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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미래

창세기 길희성............... 조회 수 1677 추천 수 0 2007.12.12 14: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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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2:1-3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냉전 시대에는 인류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절실했습니다.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초강대국이 가진 가공할만한 핵무기의 불과 몇 십분의 일만 사용해도 온 지구가 잿더미로 화할 위기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실로 인류의 미래는 절실했던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결코 이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나 적어도 예전만큼 긴박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군비확장과 핵 대결이 완화되어 가는 시점에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커다란 문제는 과연 이 지구에게 미래가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인류의 미래뿐만 아니라 자연세계 자체에 과연 미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최근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온갖 기상 이변들과 자연 재해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우리가 의존하여 살고 있는 환경세계에 진행되고 있음을 예고해주는 듯 합니다.

미래가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심각한 물음입니다. 인간은 현재만을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안고서 미래를 꿈꾸며 사는 역사적 존재이며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항시 미래를 전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고, 결국 그런 사람의 인생은 포기된 인생, 마지못해 사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요즈음 친구들을 만나면 화제가 곧잘 건강, 그리고 은퇴나 노후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희망보다는 염려와 걱정의 소리가 지배적이고, 뾰족한 결론도 없이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얘기로 끝내기 일쑤이며, 아니면 그 때 가서 볼 것이지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식으로 얘기를 끝내곤 합니다. 고작 희망적인 얘기라고는 건강하고 젊었을 때 인생을 즐겁게 살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인생의 후반기나 종반기에 들어선 사람들 대부분은 미래를 크게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에 대한 허무감과 절망감이 스며들어 삶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나이가 든 사람과 어린 사람들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나이든 사람들은 미래를 기다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볼 일이 점점 없어지며 과거에 대한 추억만 늘어나는 것이 나이 먹은 사람들의 최대의 비애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별로 기다릴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죽음이라는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미래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모든 희망을 좌절시키는 가장 무서운 힘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극복하지 않고서는 활기차고 의미 있는 삶이 전개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요행 지금은 건강을 유지하고 어느 정도 재력도 있어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손 치더라도, 앞에 보이는 것이 점점 쇠약해 가는 체력이요 모든 것을 삼켜버릴 죽음의 블랙 홀 뿐이라면, 철부지 만용이 아니고서는 죽음 앞에서 누가 과연 인생을 아름답고 값있는 것이라고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라는 불확실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미래를 놓고 아무리 자기 인생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정당화하려고 해도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개체는 죽지만 나의 후손을 통해 나의 생명은 지속될 것이라는 생물학적 위로만이 위로라면 위로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죽음마저도 능가할 수 있는 어떤 삶의 의미, 곧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진정으로 인생의 찬가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개인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제아무리 절실하다 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류 전체의 미래에 관한 물음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인류의 삶과 역사는 무엇 때문에 진행되고 있는가? 인간의 역사는 종국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집단적 파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역사에는 어떤 일정한 방향과 목적,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야말로 맹목적인 충동과 의지들이 생존경쟁을 벌리는 끝없는 접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인생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흘린 억울한 피와 땀과 눈물을 보상해주고도 남는 어떤 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되풀이되는 생사의 수레바퀴일 뿐인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물음은 결코 단지 호기심에서 나오는 질문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 전체에 희망이 없다면, 궁극적으로 나라는 개인의 존재에도 희망이 없는 것이며, 인생 그 자체가 맹목적인 생물학적 충동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나의 인생도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하찮은 존재가 무슨 예외가 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허무를 이기는 길은 단 두 가지 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으로서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후세계는 못 믿는다 하여도 죽음에 의해 부정되지 않는 어떤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 즉 인생의 온갖 부조리와 비극, 무수한 인간들이 흘린 한없는 고통의 피와 땀과 눈물을 정당화해줄 만한 어떤 절대적 가치를 믿고 그것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일입니다. 