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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어디에

열왕기하 신윤식 목사............... 조회 수 530 추천 수 0 2015.07.05 09:5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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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하24:1-20 
설교자 : 신윤식 목사 
참고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왕하24장 1-20

길은 어디에

2008년


<본문>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야김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하수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취하였음이더라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다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일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먀의 딸이더라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저희를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열왕기하 24:1-20)


<설교>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이스라엘로 분열된 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먼저 멸망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제 남 이스라엘, 즉 유다의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본문 24장에는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라는 세 왕이 등장을 하는데 시드기야가 바로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멸망하기 직전의 유다의 상황이 어떠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믿는 유다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긴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이 유다가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유다의 희생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죄를 깨닫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정말 쉬운 이 길을 가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사는 길을 찾아 가다가 결국 멸망이라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멸망이 갑작스런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유다의 멸망을 수없이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자시들이 볼 때 옳다고 여겨지는 길을 고집하다가 멸망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이런 이야기들은 분명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고 점검하게 해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유다처럼 하면 망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멸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즉 세상이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확인하고 그 길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로 굳게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유다의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 이후로 약 22년 동안 네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이 네 왕의 이름은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인데 여호야긴은 요시야의 손자이고 나머지 세 명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왕들이 요시야 왕과는 다르게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스바냐, 나훔, 하박국 등이 바로 이 기간에 보냄 받은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가 등장을 했다는 것은 신앙적인 큰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닌 많은 선지자가 등장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유다의 신앙적 형편이 엉망이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돌이키고자 하였으나 유다는 선지자들의 말을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렘 7:23절을 보면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유다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즉 선지자를 세워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찌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찌니라”(렘 7:27,28)고 말씀한 것처럼 유다는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한 채 자기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살기 위한 길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가 생각했던 사는 길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주변 정세를 살피면서 좀 더 유리한 쪽으로 향하는 것이 전부였을 뿐입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야김이 삼년동안 섬기던 바벨론 왕을 배반함으로 인해서 바벨론 왕이 유다를 공격을 한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에 의해서 왕으로 세워진 사람입니다. 또 당시 유다는 애굽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호야김이 애굽을 뒤로 하고 바벨론을 섬기게 된 것은, 애굽이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모든 주도권을 바벨론이 쥐게 된 것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바벨론을 섬기고 삼년 쯤 지난 후에 애굽이 다시 강성하게 되었는지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을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야김을 괘심하게 여겨서 주변의 여러 군대를 모아서 유다를 공격하고 여호야김은 포로로 잡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지만 그 역시 악을 행하였으며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서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14절)고 말한 것처럼 일만 명이 넘는 수많은 백성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는데 시드기야 역시 악을 행하는 왕에 불과했으며, 결국 시드기야를 마지막으로 유다는 멸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다 역사를 보면서 답답한 것은, 이방나라의 침략을 받으면서 고통을 당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악함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지를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의 악함에 대해 책망하시고 경고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 말을 청종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관심이 유다를 지탱하는 것에만 있었을 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의 회복에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되는 것이 곧 진심으로 사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좀 더 희망적이고 유리한 길을 제시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렘 27:8-9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너희 복술이나 너희 꿈꾸는 자나 너희 술사나 너희 요술객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듣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바벨론과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않으면 진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편을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벨론의 편을 들고 계시는 것 같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렘 28:2-4절을 보면 거짓선지자 하나냐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는 말을 합니다.


소위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바로 이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유다가 기대하는 것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씀일 것입니다.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다’는 것과 같은 말씀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가 그런 말을 하여도 듣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자기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절망적인 말보다는 희망을 주는 말에 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을 향한 축복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자가 잘 되는 길로 인도하시고, 신자가 잘되도록 축복의 말씀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는 그러한 축복의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말이 맞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축복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복으로 인도하는 말씀인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을 잘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고 어떤 의미에서 잘되는 길이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되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

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생각하는 축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일 뿐 죄를 선포하고 저주를 선포하며 우리를 책망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유다와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선호하는 말만 듣는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사는 길은 애굽도 바벨론도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애굽의 눈치를 살필 것도 아니고 바벨론의 눈치를 살필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그 말씀을 청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바로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서 자기가 사는 길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사는 길이 아니라 육신이 사는 길을 원했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어느 나라가 힘있는가를 살피면서 배반을 하기도 하고, 그런 방식으로 사는 길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대도 멸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주식이 폭락한 현실에서 세상의 관심은 경제가 사는 것이고 주식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온통 자신이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희망적인 말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결국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청종치 않는 결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망하는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과연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까? 물론 세상에 전혀 기대를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한다면 십자가는 유일한 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유일한 희망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세상에서는 죽은 자입니다.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사는 길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길이 돈입니까? 사람이 사는 길을 돈을 버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믿음을 돈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에 희망을 두면서 자기 열심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믿고자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우리를 복주어서 잘살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책망하고 저주하시면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그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춰버린 그때부터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의 사는 길은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전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씀의 가치는 세상의 그 무엇에도 뺏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산자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을 말씀을 죽은 나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신을 힘 있는 자로 만들어 줄 세상의 것에 끌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향해서 ‘너희는 죽었다’고 선포하시는 말씀들이 달갑지 않게 들리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하고 율법의 말씀을 들은 후에 옷을 찢으며 애통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은 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은 나를 보게 합니다. 죽은 나를 보게 되면 비로소 생명이 주께만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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