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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6 추천 수 0 2022.10.23 17: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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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3:22-31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322-31: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22: 가르치는 향방과 목적이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그 때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거지만, 그런데 그렇게 발걸음을 내딛는 그 분의 소원성이 너도 나를 따라서 이 성역의 길로 올라가자하는 신앙사상이 들어있다.

 

2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 길은 구원의 여정이다. 인간이 출생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가 구원의 여정인데, 이 신앙사상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신앙사상이다. 지금도 그 신앙사상을 가지게 되면 예수님과 같이 동거 동행 동사 동숙이 들어있다.

 

그런데 24절에 보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힘쓰라하는데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왜냐? 좁은 문은 세상의 것은 다 버리고 오직 진리만 잡고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다 세상 넓은 문으로 가기 때문이다. 주님과 같이 의사단일로 천국을 향해서 가는 게 아니라 세상 넓은 길로 많이 간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 중에 다른 마음을 품고 올라가는 제자도 있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 소원 목적을 마음에 품고 올라가면 그건 가룟유다와 같이 가는 거다. 믿는 사람은 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다고 하는 거지만 그런데 자기 옆에 가룟유다가 같이 걸어가고 있는 거다. 의사성이 소원 목적성이 가룟유다와 같이 가고 있구나.

 

25: 올라가면서 주님과 의사단일로 돼야 하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문을 닫고 열고 하는 것은 주인의 주권섭리를 말한다.

 

26-27: 같이 가고 있는 상태다. 같이 먹고 마신 것은 같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길거리에서그 말이 있는데 우리 길거리라는 것은 자기 주관적으로 가고 있는 거기에 예수님이 동행이 되니 주격이 달라지는구나. 자기 주관적 신앙을 가지게 되면 주체성이 자기가 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의 일을 예수님이 돕는 격이 된다. 그런 식이다.

 

28-30: 동서남북 세계 각국에서 성도들이 그 기쁨의 잔치에 다 모였다. 그러니 얼마나 많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모인 데 가 보면 유달리 눈에 띄게 옷을 입은 사람을 볼 수 있다.

 

성도들이 기쁨의 잔치에 다 모였다. 잔치는 기쁨이요 즐거움을 의미한다. 잔치를 할 때는 음식을 먹는데, 먹는 것은 기쁨이다.

 

예수 믿는 자기는 그 날에 어디에 앉고 싶으냐? 주님 바로 옆에 앉고 싶은 건지, 주님과 제일 멀리 앉고 싶은 건지? 이게 무슨 말이냐? ‘평소에 내가 예수님을 어떤 관계적으로 믿어왔느냐하는 게 문제라는 말이다. 평소 주님과 의사적으로 제일 잘 통했다면 제일 잘 통한 사람이 늘 주님 옆에 있는 것이다. 안 통하면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이렇게 되느냐? 남이 아닌 제 마음에 의해서 그런 것이다.

 

주님과 평소 의사적으로 제일 잘 통했다면 주님 옆에 앉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인간 자기 식, 자기 주관적으로 예수를 믿었다면 주님과 안 통한 것이니 제일 멀리 앉을 것이다. 이 말이 천국에 못 들어간다가 아니라 의사적으로 멀다 그 말이다.

 

친구란 항상 의사가 잘 통하는 것이 친구다. 같은 또래라도 의사적으로 안 통하면 친구가 안 되고 남이 되고 원수가 된다. 친하고 싶으냐? 의사적으로 통하는 것. 이게 주님의 세계다. 자기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잘 통하면 부가 많다.

 

제일 가까운 사람은 눈치만 봐도 안다. 눈치 빠른 며느리는 시어머니 얼굴빛만 봐도 안다. 눈치 빠른 아내는 가령 나이 많은 사람이 입이 마르면 자꾸 입을 쩝쩝 거린다. 그 때 얼른 눈치를 봐서 물을 갖다 드리면 이건 눈치가 빠른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얼굴빛만 봐도 어디가 아프겠구나. 피곤하겠구나하는 걸 잘 안다. 그러면 그만큼 잘 통한다. 그런데 안 통하게 되면 이건 눈치가 없는 것인데, ‘어쩌라 저쩌라말로 하게 된다. 또 말을 해도 안 듣는 경우에는 큰 소리가 나간다. 이건 그만큼 멀다는 것이다.