많은 숭고한 휴머니스트들이 이 길을 선택했으며, 거기서 죽음조차도 앗아갈 수 없는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합니다. 하지만 사후의 세계를 믿지 못하면서 과연 인간이 어떤 영원한 가치를 위해 낙심하지 않고 타협도 없이 끝까지 자신을 바칠 용기가 있을 수 있겠으며, 그것이 끝내 어떤 위로가 될 것인가 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묻습니다. 여하튼 이 둘 가운데서 어느 방법으로 죽음의 허무를 이기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생 그 자체에 궁극적인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일차적이고, 나의 삶의 의미의 문제는 부차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 모두에게 사후의 삶이 있던지 아니면 모두에게 없던지 둘 중의 하나이지 어떤 사람에게는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는 일이란 있을 수 없고, 죽음마저도 초월하는 어떤 가치가 인생과 역사에 있다면 그것은 나 개인을 초월한 의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의 미래보다는 종종 너무 자기 자신의 미래에만 관심을 둔다는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듣습니다. 죽음이 태어났던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면 나도 그 예외는 아닐 것이요, 태어났던 생명 모두에게 미래가 없다면 나 혼자만이 누리는 사후의 삶이란 있을 수도 없으며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리 없다고 고린도 전서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거꾸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같은 특별한 존재도 이러한 일반적인 만물의 운명과 함께 하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즉 우리에게 사후의 미래가 없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바울 사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미래는 인류 모두에게 있던지 아니면 없던지 이지 개인에 따라 선별적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따라서 모든 죽은 자의 부활, 곧 보편적 부활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말을 요약하자면, 인간은 미래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미래의 희망을 좌절시키고 인생을 무의미하게 해버리는 최대의 힘은 죽음이라는 것,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는 미래가 있다면, 개인의 미래보다는 인간 모두의 미래이어야 하며, 인생 그 자체와 인류역사 전체의 의미가 개인적 삶의 의미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죽음의 힘 앞에 굴복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해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만인의 부활을 믿는 신앙만으로도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확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인간의 운명 못지 않게 중요하며 인간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자연 환경세계의 운명입니다. 태어났던 모든 인간들의 삶이 궁극적으로 부질없었던 것이 아니고 의미 있는 것이었으며 죽음을 초월하는 미래와 희망이 있는 것이라면, 산과 강, 나무와 풀,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 등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의 생명도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유독 인간에게만 죽음 너머의 희망이 있고 타 피조물들은 죽음의 힘 앞에서 무력하고 허무한 존재들이란 말입니까?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온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허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와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다고(로 8: 12-25)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같은 하나님의 창조의 공동체인데 인간만이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진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우리는 요즈음 점점 더 절실하게 느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새길의 신앙고백에서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보전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죽음 너머서의 세계에서도, 부활 이후의 영원한 구원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운명은 지구환경세계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창조 공동체로서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의 구원공동체, 영원한 생명공동체에 같이 동참한다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점을 소홀히 해 왔습니다. 이 세계는 오직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고 인간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식의 구원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물과 함께 구원공동체를 이루며 살 것이라는 생각을 소홀히 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허무로부터 건짐을 받은 여타의 피조세계와 더불어 변화된 세계, 곧 새 하늘과 새 땅 위에서 함께 영광을 누린다는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가 결국 오늘의 환경위기와 죽음의 문화를 초래하는 한 요소가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미래만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뿐만이 아니라 온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미래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온 피조물들이 인간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세계는 온데 간데 없고 인간들만이 구원을 즐기는 세계란 그다지 아름답지도 못한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이러한 물음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창조론과 