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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준이냐, 인간의 기준이냐?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634 추천 수 0 2015.07.01 12: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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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2:15-17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2장 15절-17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5절: 레위 집의 식사자리에 어떤 사람들이 같이 앉았느냐? 레위와 레위 식구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또 따르는 무리들이 앉았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참 좋은 뜻이다. 반가운 사람, 절친한 친구, 사랑하는 사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식사자리를 같이 한다.


식사자리는 교제를 뜻한다. 그런데 ‘누구랑 사귀느냐? 무엇과 교제하고 싶어서 식사자리를 같이 하느냐’ 하는 그런 뜻이 있다.


예수님이 계신 식사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서로가 ‘의인이다. 죄인이다’ 하며 예수님 앞에서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느냐? ‘죄인이다. 의인이다’ 하는 경계선을 긋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것은 정확하다. 세상 인간들이 하는 것은 불확실하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죄인이다. 의인이다’ 할 때에 예수님의 기준을 가지고 보는 눈이라야 정확도를 가지는 거지 안 믿는 사람들의 기준을 갖고 와서 판단을 하면 틀린 거다.


선악과 따먹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은 땅의 기준이다. 땅의 기준은 경험적, 그리고 배워서 아는 기준이다. 하늘의 기준은 땅에서 올라온 것 아니고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지식으로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이다. 이게 정확하다.


하나님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이 있는데,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을 먹는 거다. 하나님의 기준을 갖는 거다. 이 하나님의 기준을 갖고 연관성을 갖는 것이다. 이게 정확하고 바르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땅의 것을 기준을 삼으면 살리는 것 같으나 다 죽인다. 하늘의 정신으로 살지를 못한다.


땅의 사람들은 땅의 기준을 가지고 관계를 갖다가 그대로 죽는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적인 면에서 다 잘못되고 어그러진 거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교회에서 성경을 보면서 세상기준을 갖게 되면, 성경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기준을 말하게 되면 이거는 죽은 말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을 가지고 쓸 때 누가 제일 끼어들기 쉬우냐 하면 마귀가 끼어들기 제일 쉽다. 목사가 성경을 들었다 하면 마귀가 끼어드는 건데, 어떤 목사에게 마귀가 끼어드는가 하니 땅의 생각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땅의 행복성 땅의 이해타산을 가지고 말할 때에 마귀가 성경구절을 들고 예수님에게 온 것처럼(마4:) 그 목사가 성경구절을 들고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계산은 세상이다. 세상 것은 불타고 썩고 변질되고 변동된다.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학박사라도 세상 땅의 것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제일 큰 문제가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성경을 앞에 놓고 세상기준을 가지고 말을 한다면 이건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구구절절이 사람의 죽은 생각을 살리고, 죽은 소원 목적을 살리고, 성격 성질 면에서 저주 받고 심판 받을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도록 하고, 생각과 마음이 하늘을 향해서 올라갈 수 있는 교훈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각과 소원 목적을, 인간 자기를 만든 목적을 바로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 바로 살게 하는 거다. 그러면 예수 믿는 자들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으냐? 아니다. 지극히 드물다.


교회는 십자가 붙이고 간판 붙인다고 해서 그게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 교회다. 간판을 붙이던 안 붙이던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게 하는 것이 교회다.


오늘날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서로가 자기 기준에서 ‘저 놈은 도둑이다. 아니다’ 한다. 교회에서는 바리새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말씀의 지시한 대로 행동을 하면 ‘의인이다’ 하고, 안 하면 죄인으로 여긴다. 바리새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중심이 죄인임에도 자기들의 그 마음을 뜯어고치지 않고 그런 그들을 지적하는 예수님을 싫어하고 그랬는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그런 자들이 참 많다.


이 말씀을 받으면서도 세상기준을 갖고 사람을 상대하고 생각하고 그러고 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일가친척 처와 남편 자식 아들딸 친구 이웃 교인들과 관계성을 가지려고 하니 얼마나 잘못됐느냐?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심판 안으로 죄다 몰아넣으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방향을 풍향계를 가지고 어디서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있듯이 성경을 가지고, 성경의 깨달음을 가지고 ‘사람의 속에서 신앙이 아닌 비진리적인 정신이, 육의 생각이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구나’ 하는 그걸 알게 된다. 그걸 아는 게 성도요 믿음 있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도 예수는 안 믿지만 그래도 유식한 사람은 사람의 정신을 본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돈을 가진 것을 기준으로 ‘사람이 좋다. 나쁘다’ 하고 따지면 그 사람은 정신이 망한 사람이다.


