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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0 추천 수 0 2022.03.21 17: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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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11-12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2장 11절-12절: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정사는 나라의 정치나 사무를 맡는 일이다. 권세는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고 다스릴 수 있는 세력이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들이 사도들과 성도들을 끌고 갈까? 사도들이 도둑질을 했느냐, 강도짓을 했느냐. 거짓말을 했느냐, 사회적으로 문란을 일으켰느냐, 국가적 반역적인 발언을 했느냐?

 

기독교는 원래가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 영원히 변치 않는 목적, 어느 장소나 어느 환경이나 어느 시대나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뜻은 우리에게 향하신 당신의 온전이다. 이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온전을 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로써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고 교훈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게 천국복음이다. 그런데 말세 된 오늘날 기독교 안에 여러 가지 위주로 나가는 기독교 형태를 볼 수 있다.

 

천국복음은 어느 나라 국법에 제동이 걸리지를 않는 것이다. 원칙상 그렇다. 왜 그러냐?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으로 들어가 있어서이다.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 이후 마지막 그 날까지 온 인류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사단의 역사들이 거짓 종들을 붙잡고 나타나는 건데, 그걸 허용하시는 하나님의의 주권섭리를 보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찾도록 하려는 유도가 들어가 있다. 원칙상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키워주기 위한 뜻이 들어가 있는 거다.

 

그래서 교회라 하면 첫째가 인도자 목사가 중요하다. 그래서 목사의 가르침의 교훈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라 할 때는 원칙상 천국복음을 전해야 하고, 주님 하나밖에 없다. 사도들의 외침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이걸 교훈적 인격적 성품적으로 말을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질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거짓된 인도자들이 교회에서 그게 아닌 다른 여러 가지 형태의 운동을 하면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 여러 운동에 예수이름만 걸어놓는 식이 돼 버렸다. 위주가 그렇게 나가고.

 

그런 것들이 기독교 안에서 신앙의 함정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산물적인 교회가 많다. 그런 인도자가 많다. 그 시대의 산물에서 나온 것은 진리에서 나온 게 아니고 ‘저 교회는 저렇게 하니 사람이 많아지는구나, 그러니 우리교회도 그걸 도입해서 부흥을 시켜야 되겠다’ 하는 것들이다. 그런 시대적 산물. 구복주의도 시대적 산물이고, 신비주의 사회주의 구국주의 은둔주의 극기극복주의 세대주의 하는 게 전부가 시대적 산물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이 나왔을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온전의 구원도리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이런 저런 사람, 이런 저런 사건을 붙잡고 우리로 하여금 제일 근접되게 깨닫게 하려는 것인데 그렇게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의도성을 모른 채 우리의 온전을 위해서 잡고 쓰신 부분적인 그 위주로 나간 데서 생긴 문제들이다.

 

교인들이 그런 것들에게 속는 이유가 뭐냐? 그런 것들이 보여지기를 주님이 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목사도 그렇고 교인들도 그렇고 영의 눈이 감겨져 있어서 그런 것이다.

 

주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르는 이게 구원이니 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르는 이게 예수를 따르는 거다. 따라서 교훈적 소원적 정신 사상적으로 그렇게 살다보면 자기가 구원의 사람이 되는 거다. 주님 닮은 사람이 된다. 인격과 성품과 속성적으로 주님의 실상의 사람이 된다. 이게 실상이다. 이게 참 인격이고, 이게 참 사람이고, 신의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기독교 산물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이치적으로 들어가는 그걸 쫓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부분적인 그것만을 좇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위주가 그렇게 되게 되고, 목적이 그렇게 되게 된다. 그러니 얼마나 좁은 사람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부분적으로 보고서 그 위주 그 목적으로 나가는 인도자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지식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는 거기에서 나온 사상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이다.

 

성령님께서는 영을 분별하는 분이시고, 교훈분별, 사람분별, 사람의 속 중심을 분별하는 분이신데, 이런 성령님께서 눈이 어두워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부분만을 따서 하는 그런 목사, 그런 종들을 붙잡고 역사를 하시겠느냐? 그렇게 되면 하나님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 성령님께서는 그런 일에는 역사를 안 하신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 뭐가 판을 칠까? 악령의 종류들이 그 안에서 판을 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성령이라고 하지만 성령은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성도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역사를 하신다. 그게 성령님의 역사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 천국의 사람이고 천국복음이다. 그런데 안 가르쳐 주었던 몰랐던 분별력이 없으니 이래저래 신앙사기 다 당한다. 충성봉사를 한다는 것이 전부가 사망성공을 이뤄놓는다. 통곡할 노릇이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선교 선교’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껍데기 노릇을 하지 말아라. 껍데기 노릇 하느라고 충성봉사하며 생명까지 내댄다고 해도 주님은 ‘난 너 모른다’ 라고 하신다. 알맹이 사람이 되라. 알맹이 사람이 되면 언행심사 활동이 남이 볼 때는 너나 우리나 똑같이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 활동을 하는 중심사상은 뿌리가 다르다. 근원이 다르고 기준이 다르다. 우리는 이걸 분별해서 이용당하거나 얻어맞지 말아라.

