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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이삭으로 길러진다.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51 추천 수 0 2022.05.10 14:28:21
.........
성경본문 : 창12:1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별난 사람이냐? 하나님께서 이 분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너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고, 너는 지금 이런 사람이다’ 하고 깨닫게 해서 창조의 목적대로 갈 수 있게 하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야곱에 대해 무엇을 깨달았느냐? 야곱이 기도한 대로 다 받았으니 믿음이 좋다고 보느냐? 그렇다면 야곱이 신령계에 속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에 속한 것을 구했느냐, 아니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재산이나 재물에 대한 것을 구했느냐? 후자다. 그러면 물질의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창조의 궁극적 목적대로 주시고자 하는 거냐, 이건 수단이고 방편이냐? 후자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생각을 하면 야곱이 달라는 대로 하나님께서 준 게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하시려는 게 원 뜻이냐, 먹고 마시며 배부르게 살다가 죽으라는 게 원 뜻이냐?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배부르게 살다가 죽으라는 게 원 뜻이 아닌데 왜 기도를 들어주신 거냐? 자식이 부모가 주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면 할 수 없이 들어주기도 하는데, 들어주는 이유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사람이 될까?’ 라고 하면서 차원을 끌어 올리려는 심정으로 들어주는 거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원하는 대로 사람의 복과 물질의 복을 들어주신 게 하나님의 원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그동안 피땀을 흘리고 목숨까지 걸고 모은 재산을 다 내놓게 했느냐? 그럼에도 야곱은 재물을 자기 앞에 보내고 자기는 뒤를 따라가는 약은꾀를 썼다. 야곱은 이때까지도 궤휼과 술수를 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라. 마라’ 하는 것도 교훈이지만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을 가지고 오셔서 깨닫게 하는 것도 있다. 말로 해서 안 들으면 천상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을 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신다.

 

야곱이 원하는 대로 다 받았기 때문에 믿음이 좋다고 한다면 야곱이 응답을 받음으로써 좋은 게 뭐였느냐? 심적인 고통과 번뇌뿐이었다. 정신적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썩는 것뿐이었다. 처음 고향을 출발하면서부터 거짓말을 한 게 외삼촌 집에 살면서 자식도 많이 낳고 살림살이도 불어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지옥의 경험을 했느냐?

 

물질성의 정신으로 산 세월 동안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훗날 이방 왕 바로 앞에서 ‘내가 130년 간을 산 게 눈물과 고통과 한숨뿐인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이 야곱이 그만큼 깨달아서 ‘그동안 물질만 쫓으면 산 세월이 부끄럽습니다’ 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의 말인지, 아니면 ‘내가 축복을 받아서 여기까지 왔다’ 라는 건지?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한 말이 일종의 간증인데, 야곱은 자기가 달라는 대로 주신 것을 ‘이제 와서 깨닫고 보니 이것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나?’ 라고 하면서 후회를 하는 거다.

 

야곱의 이 일을 성경에 기록을 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는데도 젊었을 때의 야곱처럼 자꾸 물질성을 쫓고 있지는 않느냐? 이 근성을 뽑기 전까지는 굶어 죽지는 않더라도 인간창조의 목적관대로 못 올라간다. 예수를 믿으면 창조의 목적에 들어서서 성장하고 장성을 해야 하겠는데 마음속에 항상 시베리아 바람이 불고 있다면 얼마나 고통이냐? 예수를 믿는다면 마음이 날이 갠 아침의 햇살처럼 되어야 하겠는데 돈이 있어도 없어도, 큰 집을 가졌어도 안 가졌어도 속에서 항상 울고 있다면 왜 그런 거냐?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거다. 그러나 이런 정신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러질 수밖에 없는 거다.

 

사람이 제일 미련한 게 남에게 속는 거다. 남에게 속는 것은 자기가 속는 수준에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즉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새사람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다가는 아무 쪽의 길로도 못 간다.

