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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과 롯에 대한 오해와 진실

룻기 이경숙............... 조회 수 2716 추천 수 0 2009.05.22 12: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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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릇4:9~12 
설교자 : 이경숙 교수 
참고 : 이화여대 구약학 교수 새길교회 2008.10.12 주일설교 

 날씨는 정말 청명하여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지만, 금융위기 사태도 벌어지고 있고 또 최진실 씨 자살 사건도 있고 해서 마음이 스산하고 불안하다는 주변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을이라는 분위기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올해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기뻤던 일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보니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우승을 하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9회 말에 정대현 이라는 투수가 나와서 일본 선수들을 병살로 처리하고 우승을 했을 때 정말 기뻤던 일이 생각납니다. 또 최근에 들어 온 소식으로 그동안 이화여대에서 가끔 뵙던 르끌레지오 라는 분이 노벨 문학상을 탔다고 하니까 무척 반가운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은 한국을 좋아해서 4차례나 방문했고 또 이화여대 통번역 대학원에서 강의도 하셨고 또 지금도 석좌교수로 계십니다. 이 분은 이대 국제 기숙사에 계셨는데 아주 소탈해서 이대 앞 음식점에서 학생들과 인생을 논하고 한국에 대해서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다이내믹하고 다채롭다. 정 많고 예의바른 한국 사람들 덕분에 한국에서 숨 쉬는 매순간이 행복했다.”고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정 많고 예의바른 한국사람”이라는 말에 “정이 많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이지만, “예의바르다”는 말에는 약간 의문이 생겼습니다. 혹시 멋지게 생기신 백인 교수님에게 한국 여학생들이 너무 잘해드린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스쳐 지나간 것입니다. “예의 바르기” 위해서 약자들이 고통을 받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참고 또 참고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 또 약자들에게 강제적으로 요구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성서에서 나타나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모범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정숙한 여인 룻기를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구원받은 죄인의 대표적 여인 다말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오해도 지적해 보겠습니다.

 아까 읽어 드린 성서 본문(룻 4:9-12)처럼 룻과 다말, 두 여인은 같이 칭송받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이밖에도 두 여인은 여러 가지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이들은 모두 예수 족보에 등장합니다. 룻기에서도 마태복음에서도 모두 두 여인을 아주 높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룻만 좋아 하고 다말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거나 죄인으로 취급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말은 큰 죄인으로서 하나님은 죄인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의 족보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는지요. 이제 두 여인에 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봄으로써 성서에서 말하는 훌륭한 여인들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한국 교회에서 룻은 굉장히 인기 있고 사랑받는 여인입니다. 시어머니에게 순종하고 헌신하고, 예수를 잘 믿어서 그 결과 다윗이라는 왕의 조상이 된 여인이 되어 집안을 일으킨 여인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여성들에게는 룻은 최고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는 초기 기독교 역사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천한 집안의 여인이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봉양해서, 시어머니를 따라 예수를 믿고, 집안을 일으키고 복 받아서 부자와 결혼하고 마침내는 왕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국의 여인상의 귀감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룻기에 대한 아주 한국적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족보를 중요시 생각하는 전통, 시어머니를 중요시하는 전통, 순종을 좋아하는 전통, 그리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추천하는 전통에서 룻을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룻에 대한 이해는 성서를 올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맞게 맞추어 읽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룻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아닙니다. 개종했다면 유대교로 개종했겠지요. 그러나 룻기는 선교적 차원의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순종적이라는 사실도 일부만 맞습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싫은데 시어머니를 따라 온 것은 아닙니다. 성서에서 왜 룻이 나오미를 따라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친정에 돌아가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보아즈와 결혼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룻은 상당히 대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냥 시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보아즈의 “발치에 얌전히 앉아 있던 것”이 아니고 성서 보도에 보면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한 여인입니다. 룻은 잡히면 죽을 수밖에 없는 대담한 행동을 해서 결혼을 쟁취한 여인입니다. 한편 서구의 여성신학자들이 룻을 나오미와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조금 과장된 해석으로 보입니다. 이야기가 보아즈와의 결혼이라는 해피엔드로 끝난 것을 보면 룻과 나오미를 동성애자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참았다는 말은 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룻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그 당시의 결혼 제도는 ‘시형제 결혼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 조선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제도이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 북방에서도 실시된 적이 있는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던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의 양자제도와 비슷하게 과부가 된 여인을 구제하는 제도이면서 동시에 아들 없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주는 사회 보장 같은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에 대해 잘 나와 있는 곳은 신명기 25장 5-10절입니다. 신명기 25장 5-10절에 의하면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야 되고, 이 경우 그 아들은 형의 이름을 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동생이 이런 관습을 따르지 않고자 하면 형수는 그 시동생에게서 신발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 마을 장로들은 그 신발을 그 다음 친척에게 주고 그 신발을 받은 사람이 그 여인과 결혼한다는 제도입니다.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을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신 25:9-10)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제도는 매우 가부장적 사회의 제도이지만 나름대로는 여성의 생존권도 보장해 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보아즈는 룻에게 이 제도에 맞게 형식을 갖추어 결혼할 것을 약속하고 이를 시행했습니다. 따라서 이 제도에 따라 결혼한 룻과 보아즈 사이에서 난 아이는 보아즈의 아이가 아니라 말론의 이름을 딴 아이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족보 문제도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룻기 4: 17-22의 족보는 후대 삽입으로, 역대상 2:3-15에 보아즈가 등장하기 때문에 후대에 여기에 삽입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룻이 칭찬받고 예수의 족보에 까지 오른 성서적 근거는 무엇일까요? 순종적이고 시어머니를 잘 섬긴 며느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밖에 룻 이외에 족보에 오른 다른 여인들이 라합과 다말이 모두 이방 여인들이기 때문에 룻도 이방 여인이기 때문에 족보에 올랐다는 주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외국인 노동자나 외국인 이주민 문제가 다루어 질 때 룻기가 많이 다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평가할 때에는 룻은 관계에 충실한 여인이었고 아주 적극적으로 살아낸 여인입니다. 비록 나오미의 제안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보아즈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일, 즉 들키면 죽을지도 모르는 굉장한 모험을 감행했고, 또 이로써 보아즈의 관심과 약속을 성공적으로 받아낸 능력의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인이 아니라 무척 과감하고 상황을 자신의 노력으로 역전시킨 여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다말(창세기 38장)에 관해서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은 룻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주도면밀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말의 시아버지 유다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이 다말의 남편 엘이고, 둘째는 오난이고, 셋째는 셀라였습니다. 엘이 죽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오난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오난과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난은 자식이 생기면 유산 문제와 형의 이름을 잇게 되니까 이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액을 바깥에 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난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였고 그 결과 죽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까지 죽을까 겁이 나서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이는 다말을 기만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습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자기 동네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창녀로 가장해서 길에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시아버지와 관계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시형제 제도에서 시형제가 없을 때에는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져도 된다는 관습이 있는 나라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자연스런 발상입니다.