구원론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미래 운명에 대한 해답을 종말을 다루는 묵시문학이나 종말론에서뿐만 아니라 창세기 초두에 있는 창조설화, 특히 안식일에 대한 성서기자의 증언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동식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제 칠일에 창조의 모든 역사를 끝내시고(finish, complete) 휴식하셨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는 제 칠일을 축복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안식일을 즐기시고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끝내시고" "쉬시고"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로써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하신 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창세기 기사를 읽을 때 흔히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하신 일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냥 아무 것도 안 하시고 쉬신 날로 생각해버리기 쉽습니다. 마치 쉬는 일이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안 하는 무의미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일을 끝내시고 제 칠일을 축복하신 일을 간과하곤 합니다. 산업사회에서 일하는데 이골이 난 현대인들에게는 쉰다는 것은 실직을 의미하던지 또 다른 일을 위한 시간 벌기 내지 회복기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 일을 끝내신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의 성격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안식일에 대한 그릇된 율법주의적 태도를 비판한 예수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곧잘 안식일의 의미를 격하시키거나 망각하고 제 칠일을 나머지 육일과 똑같이 취급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안식일은 일이 완성된 날이자 휴식과 축제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히 이 제 칠일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른 것이며, 이 점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마치 피조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을 창조한 제 육일의 이야기에서 창조설화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것으로, 그리하여 제 칠일의 이야기는 없어도 좋은 반클라이맥스의 얘기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제 육일이 아니라­실제로 6일 동안에 모든 일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제 칠일을 창조의 완성의 날로 선포하고 있으며, 창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창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제 칠일의 휴식과 축제,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없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 없으며,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사이에 아무런 대립이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샬롬에서 창조는 곧 그 목적을 실현하며 완성을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가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노동, 그리고 이 노동으로 영위되는 인간의 역사도 결코 노동 자체를 위해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을 위해서 전개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노동과 일이란 이기심과 탐욕, 경쟁과 투쟁, 착취와 폭력의 역사이기에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칼 마르크스가 꿈꾸던 계급 없는 사회의 꿈, 모든 사람이 소외되고 강요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각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세계란, 인간의 타락한 역사의 시작 이전에 있었던 바로 이러한 안식일의 샬롬, 곧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이 지배하는 곳에 대한 세속적인 해석일 것입니다.

사실, 이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는 태초세계에 대한 비전은 단순히 순수했던 타락 이전의 과거세계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그 보다도 적극적으로 미래에 대한, 아니 종말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갈등과 비극을 많이 경험한 이스라엘의 성서기자들은 이 세상이 악과 부조리에 가득 차 있으며 진정한 평화가 없는 세계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더 이상 안심하고 쉬실 수 있는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한 것입니다. 순수했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인간과 인간이 적이 되고, 인간의 탐욕이 자연세계에 고통을 가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갈등의 세계가 되어 하나님이 거하기에 너무나도 불결하고 불편한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제 칠일의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비전을 지녔던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안식과 평화를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쉬실 수 있는 세상, 그리고 인간도 자연도 함께 쉴 수 있는 평화와 안식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던 것이며, 이것이 다름 아닌 진정한 성서적 의미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에 김이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품었던 희년, 즉 햇수로 일곱 해, 즉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고 50년이 되는 희년의 비전과 그 정신에 대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락한 역사가 다시 한번 바로 되고 정화되어 하나님의 안식이 회복되는 날을 기다리고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의 표현입니다. 이 희년에는 하나님도 쉬시고 인간도 쉬고 심지어 농토도 인간의 탐욕이 부여한 중압으로부터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사야 같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꿈꾸던 메시아 시대의 비전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샬롬의 세계입니다(이사야 11: 6-9).