 

사도들과 종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해서 인간 너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의 온전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나처럼 온전하라’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이게 목적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 모든 세상만사가 돌아가고,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쌓게 만드느라고 하나님께서 악령류를 이용 활용 등용시키고 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국가나 민족과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근본에 관한 문제의 해결책이 복음이다. 이런 가르침은 창세 이후, 인간 타락 이후로 성경 하나님 말씀 외에 그 어떤 종교에도 없다. 절대적이다. 그런데 요즘 드러내놓고 기독교가 이방종교들과 손을 잡고 ‘같이 잘 해 봅시다’ 하고 있다. 이건 벼락 맞을 짓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놓여진 것이다. 있을 수가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것이냐? 이방종교가 득세해서 그런 거냐, 교회가 내려갈 때까지 내려간 것이냐? 성도가 빛이라면 모든 것이 분별되는 것이고 빛의 역할이 있는 건데 어째 이렇게 된 것이냐? 어두움이 빛에게 와서 ‘같이 손잡고 일을 해 봅시다’ 할 수 있는 거냐? 이건 송장이 산 사람의 손을 잡고 ‘우리 같이 일을 해 봅시다’ 하는 것과 같다. 이치가 그런 것과 똑같다. 왜 이치를 모를까?

 

좀 더 생각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만물은 왜 만들었으며, 인간을 왜 만들었으며, 시간의 흐름은 왜 만들었으며, 역사의 흐름과 만물은 왜 만들었으며, 사시사철을 왜 흐르게 만들었으며, 세상의 끝은 왜 만들었는지? 시작을 했으면 끝이 있는 거다. 인간을 도덕성을 가진 자유자로 만들어 놓고 왜 심판이 있는 건지? 거기에 대한 책임감도 따른다 그 말이 아니냐?

 

‘의에 대해여 죄에 대하여 바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면 구원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의미가 물질적 소유적인 몸 밖의 개념으로 많이 생각을 하는데 이건 따라오기도 하고 안 따라오기도 하는 거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구원을 얻고’ 하는 거다.

 

유라굴라 강풍에서 누가 구원을 얻었느냐? 사도바울과 그 배 안의 선원들이다. 그러면 유라굴라 광풍이 물론 사도바울을 드러내기 위한 광풍인데, 사도바울이 없다면 그 성경은 안 쓰여질 것이고, 선원들이 바다에 빠져죽어도 성경에는 안 써지는 거다. 사도바울이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바울 속에는 그게 들었기 때문에 핵심적으로 구원이 되는 거다. 바울을 죄인으로 잡아가는 그들이었지만 바울 덕에 바울의 지도로 그들도 사는 것이다.

 

그게 세상 축소판이기도 하다. 성경 군데군데의 어느 한 사람의 일생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인데, 그렇지만 한 사람의 일생 속의 부분 부분마다에 거기에 중복적인 계시가 또 들어 있다. 우리를 보면 예수 믿기 전의 때가 있었다. 사업도 잘 되고, 돈도 많이 벌고, 천국 부럽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다. 그럼에도 성경에 있는 것을 자꾸 시대적으로만 생각을 하려고 하니까 자기 때는 못 찾는 거다. 자기에게 나팔이 몇 번 분줄을 아느냐? 여리고 성이 몇 번 만에 무너졌느냐? 자기에게도 한 번씩 나팔을 불고 지나간 것을 아느냐? 모르지 않느냐?

 

성경에는 온 세상만물의 이치와 모든 사사건건의 흐름을 다 보여준다. 따라서 이 성경만 다 깨닫는다고 해도 세상 어느 나라 대통령을 부러워 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주님이 어느 나라 대통령을 부러워했느냐? 우리가 그 분을 따르는 건데.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바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면 구원을 얻고.’ 믿는 우리는 실상적인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존재는 아니로되, 하나님은 아니로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으면 하나님의 속성과 똑같은, 예수님의 마음이나 우리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마음이나 같은 거다.