 

좁은 길은 생명 길이다. 왜 좁은 길이 생명 길이냐? 하나님의 의사단일로만 가기 때문이다. 이 길은 하늘에서 땅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차원의 길이다. 그런데 세상 넓은 길로 가면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마음이 쪼개지고 분산이 되어서 사람이 정립이 안 된다. 이러다가 원하지 않는 사건이 닥치면 울고불고 하며 미치거나, 넋을 놓고 있거나, 자살을 하게 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사건이 오면 ‘순교로 죽으면 하늘나라에 빨리 가는 거다’ 라고 하면서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의 길로만 가면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값어치가 있는 것은 참사람으로 되는 거다.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이삭이 길러진다. 아브라함의 정신과 사상의 교훈이라야 이삭이 길러진다. 그런데 이삭은 노년이 되어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니 야곱이라는 자식이 속여먹는다. 이걸 영적인 면으로 보면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거짓 종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눈을 떴어도 무식하면 아무 데고 도장을 찍어주다가 살림이 다 날아가는 걸 흔히 본다. 영적인 면에서도 모르면 자기가 좋아서 열심히 충성을 하고, 자기가 좋아서 자원적으로 다 도둑을 맞게 된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나는 강도에게 안 당했다? 아니다. 세상에는 두 갈래 길밖에 없다. 생명 길이 아니면 사망 길이다. 죄를 안 지어도 생명 길로 가는 게 아니면 사망 길로 가는 거다. 사망 길로 가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의 수준으로 사는 것이라서 도둑질하고 남을 때리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도둑맞고 강도를 당하며 사는 거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생명과를 먹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사용하고 지배하는 게 되지 않으면 강도를 당하며 사는 거다. 이런 사람은 머리를 쓰는 수준 자체가 사망적이라서 교회에서 교인들을 가르친다면 세상을 자랑하며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면 복을 받는다’ 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영과 육의 강도가 된다.

 

예수를 믿는다면 절대 정확한 공의성을 가져라. 하나의 종교성은 안 된다. 이것은 소돔 고모라의 사상이고, 노아홍수 때의 사상이다. 물 아래, 심판 아래의 사상이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일생을 다 도둑 맞는다. 교회에 다닌다면 땅의 수준, 세상의 수준을 가지지 말아라. 이러면 스스로 다 도둑을 맞는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별난 사람이냐? 하나님께서 이 분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너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고, 너는 지금 이런 사람이다’ 하고 깨닫게 해서 창조의 목적대로 갈 수 있게 하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야곱에 대해 무엇을 깨달았느냐? 야곱이 기도한 대로 다 받았으니 믿음이 좋다고 보느냐? 그렇다면 야곱이 신령계에 속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에 속한 것을 구했느냐, 아니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재산이나 재물에 대한 것을 구했느냐? 후자다. 그러면 물질의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창조의 궁극적 목적대로 주시고자 하는 거냐, 이건 수단이고 방편이냐? 후자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생각을 하면 야곱이 달라는 대로 하나님께서 준 게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하시려는 게 원 뜻이냐, 먹고 마시며 배부르게 살다가 죽으라는 게 원 뜻이냐?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배부르게 살다가 죽으라는 게 원 뜻이 아닌데 왜 기도를 들어주신 거냐? 자식이 부모가 주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면 할 수 없이 들어주기도 하는데, 들어주는 이유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사람이 될까?’ 라고 하면서 차원을 끌어 올리려는 심정으로 들어주는 거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원하는 대로 사람의 복과 물질의 복을 들어주신 게 하나님의 원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그동안 피땀을 흘리고 목숨까지 걸고 모은 재산을 다 내놓게 했느냐? 그럼에도 야곱은 재물을 자기 앞에 보내고 자기는 뒤를 따라가는 약은꾀를 썼다. 야곱은 이때까지도 궤휼과 술수를 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하라. 마라’ 하는 것도 교훈이지만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을 가지고 오셔서 깨닫게 하는 것도 있다. 말로 해서 안 들으면 천상 크고 작은 사건과 환경을 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신다.

 

야곱이 원하는 대로 다 받았기 때문에 믿음이 좋다고 한다면 야곱이 응답을 받음으로써 좋은 게 뭐였느냐? 심적인 고통과 번뇌뿐이었다. 정신적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썩는 것뿐이었다. 처음 고향을 출발하면서부터 거짓말을 한 게 외삼촌 집에 살면서 자식도 많이 낳고 살림살이도 불어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지옥의 경험을 했느냐?