 

같은 한 집안에 살면서도 마음이 먼 사람이 있다. 이건 그만큼 먼 거다. 부부가 둘이서 쳐다보고 자다가도 무슨 일로 돌아누우면 가까이 있으나 그렇게 먼 것이다. 돌아누우면 남이다. 그렇게 멀다. 의사성을 말한다. 대화를 자주하라는 것은 의사성을 타진하게 하는 것이다.

 

큰 소리로 말을 해도 안 통하면 더 큰 소리로 하고 책망이 들어간다. 큰소리를 해도 안 들으면 그 때는 몽둥이가 들어간다. 그게 인격자의 세계다. 몽둥이로 해서도 안 들으면 불간섭이다. 그러니까 간섭을 해서 이런 저런 꾸중도 듣고 매도 맞고 하는 게 좋으냐, 아예 불간섭으로 사는 게 좋으냐? 불간섭으로 살면 좋을까? 이건 고아처럼 된다. 불간섭이라 하는 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이 그냥 놔두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보호를 못 받는다. 모든 삼라만상이 다 주님의 주권섭리 하에서 움직이는데 하나님의 보호를 못 받으면 어떻게 할 참이냐? 부부도 의사가 안 통하면 남남처럼 살게 된다. 남이라도 의사가 잘 통하면 형제처럼 산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고 진리생명 길을 가려니 남이 당하지 않는 환난 핍박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바보처럼 본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다가 보니 바보처럼 여김을 받았는데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잔치자리에서 모였는데 그 날에 주님도 그 성도를 바보처럼 대할까?

 

잔치자리는 왜 여는 거냐? 말씀 붙잡고 바보처럼 하나님 의사단일로 순종하며 사는 그 성도를 높여주기 위해서 세계 각국의 성도를 운집해 놓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이다하고 높이려고. 욥도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욥이 그 때 당시 의인인데 하나님께서 저 욥을 어떻게 하면 최고로 높여줄까하는 데서 나온 그 사건이다.

축복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먼저 높인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남이 볼 때는 별 볼일 없는 사람 같으나 신앙정조를 지키는 그 성도의 중심을 아는 하나님께서 당하는 사건을 갖고 와서 그 성도를 높인다.

 

언제 등잔불을 높이느냐? 등잔불은 밤이라야 높이는 거다. 낮에는 안 높인다. 옳은 성도는 낮에는 늘 기름준비, 영능의 실력준비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밤, 진리가 어두운 밤, 거짓이 난무하는 밤, 진리에 깨어있지 못한 밤에 늘 신앙정조를 지키며 기름준비를 하고 깨어있는 성도를 그 날에 높인다. 그러니까 왜 환난 핍박이 오는 거냐? 긍정적으로 말하면 믿음 있는 성도를 높이려 함이요, 부정적으로 말하면 믿음 없는 성도의 얼굴이 똥이 되게 만들려는 것이다.

 

성경에 보니 아하수에로 왕으로 하여금 180일 즉, 6개월 동안 잔치를 열게 한 것은, 잔치는 왕의 명령으로 한다. 그런데 그 속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높이려고 그 잔치를 벌이게 한 것이냐?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높이려고.

 

우리도 모르는, 하나님만 아시는 어떤 큰 사건이 온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높이겠느냐, 낮추겠느냐? 평소에 진리말씀의 이치를 무시하고 살았다면 사건이 오면 너는 죽었다. 높여줄 리가 없다. 평소에 말씀무시는 예수님 무시다. 예수님 무시는 결과적으로 자기 무시 쪽으로 오게 돼 있다. 항상 주님 쪽으로 선택을 하고, 진리를 높이려는 쪽으로 선택을 하고, 마음이 그 쪽으로 늘 운이 달아있고 불이 붙어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꾸 그 쪽으로 역사를 해서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그 잔치에서 누가 떨어졌느냐? 와스디.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자라고 남이 올려주고 자기도 높은 줄만 알고 모든 영광을 다 받았는데 그 날에 주님이 올려주더냐, 낮추더냐? 성경을 통해서 영능의 믿음실력 면에서 똑같지 않다고 분명히 보여줬는데도 그래도 천국잔치에 들어가면 너나 나나 똑같은 거냐? 이 세상에서도 노력한 자와 게으른 자가 차이가 있는 건데 천국에 들어가면 똑같다고 우길 수가 있겠느냐?