 

예수님의 마음과 같지 않은 다른 마음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 천국은 예수님의 질과 같은 것만 들어가는 곳이다. 이치가 그렇게 돼 있는 거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부활이라는 체로 왜 거르는 거냐? 예수님과 같은 것만을 골라서 천국에 넣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지금 현재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의 현재의 이 마음 이 정신을 가지고 다 올라가느냐? 못 올라간다. 예수님의 질과 다른 질은, 성격 성분 성질은 못 올라간다. 주님을 닮은 것만 올라가게 돼 있다. 신령천국은 그런 세계다. 그러니 주님 오시는 그 날이 삽시간에 오기 전까지 그 분의 것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게 기독교요 이게 신앙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을 이게 아닌 사역에 두고 있고 업적에 두고 있다. 천국에 그런 업적 사역이 올라갈 것 같으냐? 못 올라간다. 실상적으로 하나님을 닮은 그 자가 천국에서 존귀 영광자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종들을 가두고 죽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 끝이 안 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종들을 살려둔다고 해도 그들에게 심판이 안 오는 것도 아니다. 어찌 되었던 오는 거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당신의 예정과 계획대로 그대로 들어가는 거다.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 백성들이 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 끝은 오는 거냐? 온다. 하나도 안 믿어도 세상 끝은 오는 거냐? 온다. 절반을 믿어도 오는 거다. 내가 믿으나 안 믿으나 세상 끝은 오는 거다. 문제는 그 이전에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몸이 아프면 죽음이 오고, 항상 건강하면 죽음이 안 오느냐? 몸이 건강한데 죽음이 왜 오느냐? 몸이 자꾸 아프면 ‘이러다가 죽으려나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항상 건강한데 왜 죽느냐 그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기를 항상 건강하면 죽음이 안 오는 것처럼 은연중에 생각이 들어 있다. 그러면 안 아픈데 왜 죽는 거냐? 뭘 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먹은 인생은 죽는 거다. ‘그래도 모르겠느냐?’ 하고서 송장 치우는 걸 보여주는 거다.

 

지구의 종말의 사건은 꼭 온다. 자기의 죽음이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에 올 수도 있다. 이게 지구를 만드신 그 분의 말씀인데, 그런데 그 분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들이 그게 안 믿어진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그런데 본문의 이 사람들이 왜 사도들과 성도들을 끌고 갈까? 잡아가는 그들의 입장으로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처럼 세상풍습도 안 지키지, 세상명절도 안 지키지, 세상명절은 다른 말로 하면 마귀 대목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 하고 몰려다니는 그런 곳에 있게 되면 안 밟혀죽는다는 보장이 있느냐? 안 밟혀죽는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서 내려온다면 자기가 그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 거냐? 안 되는 거다. 밀리는 거다. 이게 이치다. ‘나는 안 밀린다’가 아니라 같이 밀린다. 그게 홍수다. 물 홍수만 보지 말고 인간홍수도 있다. 차량홍수도 있다. 세상명절을 쫓아 몰려다니다가는 그 홍수에 자기의 신앙은 죽는 거다. 제사가 둔갑한 것이 추도식이다. 추도식은 성경적이 아닌 우상숭배다.

 

사도들과 성도들이 이 추도식도 안 하고, 그들을 향해서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고 주장을 하고, 또한 그들을 향해서 죄의 노예로, 죄 아래 사망 아래 산다고 하고, 구원을 얻어야 산다고 하니까 그들이 이런 말들을 듣기 좋아할까? 그래서 사도들을 끌고 가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도를 하니까 ‘동양귀신을 믿지 왜 서양귀신을 믿느냐?’고 한다. 그래서 내 입에서 하는 말이 ‘이왕이면 산 귀신을 믿지 왜 죽은 귀신 믿느냐’고 했다. 예수는 살아났지 않았느냐?

 

자기 집안 식구가 다 같이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행복하고 좋은데 자기 혼자 믿고 있으면 핍박이 오고 왕따를 당한다. 그리고 결혼할 때 배우자를 안 믿는 남자나 여자를 데리고 옴으로 해서 거기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형태를 성경에 다 기록해 놨다.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으나 일단 옳은 것으로 찾아 들어가면 언젠가는 바꿔진다. 바꿔놔야 한다.

