2002-11-03 4072
91 한국교회허와실 ■ [혼란한 교회 영성운동 ] 한국교회 영성 이해부족 기독교신문 2002-11-03 3883
90 선교화제현장 가난한 은퇴 목회자의 여생을 담당하는 원로목양선교회 기독교신문 2002-11-03 3853
89 선교화제현장 보석같은 4인성전 기독교신문 2002-10-30 3267
88 한국교회허와실 ■ 현실과 동떨어진 공동체운동 기독교신문 2002-10-30 3551
87 한국교회허와실 ■ 기독 사이트의 난맥상 기독교신문 2002-10-30 3925
86 한국교회허와실 ■ 일부 교회들의 무속화 현상 기독교신문 2002-10-30 3854
85 생명환경자연 작은 단추구멍 하나를 찾고서-생태 유아 교육 강좌를 듣고 성혜란 2002-10-30 3474
84 北山편지채희동 한송이 들꽃처럼 살수만 있다면 채희동 목사 2002-10-30 3213
83 목회독서교육 [야베스의 기도]는 진정 위험한 '가짜 빵'인가 김종희 2002-10-30 3428
» 영성묵상훈련 야베스는과연 어떤 기도를 했던 것일까? 한종호 목사 2002-10-27 3712
81 수필칼럼사설 교회를 죽이는 방법? 조명환 2002-10-27 3393
80 목회독서교육 구약 성서의 613 계명 목록 돌쇠 2002-10-27 3648
79 수도관상피정 마귀의 책략 [1] 영성의메아리 2002-10-27 3161
78 정치건강취미 [건강] 스님들의 장수 비결 김철중 2002-10-27 3743
77 한국교회허와실 ■ 짜증 유발하는 전도활동 기독교신문 2002-10-27 3726
76 선교화제현장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 김진홍 2002-10-27 3298
75 수필칼럼사설 우연은 없다 정원 목사 2002-10-27 3366
74 사회역사경제 미국 테러당할 때 일부 아랍인은 왜 환호했나? 이희수 2002-10-27 3127
73 사회역사경제 이슬람교는 어떤 종교인가? 퍼온글 2002-10-27 4471
72 수필칼럼사설 [읽을꺼리37]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 방선기 목사 2002-10-23 3221
71 수필칼럼사설 이제 단강을 떠납니다. 뉴스엔죠이 2002-10-23 3228
70 한국교회허와실 ■ 자리잡지 못하는 예배문화 기독교신문 2002-10-23 4074
69 한국교회허와실 ■ 왜곡된 경건생활 [1] 기독교신문 2002-10-23 3882
68 한국교회허와실 ■ 과대포장된 교회내 '직분' 기독교신문 2002-10-23 4062
67 한국교회허와실 ■ 기독교가정의 허와실 기독교신문 2002-10-23 3916
66 생명환경자연 작은 이야기 - 들꽃 사랑 작은이야기 2002-10-18 3564
65 사회역사경제 프리메이슨(Freemason) [3] 궁금자 2002-10-18 7660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