 

하늘의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과 별의 영광이 다 차이가 있다. 예수 믿는 면을 그렇게 생각을 하라. ‘어떤 자는 해와 같이 빛나리라그게 있다. :의 어느 교회에 너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고 했다. 새벽별은 캄캄한 밤에는 안 나타나고 새벽에 나타난다. 왜 새벽에 나타나느냐?

 

새벽별은 해를 소개하는 별이다. 주님을 소개하는 별이다. 이 새벽별이 유난히 더 빛이 난다. 그러니까 다른 별들은 밤새도록 비취며 다 자기 자랑을 하고 있다가 해가 뜨려고 하면 사라지지만 이 새벽별은 주님 오시기 직전에, 해가 뜨기 직전에 나타나서 비춰주는구나. 해를 소개를 하는구나. 이 별을 이름 하여 금성이라고 하는데, 계시로 보는 건 다른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고 보는 게 아니다. ‘열 고을을 다스려라. 스무 고을을 다스려라.’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이게 다 영능의 실력을 말하는 거다. 사도바울이 천국에 들어가니 생명의 면류관을 썼다. 십자가상에서 오른 쪽 강도가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하소서하니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했는데, 그러면 그 강도가 천국에 들어가서 면류관을 썼을까? 아니다. 차이가 있는 거다. 생각을 해 봐라. 평소에 살인 강도짓을 한 그 사람은 자기 죄로 응당히 십자가에 죽은 것인데 이 사람과 사도바울과 어떻게 같겠느냐? 같다면 뭐하려고 열심히 믿느냐?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 이게 다 영능의 실력을 말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 날에 쫓겨나서 이를 갈며 땅을 치며 통곡할 자도 있고,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앉을 자도 있고, 가장 멀리 앉을 자도 있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자도 있고, 가장 낮은 자라에 앉을 자도 있고, 가장 빛나는 면류관을 쓰고 앉을 자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각자 자기가 앉을 자리는 어디냐? 예배 시마다 맨 나중에 와서 뒤에 앉는 사람의 그 정신이 천국에 가서 맨 앞에 앉겠느냐, 맨 뒤 문 앞에 앉겠느냐? 문 앞에 앉으면 드나드는 사람에게 눈의 가시가 된다. 그런 자가 돼서는 안 된다. 예배 때 꼭 예배를 시작하고 1, 2분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교회에 오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럴까?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이냐?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는 천국과 지옥에 들어갈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병원이라고 다 똑같으냐? 학교라고 다 똑같으냐? 교회라고 다 똑같으냐? 목사라고 다 똑같으냐? 거짓 종도 있고, 이단자도 있고, 진리진실의 종도 있느냐, 양의 가죽을 쓴 이리도 있느냐?

 

31: 예수님께서 그 날에 있어질 격차성 차등성을 가르치고 있을 때 누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느냐? 헤롯사상을 가지게 되면 예수님을 죽이게 된다. 헤롯의 조상은 에서다. 이 에서는 야곱의 형이다. 쌍둥이다. 이 에서는 장자인데, 이 에서가 먼저 되는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 육신의 배고픔 때문에 팥죽과 그 명분을 바꿨다. 쉽게 말하면 옳은 진리와 세상 밥 한 그릇과 바꾼 것이다. 돈과 세상 것과 진리를 바꾼 것이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목을 베었다. 또 예수님을 죽인 동행자이다. 다른 때는 서로가 원수였다가 예수를 죽여 놓고는 빌라도와 친구가 된 자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인들은 성경을 가지고도 마지막 그 날에 되어질 것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에서 영원히 머리 되는 교훈을 받지 않고 도리어 바로 되는 그 교훈을 죽이려고 했다. 신앙실력 면의 격차와 차등이 성경에 있는데도, 또 단:에도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자는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하는데도, 그게 다 영능의 실력을, 영광스런 격차 차등을 말을 하는 건데 기독교 안에서 목사님들 세계에서 이걸 모르고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니까 주님을 닮은 인격 면에 따라 그 나라에서의 격차가 나는 것이다. 이 말은 격차에서 뒤떨어지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도 다 똑같지를 않고 격차가 있다. 한 날 한 시에 한 설교를 듣고 있지만 많이 깨닫는 자와 적게 깨닫는 자, 중간쯤 깨닫는 자 다 격차가 있다. 우리 신앙의 세계가 그런 세계인 줄을 알고 그만큼 힘을 써야 하는데 예수 믿는 것을 아예 그런 걸 모르고 믿는 사람이 많다.