 

모세오경도 주님이 주신 것인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 율법사 서기관 대제사장 등등 이들이 모세오경 율법대로 한다고 했는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화를 당할 외식자라고 지적을 했다. 그들의 중심 사상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다. 우리도 그렇게 봐야 한다. 성경구절을 이용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마귀도 예수님께 시험을 걸 때 성경구절을 이용했다. 그러나 목적이 비뚤어졌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그 사람의 말의 목적을 심사해야 한다. 성경구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성경구절을 가지고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어 부자 되고 만사형통되고 축복 축복’ 하며 그걸 열매라고 말을 한다면 그 나무의 뿌리는 어디에 박혀 있느냐? 땅이다. 그러니까 세상열매를 따먹고자 하는 그 사상은 그 기초를 어디에 박아놓고 있는 거냐? 땅에 박아 놨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목적을 보면 ‘이 사람은 목적이 땅이구나’ 하고 알 수가 있다. 천국을 향해 목적을 둔 말은 하나님의 온전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설교할 때 타 종교의 좋은 말이나 철학자들의 좋은 말 같은 거 절대로 쓰지 말아라. 그러는 사람은 성경의 계시를 모르는 거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또한 성경구절을 자꾸 연속적으로 붙여가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구절을 관주식으로 연속으로 붙이는 사상은 땅이요, 결과적으로는 목적이 세상이 딱 된다. ‘안 된다’가 아니라 세상이 된다. 왜 그러나? 그 말씀 속에서 계시가 나와야,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나와야 하나님의 의중으로 들어가는 건데 성경구절을 그대로 쓰지만 그 말하는 것은 세상에 붙어있는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은 세상이 돼버린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그들의 원수로 보인다. 왜 원수같이 보여지느냐? 그들의 중심을 찔러 쪼개고, 또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그들의 소원대로 모세처럼 로마를 둘러엎고 유대를 독립하고 그들을 지배하게 만들면 좋겠는데 예수는 그러지를 않고 죄에서 해방을 부르짖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세의 역할 속에 들어있는 죄와 사망권 아래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탈출시키는 이 계시의 뜻을 못 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다 보니 이방인들과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게 되듯이 오늘날도 역시 세상에 목적을 두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진리생명 길을 가는 참 성도들을 핍박을 하고 박해를 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는 반드시 이방인들과 합세를 하게 돼 있다. 이방인들과 종교계가 합세할 때는 그들 모두 세상 길 넓은 길 사망 길을 가는 것이다. 진리진실의 성도는 좁은 길 생명 길 영생의 길로 간다.

 

이건 역사적으로 있었던 일인데, 우리가 여기서 좀 더 들어가서 그 이치를 그대로 갖고 와서 개체적인 인간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기 속에 옛사람과 새사람의 성분이 들어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영의 일을 생각하고, 어떤 때는 육의 일을 생각한다. 육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의 일을 하는데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있어서는 영의 일이 시급한 건데 이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는 식으로 살면서 세상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며 그 일에 우선적으로 힘을 쓰며 나간다는 말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육을 생각하고 있느냐, 영을 생각하고 있느냐? 육을 생각하고 있다. 육의 생각이란 육신의 모든 삶의 조건의 일이 잘 되기 위한 목적으로, 누림성의 목적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육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 쪽 그 위주로 사는 사람을 육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도 믿는 사람에게 이런 표현을 하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은 육의 일이고 영의 일이고 말할 것도 없이 다 육의 일이다.

 

성경에 영의 생각도 있고 육의 생각도 있는데, 영의 생각은 뭐냐? 영의 생각은 영의 일을 두고 ‘어떻게 하면 자타의 이룰구원에 덕이 될까? 유익이 될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구원에 속하는 일이다. 구원에 속하는 일을 하다 보면 그 다음에 육신의 일은 목적이 안 되고 방편이 돼 버린다.

 

성도는 두 가지 일을 할 수가 있는 거지만 육신의 일을 할 때도 영의 소원 목적을 두고 육의 일은 방편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영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 육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위주로 살고자 육의 일을 하는 것은 육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안 믿는 사람과 중심 사상이 똑같은 거다. 오늘날 교인들마다 그런 기도가 들어 있다. 그런다고 해서 얼마나 잘 살고 만사형통이 되느냐? 그것도 아니더라.

 

그런데 개체적으로 보면 자기 속에 세상 쪽으로 나가고자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자꾸 그 면에 생각이 들어가고 활동이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안 믿는 사람들과 합세가 되게 된다. 안 믿는 정신이 자기 속에 들어 있으니까 안 믿는 사람들과 합세가 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자기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따르고자 하는 면에서는 엄청난 고난을 받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 면을 깨닫게 해 주려고 몸이나 사업을 치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은 이런 걸 전혀 모르는 거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이것이 인격적으로 와 닿지를 않는 이상 이게 실감이 안 나는 거다.

 

예수 믿는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성도는 첫째는 신분적 근원이 다르다. 국적은 하늘나라 국적이다. 물론 세상나라 국적도 있는 거고. 그리고 소원도 목적도 지향성도 추구성도 취미성도 다르고 가치판단 평가성도 다르다.