그리고 두 말할 필요 없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하고 그에 의해 실현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 역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날, 곧 온 세계에 하나님의 샬롬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얼굴에서 주름살이 사라지고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며 그가 안심하고 거하며 쉴 수 있는 세계,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세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자연세계에서도 상함이나 해함이 없는 하나님의 평화의 날에 대한 비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누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 그의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바로 이 희년의 비전을 선포하는 아사야 61장의 말씀을 안식일에 회당에서 낭독하시고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귀한 것은 바로 그가 이러한 비전이 단순히 꿈이 아니라 그의 말씀과 행위로서 이미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으며,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서 새 시대가 이미 도래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부활은 이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 나라의 세계, 그 안식, 그 평화, 그 샬롬이 이미 열리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전히 계속되는 어두움 속에서도 온 세상을 부활의 빛 아래서 보게 되었으며 인간과 온 피조세계에 미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식을 누리셨고 그가 우리의 평화를 위해 성별해 주신 제 칠일 안식일을 바로 부활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일요일에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매 주일마다 세상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이곳에 모이는 이유가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를 마치시고 평화로운 세계에 거하시면서 안식을 취하셨던 창조의 아름다운 세계를 기억하면서 그리스도의 역사와 더불어 이미 시작했고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기다리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안식일은 여느 날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이 날에 우리가 하는 일은 세상적인 짓거리의 연속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와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샬롬의 관계를 앞당겨 실현하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쟁과 갈등이 아니라 사랑과 협력, 억압과 투쟁이 아니라 희생과 평화, 화해와 용서의 새로운 질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미리 맛보고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 주일 이렇게 모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던 짓, 세상에서 가졌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그대로 교회에서도 연장하려면 왜 하필 교회에서 해야 합니까? 교회에서는, 더군다나 안식일에는 나에게 무엇이 이로운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어떻게 하면 이롭게 할까가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하며, 남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가보다는 내가 형제의 마음을 어떻게 아프게 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자랑을 뽐내는 곳이 아니며 세속적인 자선단체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상처받은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치유함을 받아 모두가 함께 휴식하면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창조공동체의 회복을 체험하고, 창조세계의 미래를 꿈꾸고 확인하기 위해서 모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나라, 곧 창조세계의 미래는 단순히 태초에 하나님과 인간과 온 피조세계가 누렸던 안식의 단순한 회복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이며, 더 찬란한 세계이며, 창조의 완성입니다. 만약 이 완성이, 이 구원이 단순한 과거 창조세계의 회복이라면,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할 일 없이 세상을 지었다가 허물었다가 다시 짓기 위해 애쓰는 가련한 존재처럼 보일 것입니다. 병 주고 약 주는 존재처럼 우스운 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단순한 과거의 회복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의 잔치 날은 제 칠일 안식일이 창조의 완성이듯이, 창조의 종결이요 완성으로서 이전의 태초의 창조보다 더 아름답고 더 영광스러운 세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사업을 시작하셨고 인간을 그 사업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온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평화가 실현되는 찬란한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따스한 봄기운이 엄동설한을 녹이듯 부활의 빛이 온 세계에 충만하게 될 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만물과 더불어 편히 쉬실 수 있는 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우주에 가득 차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그 날을 향해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일, 칠년에 한 번 돌아오는 안식년, 그리고 50년만에 돌아오는 희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정녕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이러한 희망을 안고 그 희망을 향해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은총의 수단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새길 공동체는 안식일마다 모여 하나님의 창조의 보전뿐만 아니라 그 완성을 향해 우리 삶을 헌신할 것을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과 창조세계에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으로 오늘 아침의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생기지 않도록, 두려운 맘으로 조심하십시오."(히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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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창세기 형제를 위한 희생 창14:1-16  한태완 목사  2007-11-25 2280
811 창세기 믿는 자에게도 기근이 창12:10-12  한태완 목사  2007-11-25 2462
810 창세기 하나님의 형상 창1:26-31  길희성 형제  2007-11-22 1170
809 창세기 신실하신 하나님 창7:6-24  한태완 목사  2007-11-18 3242
808 창세기 나와의 씨름 창32:23-3  권진관 형제  2005-02-16 3924
807 창세기 쉼의 저항 창2:1-3  최만자 자매  2005-02-01 2471
806 창세기 나를 보낸 이는 형님들이 아니요 하나님... 창45:1-8  김이곤 목사  2004-08-27 2736
805 창세기 선악의 지식은 어떻게 위험한가? 창3:1-7  정대현 목사  2003-10-03 2864
804 창세기 정말 긴 씨름을 하고 나서 창32:22-32  최만자 자매  2003-09-07 3322
803 창세기 하늘을 바라보라 창15:5-6  한태완 목사  2007-11-10 2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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