사람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나라를 다스리는 분들이 나와서 표 많이 받으려고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한다. 아니,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주겠느냐? 자기 돈은 하나도 안 쓰면서. 국민의 세금으로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도 그 소리를 믿느냐?


교인들이 의례히 하는 말이 생사화복은 누가 주장한다고? 하나님이 주장한다고 하면서 선거 때는 꼭 정치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그만 그런 데 휩쓸린다. 얼마나 정신이 빠진 거냐?


정치인들은 자기 마음도 못 다스리는 주제에 하나님과 같은 소리를 한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은 다 자기가 하나님처럼 말하는 거다. ‘타락되고 저주받은 세상은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게 나쁘다’ 그게 아니라 세상은 선악과를 따먹은 고로 그런 것이다. 선악과를 안 따먹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믿는 우리는 생명과를 먹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거다. 말씀 먹은 생각, 말씀 먹은 소원 목적, 말씀 먹은 취미 추구 지향성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성령님이 같이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사귀고 보는 면에서도 아무렇게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외부적으로 무슨 전염병이 없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는 이상, 예수님께서 구별치 않는 이상 예수님과 교제를 하고 있는데 인간들끼리 세상의 잣대를 가지고, 선악과 따먹은 타락된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주님 앞에서 구별을 한다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자기들의 잣대로 사람을 구별하더냐?


16, 17절에 보면 바리새교인들 중에 서기관들이 하는 말이, 이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요 율법주의자들인데, 이들이 하는 말이 ‘왜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 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보는 눈에 그들이 죄인들과 세리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도 그들의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보는 거냐? 예수님의 기준은 하나님 기준이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기준을 가져야 한다.


사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는 간판만 안 붙었다 뿐이지 영적인 면에서 예수님과 교제를 하는 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 안에서 미움이라고 하는 구별이 왜 생기느냐? 또 왜 자기가 구별의 제공을 주는 요인을 만드느냐? 내가 저 사람을 구별을 하니까 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당신이 구별하는 그 잣대는 틀렸소’ 한다면 ‘네가 틀린 것을 왜 다른 사람에게 제공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고쳐야 한다.


모두 각자가 예수님과 교제할 일에나 신경을 쓰고,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나’ 하고 자기 단속을 해야 한다. 세상적 물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또는 세상 신분적 그 무엇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진리에 대해서 자기를 축소시키고 쭈그러뜨리고 왜 그렇게 만드느냐? 누가 자기를 쭈그러뜨리느냐? 바로 자신이다.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죄인, 죄인’ 하는 걸까? 그들의 기준이 무엇일까? 자기들의 기준이 예수님의 기준과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다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절대 기준이다. 지식의 기준, 지혜의 기준, 거룩의 기준, 선의 기준, 사랑의 기준, 진실의 기준, 의와 능력의 절대 기준이다. 모든 것이 주님이 기준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기준을 내가 가져야 그게 예수 믿는 거다. 그 속성 그 성품 그 인격의 기준을 내가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배우면 하나님이 옮아와야 한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좋아하면 그게 옮아오더라. 노래 잘하는 사람과 노래방에 가면 노래를 옮아오고, 술집에 가서 술 먹는 거 옮아오고 한다.


이들이 자신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면 자신들은 철두철미하게 율법을 지킨다는 것과, 그 다음에 안식일을 잘 지켰고 금식기도 잘하고 성경암송 잘하고 기도 잘하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그들의 속 중심 사상은 썩을 대로 썩었고 곪을 대로 곪았다. 그들은 이 외식 때문에 자신들의 속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람을 겉 표면만 보기 시작하면 그렇게 보는 사람의 속정신은 썩어 들어간다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영육 결합체인고로 자신의 안팎을 잘 다스려야 한다.


영인성장 면에서 영적으로 깊이 병이 들었는데도 스스로 믿음 면에서 건강한 자라고 착각을 하고 있구나.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본질 앞에서 비뚤어지고 꼬부라지고 꺾어져 있고 썩은 시궁창 냄새가 나고 있는데 자기들은 고칠 것이 없고 완전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그 속마음이 하나님의 것으로 자꾸 채워져 가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오늘날 이 마지막 시대에 가만히 보면 건강하고 완전한 자가 많다. 즉 자기 자신을 볼 줄을 모른다.