 시아버지가 염소로 비용을 치룰 때 까지 지팡이와 인장을 갖고 있겠다고 다말은 말했습니다. 다말의 주도면밀한 면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말은 임신이 되었고 소문이 유다의 귀에 까지 들어갔습니다. 유다는 며느리가 간통을 했다고 생각하고 화형에 처하는 법정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지팡이와 인장을 내놓는 다말의 지혜로 다말을 임신시킨 장본인이 유다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다가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서는 “너의 의가 내 것보다 낫다”로 칭찬을 한다는 점입니다. 성서는 다말의 행동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또 룻에게도 다말의 집안처럼 되라고 덕담을 할 정도로 다말의 행동은 후대까지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다말을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시아버지를 속이고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졌으니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다말은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우리나라 여자들에 대한 재혼 금지나 성적 억압은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엄격합니다. 이는 조선조 성종 때부터 내려온 재혼한 여자들의 자손이 과거를 볼 수 없다고 조항을 만든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물론 이 제도는 과거를 볼 수 있는 정도의 양반 계급을 향한 제도였지만 양반층으로 신분 상승을 원하는 중인 계급에게도 퍼져 나갔고 점차로 여성 모두가 정절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말을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지요. 교회에서도 다말에 대해서 설교가 된 적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서 왜 다말과 룻이 언급되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이들 같은 천박한 죄인도 하나님께 은총을 입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들어 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해석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고대 이스라엘의 성윤리는 우리나라의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 안에서 다말과 룻을 우리의 척도로 재면 안 됩니다. 은장도를 가지고 절개를 지키고,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면, 복 받고 시집 잘 가고 아들 딸 낳고 부자가 된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성서 안에서 룻과 다말은 칭송을 받고 “의롭다”고 선언되고 있습니다. 특히 유다는 “그는 나보다 의롭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직접 다말이 의롭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이들이 처해 있는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 기인할 것입니다. 룻이나 다말이나 외국여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정황에서 최선을 다한 여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을 모르고 소극적인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깨우쳐 준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성적으로 유혹했느냐 아니냐 라는 점만 가지고 이들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대로 예수의 족보의 인물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살아 내고 최선을 다해서 산 여인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지적하고 수정해준 이방 여인들이 예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이 나닐까요? 아무리 어렵고 우울한 시기일지라도 그 속에 주저앉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할 일을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면서 삶을 살아 내는 여인들, 이런 사람들을 닮는 저희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운주사에 대해 쓴 르클레지오의 “운주사, 가을비”시 중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중략)......
기다리고 나이를 먹고 비가 온다
운주사에 내리는 가랑비는
가을의 단풍잎으로 구르고
길게 바다로 흘러
시원의 원천으로 돌아간다.
두 와불의 얼굴은 이 비로 씻겨
눈은 하늘을 응시 한다
한 세기가 지나가는 것은 구름 하나가 지나는 것
부처님들은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꿈 꾼다
눈을 뜨고 잠을 청한다
세상이 벌써 전율한다.”(최미경 역,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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