 

가만 보면 세상 사람들은 세상 넓은 길로 가면서 서로 먼저 뛰려고 한다. 뭐든지 많이 가지려고, 뭐든지 부자가 되려고 서로 먼저 뛰고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성경대로 달음질을 해야 하겠는데 사랑이 많은 건지, 양보심이 강한 건지 이걸 안 하니 이게 뭐가 되느냐? 마지막 심판의 그 날은 자꾸 다가오는데.

 

앞에서 읽은 내용 면이 신앙 영능의 실력의 격차성 차등성을 말하는 건데, 그런데 유대 종교인들은 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니 예수님을 죽여 버리면 그 격차성 차등성의 교훈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능의 능력자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당신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잡혀준 거다. 힘이 없어서 산속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들이 찾아와서 잡아다가 못박아 죽인 게 아니다. 헤롯과 이방인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합세하여 구원 되신 예수님을, 천국의 격차의 교훈을 말살시키려는 것은 사단 마귀의 계교다.

 

오늘날 교회가 설교의 냄새, 강조점이 전부가 종교적인 사역, 또 일반 도덕성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는 신앙 믿음이 자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격차가 생기지를 않는다. 그런 수법을 누가 쓰느냐 하면 마귀가, 거짓 종들이, 악령이 쓴다. 마귀가 성도를 지옥에 보내는 건 안 되는 거다. 자기 권한 밖이다. 마귀는 기본구원은 터치를 못하는 거고, 이룰구원 성화구원 면에서 터치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함은 우리의 신앙실력을 키워주기 위한 주님의 허용성이다. 그러니까 게으르거나 졸거나 진리를 무시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파고들게 돼 있다. 하나님의 허락이 그렇게 돼 있다. 이걸 또 미리 가르쳐 줬고. 그래서 우리로 진리의 개달음에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입장에서 왜 그렇게 하도록 했느냐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인간 자기가 우주만물의 창조자가 아닌 이상 이미 되어있는 세상에서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다. 자기는 순종할 자요, 심판이 있는 자요, 말씀대로 믿어야 할 존재들이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느냐? 싫다고 자살을 하면 피해지는 거냐? 아니다.

 

이렇게 하심이 깨닫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이 신나고 좋지만 예수 믿는 게 짐이 되는 사람에게는 세상 속된 말로 예수 믿는 게 참으로 더러운 팔자다. 죽어도 심판, 살아도 심판, 숨을 쉬어도 심판, 안 먹어도 심판이니 어떻게 사는 게 좋겠느냐? 아예 자기를 인간으로 짖지를 말지? 그렇게 생각이 되느냐? 그것도 이미 사람으로 되어 있으니 천상 예수를 믿으면서 영능의 실력자로 죽자 사자 만들어져가는 수밖에 없다.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예수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전했다. 성경을 잘 아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권이 강하다. 이 바리새인들이 헤롯이 예수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한다. 그러면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위한 자들이냐, 핍박을 하는 자들이냐? 핍박자들이다.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줬으니 위한다고 보여지느냐? 마귀의 수법이 참 묘하다. 생각을 해 주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이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누가 너를 죽이려고 하니 빨리 피하라하면 마음이 도망가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많다. 이처럼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선동질을 잘 하는지?

 

우리가 이 속에 들어있는 신앙정신을 보면 헤롯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에서는 야곱과는 원수다. 애굽을 출발한 이스라엘이 에돔족에게 얼마나 많이 당했느냐?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피해를 준 자들이다. 그러니까 에돔족의 사상, 또 로마사상, 또 유대 율법적 종교적인 사상이 들어오면 대부분 교인들을 보면 그 세력에 무너져 버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같은 사상의 신앙생명이 죽는다.

 

그러나 아는 자는 도망갈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성경을 늘 읽지 않고 남의 소리만 듣고 교회에 다닌 사람이 자기 집에 여호와의 증인이 온다고 하면 문을 닫고 도망을 간다. 귀찮으니까. 귀찮다는 그 말은 실은 실력이 없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예수님 도망가십시오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도망을 가느냐? 그들을 처지하고 이길 수 있는 분이 왜 도망을 가느냐?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나, 하늘의 어머니나, 불교인이나, 유교인이 자기 집에 찾아와서 성경에 대해 묻겠다고 하면 십중팔구는 도망갈 것이다. 그런 격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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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8 마태복음 (계시보기)성경과 세상은 비유와 비사다. 마13:34  김경형목사  2022-11-05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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