 

물질성의 정신으로 산 세월 동안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훗날 이방 왕 바로 앞에서 ‘내가 130년 간을 산 게 눈물과 고통과 한숨뿐인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이 야곱이 그만큼 깨달아서 ‘그동안 물질만 쫓으면 산 세월이 부끄럽습니다’ 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의 말인지, 아니면 ‘내가 축복을 받아서 여기까지 왔다’ 라는 건지?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한 말이 일종의 간증인데, 야곱은 자기가 달라는 대로 주신 것을 ‘이제 와서 깨닫고 보니 이것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나?’ 라고 하면서 후회를 하는 거다.

 

야곱의 이 일을 성경에 기록을 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는데도 젊었을 때의 야곱처럼 자꾸 물질성을 쫓고 있지는 않느냐? 이 근성을 뽑기 전까지는 굶어 죽지는 않더라도 인간창조의 목적관대로 못 올라간다. 예수를 믿으면 창조의 목적에 들어서서 성장하고 장성을 해야 하겠는데 마음속에 항상 시베리아 바람이 불고 있다면 얼마나 고통이냐? 예수를 믿는다면 마음이 날이 갠 아침의 햇살처럼 되어야 하겠는데 돈이 있어도 없어도, 큰 집을 가졌어도 안 가졌어도 속에서 항상 울고 있다면 왜 그런 거냐?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거다. 그러나 이런 정신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러질 수밖에 없는 거다.

 

사람이 제일 미련한 게 남에게 속는 거다. 남에게 속는 것은 자기가 속는 수준에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즉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새사람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다가는 아무 쪽의 길로도 못 간다.

 

좁은 길은 생명 길이다. 왜 좁은 길이 생명 길이냐? 하나님의 의사단일로만 가기 때문이다. 이 길은 하늘에서 땅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차원의 길이다. 그런데 세상 넓은 길로 가면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마음이 쪼개지고 분산이 되어서 사람이 정립이 안 된다. 이러다가 원하지 않는 사건이 닥치면 울고불고 하며 미치거나, 넋을 놓고 있거나, 자살을 하게 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사건이 오면 ‘순교로 죽으면 하늘나라에 빨리 가는 거다’ 라고 하면서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의 길로만 가면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값어치가 있는 것은 참사람으로 되는 거다.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이삭이 길러진다. 아브라함의 정신과 사상의 교훈이라야 이삭이 길러진다. 그런데 이삭은 노년이 되어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니 야곱이라는 자식이 속여먹는다. 이걸 영적인 면으로 보면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거짓 종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눈을 떴어도 무식하면 아무 데고 도장을 찍어주다가 살림이 다 날아가는 걸 흔히 본다. 영적인 면에서도 모르면 자기가 좋아서 열심히 충성을 하고, 자기가 좋아서 자원적으로 다 도둑을 맞게 된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나는 강도에게 안 당했다? 아니다. 세상에는 두 갈래 길밖에 없다. 생명 길이 아니면 사망 길이다. 죄를 안 지어도 생명 길로 가는 게 아니면 사망 길로 가는 거다. 사망 길로 가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의 수준으로 사는 것이라서 도둑질하고 남을 때리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도둑맞고 강도를 당하며 사는 거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생명과를 먹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사용하고 지배하는 게 되지 않으면 강도를 당하며 사는 거다. 이런 사람은 머리를 쓰는 수준 자체가 사망적이라서 교회에서 교인들을 가르친다면 세상을 자랑하며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면 복을 받는다’ 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영과 육의 강도가 된다.

 

예수를 믿는다면 절대 정확한 공의성을 가져라. 하나의 종교성은 안 된다. 이것은 소돔 고모라의 사상이고, 노아홍수 때의 사상이다. 물 아래, 심판 아래의 사상이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일생을 다 도둑 맞는다. 교회에 다닌다면 땅의 수준, 세상의 수준을 가지지 말아라. 이러면 스스로 다 도둑을 맞는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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