육신의 병은 나타나 있는 임시적인 병이다. 이 육적인 병은 영적 면의 병을 깨닫게 해주는 하나의 방편이다. 따라서 내 육신의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 ‘내가 내 몸을 정신적으로 어떻게 다스려 나가야겠다’ 하고 고쳐야 한다. 예를 들어서 밥을 많이 먹어서 위가 고장이 났다고 하면 어떤 정신을 가져야 하겠느냐? 많이 먹고자 하는 자기 정신을 제재해야 하는 거다. 아니면 다 나을 때까지 약을 먹고 새살이 돋아나도록 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조정을 못하는 자기 마음이 문제다.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육신의 병은 영적인 병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있는 거다. 깨닫게 해 주시는 방편이다. 그런데 한국의 병원을 다 돌아봐도 ‘육신의 병은 영적인 병을 깨닫게 해주는 거다’ 하는 이걸 모른다.


영인성장적인 면에서 영적으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온전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니까 영적인 이 병은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무서운 병이다. 이건 병원의 약도 안 듣고 주사도로 안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주시는 병은 병원에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다. 왜냐? 영적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데 보통 육신에 병든 것만 알지 육신에 병이 들 수밖에 없는 꼬부라지고 잘못된 마음으로 사는 마음병을 모르고 있다. 이게 중요한 건데 모르고 있으니 못 고친다.


성경은 그런 병을 고쳐주려고 하는 거다. 그래서 생명과를 먹으라는 것이다. 영생과를 먹으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실상이지 마음으로 생각으로 부처 앞에 공 드리듯이 그런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본질에서 위배되거나 맞지 않는 죄와 관련된 모든 영적인 병을 온전하게 고쳐주러 오신 분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령성에 속하는 이 영적인 병을 모르는 자들이 거의 전부다. 그래서 육신의 병만 고치겠다고 교회마다 난리가 났다. 안 믿는 사람도 이런 병은 다 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껍데기만 그렇게 보이지 그들 속정신 마음 모두는 병이 들었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집 식구나 이웃이나 친구를 볼 때 ‘겉은 멀쩡한데 네 속이 병들었다’ 이런 말을 한다. 자기 아버지가 월급을 타서 술집에 다 버리고 오면 그 집 아들이 ‘아, 우리 아버지 마음이 정신이 병들었다’ 그렇게 본다.


종교적 부흥만 외치는 목사들이 영적 면에서 건강한 자로 보여지느냐? 외부적 몸뚱이만 부풀리는 목사들을 볼 때 그 신앙정신이 건강한 바로 보여지느냐?


성경의 이 서기관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다.


17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면 세상에는 의인이 몇이나 있고, 죄인이 몇이나 있을까? 예수님이 감옥 속에 있는 그 죄인을 풀어주러 온 것이냐? 죄인이 뭐냐? 그 뜻이 죄 지은 인간이 죄인이다. 반면에 의인은 의를 행한 사람이 의인이다. 글자대로 보면 그렇다.


그러면 누구 앞에서 죄인이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사람을 말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행을 한 사람은 의인이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의인이냐, 안 산 죄인이냐? 안 산 죄인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버리고 안 믿고 안 듣고 했으니 그렇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냐, 죄인이냐?


하나님 앞에 죄인이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한숨만 쉬며 살아야 하겠느냐, 의인으로 올라가야 하겠느냐? 의인으로 올라가려는 자도 있고, 올라가려고 바둥거리는 사람도 있으니 하나님은 그걸 다 기쁘게 보신다. 문제는 그 마음도 없는 자가 문제다. 생각조차도 안 갖는다.


세상 일반적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큰 죄행을 아니했으면 자기 양심적으로 ‘나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하며 은근히 의인처럼 생각하는 게 세상 일반사람들이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일반적으로 법의 대행자 순경이 와서 잡아간다. 그러면 순경이 와서 안 잡아가는 사람은 의인이냐, 무죄인이냐? 일반적으로는 무죄인이라고 한다. 의를 행했으면 의인이라고 하면서 나라에서 상을 준다.


일반적으로 보면 ‘너 죄 지었지?’ 하면 다 ‘나는 죄 안 지었다. 나 좋은 사람이다’ 하지 ‘나는 무죄인이다’ 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다 그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느 면에서 죄인이고, 어느 면에서 누구 앞에 의인이고 하는 걸 잘 모른다.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면 의인이고, 안 했으면 죄인이고 하는 이런 식으로 알고 있다. 이건 기준이 틀렸다. 잘못 깨닫고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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