 

두 번째는 성도는 주식이 다르다. 먹는 양식이 다르다 그 말이다. 안 믿는 사람의 주식은 물질성이고, 믿는 사람의 주식은 영의 말씀, 생명의 말씀, 생명과, 안 죽는 것, 살리는 것, 그리고 속성적으로 하나님처럼 실상화 돼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모든 지혜지식성 도덕성 평가성이 천국 쪽으로 나오는 거다. 자타의 구원 쪽으로 나오는 거다. 그리고 세상만물을 밟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성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죽은 말씀은 말씀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만사형통되고’ 하는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소원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죽은 거다. 이건 죄 아래 드는 거고, 심판 아래 드는 것이다.

 

성도는 먹는 양식이 다르니 거기에서 성장되고 자라나는 오각의 오감성도 다르다. 가치판단에 있어서의 주장성도 다르고, 귀신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다르고, 돈을 따르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 다른 거다. 사망 길 넓은 길이 아닌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게 다르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과는 자동적으로 의사적으로 충돌과 대립과 마찰이 일어나게 돼 있는 거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이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과는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죽은 고기는 졸졸 흐르는 물이라도 그 물에 떠내려간다. 죽은 고기가 졸졸 흐르는 물에는 거슬러 올라가고, 한강과 같은 깊은 물에는 떠내려가는 게 아니다. 죽은 고기는 그거와 상관없이 떠내려가는 거다. 그런데 산 고기는 강이 깊던 도랑이 얕던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걸 보면서도 깨닫는 게 없는 거냐? 만물보다 유능하고 지혜 있는 인간아, 그걸 보고도 네가 모르겠느냐?

 

자기의 존재목적, 출생목적은 간단히 말하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구원목적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이 구원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표면상 천국복음, ‘예수를 믿어라’ 하는 건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귀 영광자로 나타나는 그 면에 열매가 들어 있다. 기독교 복음은 바로 그런 것이다.

 

너를 인간으로 왜 만들었고, 왜 인격자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도덕성자로 왜 만들었느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영능의 실력대로 누릴 수 있는 그 세계가 있어서 너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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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3 고린도전 마인드버그를 제거하라 file 고전4:3-5  이익환 목사  2022-03-15 136
17312 고린도전 가장 좋은 선물 file 고전3:16-17  이익환 목사  2022-03-15 223
17311 고린도전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삶 file 고전2:8-10  이익환 목사  2022-03-15 194
17310 고린도전 문제 해결의 열쇠 file 고전1:18  이익환 목사  2022-03-15 234
17309 다니엘 마지막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 단12:13  이익환 목사  2022-03-15 239
17308 누가복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눅12:8-10  김경형 목사  2022-03-15 74
17307 시편 마트(mart) 안이 더 위험하다 file 시91: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98
17306 요한복음 나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노라 요4:27-38  허태수 목사  2022-03-12 104
17305 사도행전 성경 속에서 성경 읽기 행16:8-10  허태수 목사  2022-03-12 94
17304 요한복음 나는 내가 증거한다 요8:12-18  허태수 목사  2022-03-12 81
17303 누가복음 아흔아홉을 보는 눈과 하나를 찾는 마음 눅15: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33
17302 신명기 우리는 트루-빌리버, 진짜 신자다. 신4:15-24  허태수 목사  2022-03-12 115
17301 이사야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 사45: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29
17300 마가복음 제목새 술을 담아 익혀 마셔라 막2:18-22  허태수 목사  2022-03-12 79
17299 열왕기상 축복의 단비를 주소서! 왕상18:1-2  전원준 목사  2022-03-10 227
17298 미가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5:2-5a  정용섭 목사  2022-03-08 107
17297 누가복음 성령과 불 눅3:7-18  정용섭 목사  2022-03-08 90
17296 누가복음 빈 들에서 눅3:1-6  정용섭 목사  2022-03-08 119
17295 누가복음 늘 깨어 기도하라! 눅21:25-36  정용섭 목사  2022-03-08 209
17294 요엘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2:21-27  정용섭 목사  2022-03-08 99
17293 히브리서 하나님께 가까이! 히10:19-25  정용섭 목사  2022-03-08 179
17292 마가복음 불행한 서기관 막12:38~44  정용섭 목사  2022-03-08 59
17291 마가복음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12:28-34  정용섭 목사  2022-03-08 81
17290 누가복음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눅12:6-9  김경형 목사  2022-03-07 68
17289 누가복음 선한 이웃이 되라 눅10:25-37  강승호 목사  2022-03-06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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