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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참 정신과 우상으로부터의 자유

갈라디아 김경재 교수............... 조회 수 2210 추천 수 0 2009.05.22 12: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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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5:1~6 
설교자 : 김경재 교수 
참고 : 한신대 명예교수/ 새길교회 2008.10.26 주일설교 

종교개혁의 참 정신은 우상으로부터 자유정신

 오늘은 10월 마지막 주일, 종교개혁의 참 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신앙자세를 성찰하는 주일이다. 종교개혁의 참 정신이 무엇일가? 신학이라는 학문의 물을 조금도 맛보지 않은 신도일지라도, 종교개혁 운동의 세 가지 모토를 머리에 떠올린다. 오직 성경만, 오직 믿음만, 오직 은총만 이라는 세 가지 표어가 그것이다. 그런데 매우 역설이지만, 세 가지 표어 앞에 ‘오직’이라는 강조 형용사를 부침으로 해서, 종교개혁의 참 신앙이 도리어 실종되는 아이러니를 목도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위기를 본다. 빛이 너무 강하면 그림자도 그만큼 진하게 생기는 이치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 표어가 잘못된 때문일까?

 종교개혁의 참 정신을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모토로서 관습적으로 반복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갈파한다면 우상으로부터의 자유정신이다. 우상을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답게 예배하고 경외하며,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를 되찾자는 운동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역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참으로 묘한 동물인지라 어떻게 해서든지 우상을 만들려 하고, 우상을 섬기면서 만족하려는 자기기만적인 존재다.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일 수 없는 것, 그것이 신적영물이던 이념이든 가치이든 종교교리이든 경건한 신학체계이든, 그런 것들을 하나님처럼 절대화하고 섬기면서 그 우상들에게 충성하고 아부하고 자기 이익도 적당히 취해가는 짓거리 곧 ‘경건한 기만, 경건한 태만, 경건한 교만’을 우상숭배라고 말한다.

 루터, 칼빈, 멜랑히톤, 쯔빙글리등 종교개혁의 제1세대들이 당시에 싸웠던 우상들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대신하는 교황권이었고, 성경에서 솟구쳐 나오는 복음을 대신하려는 스콜라신학이었고, 십자가의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공로신앙 체계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개혁당시 금빛으로 도금한 금관의 예수만 있었고, 십자가고상 ‘가시관 쓴 예수’는 교회의 장식물로서만 벽면에 걸려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햇빛 같은 공의, 아가페적 사랑,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가 실종되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배반한 개신교의 교권과 교리주의

 그렇다면, 종교개혁운동 이후, 기독교 교회사는 참다운 복음만을 증언하는 교회로서 충실했던가? 잠시 동안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개신교의 역사는 제2의 종교개혁을 필요로 할 만큼 ‘프로테스탄트의 기본원리’를 배반해온 역사였다.

 성경을 재발견한 것은 정당했으나 성경문자주의에 떨어짐으로서 성경을 절대화하는 ‘성경책 우상화’라는 위험수위에 까지 이르렀다. 중세기 교황권을 비판하고 나온 프로테스탄트가 중세교권보다도 더 지독한 교권주의로 무장하여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

 오직 믿음만의 원리를 강조해온 개신교는 ‘성령충만, 선교열정’을 구원의 조건인양 내세우고 있다. 스콜라신학을 비판하고 복음을 재발견한 종교개혁인데, 후대 신학자들은 스콜라신학보다 더 굳어지고 생명력 없는 근본주의 신학강령으로 무장한 십자군단이 되었다.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 오직 믿음만(sola fide), 오직 은총만(sola gratia)'이라는 종교개혁의 삼대 표어가 문제가 되고 말았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오직 만'이라는 절대적 표현은 하나님 자신에게만 부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그 말을 붙이니 '경전 절대 책 종교'가 되고, 믿음에 그 말을 붙이니 '행함 없는 말 많은 신자'가 양산되었고, 은총에 그 말을 붙이니 '싸구려 은총'이 남발하게 되었다.

 제1세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오늘에 다시 되살아 나타난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종교개혁정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도리어 철저하게 종교개혁정신에 반대되는 반종교 개혁적 종교집단이라고 평할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제3바벨론 포로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정신을 담고 있는 문서들 중에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논서(論書)가 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제국에 포로로 잡혀가 자유를 잃어버렸던 역사적 사실을 비유로 하여 중세기 그리스도교가 처한 교회 상황을 마틴 루터가 비판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잘못된 중세 스콜라 교리신학 특히 세례와 성만찬이외 다섯 가지나 더 많은 의식들을 세크라멘트(聖禮)로 선포하고 번잡한 성례주의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의 ‘생수와 생명의 떡’에 접근을 막은 결과, 신도들이 영적 포로들처럼 지내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20~21세기 세계그리스도교 특히 미국과 한국의 주류 기독교세력은 ‘제3 바벨론 포로시대’를 살고 있지 않는지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해야 하겠다. 100년 후 우리의 후손들은 20-21세기 주류 개신교 교회들의 신앙과 신학이 참으로 복음적이었고, 생명력이 차고 넘쳤으며,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훌륭히 감당한 세대였다고 평가할까? 흐르는 역사의 강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위상이 총체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중세기가 모두 ‘어두운 암흑시대’였던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영적으로 위대한 시대였던 면도 있다. 그러나 근세가 동트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서 뒤돌아 볼 때, 중세기 그리스도교를 지탱했던 교황중심의 교권과 스콜라신학이 공헌만이 아니라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이 보인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이후, 성인이 된 서구 중산계층이 이루었던 19세기 위대한 선교역사와 자유주의 신학의 업적이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20세기 1차 대전을 겪고 나서 보이게 되었다. 백인 서구중심 문화제국주의와 인본주의적 낙관주의와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정치에 예속된 기독교였음이 보였던 것이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뉴라이트 운동이, 몇 명 훌륭한 지도력을 지닌 목회자들도 있고 경건한 신도들의 헌신적 희생을 인정하더라도, 시대를 휩쓸고 있는 세속적 자본주의 물결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한 ‘제3바벨론포로’ 시대였다고 후세 교회사는 평가 할 것이다.

 아직도 냉전시대 반공논리와 색깔론으로 사고체계가 굳어진 교회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큰 선장들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무한 성장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수량적 실증주의를 복음의 표징이라고 강변하는 지도자들이 많다. 문명전환의 새벽을 알리는 양심적 신학지성들을 이단이라고 파문하더니만, 그 동일한 교단안에서 총감독이 두 명이나 선출되어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권력욕과 경제력과 명예욕을 독점한 한국 개신교 교권주의자들은 자기들만이 복음의 정통성을 파수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도록 지켜드리는 근위병임을 자처한다. 그들 경건한 교권주의자들은, 엄연히 다른 두 실재, 다시 말해서 기독교국가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면서 현대판 젤롯당이 된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숭미, 반공, 반민주, 반인권, 힘과 다산숭배, 참신앙의 제국예속화’로서 특징이 드러나는 현대판 제3바벨론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20-21세기 거대한 이집트의 파라오 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제국, 로마의 카이사 제국 같은 신종 공룡들이 판치는 병든 문명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까? 길희성 교수가 쓰신 명저 <마이스테르 영성사상>을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서 ‘제3바벨론 포로상태’를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길에 관한 지침을 발견하고 학생들과 함께 깊이 토론한 바가 있다.

 참다운 복음신앙, 사랑하며 자유하며 찬양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우상의 힘들, 우리를 안팎에서 옥죄는 거짓 종이호랑이 같은 우상들의 공갈협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우리는 ‘청빈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엑하르트 수사는 귀띔해주었다. 수도원의 참정신일 뿐 아니라, 저 갈릴리 예수의 산상수훈을 꿰뚫고 흐르는 참된 진리의 소리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갈파하셨다.

 그런데, 엑하르트 수사는 청빈에는 3가지 청빈이 다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소유의 청빈이요, 둘째는 의지의 청빈이요, 셋째는 존재의 청빈이다. 그 세 가지 청빈이 이뤄지는 만큼 우리는 자유로운 자가 되고, 사랑하며 죽어가는 자연일지라도 작은 꽃들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위에도 이뤄지이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첫째, 한국개신교가 참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가는 신앙집단이 되려면, ‘소유의 청빈’ 없이는 절대불가능하다. 한국 개신교는 한마디로 가진 것 소유가 너무 많아 참 진리가, 그리스도가, 복음이 들어갈 공간적 여지가 없는 것이다. 헌금으로 거둬들인 돈이 너무 많고, 교회당 숫자와 직업목사수가 너무 많고, 말이 너무 많고 신학자와 신학교가 너무 많다. 2006년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종교단체 연간 운영자금통계를 보면 불교가 4,610억, 천주교가 3,390억, 개신교가 3조 1,760억이다. 이 수치는 개신교 각 교단의 연간 운명자금이라는 것이고, 실질 헌금 총액은 7조원정도로 추산하는 연구기관 발표도 있다.

 한국 개신교가 성경말씀대로 십일조 헌금을 강조해서 3조든 7조원의 헌금을 모았다면, 오늘 바울논리대로(갈5:3) 십일조 율법대로 지키라고 신도들에게 강조했던 대로,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도 있을 것인즉, 총 헌금액의 10% 곧 최소한 3,000억 - 7,000억 원을 따로 떼어서 고시원에서 가난하게 노동하다가 불타죽은 중국교포 유가족의 자립자금으로 제1착으로 조건 없이 지원하고, 온 세계 극빈자 어린이 구제금과 북한동포 돕기에 생색 내지 말고 조용히 조용히 돕는데 사용해야 할 일이다.

 둘째, 한국 개신교가 참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면, ‘소유의 청빈’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엑하르트 수사의 표현을 따른다면 ‘의지의 청빈’이다. 한마디로 한국 교회는 선교의지가, 하나님 지켜드리는 근위병 이라는 충성의지가, 한미방위조약 강화에도 힘써야하는 정치군사외교 사업의지가 너무 강해서 탈이다. 담 넘어에로 들리지도 않게 작은 소리로 말하는 ‘고난의종’ 예수의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 교회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지이다”라는 기도는 믿음 약한 기도로 치부된다. 하나님의 뜻이나 그리스도의 뜻이나 모두 우리의 뜻, 나의 뜻에 따라 변경되어야하고 변경시키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라고 교육되고 있다.

 한국교회신도들을 ‘오직 믿음만, 오직 은총만’ 모토는 형식논리뿐이고, 실질적으로는 100점 맞는 학교시험지를 많이 모아서 부모님께 보여드림으로서 칭찬받으려는 ‘사랑결핍증 어린아이’로 머물게 한다. 아니면, 대기업의 모범사원으로 표창 받는 일 중독자가 된 회사사원처럼 국내외 ‘선교 사업’에 큰 실적을 올리려는 현대판 공로신앙 신봉자가 양산된다.

 셋째, 한국교회가 참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면, 엑하르트 수사에 의하면 마지막 하나 더 청빈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을 ‘존재의 청빈’이라고 했다. 존재의 청빈이란 스콜라 신학자요 영성대가인 엑하르트가 이해한 경지에까지 도달하기가 쉽진 않지만 이렇게 이해해 보자. 두 가지 엄연한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항상 직시하면서 살면 ‘존재의 청빈’에 가까이 갈수 있다. 우리생명은 허허 막막한 대우주 시공간 속에 둥실 떠있는 좁쌀만 한 크기의 녹색별 위에서 길어야 70-90년 동안 꿈틀거리며 살고 있는 들풀 같은 생명체라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는 삶이다. 그 엄연한 두 가지 사실은 동화도 아니요, 신화도 아니요, 엄연한 사실이요 반드시 곧 닥쳐오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살아야하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30살도 채 안된 나이로 사형당한 민족시인 윤동주 서시를 생각 한다.

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구상 선생의 「풀꽃과 더불어」명상 시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더 맘속으로 읽어 본다.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나 여기 존재한다.

 종교개혁의 참 정신을 회복하고 우상에서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사는 길로서 야고보 선생의 권고를 들려드리고 싶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붙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바울사도가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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